땅을 사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6 예레미야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나에게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 앞과 시위대 뜰에 앉아 있는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봉인하고 봉인하지 않은 매매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렘 32:6-15)

지난 수요일 제가 택배 두 개 5천 원에 보내야 하는데 200원이 모자라 정집사님께 200원 빌려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낮에 우리 집사람이 왔길래 우체국에 우편물 하나 보낼 것이 있어서 돈 좀 있으면 주고 가라고 했더니 지금 막 은행 들려서 오는 길인데 마지막 2만원 찾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마이너스 통장인 것 아시죠? 하고 돈 만원 주고 가버렸습니다. 우리 집사람에게는 참 미안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혼자 생각해보면 올해도 참 잘 살았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남겨놓는 것 없이 다 쓰고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할 일 다 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목사가 돈 남겨 놓아서 뭐합니까? 나는 가난하지만 하나님의 일이 되어 가는 것을 보니 감사합니다. 2010년도 한 해에도 너무 감사할 제목이 많습니다.

성도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양입니다. 양은 늑대처럼 사납거나 똑똑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기를 방어할 수 있는 기능정도 하나씩은 있답니다. 뿔이 있던지,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가 있던지, 눈이 좋던지, 냄새를 잘 맡든지… 그런데 양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딱 하나 있는 것은 귀로 목자의 음성을 구별하고 목자를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는 양이었고, 우리도 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면 목자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는 잘 들어야 합니다. 설교는 안 듣고 졸다가 가시면 우리 목사님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셨구나 그렇게 생각하시기 쉽습니다. 그럼 그렇지 목사님이 현실을 보시는구나! 역시 투자할 곳은 땅 뿐이 없어! 그렇게 생각하시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습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8)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 23:5-20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땅을 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라가 죽자 사라를 장사지내기 위해서 매장 지를 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으로부터 땅을 살 때, 헷 족속은 그냥 묘실을 사용해도 된다고 합니다.
“6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7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창 23:6-7)라고 했습니다. 12절에도 “아브라함이 이에 그 땅의 백성 앞에서 몸을 굽히고” 아브라함에게 그냥 좋은 땅을 골라 쓰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은 몸을 두 번씩이나 굽히고 겸손하게 대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물됨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겸손하게 그 땅의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리고 땅 값 사백 세겔을 주고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을 사서 사라를 이곳에 장사했습니다.
이 땅에 사라, 아브라함,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야곱과 레아도 이곳에 장사되었습니다(창 49:30-31). 요셉이 애굽에 가서 총리가 되어 야곱이 거기서 죽었지만 요셉에게 유언하기를 가나안 땅, 바로 아브라함이 묻힌 그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하고 죽고 요셉은 그 유지를 받들어 야곱을 가나안 땅에 장사지냅니다(창 50:11).
땅을 산 목적은 투기가 아닙니다. 장사지내기 위해서입니다. 매장 지를 산 것입니다.

다윗도 땅을 샀습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군사를 의지합니다. 그래서 인구조사를 실시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에 노하사 “…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삼하 24:15)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갓 선지자를 통해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24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25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바로 이 땅이 예루살렘의 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서 땅을 쌌습니다. 자기를 위해 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두 그냥 가지라고 했지만 돈을 지불하고 땅을 샀습니다. 값을 치르고 차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도 땅을 삽니다.
예레미야의 사촌인 하나멜이 예레미야에게 와서 땅을 사라고 합니다. 하나멜은 참 약삭빠른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땅은 다른 족속에게 팔 수 없습니다. 자기 족속만이 땅을 매매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분배해준 땅이 다른 지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지파 사람에게는 팔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사촌인 하나멜에게 땅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은 이미 바벨론 군대가 포위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해졌기 때문에 이미 가치가 없었습니다. 망해 가는 나라의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은 십 팔 세겔을 주고 당시의 법에 따라 정확하게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0 증서를 써서 봉인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봉인하고 봉인하지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가지고” 그리고 14절 “증서를 가지고 토기에 담아 오랫동안 보존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다 망한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지 마지막 15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지만 반드시 돌아와 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상징적으로 예레미야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남북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면서 국내 은행 고객들 사이에서도 “전쟁나면 은행에 맡긴 내 돈은 어떻게 되나”라는 걱정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은행들은 전쟁이나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천재지변 등을 대비해 마련해 놓은 비상대책(컨틴전시 플랜)에 따라 위기대응에 나설 수 있어 큰 문제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다른 시중은행 IT기획부장은 “해외 백업을 검토했지만 국내와 똑같은 시스템을 해외에 두고 관리하는데 비용부담이 커서 힘들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전면전 상황에서는 고객 정보를 완벽히 지켜낼 대책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은행에 저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의 선지자들이란 사생활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합니다. 호세아는 창녀 고멜과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도망가려고 시도했지만 자기의 뜻대로 안됩니다. 결국 니느웨로 갑니다.
이사야가 활동한 시대는 앗수르의 침략에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몹시 곤욕을 당하는 때이었습니다. 이미 주전 840년 예후 왕 때부터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 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이사야가 아직 젊은 시절인 734년에 앗수르는 북왕국으로 부터 많은 포로를 붙잡아 가고 북왕국은 완전히 멸망해 버렸습니다. 수 년 후에 앗수르는 남왕국 유다에 침입하여 46개의 성을 파괴하였고 20만 명을 포로를 붙잡아 갔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메시야에 관한 예언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일 암흑 시대에 제일 밝은 빛을 보여 주셨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당장 돈주고 산 땅은 이미 바벨론의 소유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으로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바보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바보 같습니다. 다 망한 땅을 사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는 좌절의 짙은 구름을 뚫고 비취는 소망의 빛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다른 가짜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렘 23:17) 할 때에 비록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게 될 것을 예언했지만 그 다음에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마치 공증하듯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땅을 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지만 절대적인 절망이 아닙니다. 민족과 개인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아무리 북한이, 중국이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러시아가 일본이 있어도 우리는 절망에 빠지거나 사로잡혀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한 개인과 나라의 운명은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잠 29:26) 세상에서 권력을 잡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전 4:8-10) 인간의 절망이 있는 곳,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 하실 장소가 됩니다. 인간의 힘이 존재하는 곳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이 절망적인 곳에는 하나님의 힘이 역사 하는 곳이 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개의치 않으시더니”라고 했습니다. 무서운 형틀의 십자가만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신경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주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습니다. 부활을 바라보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소망의 종교입니다.

바로가 꿈 꾼 것을 요셉이 풀어줄 때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 41:16)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대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8) 자신이 애굽으로 형제들이 팔았지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이 먼저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팔아먹은 형제들을 원망만 하고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버리고 가는 땅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버려진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망을 사는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팥죽으로 산 것도 이것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0-13)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바울과 이들 일행보다 오늘날 더 영광스럽게 된 사람들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만물의 찌꺼기”는 마치 공해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쓰고 남은 쓰레기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서는 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버립니다. 우리가 비록 그러한 자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에바다, 우리의 영이 열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최고의 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10)

[먼저 영상을 보시겠습니다.] 이 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서 1500만 명이 본 것입니다.
아버지 딕 호이트. 아들 릭 호이트 그리고 이들 부자에게 이름 하나가 더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합하여 ‘팀 호이트’(Team Hoyt)라는 이름입니다.
아들 릭 호이트는 1962년 1월 10일에 태어났는데 출산 직전에 엄마 뱃속에서 한바퀴를 돌면서 목에 탯줄을 감고 나와서 몸에 경련을 일으키고 호흡곤란으로 뇌성마비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아들을 포기하라고 했지만 20대 초반의 부부는 절대 아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고 불완전한 아이를 집으로 대려 왔습니다.
아들을 시설에 보내라는 주위의 권고에도 부부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합니다.”하면서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들이 15세가 되었을 때 컴퓨터로 의사 소통을 했습니다. 아들은 “전 아빠와 달리고 싶어요”라는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 졌습니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8km 달리기 대회에 나가 꼴지를 면하고 뒤에서 2등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경기 후 지쳐 집에 가서 쉬기만을 생각할 때 아들은 말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내 몸의 장애가 사라진 것 같아요.” 이때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미친 듯이 뛰었습니다. 각종 마라톤 64회, 단축 철인3종 경기 206회, 보스톤 마라톤 대회 24회 연속 완주의 대 기록을 세웠습니다. 마라톤 최고 기록은 2시간 40분 47초로 정상인도 내기 힘든 기록입니다(마라톤 세계최고신기록 2시간 5분 42초, 1999.1025 시카고 올림픽에서 하누치(모로코)가 새움).
또한 자전거로 6000km에 이르는 미국 대륙 횡단을 했습니다. 각종 대회 1천여 번 참가했습니다. 대 기록을 작성한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네가 없었다면 아버지는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없었다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지 않습니다. 보내실 이유가 없습니다.

기자들이 릭에게 물었습니다. 너무 기록이 좋으니까 마라톤에서 혼자 뛰어 보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 때마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안 한다는 겁니다. 휠체어를 붙잡고 뛰는 자신의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른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처음에 이들 부자의 ‘팀 호이트’를 쉽게 대회에 참가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팀 호이트는 포기하지 않고 완주를 목표로 그냥 참여했습니다. 처음에 받은 등 번호는 ’00′번 이었습니다. 앞 이가 빠진 릭의 모습 같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부자를 서로 초청하려고 합니다. 보스톤 마라톤 대회는 ‘팀 호이트’가 보이지 않으면 재미없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아버지 딕 호이트는 말하기를 “나는 항상 도전하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손으로 일하는 것을 즐겼다. 땀 흘려 무언가를 만들어 냈을 때의 기쁨과 보람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합니다.
1964년 4월 17일 둘째 아들이 태어났는데 ‘로버트 스탠리 호이트’가 어느 날 아버지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삶이 내게 어떤 역경을 주든 형이 날마다 맞닥뜨리는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예요.” 아버지 딕 호이트를 울린 멋진 말이었습니다.
아들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만일 장애가 없다면 ‘아이언맨 월드챔피언십’에서 최선을 다해 경주할 거예요. 아버지를 태운 보트를 끌고, 아버지 대신 페달을 밟고, 아버지 휠체어를 밀면서요. 보스톤 마라톤 경기에서도 아버지를 밀며 달릴 거예요.”
팀 호이트는 말하기를 ‘어떤 한계를 규정짓는 어떤 말에도 귀 기울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영어로 ‘Yes You Can’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휠체어를 밀고 1000번이 넘는 레이스를 펼친 아버지 딕 호이트에게 아들은 컴퓨터 자판을 치기 위해서 머리를 이쪽 저쪽으로 흔들면서 단어 하나씩 처내려가며 말합니다.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건 턱없이 부족한 말이에요. 그래도 제게 헌신적이었던 아버지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군요. 아버지가 그랬듯이 저도 아버지께 헌신적인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 사랑해요.” -아들 릭 호이트

교통사고로 전신의 55%에 3도 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자매는 사고 이후 10년 동안 거울을 보며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쳤다고 합니다.

1914년 겨울, 미국 뉴저지 주에 있는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200만 달러의 실험 장비와 평생 연구한 귀중한 자료들이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한 연구소를 바라보면서 에디슨은 “우리의 모든 잘못된 것은 불타버렸다. 그러나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잘못된 것을 내려놓읍시다. 우리의 방법과 생각을 내려놓읍시다.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고,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저는 결정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팀에게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팀만은 믿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변치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나를 정말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하나님은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들인 예수님은 완벽하게 아버지 하나님과 호흡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귀하지 않은 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난 12월 6일 오전 7살짜리 수컷 말레이곰(꼬마)가 서울대공원 우리를 탈출해 청계산으로 달아났습니다. 다행히 9일만(15일)에 포획되었습니다. ‘꼬마’는 포획된 뒤 서울대공원으로 옮겨져 다시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그런데 꼬마 곰은 방사장을 탈출하기 전 함께 생활하던 30살짜리 암컷 말레이 곰(말순이)과 자주 다퉜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싸우고 탈출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집 나가면 개 고생입니다. 그래서 대공원에서는 말레이 곰 여자 친구를 새로 데려올 계획입니다.
말레이 곰 꼬마가 다행히 아무 탈 없이 돌아왔고 사실 극진히 대접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찾아 나섰습니다. 제가 집을 나가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 찾지는 않을 겁니다.
말레이곰 ‘꼬마’를 찾는데 들어간 비용은 ‘꼬마’ 몸값의 몇 배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꼬마’가 서울대공원을 탈출하면서 300여 명이 수색에 동원되었고, 헬기와 포획틀 등 각종 수색장비가 투입되면서 자신의 몸값으로 지불할 수 없는 돈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찾으시는데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계산이 안됩니다. 우리가 값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찮게 생각되면 버립니다. 그러나 귀하면 찾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십니다. 귀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귀하면 잘 돌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방주에 동물들이 들어갔습니다.
“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창 6:19-20)도 했습니다. 두 번이나 생명을 보존하라고 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 동물들이 얼마나 귀합니까? 여기서 죽으면 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라”고 하십니다. 이 동물들을 자신의 생명처럼 소중히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귀하게 생각하십니다. 딕 호이트와 릭 호이트 처럼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하나의 팀을 이루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눅 10:22)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이런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 주셨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4)
베드로는 설교에서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행 2:27-28)

크리스마스가 왜 우리에게 축복입니까?
밤거리에서 헤매며 돌아다니는 것이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한 팀을 이루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메시야)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이 팀은 이생과 내세에 있어서 못할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저는 제 아내하고 한 팀을 이루었습니다. 제가 팀원으로 최선을 다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든다고 말레이 곰 꼬마처럼 뛰어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지난번에는 제 팀원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밥도 안 해줍니다. 밥을 혼자 먹다보니 처량하기 짝이 없습니다. 매일 혼자 드시는 분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김치 긴 것 먹을 때 젓가락으로 잡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빨리 팀을 만드십시오. 함께 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과 한 팀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왜 보내시느냐, 성령님은 무엇이냐, 성령은 혼자가 아닙니다. 성령은 나를 위해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주님과 한 팀을 이루게 됩니다.

딕 호이트의 말처럼 “손으로 일하는 것을 즐겼다. 땀 흘려 무언가를 만들어 냈을 때의 기쁨과 보람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한 것처럼 칼 바르트는 하나님을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되었다가 광복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소록도 나환자 촌 애양원에서 목회하다 여수·순천사건으로 안재선에게 동인, 동신 아들 둘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에 설교하시기를 10가지 감사제목으로 설교했습니다. 몇 일 전에 두 아들이 죽었는데 하나님께 감사하는 10가지 기도제목으로 설교하는 분이 어디 계십니까? 그리고 자기 아들을 죽인 안재선씨를 기어코 양아들로 삼지 않습니까. 나환자촌에서 문둥병 환자들하고 고름 빨고 목회 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동료와 신도들의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한 나환자들과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해 48세로 순교하셨습니다.
어떤 노벨 평화상 타신 분 이상으로 훌륭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예수의 팀을 믿으면 이렇게 변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밤중에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합니다. 이 때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15)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마지막 한마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을 받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성령) 한 팀을 이루어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영제 목사
 

하나님의 아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양치기가 어미를 잃고 길에서 울고 있는 늑대 새끼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양치기는 어린 늑대가 가엾어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불쌍한 녀석, 내가 잘 돌봐줄게…” 양치기는 늑대 새끼를 정성껏 보살폈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을 잘 기르면 나를 주인으로 알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 양들을 흉악한 늑대들로부터 잘 지켜주겠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치기의 보살핌으로 늑대 새끼는 무럭무럭 자라 어엿한 어른 늑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외출했던 양치기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보살펴준 그 늑대가 양치기네 양들을 다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이 우화는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겸 작가 라 퐁텐이 쓴 ‘늑대와 새끼양’입니다.) 늑대는 늑대라는 것입니다. 근본이 달라질 수 없다는 겁니다.

<라이온 킹>도 비슷합니다. 왕의 동생 스카가 하이에나들과 결탁하여 음모를 꾸며 왕을 살해하고, 그 죄를 어린 왕자 심바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죄를 뒤집어쓰고 사막에서 죽을 뻔한 심바는 자신을 구해준 티몬, 품바와 함께 살며, 자신의 과거와 고향을 잊으려 ‘하쿠나 마타타’를 노래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 사자로 성장한 심바는 옛친구 날라를 만납니다. 심바는 날라에게 사랑을 느끼고 날라는 고향의 사정을 설명합니다. 고향 땅이 스카와 하이에나의 폭정으로 파괴되고, 황무지로 변했다는 겁니다. 그러나 심바는 겁쟁이로 변해 돌아가기를 거절합니다. 그때 라피키라는 원숭이가 나타나 심바를 이끕니다. 너는 여기서 우리와 있을 원숭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는 왕의 아들 사자라는 겁니다. 사막으로 돌아가 하이에나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자라는 것입니다. 결국 심바는 자신이 왕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가 하이에나를 물리치고 사막의 왕이 됩니다.

이 우화가 가르쳐주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늑대는 늑대라는 것입니다. 심바는 사자요, 왕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정체성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겁니다.
성도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요단강에서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음성은 두 가지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아들은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입니다. 이 때에도 제자들은 엄청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더 놀랄 말씀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만 말씀 앞에(마 5:1-12) 산상수훈이 나옵니다. 흔히 팔복이라고 말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
2. 애통하는 자 – 위로
3. 온유한 자 – 땅을 기업으로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배부를 것
5. 긍휼히 여기는 자 – 긍휼히 여김을 받음
6. 마음이 청결한 자 – 하나님을 볼 것
7. 화평케 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음
8.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 – 천국이 그들의 것

이 여덟 가지 복중에 여러분은 어떤 것이 제일 마음에 듭니까?
저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에이레네(샬롬) 화평을 만드는 자입니다. 사탄은 분란을 일으킵니다.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화평케 만듭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인지 예수님이 오셔서 증언해 주셨습니다. 날라와 라피카가 나타나 심바에게 너는 사자다(라이온 킹) 가르쳐 준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 이후에 이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8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9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 6:15 “너희 아버지께서도”
마 6:18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기 잘 보세요. 예수님께서 ‘내(나의) 아버지’라고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 아버지, 네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의 자녀가 맡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요?

사도들의 증거와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와 함께 3년 반 동안이나 활동했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도가 예수를 증거 했습니다. 가롯유다는 자기 욕심으로 예수를 팔고, 자기 죄로 죽은 것이지 예수님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4복음서가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당대의 최고 율법학자가 믿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라고 말합니다.
‘감동’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데오프뉴스토스(qeovpneusto”)입니다. 이 말은 데오(하나님)과 숨(호흡)이 하나로 된 단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숨결”이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 2:7) 생기가 호흡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십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이슬람이 유대교, 기독교를 카피했지만 카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은 카피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성전처럼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를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유대인의 회당처럼 예루살렘 향하여 기도 창문을 낸 것 같이 이슬람 사원을 짓고 메카를 향하여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카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이슬람은 기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기적의 연속입니다. 기적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있습니다. 기적 그것을 못 믿겠다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 2:9)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죄 사함까지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먼저 이 중풍병자를 고쳐야 합니다.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당시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이 중풍병자를 걷게 할 수 없었습니다.

어니스트 르낭(예수의 생애:The Life of Jesus)은 성경에 나오는 기적을 전설로 간주합니다. 나사로는 죽지 않았고 살아난 것은 억측이라고 합니다. 중동 지역에 떠돌아다니는 하나의 전승으로 봅니다. 그러면서 나사로 가족이 경솔하게 행동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고 나사로를 무덤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나오게 했다는 겁니다.
그는 예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신 적도 없다고 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도와 주었는데 사람들이 나아졌다는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이적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물 위를 걸으신 것이 아니라 엄청나게 쌓인 백합화 무더기 위로 걸어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어떻게 설명할까요? 많은 양식을 인근 동굴에 숨겨놓았다가 예수께서 제자들을 시켜서 몰라 꺼내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믿는 것 보다 르낭의 말의 믿기 위해서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합니다.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과 같습니다. 증거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책처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냥 글이 아닙니다. 보통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마어마한 능력이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눅 16:17)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보다 귀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요 8:47)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생겨납니다.

감히 하나님의 이 엄중한 말씀을 누가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9)

이사야는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사 1:2)라고 합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시 19:7)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시 119:151)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시 119:172)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생명을 말씀을 바랍니다, “너의 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는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편지를 보내고, 책을 써 놓고 그 사람이 죽었다면 그 약속은 더 이상 지켜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쓰게 하신 분은 살아 계십니다.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 1:8)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제가 한번은 강원도 길을 운전하고 갔습니다. 그 때는 여기저기서 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롭게 터널이 뚫린 것 같은 길이 나왔습니다. 그냥 직진하면서 나온 길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그 터널로 들어갔습니다. 터널은 아직 불도 안달아 놓았습니다. 터널을 다 빠져 나왔는데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길이 아닌 곳에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길이 없으니 더 이상 갈 수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좁은 길에서 유턴 하여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제 뒤로 관광버스가 따라오고 다른 차들이 따라왔습니다. 그 관광차는 길어서 그 좁은 길에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택시기사가 후미진 곳으로 가는데 차들이 계속 따라오더랍니다. 자기는 소변 좀 보려고 산 속으로 들어가는데 자꾸만 차들이 따라오더랍니다.
길을 잘못가면 나만 잘못 가는 것이 아니라 내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행군할 때 뒤에 오는 사람 잘 보이라고 철모 뒤에 흰색으로 표시합니다. 밤에 행군할 때 앞사람만 보고 가는데 한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면 뒤에 오던 사람이 다 다른 대로 갑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다” 그랬습니다. 예수님만 잘 따라가면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이 누구를 따라가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인간은 빵이 없어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길이 없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찾지 못한 인간의 정신적 방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오늘 본문보다 더 간단 명료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말은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이것은 윤리입니다. 예수님은 윤리를 말씀하시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가는 방법에 대해 긴 논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내가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진리요” 이것은 철학입니다. 예수님은 철학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철학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빌라도가 했던 질문을 떠올리며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보여주시며 ‘바로 내가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이다” 이것은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종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스펜서는 물리적인 세계의 존재에 대해 정의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보여주시면서 “내가 생명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자기가 인류의 길이라고 외친 사람도 많았고 자기가 진리라고 말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지가 ‘생명’이라고 외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틸리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운명을 극복하신 ‘새로운 존재’(The New Being)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존재 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하였다.(골 2:2)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그는 인간 이성으로만 이해되지 않는 기묘자이며 모사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영존하시는 분이기에 우리에게는 놀랍고 신기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요 11:25-26).

사람들의 생각이란, 주장이란 그것이 구체화되기 전에는 그저 보잘것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와 논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를 보내시고 400년을 넘게 기다렸습니다. 우리하고(사람들) 논쟁이나 하자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했습니다. 말씀이 구체화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솔직히 저와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든, 안 하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생명을 얻는 길을 이 길 외에 없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3:10-11)

이 기막힌 일을, 이 놀라운 일을 하나님은 강압적이거나 이 세상의 최고의 인재를 뽑아서 전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의 어부출신 몇 명과 그나마 똑똑한 제자처럼 보이는 마태는 로마 공무원이었지만 그는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다녔습니다. 또한 그렇게 많은 수의 제자를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딱 12명입니다. 물론 따로 70명의 제자를 세우셨지만 그들은 12제자처럼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앉혀놓고 천자문을 외우라든지 명심보감을 외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소크라테스처럼 영혼불멸에 대해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어떻게 이기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이들의 가치에 대해서 교훈적인 설교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들을 축복하고, 한 어린이를 한 가운데 놓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기도를 많이 하라고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친히 기도하고 떡을 떼시고, 기도하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녀 평등권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만나려고 하지 않던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여인들을 만나셨습니다.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을 때 처음 예수님의 모습을 본 것도 여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상가들이 많은 것을 설명하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세상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거의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복음은 복음 적인 방법으로 전해야 합니다. 지난 2000년 간 우리가 실수한 것은 바로 복음을 복음으로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이 동양의 인도에게 초대교회 이후 다시 전달되었을 때 인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국주의와 인도에 대한 외국의 지배와 동일시했습니다. 인도뿐만이 아닙니다. 전 아프리카와 남미의 대륙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의 선교사는 다릅니다. 우리는 서양 문명을 가지고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서 그들을 힘으로 지배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나라가 위험에 빠져있습니다. 북한은 계속 침략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우리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현지 인들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겸손하게 만드셔서 복음을 바르게 전달하는 나라로 쓰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어설프게 받아들인 사람들은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했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또 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스탈린은 신학생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으로 변했습니다. 히틀러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김일성도 세례 받았습니다. 이런 표현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말에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무당만 사람잡는 것 아닙니다. 잘못된 기독교인은 선무당보다 더 무섭습니다. 이단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과 분명히 다른 모습입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런 상태의 껍데기 그리스도인에게 은혜를 주지 않습니다. 분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태도를 보이라고 요구하십니다.
라오디아게아 교회에게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온전히 예수님의 방법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선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내 것을 다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마치 검정 색을 다 버리지 않고 흰색을 섞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검정 색을 조금만 남겨 놓아도 희게 되지 않습니다. 회색이 됩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

어두움은 빛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두움으로 어두움을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눅 11:14-15)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눅 11:18)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악한 것은 그것이 능력이 있든, 크고 작든 악한 것을 못 물리칩니다. 어둠이 어둠을 물러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주님께만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의 방법입니다.

스탠리 존스(1884년-1938.12.12 타임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소개)는 1907년부터 감리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평생 선교사로 지냈습니다. 1920년대 초반 타고르, 간디와 함께 아슈람(Ashram)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서양 선교사 중에 간디에게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친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한번은 깊은 대화가 오고가는 중에 간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선 당신네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서양인들이 오늘부터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도록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간디가 한번은 어느 마을에 기차를 타고 도착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기차를 타고 함께 도착했습니다. 간디의 연설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간디는 연단에 올라 ‘신약성경’을 꺼내 들고 ‘산상수훈’에 대해 읽고 이렇게 그의 연설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드리는 저의 연설입니다. 이렇게만 행동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본문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정죄를 당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 3:18). 바울은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했습니다.

클로로포름의 발견과 마취제의 최고 권위자인 영국인 의사 심프슨에게 “당신의 업적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그는 구세주를 발견한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가장 위대한 발견을 한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한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보시는 것은 그의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100세에 난 독자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솔직히 무엇을 온전히 행할 수 있습니까? 다만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늘날 강력히 요구하시는 것은 온전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그분의 방법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고 했습니다. 행위로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해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소돔(도시)과 아브라함의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2-33)

지난주 미션매거진(285호)의 메인 타이틀을 ‘다시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유럽 재복음화의 필요성과 전략)’ KOSTE 발표 – 최종상 선교사님의 글을 올렸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유럽의 개신교 출석교인은 평균 3퍼센트 정도이고, 복음주의자는 1퍼센트도 안 되는 나라가 22개국이나 됩니다. 프랑스만 보더라도 60년 전에는 전체 인구의 96%가 천주교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6%만이 미사에 참석하며 개신교는 2% 정도이고 복음주의자는 0.6%에 불과합니다.
1998년 12월 14일 짐바브웨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당시 조지 캐리 캔터버리 대주교는 “우리(영국)교회가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The Church is bleeding to death)”며 기도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현상은 더 심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유럽은 이미 복음화 되었다 쇠퇴하는 대륙입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잘 정리된 원고를 올렸습니다. 미국과 한국교회가 ‘전방개척선교’만 부르짖다가 뒷문을 열어놓고 있는 꼴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유럽을 재복음화 시켜야 하는 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은 받아본 한 회원이 저에게 메일로 답신을 하기를 짜증이 난다는 것입니다. 유럽 교회가 쇠퇴해 가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내용인데 글이 너무 길어서 계속 보다가 짜증나고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원고가 길고 복잡하다고 왜 화가 나는지 저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예배시간이 조금만 길어져도 짜증나는 교인이 많아졌습니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부흥회라도 할 때는 핑계삼아 아주 교회에서 24시간 살았습니다. 교회에 있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구약 사람들은 하루종일 양 잡아서 예배(제사)를 드렸습니다. 어떤 때는 몇 일씩 했습니다. 솔로몬이 대단한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단한 것은 1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을 감동시키셨습니다. 1천 마리의 양을 잡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몇 일을 제사를 드렸겠습니까?
이 시대의 사람들의 심리가 참을성이 없어졌습니다. 도시화 될 수록 사람들의 마음은 바빠지고 무언가 늘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마음이 급하고 빨리 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까 기다리지를 못하고 참을성이 없어졌습니다.

여러분! 이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유럽 교회의 문제도 도시화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의 문제도 도시화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음을 쫓아 살았습니다. 향락의 도시입니다. 광란의 도시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주거 공간일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이 사회를 주도하는 장소입니다.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람들은 지금도 도시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도시화의 현상은 사람들이 집중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하나님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어가 하나였던 시대처럼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술 소비 세계 1위의 나라 – 우리는 물 마시듯이 술을 마셔대는 국민입니다. 대학가 앞에 술집과 옷 집으로 뒤덮여 있는 곳은 대한민국 밖에 없다고 합니다.
2006년 기준 알코올로 인해 정신장애를 앓아 본 성인 남녀의 비율(정신장애 유병율)은 5.6%에 이르고, 1년에 4조 4,702억 원이 술을 마셔 없애버립니다. 2008년 성인 1인당 소주 소비량만 74.40병(360ml 기준)입니다. 여기에 막걸리 빼고도 맥주, 포도주까지 합하면 엄청납니다.
연세대 보건대학원 연구에 따르면 음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20조 990억 원(2004년 기준)에 이르고 국내 총생산(GDP) 대비 2.9%의 수준입니다. 나아가 음주는 자동차사고, 가정폭력, 살인, 행동장애, 자해·자살 등의 원인이 됩니다.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 나라 – 지난해 15,413명으로 청소년 사망원인 1위가 자살입니다. 하루 평균 42명, 53분에 한 명씩 자살하는 것입니다.
흡연율 1위의 나라 – 길거리에서 태연히 담배를 피우며 다니는 나라는 우리 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 흡연율은 남자(20.7%), 여자(5.2%)로 초등학교 4학년부터도 시작합니다. 성인 흡연율에서도 미국(28.7%), 일본(60.1%), 중국(61.8%), 러시아(65.7%), 대한민국 (69.6%)입니다. – 2010년 세계보건 기구

조금 잘살게 되었다고 이렇게 정신적으로 공허해져서 흥청망청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법을 세우는 국회로부터 시작하여 사회 모든 영역에서 이렇게 빨리 썩어 가는 나라가 또 있습니까? 오늘 이 나라가 눈물의 중보 기도자 없이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을 얼마나 피할 수 있겠습니까?

미신과 우상의 상징인 ‘갓바위’가 대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팔공산의 절들 안에는 산신을 숭배하는 산신각이 함께 있어 대구 지역의 불교가 기존의 산악숭배를 흡수한 혼합적인 우상숭배을 하고 있습니다. 팔공산 지역에 막대한 국비를 동원하여 불교테마공원을 건립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제 동족에게 총을 쏘고 있습니다. 연평도에 포탄을 퍼부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군사력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의 핵 폭탄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타락한 도성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나라,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호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죄악의 도성을 심판하기 위해 가시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자신의 몸을 내던져 한 도시를 구하기 위해 끈질기게 간구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시간이 아니라 기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예배가 드려질 때까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배불렀습니다. 우리는 정말 내 생각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나를 하나님께 맞추고 순종하면서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맞추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나에게 맞추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하나님은 떠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교회는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드는 하나님을 만들고, 내 마음에 드는 교회를 만들면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들어야 좋은 교회입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본문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까?
16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
여기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사람의 모양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모습입니다. 이제 ‘그 사람들’(하나님)은 소돔의 죄악상을 직접 알아보기 위하여 소돔으로 향하여 갑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 오십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은 사해 연안 싯딤 골짜기에 위치한 다섯 도시 중 대표적인 도시들입니다. 이곳은 요단강 저지대에 의하여 물이 풍족했고, 부요와 환락으로 뒤덮여 있어 많은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삼촌을 제치고서라도 차지하고픈 그런 도시였습니다. 롯의 육신 적인 눈에는 이 도시가 마치 하나님의 동산 같이 아름다워 보였다고 했습니다(창 13:10).
그러나 이 도시는 부패하고 타락한 곳이었습니다.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 고 했습니다.
20절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이 땅의 억울한 사람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하나님의 귀와 눈에 그들의 죄악상이 생생히 드러났습니다. 문제는 죄악의 도성을 멸하시려는 하나님의 심판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세워지고 허무시면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도성입니다.

그러나 소돔 심판을 막아선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본문 22절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라고 했습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과 싸웠습니다.
에스겔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30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31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2:30-31)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막아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이런 심판을 막아설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엔 누군가 있어야 했습니다. 대서양에서 쾌속 항해를 하고 있던 타이타닉호 위의 2,200명 사람들 중에서 술에 취하고 쾌락에 취하고 부귀에 취해 있던 사람들은 모르더라도, 죽음의 항해를 하고 있던 그 배에는 경고를 알아들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배에는 없었습니다.

소돔에는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 선 사람 아브라함은 죄악 도성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의 긍휼을 부르짖은 위대한 ‘중보 기도자’ 아브라함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했습니다. 유흥적인 도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그 도시들이 죄악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비록 죄악으로 찌든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영혼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아브라함은 무너져 가는 도성을 온 몸으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본문 27절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이나 재에 불과 합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8)고 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을 못 채우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들 떨어진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천재가 아닙니다. 휼룡한 도덕적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숨을 건 기도가 시작됩니다.
23절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이 말은 의인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50명의 의인으로 시작하여 10명으로 마쳤습니다. 소돔 인근 네 성읍들(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지역을 합하면 적어도 한 성읍에 의인 10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안전 권에 들려면 해보는 만큼 해야 합니다. 그래서 10명까지 줄여 놓았습니다.
“거기서 45명을, 40명을, 30명을, 20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28-31절)
줄여 가다가 마지막에 32절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이미 멸망으로 끝날 심판의 상황을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상황을 바꾸기 위해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기도의 사람들은 어둠의 세계를 빛의 세계로 바꿉니다. 아브라함은 타락한 도시이지만 그 도시를 가슴에 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우리도 이 땅은 안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끈질긴 기도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뿐만 아니라 그 성중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불타는 심정을 가졌던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 라고 했습니다. 타락한 이 땅을 심판하실 때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긍휼을 받는 것, 은혜를 입어야 살 수 있습니다. 기도는 결국 어떠한 기도이든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합니다. 세상을 살려내는 힘이 기도에서 나옵니다. 사탄이 다른 것은 다 막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지는 기도는 막지 못합니다.
성도의 향이 기도입니다.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마지막 때에 천사들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도 기도입니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4)
기도하심으로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우리 교회를 살리고 여러분들의 가정을 살리고 자신을 살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감사하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고후 12:9-10)

사람이 왜 위대합니까? 사람이 왜 귀합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알고 감사할 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땅의 몇 만 종의 동물이 있지만 서로 만나서 인사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수많은 개를 보았지만 개가 서로 길 가다가 인사하는 것 한번도 못 봤습니다. 서로 노려보고는 갑디다. 사람만 감사할 줄 압니다. 사람만 인사할 줄 압니다. 아무리 원숭이가 똑똑해도 자기가 입을 옷 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동차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사람과 동물은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만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물과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감사할 줄 모른다면 동물처럼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한마디로 빈털터리 인생이었습니다. 율법교사도 포기했고, 결혼도 포기했고, 성공도 다 포기했습니다.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생활도 가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입 열 때마다 강조한 것은 감사였습니다. 특별히 감사가 많이 나오는 곳은 옥중서신입니다(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키프슨(Barnett Gipson)박사는 그의 저서 “행복한 하루(Happiness Days Night)”에서 “당신의 손에 얼마나 많은 것을 쥐었느냐 하는 것은 그대로 행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대의 마음속에 감사한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젖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의 예술을 배울 때 그대는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고 쓰고 있습니다.
소크라데스의 제자 플라톤도 사람의 행복의 조건은 쓰고 남을 정도의 부가 아니라 쓰기에 약간 부족할 정도로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외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잘난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보기에도 부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이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감사하느냐에 달여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고 했습니다.
감사란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원망이나 불평도 찾으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감사 쪽으로 눈을 돌리면 감사가 보이고 불평 쪽으로 눈을 돌리면 불평이 보입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 그것은 나에게 달렸습니다. 감사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축복 쪽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메뚜기처럼 작은 내가 아니라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이, 성령이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역사 하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과 같이, 세상 적인 조건에 의해서만 기뻐할 때 기뻐한다면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이 기뻐하지 않을 때도 기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낙담하고 좌절해 있을 때에도 기뻐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의 모습만 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주어질 하나님의 나라까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이 가지고 있지 않은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바울사도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8)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슬픔에 잠겨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극복하고 일어나 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같습니다. 누구나 세상에서 슬픔을 겪습니다. 어느 집이나 속 들여다보면 같습니다.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 나와야 합니다. 문제 투성이 속에서 빠져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렁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떤 분이 사랑하던 아내가 먼저 사상을 떠났습니다. 너무나 그립고 못 잊어서 20년 동안 아내가 입던 옷, 사진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처음 5년 동안은 사람들은 참 그 사람 정말 진실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년을 그러고 있으니까 이제 질렸습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털고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아내의 삶까지 다 살아야 합니다.

제가 지난 금요일(2010.11.19) 96일만에 컴퓨터로 성경을 1독 타자 했습니다. (http://kcm.kr/bible_taja/)
참 많은 말씀가운데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타자할 때에 때로는 내 마음을 두드리듯이 타이핑했습니다. 때로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에 맞추어 피아노 건반을 타듯이 타이핑했습니다. 말씀 하나 하나를 깨달은 것도 큰 기쁨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말씀을 깨달으려고만 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인식함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품속을 느끼는 것입니다. 엄마와 함께 하는 평안함 기쁨입니다. 그 마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참 행복했습니다.
마지막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정말 은혜 받았습니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2-4)

성경타자 프로그램을 설계할 때에 세 가지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첫 번째 편리하게 타자할 수 있게 만드는 것, 두 번째 다양한 통계가 가능하도록, 세 번째 모든 기록을 잘 남기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데이터를 가지고 계십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머리카락 하나 까지도 다 세고 계십니다. 나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없습니다.

현재의 나를 감사하세요.
본문 9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현재 상태를 감사하지 못하면 감사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부족함이 있습니다. 약한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 이 대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세요. 얼마 전에 미얀마에서 카렌족이 동산 당에 의해서 또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국적이 없습니다. 산 속을 떠돌아다닙니다. 몇 백만 명이 넘습니다. 나라 없는 서로 움을 우리는 잘 모릅니다. 지금의 나와 주어진 상황을 놓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학자 헉슬리는 말년에 시각을 잃었습니다. 그는 점자로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점자를 읽을 수 있게 되니 담요를 뒤집어쓰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주 추운 밤에도 손이 따뜻한 채로 책을 읽게 된 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손으로 만져보고 감격했습니다. 만지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시각이라는 소유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도 존재가 희망이 있습니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은 강한 것, 있는 것, 가진 것만을 가지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약한 것을 가지고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족함 가운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내가 강하면 주님을 떠나가십니다. 그러나 내가 약하면 주님이 머물러 계십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본문 10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예수님을 인하여 감사하세요.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우리가 감사할 것이 아주 많지만 그 중에 제일 감사해야 하는 제목입니다. 예수를 주로 받은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감사의 제목은 없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기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억압하고 협박해서 무엇을 었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로마서 1:6에는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라고 합니다. 1:7에는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라고 합니다. 부르심에 대한 바울의 고백입니다. 부르심이 얼마나 대단한 은총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축복입니다.
우리나라 성도들이 제일 많이 부르는 찬송이 뭐냐?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뭐냐? 조사를 했는데 제일 좋아하고 은혜를 받고 많이 부르는 찬송이 첫 번째가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왜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셨는지 나를 구속해 주시는 그 은혜가 너무 크다 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주님의 감사를 처음 깨닫고 은혜를 받는 그 순간에 우리가 얼마나 감격했습니다. 그 감사가 얼마나 넘쳐흘렀습니까?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 말씀하시기를(계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 다 잊어버리고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주님의 사랑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감사가 없으면 축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찌무라 간조라고 하는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가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을 두는 것 보다 차라리 독사 이빨에 물리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자녀로 키우시면 자녀교육은 성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에 맡지 않는 사람이 잘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출애굽기 22:29절에서부터 보면 “너는 네가 추수한 것과 네가 짜낸 즙을 바치기를 더디하지 말지며 네 처음 난 아들들을 내게 줄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헨리는 말하기를 감사는 최고의 항암제, 해독제, 방부제라고 했습니다. 암을 막아내는 게 감사이며 해독제와 방부제가 됩니다. 과학적으로 수 없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감사하는 것만큼 잘됩니다. 밀러는 말하기를 감사의 크기에 따라 행복의 크기가 결정된다고 했고, 본 회퍼는 감사를 통해 부자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감사가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감사하시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도전의 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사람은 다 불쌍합니다. 제 친구 중에 제법 잘 나가는 친구가 있습니다. 몇 일 전에 한국에 왔습니다. 저는 성경타자 하냐고 바빠서 못 나갔습니다. 그 친구는 에어버스 전용기를 타고 왔습니다. 왜 제가 정말 친구냐고요. 준혁이에게 물어보세요. 나이가 같으면 다 친구지요. 전용기 한 대만 온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보조로 비행기 두 대가 더 따라 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가 타고 다닐 자동차도 따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 자동차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보통사람은 줘도 기름 값 너무 들어서 못 탑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기 전에 미국에서 선거가 있었는데 자기가 속한 민주당이 대패했습니다. 힘이 다 빠져있는 상태에서 한국에 온 겁니다. G20 서울회의와 한미 FTA의 해결을 위해서 시간도 정하고 청와대에서 한미정상회담을 열면서 타결 소식을 기다렸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기자회견 때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미국민들 입장에서 봐도 실망입니다. 먹이를 구해 가지고 가지 못하는 사자처럼 되었습니다.
거기다 G20 첫날 저녁 만찬을 하는데 각 국 정상들이 늦게 오는 바람에 20분이나 지연되었습니다. 각 국 정상들이 자기가 맨 나중에 들어오려고 일부러 늦게 도착한 겁니다. 미, 중은 특히 기 싸움이 대단합니다. 일부러 10분 늦게 출발을 하고 도착해서도 보이지 않게 서로 나중에 들어오려고 기 싸움을 하다가 20분이 늦어졌습니다. 원래는 대통령이 제임 기간이 제일 긴 브라질 대통령이 제일 나중에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데 미국, 중국 정상이 안 오니까 먼저 들어온 겁니다. 그 때부터 다 꼬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최근(2010.11.8)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한국을 “아시아의 기적”으로 표현하며 발전상을 상세히 전했습니다.
“30년 전 한국은 말레이시아와 멕시코보다 가난했다”면서 이후 1인당 국내총생산이 말레이시아나 멕시코의 두 배를 웃도는 1만7000달러로 급증했고 올해 예상 GDP 성장률이 6%에 이를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내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실례로 삼성과 LG전자의 LCD 텔레비전 시장 지배, 4G 휴대전화 기술 선도, 현대자동차의 약진, 온라인 게임 및 대중음악과 같은 신(新)산업 성장동력 부상 등을 꼽았습니다.
이 잡지는 더불어 “세계화가 한국 경제 기적의 엔진 역할을 했다”며 1997년 금융위기 후 외국인이 한국 기업의 경영진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장벽과 편견을 없애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체제가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라며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여전히 외국의 영향을 경계하고, 직장에서 여성에 차별적이다”라고 꼬집었습니다.
타임지는 나아가 복잡한 기업 규제와 경직된 교육 시스템, 북한의 위협 등 장애 요소가 있지만 “한국은 도전에 맞서온 나라”였다면서 한국의 미래상을 낙관적으로 내다봤습니다.

모든 것이 다 주어지면 완벽해지고 좋아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완벽한 사람이란 없습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완벽한 나라란 없습니다. 미국도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 움들을 극복해 가면서 성장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미국의 가장 큰 문제는 인종차별이었습니다. 흑백갈등입니다.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아직도 이러한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볼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달러를 너무 많이 풀어 세계 환율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면서 문제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나 타임지가 말한 것처럼 문제가 있기 때문에 도전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할 일이 이 땅에서 많은 것입니다.

미션(Mission)이라는 영어 단어는 참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미션이라는 단어를 ‘도전, 힘, 교육’이라고 번역하고 싶습니다.

본문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고 했습니다. biavzetai, kai; biastai;(비아조(침노를 당함) 카이 비아스테스(침노하는))입니다. 비아는 힘입니다. 지식적 머리가 아닙니다. “힘으로도 못 가요”라고 노래했지만 사실은 무슨 힘을 말한 것이냐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힘으로 천국을 공략해야 천국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 힘은 무엇이며 그 이 힘은 어디서 나옵니까? 그 힘은 외면적 힘이 아니라 내면적 힘입니다. 하드파워가 아니라 소프트 파워입니다.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힙입니다. 무력적 힘이 아니라 사랑의 힘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제자들을 보내 예수께 질문을 하고 말미에 예수님이 오늘 본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7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부드러운 옷 입은 왕궁의 힘이 아닙니다. 이 세상 왕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힘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힘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보처럼 보였지만 사람을 살리는 영혼의 힘입니다. 십자가의 힘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것에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천국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올해의 최고 뉴스는 칠레 광부들이 살아서 올라온 것일 것입니다. 지하갱도에 622m지점에 갇힌 지 69일 만입니다.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며 감동을 안겼던 주인공들을 맞이하려 전 세계 1,700여명 취재진이 전 세계에 생중계 했습니다. 사고 발생 17일만에 처음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최초에 사고 발생 17일까지는 광부들이 갖고있던 비상식량 이틀치를 가지고 48시간마다 1인당 참치 두스푼, 과자 반조각, 우유 반컵을 먹으면서 버텼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감동의 드라마였습니다. 오바마가 대통령 취임할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더 감격적이었습니다. 무슨 돈을 번 것도 아니고, 무슨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구촌은 감동했습니다. 죽을 뻔한 생명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쇠사슬로도 묶어둘 수 없었던 아주 강한 귀신이 들어간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 귀신은 돼지 떼에게 들어가기를 구하여 예수님께서 허락 하셔서 돼지 떼에게 들어갔습니다. 돼지들은 낭떨어지로 떨어져 다 죽었습니다. 이 일로 온 마을이 난리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거라사인 지방에서 쫓겨나셨습니다(마 8:30-31, 눅 8:32). 귀신이 나간 한 영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입장만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것에 도전하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천국을 침노해야 합니까? 우리의 영혼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을 속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속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교육은 인격변화, 인간변화에 치중하셨습니다.
지식전달 위주가 아니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 없이 지식을 담는 것은 청소하지 않은 물통에 물만 넣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물을 집어넣어도 더럽습니다. 그릇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인격의 변화는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1-22)
바울은 선언합니다. ‘새것이 되었도다’ 새것이 되고 뭘 해도 해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셋째, 인격적 관계형성을 통한 교육입니다. 부단한 접촉입니다. 예수님은 삼 년 합숙하셨습니다. 도제훈련입니다. 사람을 알려면 오랜 시간 교실에 앉아 있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을 한번 같이 가보면 압니다. 다 드러납니다.
아무리 오래 교육해도 머리로 하는 교육은 머리만 키울 뿐입니다. 가정 교육이 왜 중요하냐 하면, 가정에서 인격적 관계형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인격이 무너지고 관계가 무너집니다.

넷째, 현장 중심으로 교육시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팀을 구성하실 때, 예루살렘의 똑똑한 사람들로 구성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박한 갈릴리 어부 중심으로 팀을 구성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나라 운동, 복음 사업이란 우리의 머리나, 우리의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었느냐, 회개하고 복음을 믿느냐 하는 조건들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탈락하게 되는데, 한가지 다른 제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가 지나치게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 것 때문에 그 대열에서 이탈하게됩니다. 그럼 어떻게 머리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 주간에 호산나하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른 사람들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달랐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주 냉정한 사람입니다.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예수님이 왕이 다 되신 것처럼 흥분해 있었지만 가룟유다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권력자들과 대결할 것이고, 우리가 이길 승산은 1%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다른 제자는 뭐했냐하면 누가 우리 중에 크냐,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까지도 다른 제자들은 몰랐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순진하게 “저는 아니지요, 저는 아니지요?” 그랬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가룟유다입니다. 다른 사람은 지금 다 모르는데 가롯유다만 압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길을 찾아 권력이 있는 쪽에 붙은 것입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배반한 것입니다. 그 만큼 가룟유다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처럼 선생을 미리 팔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머리도, 재주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지나치게 앞서가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살려고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려고 선생을 판 것은 분명 너무 앞서간 것입니다. 사람의 수가 너무 빨랐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 우리에게도 온다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으로 미리 피해보아야 안됩니다. 피해도 정도를 가야 합니다.
인간적인 장점만 가지고는 사도직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핵심은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자원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고 헌신한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킬 때 특징을 보면 원리를 가르치시고 방법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무식한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제가 가끔 그런 표현 잘 씁니다, 무식한 게 통한다고요.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9-21)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강조하시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는 관념적인 이론보다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침노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오는데 ‘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힘’이지만 사실 ‘싸움’을 말합니다.
이삭이 60세에 쌍둥이를 나았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창 25:26). 그 형 에서는 용맹하고 사냥을 잘하나 야곱은 대조적으로 유순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야곱을 편애하였습니다(창 25:27-28).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샀습니다(창 25:20-34). 그 후 야곱은 축복을 빼앗긴 형의 분노를 받아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부모를 이별하고 1천 8백리 되는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간 도망가서 타향살이를 합니다.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야곱의 소원은 고향에 돌아가 형 에서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형의 마음도 누그러졌겠지 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사람을 보내어 최대의 경칭 어인 ‘주’라 부르고 자신은 ‘종’이라고 낮추면서 “주께 은혜 받기를 원하나이다”(창 32:5)라고 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형이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은 전략을 바꿉니다. 이번에는 선물공세를 펴는 것입니다. 또 야곱은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나머지 한 떼는 피하라는 작전도 세웠습니다.
야곱의 이름에 “속이는 자, 간사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이름처럼 모든 수단을 다 강구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야곱이 이것 때문에, 자신의 계책 때문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것이 아닙니다.
형에게 줄 선물은 미리 보내고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2-28) 고 했습니다.

물러서지 않는 악착같음이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야곱은 얍복 나루에 천사가 나타났을 때 씨름을 하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에게 축복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연애 프로그램인 1박 2일인가에서 강호동이 하고 이만기가 씨름하는 것이 나왔습니다. 서로 장난하면서 이만기는 20년 만에 처음 삿바를 잡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씨름 선수는 삿바를 잡아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감이 온답니다. 야곱도 감이 왔습니다. “이 사람(천사)은 나에게 축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알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기회입니다. 잡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얍복강의 기회가 왔습니다. 우리의 얍복강이 어디입니까? 주앙교회입니다. 이 교회에서 천사를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싸우시기를 바랍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베드로의 이 대답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가 비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있지만 말씀을 의지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는 베드로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머리가 좋은 것 보다, 많이 아는 것 보다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셀라의 합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시 3:8)

오늘 설교제목 멋있지요? 여러분이 화답을 하여야 합니다. ‘아멘’이라고 하셨으면 그것은 말로 화답한 것입니다. 악기로 화답했다면 그것이 ‘셀라’입니다. 아멘과 마찬가지로 셀라는 화답의 표시입니다.
원래는 심벌즈를 통해서 합창의 단조로운 흐름을 막기 위한 지휘자의 신호입니다.
셀라는 시편 39편과 합 3:3, 9, 13에 모두 71번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자기가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 (힉가욘, 셀라)”(시 9:16) 학기욘 셀라의 뜻은 조용히 묵상하는 속삭임 속에서 심벌즈를 한번 치라는 지시입니다.
실벌즈를 한번 치면 그 다음에 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셀라를 쉬라는 뜻으로 보기도 합니다. 제가 너무 일을 많이 하는 것 같으니까 미국에 갔을 때 목사님이 저보고 ‘이 목사 쉼표도 음악이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바로 그런 쉼, 하나님을 위해 다음을 준비하기 위한 음악의 쉼표 같은 것, 그것이 셀라입니다.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셀라를 하려면 전체 음악에 집중해야 합니다. 단 한번 비록 마칠 때 단 한번의 심벌즈를 치지만 그 때를 놓치면 안됩니다. 한번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한번은 전체 음악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합창은 혼자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합창은 자기에게 맡겨진 것 그것을 잘 해야합니다. 아무 때나 큰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공동체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지만 그에게 혼자사는 축복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 22:17)
모세를 부르신 목적도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함입니다. 바울을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말할 때 성경에 꼭 따라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너만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너와 네 민족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본문도 잘 보세요.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편 기자는 주의 백성에게 구원을 내려 달라고 노래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신약성경도 다르지 않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같혔을 때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렸습니다. 그 때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나가지 않고 간수에게 우리가 여기 있다고 말합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10절),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고 합니다.
바로 앞에 행 16:12-15에 바울이 빌립보에 이르렀을 때에 안식일에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고 했습니다. 혼자만 구원받지 않습니다. 네 집이, 네 백성이 모두 구원받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집에 형제, 자매가 없는 분들은 교회에 오면 좋습니다. 다 형제고 다 자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고 백성입니다. 교회는 개인적이지 않습니다. 함께 가는 곳입니다. 더불어 사는 곳입니다.
어떤 분이 서양에는 농기구들을 보면 함께 하는 것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혼자 하는 기구들 ‘지게’ 같은 것이 발전했다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리나라는 산악지형이 많아 도로가 늦게 닦였습니다. 그러나 보니 지게가 유리한 것입니다. 오히려 서양에 보면 손수레는 혼자 끌고 다니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리어커는 함께 당기고 밀게되어 있습니다.
제가 한번 선교에 칼럼에 ‘가레 선교’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어려서 가레질을 한번 해 보면 참 재미있었습니다. 힘도 덜 들면서 재미있게 고랑을 파고 물길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레 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줄을 잡아당길 때와 놓아줄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아무 때나 당기면 안됩니다. 또 돌맹이 같은 것이 걸렸을 때는 힘을 더 주어야 합니다. 가운데 있는 사람은 삽을 또 잘 대야합니다.

합창은 다른 사람을 배려합니다.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21)
하나님은 합창을 원하고 계십니다. 혼자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친구들과 함께 달리기를 합니다. 그런데 중간에서 그만 돌에 부딪쳐 다리를 다쳤습니다. 절뚝거리며 더 이상 달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혼자 1등으로 들어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19-21)
이 때부터 사람들이 온전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답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괜히 온전해 지고자 했다가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8-31) 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주의 백성이 누구입니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주의 백성입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 1:9) 하나님 말씀을 증거 하다가 밧모섬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보면 여러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을 보게 되었는데 이 선교사님 사모님은 아이들 교육에 올인 했습니다. 교육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합니다. 아무리 선교사 이지만 자기 자식 교육시키는 것을 가지고 뭐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선교비를 자녀교육에 다 써버린다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결국은 나중에 미국으로 가더라구요. 그것도 알고 보면 자녀교육 때문에 간 것이지요. 지금 중심이 누구입니까? 자녀 아닙니까?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교회에서 세습을 반대하는데도 무리하게 밀어 부쳐 많은 불신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너무 이기적입니다. 할 사람이 없으면 모르지만 많은 사람이 좋지 안게 보면 그만두어야 합니다. 누가 진정한 형제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주의 백성이냐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에 해답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석학들하고도 많은 토론도 벌였습니다. 답을 얻지 못한 톨스토이는 어느 날 동네에서 농사꾼 친구에게 “사람이 왜 사느냐” 그랬습니다. 그 농부는 당연하다는 듯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지요” 그랬습니다. 이 간단한 한마디가 톨스토이를 살렸습니다. 그는 훗날 불후의 명작 부활이라는 명작을 저술했습니다.
태평양 건너에 아내 보내놓고 자녀 보내놓고 ‘꺼억 꺼억’ 하면서 기러기가 되어 가지고 살지 마세요. 자녀 따라다니면서 살지 마세요. 자녀 중심으로 살지 마세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됩니다.
자녀교육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녀교육은 내가 먼저 하나님께 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후손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황금이 현재에는 좋아보이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듯이 보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면 훗날에 큰 기쁨을 찾이 할 것이다. 재물에 눈이 멀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에 눈이 멀어야 하겠다”(1954.11.14 정재학 목사)

정재학 목사님의 사모님(차은숙:합일학교(1901년 신식교육으로 감리교가 세움) 교사 차경창(후 감리교 목사 됨) 여동생)은 김차열 목사님 부부가 방문했을 때 말씀하시기를 “내가 눈이 먼 것도 해산했으나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실조로 이렇게 되었고, 지금도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오.” 하시면서 목사님 사모님 고생하신 이야기를 할 때 함께 울기 시작하였는데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나는 목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면서 한나절을 울었습니다(김차열 목사 추모사 중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울어야 합니다. 너무 많이 먹었습니다. 너무 많이 모았습니다. 너무 욕심을 부렸습니다. 차사모님은 정재학 목사님이 서산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섬에 홀로 남아 있을 때에 딸을 잃었고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서산으로 이사 나오는 중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재학 목사님은 인천 앞 바다에 있는 덕적도 서포리에 살았습니다. 1926년 12월 덕적도진리감리교회에 이용도목사가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아껴주시던 선생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어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용도 목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롬 8:28-29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 성도들은 밤새도록 울부짖었습니다. 이후 성결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결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 정재학 목사님은 우리교회 정 선교사님의 할아버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택민이 증조할아버님이십니다.

정목사님은 ‘바보 같은 성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서산학교 설립 초기에 전교생 교복을 인천에다 주문했는데 오다가 없어졌습니다.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해 정 목사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백희씨가 동행했습니다. 이 분의 증언입니다. 서산에서 인천으로 배를 타고 가서 굶주린 상태에서 주막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거지가 와서 도와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드릴 점심을 거지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거지는 저녁때 또 왔다는 겁니다. 또 그렇게 했답니다. 몇 끼를 이 거지에게 다 주고 당신은 몇 끼를 굶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한 선생님은 처음에는 참 바보 같은 짓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이분은 진정 성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돌아와 이 말을 전했던 것입니다.
최정화 권사님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야, 목사는 정 목사 밖에 없어. 참말이지 그 목사 밖에는 진짜 목사는 없어, 옥녀봉 꼭대기에서 밤새 기도하는데 호랑이가 한참 보다가 그대로 갔대”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그 큰 소나무들이 정 목사님 눈물 받아먹고 컸다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당시 서산지역으로 가신 목사님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정 목사님을 먼저 찾아뵈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1943년 10월 20일 밤 일경들이 방문하여 구둣발로 차고 비밀문서를 찾는다고 목사님의 집을 뒤졌습니다. 이 때 돌을 넘긴 딸과 장남 현웅(정 선교사님 아버님)이 네 살이었습니다. 그때 잡혀가서 홍성경찰서를 거쳐 공주교도소에 옥고를 치루고 있었습니다. 일제에 의한 죄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패망을 예견한 내용’의 글을 유포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의 집은 흉가처럼 바뀌고 찾아오는 사람도 끊겼습니다. 목사님의 사택은 흉가처럼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4년 1월 2일 현웅(정 선교사님 아버님)이 5살 순자(고모)는 3살 그리고 막내 송자가 태어났습니다. 이 때 산모는 영양실조로 아이를 낳는 바람에 실명을 하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1년 5개월 간의 옥고로 온 몸이 동상과 영양실조로 만신창이가 되어 풀려난 후 5개월만에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목회와 함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원인이 우리 민족의 무지로 인한 국력의 세약함에 있다고 보고 교육의 기초건립을 위해 해방이 된 그 이듬해(1946년) 초부터 뜻 있는 인사들과 함께 서산에 중학교 설립을 추진, 서산경찰서 옆에 있던 양잠소를 개조해 서산중학교를 설립해 1946년 3월 15일 개교했습니다. 이후 은산중학교 설립에도 힘을 쏟았으며, 홍덕유 씨, 홍산웅 의사와 함께 상춘학원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올해(2010) 국가보훈처는 8·15 광복 65주년을 맞아 33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에게 독립유공자 정부포상 전수식에서 늦게나마 포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왕 말씀드리는 것 하나 더 소개하지요.
정 선교사님은 아버님이 할아버님이 너무 고생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버님처럼 목회자가 되시지 않았다고 했는데 혹시 잘 모르는 것이 있지 않나 해서 알려드립니다.
정재학 목사님은 평소에 늘 선교를 부르짖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이 꿈도 못 꿀 1억원 재단을 만들려고 하셨습니다. 이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00년 6월 20일 서산교회(박광훈 목사)에서 ‘정재학 목사 선교재단’ 설립예배가 드려졌습니다. 본 선교재단은 고 정재학 목사의 유지에 따라 그 자녀들이 재산을 기부하면서 시작 되다고 합니다. 정 목사의 자제 정현웅 씨가 현금 1억원과 부동산(경기도 평택의 대지와 서울 중랑구의 한 건물)을 선교재단 기금으로 쓰도록 김차열 목사에게 의뢰함으로써 아버님의 뜻이었던 1억으로 재단을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 선교사님 아버님이 제산 다 기증했다 그 이야기입니다. 너무 허무해 하지 마세요? 저는 아버님이 훌륭한 결단을 내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장기려 의사가 부산 영도 피난민 촌 천막병원에서 구슬땀을 흘리면서 젊은 조수에게 “자네도 나처럼 살아” 하였습니다. 젊은 조수는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소리 듣는데요?” 라고 말하자 대답하기를 “사람이 한 평생 살고, 바보 소리 들으면 잘 산 거야!”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 잘난척하고 잘나게만 살려고 하는 것 아닌가요? 사람에게 바보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잘 사는 것일 수 있습니다. 조금은 바보처럼 삽시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셀라는 더 높은 음으로 가기 위한 쉼입니다.
하나님께 충성, 봉사한 것 혹 이 땅에서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받습니다. 하나님은 냉수 한 그릇의 대접도 잊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 믿고 행한 것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예전에 처음 국민 연금 시작할 때 몇 만원 붙고 나중에 돈이 많이 나오니까 그 때 좀더 불 것 그러는 분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백배나 받게되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막 10:30).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
 

십자가 언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11:4)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2-25)

지난 26일 미시령 울산바위 전망대 인근 내리막길에서 단풍 관광객들을 태우고 가던 관광 버스가 긴급 제동시설 옆 비탈면을 들이받아 1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치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오래 전 스위스에서 어떤 분이 관광버스를 몰고 내려가다가 관광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되었습니다. 내려가는데 어린 아이가 도로 가운데서 놀고 있었습니다. 안에 있는 분들도 놀랍니다. 이 운전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두 말도 못하고 정말 우리 모두가 죽느냐? 저 아이는 어떻게 하느냐? 이런 긴박한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 때 운전기사는 방향을 트는 대로 이쪽으로 가면 이쪽 다 죽습니다. 낭떠러지에 다 떨어집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아이 있는 쪽으로 가서 아이를 치고 그 아래에 내려가서 섰습니다. 버스 승객들은 모두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었습니다. 모두 너무 놀랐지만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은 하나도 안 우는데 운전기사가 우는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비통에 빠졌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자기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살리려고 하나님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치고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십자가 때문에 살았습니다. 십자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나 욥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을 보았을까요? 보지 못했을까요? 예!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출애굽의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았고 믿었을까요?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입니다. 저는 오늘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는 아브라함보다 욥보다 그 다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보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마 11:23, 눅 10:11)고 하셨습니다.

오늘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믿음보다는 자꾸만 어떤 증거를 더 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고 했습니다. 십자가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더 이상의 증거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전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를 사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많은 것 가운데 이 십자가를 오페라로 말하면 크라이막스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맞춥니다. 그래서 우리가 슈퍼스타나 좋은 기독교의 뮤지컬이나 영화를 보면 모두 어디에 맞추느냐? 포인트가 어디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 모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담겨 있는 것, 하나님 은혜의 모든 것, 우리를 위해 대답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대답하십니다. 이 한 분이 지신 이 하나의 사건이 온 인류의 문제를 천만가지 억만 가지 많고 많은 인간의 고민과 문제를 풀어주고 짐을 벗겨주며 길을 열어줍니다.

법을 공부하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미국의 법은 많은 내용이 성경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미국에는 어떤 법이 있느냐 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것이 설령 지나가는 말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이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따라했다가 손해를 보았다면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책입니다. 약속의 책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받았던 십계명을 담았던 궤의 이름은 언약궤 또는 법궤라고 말합니다. 신학용어 중에는 계약신학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계시 내지는 특별한 은사를 사모하는 경향이 많지만 신앙이 깊어질수록 거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못 믿을 때 그런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그런 증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그 증거를 더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이스라엘 출애굽 백성이 있었습니다. 홍해의 바닷물이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어디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그러한 광경입니까? 지금이라면 비디오로, 사진으로 찍어놨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정말 대단한 광경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격한 백성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 때도 사람들은 수많은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나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남자만 오천명이 넘게 먹은 오병이어의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수만 명이 먹었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다 뒷걸음질 쳤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을 향해 그분의 죄는 없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 소리만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증거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증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나 욥은 아무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시기 전에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고 했을 때 이 한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창 12:4)고 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75세면 살만큼 살았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이사를 갑니까? 새 땅은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면서 있었다면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여기 잘 보세요? 하나님의 증거가 먼저 아브라함에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해 양털시험을 한 것과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같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라고 했습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에게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 어떤 증거를 보여 주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욥은 정직하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영혼에 선악을 알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잠 20:27) 사람의 양심은 속일 수 없도록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다른 사람 다 속여도 자기는 속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속이지 못합니다. 사람의 깊은 곳 ‘양심, 영혼’을 알고 게십니다.

반도체가 요즘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아십니까? 나노(nano)시대입니다. 하도 어려워서 쉽게 말하면 머리털 하나로 천 개를 나누는 것이 나노라합니다.
밀리(milli)가 천 분의 일이고, 마이크로(micro)가 백만 분의 일입니다. 그 다음이 나노(nano)입니다. 십억 분의 일을 말합니다. 머리털 하나로 10만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1초의 1/10억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나노는 세계에서 절대로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영국이나 독일이나 미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 비슷하게 가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우리가 대단히 앞서있습니다. 인터넷이나 컴퓨터는 우리가 한 30년 늦게 시작했지만 나노는 지금 같이 가고 있습니다. 대단합니다.
사람도 나노를 만듭니다. 지금은 머리카락 같은 것 하나에 넣을 수 있는 것을 불과 30년 전 방만한 컴퓨터였습니다. 이것이 나노시대입니다.
구약시대가 아날로그 시대였다면 지금은 나노시대입니다. 구약이 율법시대이면 지금은 십자가 시대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무리 깊은 것도, 아무리 어려운 것도 모두 풀어주고, 모두 대답해주며, 모두 해결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으면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 승리합니다. 어떤 문제에서도 승리합니다.

동물에게 본능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거북이가 바닷가 모래언덕에 올라와 알을 낳습니다. 알에서 막 깨어난 새끼는 물이 있는 바다로 가야 산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죽을힘을 다해서 바다로 갑니다. 연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고 죽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왜 이 정직에서 벗어나 있습니까? 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있습니까?

사탄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셨는데 사탄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최초의 거짓말입니다. 이 거짓말은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사탄입니다. 사탄은 모두 거짓입니다. 예수님께 세 가지 시험을 할 때도 다 거짓입니다. 거짓으로 유혹합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 8:12)

사탄의 거짓 속임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회개치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잠 15:32)고 했습니다. 영혼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영혼을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도 혹시 영혼을 우습게 생각하시는 것 아닙니까? ‘무슨 영혼이 있어?’ 그러면 큰일납니다. 세상축복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득이 되는지 해를 입히는지 알고 세상의 축복을 말해야 합니다. 사탄은 세상의 것으로 우리를 미혹합니다. 예수님은 범죄한 팔다리 끊고, 세상의 것을 버려서라도 영혼을 구하라고 말하십니다.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잠 16:17) 구약의 사람들은 자신이 그저 거짓말 안 시키고 정직히 사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정직히 사는 것만으로 안 됩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정직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그 정직한 것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표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정하셨습니다. 그 표준을 정하셨습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막8:3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오래 전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산중턱에 비행기가 추락하여 여섯 명의 희생자를 내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현장 가까이에는 교회훈련센터가 있음을 알리는 68피트 높이의 철탑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AP통신이 전한 사고의 원인은 그 철제십자가에는 늘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날 따라 그 십자가의 전등불이 꺼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운항하는 항공기들은 십자가 탑이 밝혀주는 불빛을 보고 그곳을 지나곤 했는데 그 날은 불이 꺼져 있었기 때문에 방향감각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불꺼진 십자가는 생명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을 때 불이 들어옵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천하를 모두 넘어뜨려도 십자가 앞에는 맥을 못 춥니다. 십자가를 말해야 합니다. 십자가만 말하고 보여주면 사탄은 벌벌 떱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진실이 어디에 있습니다. 진리가 어디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십자가에 계십니다.

본문 22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를 전하니” 이것이 참 소망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유대인처럼 표적만 구해서는 안됩니다. 헬라인은 지혜만 찾습니다. 다 필요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보다 먼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십자가와 바꿀 수 없습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 2:14) 주님과 함께 십자가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 이영제 목사
 

하나님의 은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우리 기독교인이 가장 잘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은혜’입니다. 은혜 없는 기독교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은혜 받았습니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말씀으로 보고도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세상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일을 경험하면서도 은혜 받았습니다. 그럽니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말입니다. 기독교는 모든 것이 은혜로 시작하고 은혜로 마칩니다. 내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다 피해집니까? 몇 개는 피하겠지요.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피할 길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세상에 모든 것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나님이 뽑았습니다.
하나님 믿으면 왜 감사의 삶을 살아갑니까?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불평의 삶이 아닙니다. 감사의 삶입니다.

눈이 따가워 안과에 가면 인공 눈물을 줍니다. 의사 선생님이 “하루에 네 번씩 넣으세요.” 그럽니다. 어떤 분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하루에 네 번씩 울면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울려고 하니까 눈물이 잘 안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돌아와 하루에 네 번씩 눈물을 흘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저도 참 잘 웁니다. 남이 볼까봐 화장실에 가서 웁니다. 혼자 있을 때 웁니다. 교회에서 주님과 함께 웁니다. 은혜 받으면 잘 웁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하면서 웁니다.

성경 적인 이름으로 제일 많은 것이 남자는 ‘다윗’, 여자는 ‘은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21일(목)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중학생 아들 이모군(13)이 집에 불을 질러 아버지, 어머니, 동생과 할머니 일가족 4명이 숨졌습니다. 이군은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다”고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자식을 두고는 언제나 자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식의 문제는 부모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식을 다 욕할 수 있어도 부모는 못합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은혜를 아는 아이로 키워야합니다. 은혜를 알면 사람이 됩니다. 은혜를 알면 다 됩니다. 잘못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 가서 이 은혜를 배웁니까? 어디 가서 이 은혜를 받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합니다. 교회에 와야 됩니다. 교회는 노력해서, 우리가 도 닦아서 사람을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함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곳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되면 교만만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보세요. 겸손해 집니다. 감사가 넘칩니다. 아직도 국가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까? 분명한 것은 내가 아작 덜 변했다는 것입니다. 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는 말 그대로 국경을 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가깝게는 북한 탈북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 나온 사람들을 돕고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 없는 의사들도 있습니다. 북한으로 망명하려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의사 신모씨 등 3명이 구속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난 2월 스웨덴에 거주하는 지인의 도움으로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가려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사는 것을 감사하지 못하면 어디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아무에게도 감사할 수 없습니다.
미국에 이민가신 분들이 자녀가 두 가지 말 배우는 것 때문에 고생하니까 한국말을 잘 안 가르치고 영어나 제대로 하라고 해서 지금 부모 자식간에 말도 잘 안 통하는 가정이 많다는 겁니다. 자식하고 깊은 대화를 못하니 자식도 아니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미국 오바마 대령은 어떤 때는 일주일에 공개석상에서 몇 번씩 한국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미정상회담 때는 이병박 대통령에게 한국의 교육을 배우려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잘 살게되니까 한국어가 인기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한류 붐이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 남미까지 일고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해야 합니다. 한국말을 해야 한국사람입니다. 은혜를 알아야,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에스라는 노예가 되어 타국에서 살았지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에 9:9) 노예가 되었던 것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회복해주신 것을 찬양합니다. 미래를 봅니다. 과거에 매여 원망만 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실 축복을 바라보세요.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을 만날 천국을 생각해 보세요.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은혜가 있으면 봉사합니다.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모 교회 김 권사님은 93세의 고령에도 교회 강단 청소를 사명으로 알고 매주일 예배 1시간 전에 오셔서 기쁨으로 찬송하며 닦고 계셨습니다. 한 번은 너무 힘드신 것 같아 그만 하시라고 하니 “하나님의 사명은 은퇴가 없어요.”하시면서 기쁨으로 봉사했습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남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이 내 몸에 있다면, 우리는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어떤 교인은 병원에서 완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암 환자로 누워 있으면서도 편지를 써서 ‘예수를 믿으세요. 구원을 얻습니다.’ 하고 창 밖으로 하나씩 던졌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래도 예수 믿어 구원함을 얻도록 사명을 다 한 것입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항상 궂은일에 솔선하기로 유명하였다합니다. 남강 선생께서 오산학교를 세웠을 때이다. 선생은 남들이 꺼리는 화장실청소를 하곤 했습니다. 화장실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남강이 그쪽으로 가면, “서쪽, 서쪽!”하면서 학생들은 웃으며 따라갔습니다. 추운 겨울날 남강은 도끼로 얼어붙은 똥 덩이를 깨고 있었습니다. 또 후에 선생께서 3.1운동으로 옥중에 있을 때에도 변기를 맡아 청소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젊은이들이 “선생님이 그렇게 하셔서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그것을 자기의 십자가로 알았습니다.

서울에 사무실이 있을 때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못되었는지 사무실 앞에 차를 세워두면 늘 망가집니다. 백미러를 펴서 발로 차서 달랑 달랑 매달려있기가 일수입니다. 한번은 누가 계단에다가 큼지막한 똥을 싸고 갔습니다. 주인이 그 위층에 사시는데 그분도 교회 집사님 입니다. 그런데 그 똥을 못 치우고 피해 가시더라 구요. 결국 우리 집사람이 치웠습니다.

속담에 “하루 은혜 백 날에 갚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기는 쉬워도 갚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전 6:1)고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봉사의 책임이 더 커짐을 알아야 합니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 12:48)고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보기 드문 선한 왕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한 가지 오점을 남겼는데 그것이 대하 32:24-26에 나옵니다.
“24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26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거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저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위급한 상황에 처한 히스기야를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마다 구해 주셨습니다. 그의 통치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히스기야의 유다는 강성해졌고 이웃 나라로부터 부러움과 경계를 동시에 받는 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바벨론까지도 유다에 사자를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선물을 바치고 환심을 사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으로 말미암아 히스기야는 도리어 교만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거듭된 은혜를 입고 보니 모든 일들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잘 되었고, 그러자 스스로 자신감이 생기고 자부심이 생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무를 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문제가 생겼을 때보다 그 문제가 해결된 후에 더욱 조심을 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기리면서 감사의 고백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이 스스로의 노력이나 의지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의한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과 외국의 왕으로부터 많은 보물과 존경을 받았으나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섬기는 데는 인색하였습니다. 인색한 마음은 성도의 신앙을 좀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색한 봉사나 헌신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인색한 연보에 대해 말하기를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 9:7).

참 사람이 간사합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이 아니라, 인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시 27:13)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시 30:7) 라고 합니다.
여러분! 언제 기도하셔야 합니까? 주의 얼굴이 가리우시면 큰일입니다. 내가 보기 싫어지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회개해야 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빨리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주님이 피하시는데 마지막 날이라고 피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부르짖어야 합니다.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희돈 장로님은 3년 정도의 스케줄이 다 짜여있는 분입니다. 얼마나 바쁘겠습니까? 그러나 매일 새벽에 교회에 가서 3시간 이상 기도하고 출근합니다. 한번은 어떤 분이 기도하는데 들어와서 “장로님 정말 기도하면 이루어집니까?” 그래서 그분을 바라보면서 한마디만 하셨답니다. “제가 바보처럼 보이십니까?” 그랬더니 그분도 열심히 기도하더랍니다.

은혜를 받고 봉사하지 아니하면 은혜를 빼앗길 수 있습니다.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8-29) 일하지 않는 일꾼의 달란트는 빼앗아 일할 수 있는 사람에 주십니다.

바울은 솔선수범한 사도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아무리 보아도 은혜로운 말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 :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