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송구영신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우리의 신앙이 꼭 대나무와 같습니다.
대나무는 4년 동안 죽순하나 밖에 안나옵니다. 그런데요 5년이 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그 한해에 25m가 쑥 자랍니다. 그 죽순 밑에 섬유질, 뿌리가 넓게 펴져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대나무와 같이 쑥 자랄 때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의 깊이를 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쉽게만 되는 것은 또 쉽게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진짜 가치가 있는 것은 인내를 요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쉽게만 벌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길 가다가 손 끔 한 번보고, 사주팔자보고 이름석자 바꾸어서 인생이 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우리는 아담 이후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의 항로에서 이탈했습니다.
우리만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인내하고 계십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른 항로를 잡기 위하여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오늘도 인내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비행기도 우리가 아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정상궤도에서 이탈한다고 합니다. 때로는 천둥과 비바람이 몰아치는 속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저는 비행기 타고 바로 옆에서 벼락이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만일 그게 비행기에 맞았다면 바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베트남 비행기 타고 김포공항에 내릴 때였습니다. 얼마나 안개가 짖게 깔렸던지 착륙하려다 다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엔진도 소리가 꺼진 것 같았습니다.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착륙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까지 하늘에 떠 있을 수 없습니다. 착륙하게 되어있습니다. 그 시간이 우리에게도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인내하는 것은 목적지에 착륙할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인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 입니다.

오늘 아침에 사무실에 나왔는데 전화가 계속오는 겁니다. 지금 중앙아시아 00나라에서 정보부 요원이 한국에 들어와 선교사 색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KCM에 있는 그 국가에 대한 자료를 다 삭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선교사들에게 큰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용들을 하나 하나 확인해 나갔습니다. 무조건 다 지우기는 그렇잖아요. 자료, 정보요 하루아침에 다 삭제해야 될 일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뭘 아는 것 같지만 한 살 더 먹어봐야 별로 더 아는 것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안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뭘 가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우스운 것입니다. 별것 아닙니다. 인간이 잘 살겠다고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지구는 오염되었습니다.

미국 천문학자들이 물이 존재하는 행성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지구 2.7배 크기의 물이 있는 행성이 태양계 밖에 존재한답니다. 태양계와 불과 40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발견된 행성은 지구의 1∼10배인 ‘슈퍼 지구’ 사이즈입니다. 그런데 너무 뜨거워서 생명체가 살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과학자들조차도 우주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래서 태양계 밖 40광년도 ‘불과’ 얼마 안 되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빛은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고 이 거리는 달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태양까지는 약 8분 거리입니다. 그러면 40광년이라는 것이 얼마나 먼 거리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5:8-9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가지는 알 수 있어요. 때가 차면 비행기가 착륙하는 것처럼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에 계셨습니다. 시간이 존재하기 전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와 시간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정하시고 운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못할 일이나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벧전 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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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3:18-21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내 인생이 사막과 같아도 하나님을 믿으면 길이 생깁니다. 사막이 변하여 강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믿지 못합니다.
본문을 잘 보세요. 그 일을 누가 합니까?
19절 보세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내가”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해 주십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2010년을 하나님께 맡겨드리기 위한 안수기도를 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자주 하는 것이 아니구요 딱 1년에 한번 합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돈만이 축복인줄 알고 있어요. 돈에게 지배당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돈을 지배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더 주십니다. 돈은 중요한 것이지 첫 번째 축복은 아닙니다. 돈 많으신 분은 교회 안에 보다 교회 밖에 더 많습니다. 돈 버는 것은 상대적인 은사이지 절대적인 축복은 아닙니다. 돈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특별히 2010년 한해동안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는 믿음과 축복을 얻으려면 ‘내가’ 아니라 ‘내가’ 라고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게서, 우리가정에서, 주앙교회에 새 일을 행하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절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전에 세워둔 비전과 소망을 다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것, 믿음으로 살지 않았던 과거를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생각이 무엇입니까? 내 생각입니다. 내 방법입니다.
새해에는 새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지난 일들을 생각하고 있으면, 새해를 향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안수 기도해야 되는데요 아무 생각도 없는 분들에게 기도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기억해 봅시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합시다. 그러면 내 마음에 원하는 것 또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기도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새해에는 예배도 기도도 성경 읽기도 좀더 열심히 해야지 다짐해 보세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언제나 전도하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에 정하세요. 꼭 기도하세요. 원하세요. 하나님 2010년에는 꼭 전도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 받으시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먹어야 삽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2009년도 한해도 몇 일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 한 살을 더 먹습니다. 우리는 나이도 먹습니다. 사실 살 나이가 한 살 줄어들었으니까 빼야 되는데 우리는 더합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었으면 나이 값을 해야 합니다.

초등학교선생님이 “사과 세 개가 있는데 하나를 먹으면 몇 개가 남느냐?” 고 문제를 내었습니다. 한 아이가 “세 개입니다.” 그러는 겁니다. “하나를 먹었는데 어떻게 세 개가 남느냐?” 고 선생님이 물으니까 학생이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요, 먹는 게 남는 거래요.” 그랬다는 겁니다.
사자성어에는 식이위천(食餌僞天) “백성들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는 말이 있습니다.
회사를 뜻하는 ‘Company’라는 영어단어는 ‘함께’라는 뜻을 가진 ‘com’과 라틴어의 빵을 의미하는 ‘pany’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베트남에 갔더니 길가에 ‘껌(com)’이라고 써있는 가게들이 있었습니다. 인터넷 PC방인가 생각하고 들어가 보니 식당이었습니다. 쌀, 밥을 껌이라고 부릅니다. 회사는 빵을 함께 먹기 위해서 만들어진 곳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나)을 먹기 위해서 모인 곳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베푸신 첫 이적은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요 2:1-10). 어머니 마리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의논했을 때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아닙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혼인잔치의 기쁨을 망칠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첫 기적을 베푸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만들어 내십니다(요 6:9-13).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님께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음식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 소중한 것은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먹는 문제도 목숨을 위하여 먹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다. 영입니다. 살리는 것입니다. 생명입니다. 목숨입니다. 이제 영적 양식을 받아먹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양식을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께 오셔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예수께 오셔야 해결됩니다. 와야 해결이 됩니다.
우리속담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는데 중국에는 “산을 옮기는 사람은 작은 돌멩이부터 옮긴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 일이 크던지, 작던지 일단 시작을 해야 합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께 오셔서 예수께 먹을 때만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원문의 “!Elqev::아르코마이”는 ‘나타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타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같은 단어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다 풍랑 속에서 빠져 들어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너무 무서워 유령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만일 주님이시라면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18)라고 할 때 29절에 “오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1:46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와 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생명수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생명수는 값이 없습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값이 없다는 것은 계산할 수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돈주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값없이(어근 dwreavn:도레안)’은 ‘값없이’이도 되지만 다른 말로는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했습니다. 선물은 내가 돈주고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수를 먹을 수 있는 다른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본문에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듣는 자입니다.
듣는 “ajkouvwn:아쿠온”입니다. 같은 단어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6)에 사용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귀로는 아마 많은 사람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습니다. 즉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고 외치라는 겁니다. 요나는 가기 싫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하시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신다고 하시고 그들이 회개하면 내리지 아니 하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의 생각에는 원수의 나라가 망하기를 바랄 뿐 회개하고 구원 얻는 것을 원치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이쯤 되면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 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는 기도할 필요도 없이 다시스로 도망을 치고 있었습니다. 지중해에서 풍랑을 만난 그는 형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잘 될 것은 없습니다. 결국 그는 남에게 큰 손해를 입히고 자신은 바다에 던짐을 받는가 하면 큰 물고기에 삼킨바가 되었습니다. 그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고 끝장을 맞게 됩니다. 자기의 힘으로 살길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제 살길은 하나님의 도우심뿐임을 깨닫고 회개하며 기도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문제가 풀리기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요나는 죽을 고생만 하고 원점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을 때는 예수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예루살렘에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나중에 로마로 가고 싶어하던 바울에게 죄인의 몸으로 갈 기회가 왔습니다. 죄수의 몸으로 배에 탔습니다. 바울이 탔던 배는 요나가 만난 풍랑보다 더 심한 유라굴라 광풍을 만납니다. 바울이 그 배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276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멜리데 섬의 사람들은 이 일로 주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도망가지 마세요. 요나처럼 돌아올 뿐입니다. 제자리예요. 만일 영영 하나님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은 더 불행한 것이지요. 예수께 오지 않으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둘째,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목마른 자입니다.
목마른 어근 “딥사(diyavw)”는 “목마르다, 갈망하다, 갈급해 하다”는 뜻입니다. 제일 맛있는 것은 비싼 음식이 아닙니다. 갈급 할 때 먹는 물 한 컵입니다.
2002년 월드컵의 영웅이었던 히딩크 감독은 16강, 8강에 올라가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라고 했습니다.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 5:6)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고 하셨습니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눅 8:44, 마 9:20)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마 9:21)
마가는 이 여인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라고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해 볼 만큼 해 보았습니다. 예수가 그 여인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옷을 스쳤겠지만 그것은 다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예수의 옷을 만진 이 여인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셋째, “원하는 자”입니다.
원하는 “델론(qevlwn)”은 “선택하다, 기울어지다, 사랑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예수께 기울어져 예수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하이레오마이(aiJrevomai)” 자력으로 취하다, 택하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자기 자신이 간절히 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다윗이 아리우나 타작 마당에 딱 서 보니까 자기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 한 감동으로 충만하고, 그리고 주님을 예배하고 싶고, 찬양하고 싶고, 그런 감동으로 꽉 찼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제물을 드리고 싶다. 그런데 제물이 없었어요. 그걸 알아차린 아리우나가 왕이시여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제물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소와 양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제물로 제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양하면서 그러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유명한 대답을 합니다. 삼하 24:24절에 보면. 따라서 하세요.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값 없이는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 하리라 이런 응답을 했어요. 다시 말하면 나는 공짜로 주는 그것으로 바치지 않겠다. 제물에는 내 정성이 있어야 되고, 내 땀흘림이 있어야 되고, 내 희생이 있어야 한다. 내가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겠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신앙입니다. 다윗의 희생 정신입니다. 여러분! 원하세요.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세요. 전도하시기를 원하세요.

기도에 대한 응답은 우리가 생각할 때 느린 것인지 하나님은 모든 기도에 적절하게 주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에스더의 기도는 3일 만에 응답되었지만, 벧엘에서의 야곱의 기도는 20년 만에 응답되었습니다. 19세기의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는 친구 5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1년 반만에 응답을 받았고 2번째 친구는 6년 반만에 세 번째 친구는 19년 만에, 그리고 네 번째 친구는 24년 만에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한 친구는 결실하지 못하고 죠지 뮬러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친구는 죠지 뮬러가 죽은 장례식장에 들어와 조지 뮬러의 마지막 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해서 40년 동안 끝임 없이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자는 하게 되어 있습니다. 먹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 드리는 보화(크리스마스)

본문 : 마 2:10-11

동방박사(마기) 메데파사의 제사장, 지도자들. 여러 분야를 연구하여 오직 로마를 무너트릴 방법을 찾고 있었음. 그러나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은 연구해서 찾은 별이 아님.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난 별이 그들을 인도하셨음.
로마와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음.

성경에는 세 명의 동방박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동방박사가 한 명 더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만 늦게 도착하여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런 이야기 성경에 없잖아요? 네 성경 밖에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전해드리는 이야기입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도 아주 귀한 세 가지 보석을 준비하고 낙타를 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낙타가 발목에 부상을 입고 얼마가지 못해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갈까 끝까지 가볼까? 생각하다 하나님이 아들이 오시는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데 끝까지 가봐야지 하고 마음먹고 길을 떠났습니다. 악착같이 가야지 하고 걸어서 광야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쯤 같을까요. 동네 어귀를 만났는데 한 불쌍한 아주머니가 울면서 나오는 거예요. 왜 그러세요. 사정을 물어 보았더니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탄생한 다음 헤롯왕이 남자 어린아이들은 다 죽이라 해서 대 학살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 때 그 아주머니 아들이 죽은 거예요. 이 아주머니를 보고 네 번째 동방박사의 마음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측은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자기가 어린 새싹처럼 소중히 여기는 보석을 하나 주고 길을 떠났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예수님이 이집트로 피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 만나러 이집트로 가자 죽을 고생을 하고 이집트에 도착을 했는데 들리는 소식은 또 실망이었어요. 예수님이 잠깐 그곳에 계시다가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지금 이집트 카이로에 가면 예수님이 머물다 가신 기념교회가 있답니다. 여기서 3년 지내셨답니다. 네 번째 동방박사에게 낙심이었어요. 그런데 동네를 다니다 어디에서 잠을 잘까 하고 왔다 갔다 하던 중에 한 사람을 만났는데 문둥병자 한 사람이 너무 불쌍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는 거예요. 아무도 도울 사람이 없어요. 그대로 살다가 그대로 죽을 사람이예요. 그래서 두 번째 자기에는 너무너무 소중한 보석을 그 문둥병자에게 주고 말았어요. 이제 하나 남았어요. 소문을 따라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다닌 시간이 어언 30년이 지났고 이제는 이 네 번째 동방박사도 늙고 초라해져서 어느 식당에서 식사하고 나오는데 어린 그지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서 두 손을 들고 돈을 달라고 하는데 표정이 너무너무 불쌍하고 해서 나도 고향 땅에 자식이 있는데 생각하면서 마지막 남은 것 하나, 예수님께 바쳐야할 딱 하나 남은 보석을 그 어린 거지에게 주었어요. 그런데 조금 있다가 대낮인데 온 천지가 캄캄해지는 거예요. 그러더니 심한 지진이 일어났어요. 몸을 가눌 수 없어요. 뒷둥 뒷둥 대다가 언덕을 바라보았는데 거기에 십자가 세 개가 있었고 그 가운데 30여 년을 찾았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거예요.
그 때 예수님이 이 네 번째 동방박사를 바라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자식을 잃어 너무 너무 슬퍼할 때 나를 위로해 주었고, 내 몹쓸 병에 걸려서 아무도 나에게 오지도 않는데 너는 나에게 보석을 주었고, 내가 목마르고 몸을 둘 곳이 없을 때 그대는 나에게 먹을 것과 거처할 곳을 주었으니 나는 당신의 사랑을 잊지 않을 거야.
네 번째 동방박사 예수님께 말했대요. 저는 지금 예수님을 뵙는 것이 처음이고 저는 예수님께 그렇게 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까지 네가 나에게 주려고 했던 그 보석을 네가 불쌍히 여겨 다른 사람들에게 준 것은 곳 나에게 준 것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확실한 것은 영, 육간에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잘못하는 것은 비 기독교인을 멸시하는 것 같은 태도입니다. 자꾸만 그분들을 멸시하는 듯한 태도입니다. 거룩한 것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우리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따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주식 투자하듯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헨델의 ‘메시아’가 신앙의 생활화의 표준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더욱 자주 듣게 되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메시아’도 헨델(George Fredrich Handel)이 이사야서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입니다. 진실한 기독교 신앙인 이었던 헨델은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하셨던 까닭이 바로 그로 하여금 ‘메시아’를 작곡하도록 하시기 위한 연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메시아’를 작곡하면서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그 긴 대곡을 불과 2주만에 작곡을 다 끝내고 난 후 방에서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았던 하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눈망울에서는 눈물이 가득했고 양 볼에는 눈물 자국으로 범벅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는 그를 시중들던 하인에게 “나는 메시아를 작곡하는 동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보았네”라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음악적으로만 이해하여서는 그 진수를 맛볼 수 없고 음악 속에 살아 있는 헨델의 신앙과 함께 들어야만 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헨델의 음악세계가 그렇게 뜨거운 신앙을 바탕으로 하였기에 훗날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로부터도 “나는 헨델에게는 무릎을 꿇어 경의를 표한다. 그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작곡가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찬사를 듣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전에 교회는 종이 있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 종을 쳐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 종에 줄이 없어 종을 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그 종은 남에게 아주 많은 봉사를 한 사람이 있으면 저절로 울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자기 딴에는 봉사한다고 여기저기 금은 보석도 바치는데 종은 울리지 않는 거예요. 그 소문이 왕궁까지 들어갔어요. 그래서 왕도 왔어요. 그래서 왕으로서 많은 헌금을 드렸는데 그래도 종소리가 울리지 않자 자기 왕관을 벗어서 바쳤는데요 종소리는 울리지 않는 거예요. 응답이 없는 거예요. 왕까지 다녀간 후에 좋지 않은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전설이지 실제로 일어날 일이 아니라는 거야! 왕까지 오셨었는데 안되었는데 말야.
그러던 어느 해 성도들이 크리스마스 찬송을 다 부르고 있었는데 그 때 갑자기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땡그랑, 땡그랑 은은하면서도 장엄한 종소리가 들렸어요. 성도님들은 찬양하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누가 어떤 헌금을 했는데 저 종소리가 울리나 관심이 다 그 종소리에 가 있었습니다. 얼마 안 돼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 다니는 청년이었습니다. 성탄절 예배를 드리려고 오는데 교회근처까지 왔는데 한 사람이 눈 속에서 죽어가는 거예요. 저 사람을 지금 데리고 가서 먹을 것을 주고 살리는 것이 우선인가 지금 성탄절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이 우선인가? 잠시 망설였지만 그 사람을 집에 데리고 가서 살려내려고 애쓰는데 성탄절 예배시간이 다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동생에게 빨리 교회에 가서 예배가 끝나기 전에 내가 준비한 성탄헌금을 드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동생이 뛰어와서 예배당 뒤에 있는 헌금함에 은전을 넣는 순간에 울렸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들 때문에 하늘 문을 여시고 감동 하실까? 하나님이 교회의 종소리를 누구에게 울려 주실까? 어떤 교회, 어떤 사람, 이야기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우리 교회가 과연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성도가 있는가? 말구유에 오신 예수를 진정 환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어려운 설교를 하는 저는 하나님의 종으로 제일 상급이 많을 수도 있지만 제일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교회는 나름대로 애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야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 마 챙겨놓고 선교할 수 없습니다. 구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1년 동안 열심히 돈벌어서 헌금한 것 귀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매일 매일 그만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당장 나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디면서 그렇게 번 돈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예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이 목자와 동방의 박사들에게 먼저 전해졌던 것은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 당시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동방박사들을 통해 부자와 지식인, 권력자들에게도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헤롯왕을 비롯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그 소식을 들었지만 소동만 벌였을 뿐 직접 찾아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마2:3-4). 그들은 오늘날 우리들과도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식인, 부자, 권력자들의 성향은 비슷합니다. 그들은 사물을 순수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론을 전개하고 입으로만 말할 줄 알았지 행동은 할 줄 모릅니다. 성탄의 소식이 오직 그런 사람들에게만 전해졌다면 그 당시 직접 아기 예수께 나아가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목자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 ‘빨리 가서’(눅 2:16)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멀고 먼 예루살렘까지 몇 달 동안이나 걸리는 길을 진지하고 끈기 있게 찾아가 기어코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나는 일은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할 수 없습니다. 별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헨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별이 나타난 것입니다. 별은 우리에게 길을 안내합니다. 예수를 만나게 합니다. 예수께 드릴 보화를 드리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예수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당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슥 2:10-11)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커다란 도화지를 한 장 씩 주고 가족의 얼굴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모두 열심히 식구들의 얼굴을 그리는데, 한 어린이가 그 큰 도화지 한 가운데 엄마의 얼굴을 크게 그려놓고 그 밑에는 언니, 오빠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아빠의 얼굴이 없어서 선생님이
“얘 아름아, 너는 아빠가 안 계시는구나?”라고 하자 아름이는
“아빠가 왜 안 계세요? 계세요.”
“그러면 왜 아빠의 얼굴은 안 그렸어?” 라고 하자 아름이는 도화지 뒷면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뒷면을 보니 큼직한 얼굴이 도화지 뒷면에 그려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름아, 도화지가 너무 작아서 아빠의 얼굴은 뒤에 드렸니?” 그랬습니다.
“아뇨, 우리 아빠는 볼 수 없는 분 이예요. 아침 새벽에 나가시죠. 밤에는 우리가 잠든 후에 오시거든요. 우리가 못 보는 아빠니깐 안 보이게 뒤에다 그린 거예요.”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당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름이처럼 도화지 뒤에다 그려야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앞면에 그릴 수 있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구름 속에서 모세에게 음성으로만 말씀하셨던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시기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도 부족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가 제일 받아들이기 쉬운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은 얼마 안되고 대부분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런데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함입니다.

저는 오늘 크리스마스 설교를 위해 먼저 구약성경의 마지막 성경책, 스가랴서, 말라기서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설교의 제목도 주제도 먼저 정해 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본문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에만 집중하려고 했습니다. 설교의 본문과 제목을 정하는 것은 내가 미리 이것을 전해야지 하는 것이지만 오늘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그렇다고 직통계시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는 B.C. 516년경 성전재건 이후로 봅니다. 그런데 스가랴서 1-8장까지는 B.C. 520-518년 사이로 봅니다. 그러나 스가랴 9-14장까지는 몇 십 년 이후인 B.C. 480-470년 사이로 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마지막 성경은 스가랴 9-14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스가랴를 통해서 이 마지막 부분을 기록하게 하신 후 하나님은 세례요한 때까지 아무 말씀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스가랴서의 핵심어는 ‘순종’과 ‘메시야’ 입니다. 메시야를 보내시기 전에 이 땅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순종’입니다. 딸 가진 부모님이 딸을 시집보내면서 신랑에게 딸을 당부합니다. 그 때 대부분의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은 “우리 딸 눈에서 눈물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남편들은 잘 기억해야 합니다. 가진 것 없어서 고생은 시키지만 마음고생은 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면서 이 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고요. 하나님의 이 당부의 말을 들어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슥 1:3-4 “3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불란서의 사상가 파스칼은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만드실 때에 그 마음속에 하나의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 놓으셨다 그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공간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채워지지 않는 공간을 물질을 쌓고, 향락을 누리고, 명예와 권세를 얻음으로, 채워 보려고 하지만 채워지지 않고 쌓고, 누리고, 얻으면 얻을수록 인생의 갈증은 더 증폭되어 갑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먼저 어느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 잃은 것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낸 것입니다. 두 번째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입니다. 죄인을 회개케 하는 성령의 빛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셋째 돌아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종일 그 팔을 벌리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냥 집으로 달아나지 마십시다. 벌리고 계신 주님 팔에 다 안기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는데 세 번째 취임사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자원과 능력에 합당할 만큼 모든 국민의 안전과 기회와 지식을 보다 크게 세워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런 목적들만 달성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육체를 먹이고 입히는 것으로는, 이 나라의 정신을 교육하고 지도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셋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아무리 건강하고 자원이 많으며, 정신적으로 아무리 미국이 좋은 정신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영적인 축복이 가장 귀합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영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취임식에 한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리 미국이 잘 살고, 대단하다 할지라도 미국의 영적인 삶이 죽으면 미국은 끝납니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겸손한 왕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예수님 이전의 어떤 왕도 ‘겸손’이라는 말을 경의어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신 독생자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서 우리는 ‘겸손한 하나님’이라는 모순 어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알아 볼 수 있도록, 또한 겁에 질려 따를 수밖에 없는 형태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불 말과 회오리바람을 대동하신 채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힘들만큼 작아지시고 작아지셔서 우리들이 태어나는 방법과 다르지 않게 난세포가 되셔서 믿기 어려운 방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시인 존 돈(John Donne)이라는 사람은 “그대의 존귀한 태중에 광대한 존재가 은둔해 있나니”라고 탄복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고 산문투의 어법으로 말했습니다.

세계 최대 항공기 A380이 지난 화요일(2009.12.15) 동북아 최초 인천~두바이 노선 투입되었습니다(에미레이트항공). 이 비행기는 ‘하늘을 나는 특급 호텔’로 부르는 2층 구조의 초대형 여객기입니다. 프랑스 에어버스가 제작한 것으로 전체길이 73m로 축구경기장 너비를 능가하고, 높이는 10층 짜리 아파트와 비슷하답니다. 이 비행기는 세계 4개 항공사에서 20대를 운항하고 있습니다. 한번 타는데 값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퍼스트 클래스의 항공운임은 약 25,000달러랍니다. 우리 돈 약 3천만원정도 됩니다. 제가 이거 타고 중동한번 갔다오면 우리교회 1년 헌금이 다 들어갑니다.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영국의 성공회와 러시아 정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대단한 위엄과 찬란한 영화의 발자취였습니다. 러시아 크렘린 왕궁에 가면 공주들이 입던 드레스가 있습니다. 금실로 짠 금 드레스가 있습니다. 왕국에서 사용하던 금 그릇들과 마차들도 모두 금으로 되어있습니다. 나중에는 성경책도 겉 표지를 각종 보석으로 장식했습니다. 얼마나 보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지요. 대단한 나라입니다.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영국 시장이 타던 마차도 금 마차였습니다. 열왕기서를 보던 유대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솔로몬의 저 영화로운 시대,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왕상 10:27)라고 말하던 그 시대의 강렬한 향수를 생각한 것은 오히려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입니다.
“신은 너무나 위대하여 미천한 인간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 이슬람이 가르치는 진리입니다. 영국여왕의 행차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경호원들과 호화스런 치장과 웅장한 팡파르에 맞추어 ‘의전품’들을 일일이 챙겨가면서 나타납니다. 영국 왕가 일행이 해외를 한번 방문하는데 들어가는 돈이 26억이랍니다. 이 정도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의 이 지상의 방문은 어떻습니까?
마땅히 누우실 곳이 없어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잠시 천사들의 방문이 있었고 빛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것을 누가 보았습니까? 추운 겨울에 양을 치던 목자였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의 목자들은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던 비천한 부류입니다. 그들만이 이 광경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네 가운데 거할 것
슥 2:10-11 “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수 방법은 희생제물과 몸을 최대한 낮추어 이슬람교도들처럼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몸을 최대한 낮추어 기도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부처에게 하는 절을 오체투지(五體投地)라고 합니다. 오체투지는 몸의 다섯 부분을 땅에 닿도록 납작하게 엎드려 절하는 방법입니다. 두 팔꿈치와 두 무릎과 이마가 땅에 닿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몸의 동작으로서 가장 경건한 예법이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대다수의 종교적 전통들 가운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이 신에게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사실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거나 만지는 사람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지성소에만 잘못 들어가도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러한 관계를 끊고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어린 아기 예수를 보고 두려워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말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두려워 할 자는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아기가 자라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소개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두렵기 이전에 친근하신 분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부자지간에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어떤 때는 친구같이 지냅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토론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어린이들하고 잘 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린아이들과 같아 져야 합니다.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5) 예수님이 어린아이가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군자표변(君子豹變)이라는 말이 주역의 혁(革)괘에 보면 나옵니다. ‘군자는 표범의 털가죽이 선명하고 아름답게 변해 가는 것처럼 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소인혁면(小人革面)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군자는 변해야 할 때 표범의 무늬처럼 확실하게 변하지만 소인은 겨우 얼굴빛이 변할 정도로 자기변혁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과감한 변혁이 필요할 때 확실한 자기변혁을 해야 합니다. 군자표변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어거스틴(354-430)이 9년 동안이나 마니교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19세 때 부모님의 동의 없이 여자와 동거하여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방탕한 생활 때문에 눈물로 기도하며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의 이웃집에서 ‘집어 들고 읽어라’(tolle lege) 어린 아이의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그 즉시 성경을 폈습니다. 로마서 13:13-14절이었습니다.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밝은 빛이 물밀 듯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받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뜨거워집니다. 밤새도록 회개했습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주님 자신만을 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우리의 주홍 같은 죄가 사라졌습니다.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천국을 보장받았습니다. 이에서 더 무엇이 필요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세요.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셔서 마지막 날에 주님께 칭찬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이 계시니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1-14)

오늘은 2009년 성서 주일입니다. 대강절이 기독교의 절기가 시작되는 절기입니다. 미국의 성서 공회에서는 1943년부터 성서 주간을 매년 추수 감사절로부터 크리스마스까지로 확장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54년 이후 매년 12월 둘째 주일만 성서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비록 오늘 하루만을 성서주일로 지키지만 우리는 1년의 모든 날을 성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난해에 수능 끝나고 137명이나 되는 학생이 자살했습니다. 이 엄청난 학생들이 수능시험에서 인생을 걸고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수능이 전부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인생의 극히 한 부분입니다. 살다보면 다른 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하나님은 잘 되는 사람일수록 늦게 됩니다. 대기만성입니다. 먼저 쭉쭉 올라간다고 앞서가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늦추어서 나가면 길이 다 있습니다. 조급하게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등산을 하다 길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은 영영 길을 못 찾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서 보면 어디서 길을 잃어버렸는지, 멀리 보면 보입니다. 교회는 올라가서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올라가게 만듭니다. 이 세상의 모든 학문은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위엣 것을 사모하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성서 주일은 대강절 기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그 가운데 성서주일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메시야를 기다리되 말씀대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합니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대로 갈 수 없습니다. 바다에서 항해하는 배에 나침반이 고장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을 가지고 있다해도 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또한 그 말씀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면, 행함이 없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에스라 10:3 “곧 내 주(에스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에스라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떨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떨었습니다. 그래서 범죄 한 후에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교만해 졌습니다. 인간 최고의 교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스라 10:11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따르는 자는 소망이 보이게 됩니다. 소생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버리면 다 소용이 없습니다. 유명한 대학을 나와도, 사업에 성공을 해도, 세상의 영화와 부귀를 누려도 다 부질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말씀을 무시하는 자들의 결과는
마음이 부패됩니다(딤전 6:3,5), 저주를 받습니다(신 27:26), 주께 버림을 받습니다(호 4:6), 역경으로 넘어집니다(마 7:26,27),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눅 8:12).
그러나 말씀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합니다(요 20:31), 교훈을 줍니다(롬 15:4), 성도를 거룩케 하게 합니다(요 17:17), 성도를 자유하게 합니다(요 8:32),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딤후 3:15-17), 영생을 얻게 합니다(요일 5:13).

욕쟁이 집이라는 소문난 음식점을 하는 할머니가 보니, 점잖은 장로님 얼굴이 항상 굳어있는 겁니다. 집에서 권사님과 부부싸움을 했는지, 사업이 잘 안 되는지, 목사님과 의견충돌이 있었는지… 그래서 저 장로님 나한테 한번 걸리면 가만 안 둔다고 벼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장로님과 욕쟁이 할머니가 교회 현관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저 장로님… 잠깐 귀 좀…” 욕쟁이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 들으면 곤란한 일이 있어서 그러나? 장로님이 별 생각 없이 궁금해하며 귀를 대주었습니다.
그랬는데 욕쟁이 할머니가 장로님의 귀에 대고 다짜고짜 “야, 이 새끼야. 얼굴 좀 펴라” 장로님이 당황하여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칠면조 얼굴이 되어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까지 웃음을 몰랐던 장로님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얼마나 웃고 살았던지 장로님의 간수치가 위험수위에 있었는데 정상이 되었답니다. 복음을 듣고도 웃지 못하고 산다면 욕쟁이 할머니께 욕 좀 먹어야 합니다.

둘째는 메시야가 말씀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즉 성육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주일을 대강절 중간에 넣어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4복음서를 읽다보면 그 시작이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족보로 시작하고, 마가복음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글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 출생 전에 있었던 세례요한의 탄생부터 예수님의 탄생 때의 천사들의 활동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시작은 매우 특이합니다. 영적 시작과 말씀으로 시작되는 세상의 빛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씀들을 읽어 가다보면 눈을 떼지 못합니다. 조금 읽어볼까요. 본문 요한복음 1장 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보이는 것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산과 바다 강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생명들과 자연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답니다. 그 말씀이 빛이랍니다. 그 말씀이 생명이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잘 몰랐습니다. 그 빛이, 그 말씀이 천지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이 놀랍습니다.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난 것은 육신의 사람의 방법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성서주일과 관련하여 한가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소녀 메리 존스(Mary Jones, 1784.12.16-1866.12.28)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웨일즈는 영국의 남, 서쪽 지방으로 지형이 험난하고 기후 조건이 좋지 않아 대부분의 서민들은 궁핍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지도를 보면 우리나라의 호남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영국의 웨일즈 지방은 믿음의 본고장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성경을 가지고 들어온 토마스 선교사도 이 지방출신입니다. 영국의 마지막 청교도 후예라고 말하는 로이드 존스 목사도 이곳 출신입니다.
메리 존스는 매주 저녁 교회에 나가 성경을 배우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메리는 10살이 되던 해. 찰스 목사가 세운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집에서 학교가 3km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도 보통 이 정도의 길은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먼 길을 오가며, 언젠가 글을 배워서 스스로 성경을 읽겠다는 소망을 키워갔습니다.
이 학교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주일학교가 시작되었는데, 메리는 첫날 마태복음을 공부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마태복음의 첫 장이라고 알고 있던 말씀이 첫째 장이 아니고 둘째 장인 것을 알고 나서 ‘성경의 필요성’을 더욱 깨닫게 되었습니다.
2년 전 자신의 집에 와서 성경을 읽어도 좋다고 한 이반스 부인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메리는 매주 토요일마다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성경을 홀로 접하게 된 메리는 감격에 겨웠으나 시간적 제약으로 성경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아쉬워한 메리는 “몇 십 년이 걸려도 꼭 성경 한 권을 사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메리는 성경을 사야겠다는 일념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으나 시작 첫 해에는 모은 돈이 너무 적어 실망하였고, 아버지 병세의 악화와 집안 일로 돈을 모으지 못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실망하지 않고 6년 간 각종 허드렛일을 마다 않고 돈을 모은 끝에 결국 겨우 한 권의 성경책 값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책 사려고 돈 모으는데 6개월 걸렸습니다. 10살 때 돈 모으기 시작해서 6년이 걸렸으니까 16살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메리는 성경을 구하기 위해 30km나 되는 거리를 쉬지 않고 뛰다시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웨일즈 성경이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메리는 엄청난 절망감에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감동한 찰스 목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경을 메리에게 주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성경을 갖게 된 메리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피곤함과 배고픔도 다 잊은 채 30km를 단숨에 걸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반갑게 맞이하는 부모님과 함께 메리는 성경을 상위에 놓고 성경을 들여다보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웨일즈 성경이 더 이상 인쇄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절망적인 눈물을 흘린 메리의 이야기를 찰스 목사는 1802년 12월 런던에서 열린 기독교서회 회의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이 회의를 계기로 드디어 1804년 3월 7일 영국성서공회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지난번 미얀마에 갔을 때도 호텔 객실에서 책상의 서랍을 열어보니까 기드온에서 배포한 성경이 들어있었습니다. 공산국가에서도 불교국가에도 성경을 준비하여 고객에게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전 세계 2,479개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2008.12). 그러나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6,500여 개의 언어인 것을 감안하면 아직도 해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발행한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읽힐 수 있는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전해야 합니다.

웨일즈에서 메리 존스(Mary Jones)의 성경에 관한 일화가 생길 때 즈음에 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토마스 목사를 파송한 영국 웨일즈 라드노 주 하노버(Hanover United Reformed Church)교회입니다.
제가 2003년도에 이 교회를 방문했었습니다. 교회의 크기가 딱 우리교회만 합니다. 토마스 목사의 아버지가 시무 했던 교회입니다. 토마스는 이곳에서 1840년 9월 7일에 태어납니다. 메리 존스의 이야기가 있은 지 약 40년이 지나서입니다. 그러니까 메레 존스는 이 지역(웨일즈)에서 토마스 목사가 태어날 즈음에 1802년 16살 정도였으니까 56-7세 정도 되니까 아마 권사님이 되어 계셨을 것입니다. 바로 이분들의 세대가 영국에서 선교사를 제일 많이 보내던 시대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경을 전달해 주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 상해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내 캐롤라인이 오는 중에 병을 얻어 죽습니다. 그 때 그는 선교사역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인도로 세관에서 통역 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습니다. 아직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조선 땅을 향해 다시 복음 전달의 열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1865년 9월 13일 백령도에 도착해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 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중, 그의 앞에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통역관으로 그 배에 동승했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 주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1866년 9월 2일경)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시기적으로 너무 좋지 않은 때였습니다.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은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난 때입니다. 조선의 쇄국정책이 극으로 치닫고 있을 때입니다. 이 때 나타난 셔먼호는 조선 입장에서는 조선을 쳐들어온 미국 침략선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결국 조선의 공격에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됩니다.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 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 권이라도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되었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박춘권 입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면서 그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기도하고 쑥섬에서 박춘권의 칼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박춘권은 그 일 이후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자기를 향해 웃던 토마스 목사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전도사가 되었고 나중에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박춘권과 함께 있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성경을 자기 집에 가지고가서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발랐습니다. 결국 그의 집은 널다리골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널다리골교회가 장제대교회가 되었고 장대제교회는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의 시작이 된 장대현교회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비록 정식으로 조선 땅을 밟아 보지도 못한 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했지만 그가 건네 준 한문으로 된 성경책은 이 땅에 복음의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1931년 대영성서공회가 발행한 성경책이 정..선교사 할아버님이 성결교 목사님이셨는데 가지고 계셨던 성경책입니다. 한문과 한글이 섞인 성경입니다.
국내 번역위원회가 구성되어 1900년 신약전서를, 1911년에 구약전서를 완역하였다. 이를 다시 1936년에 구약을, 1938년에 신약을 개정하였는데, 1938년에 개정한 성경은 1956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에 의거하여 개역성경을 발간하였다.

성경은 예수님의 보혈의 자국이 남아있는 책입니다. 우리를 사랑한단 말씀이 있는 책입니다. 세상의 어떤 책이 나를 위해 준비된 책이겠습니까? 오직 성경입니다. 이 성경을 받으시기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의 좋은 병사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3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4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1-4)
 

제가 지난 목요일에 안국동 근처 교회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강의하고 오는 길에 인사동에서 사진 몇 장 찍으려고 들렸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걸었는지 종로로 나왔습니다. 다시 나온 김에 광화문 들려서 세종대왕상도 찍고 변화된 광화문 거리를 보려고 갔습니다. 거기서 갑자기 청와대 쪽을 바라보고 경복궁을 가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처는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늘 그 안에는 들어가 본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면 들리는 곳 중의 하나가 왕궁인데 제나라 왕궁도 보지 않은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3,000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갔습니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년)에 창건하였습니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광화문은 공사 중이기 때문에 옆으로 돌아 들어갔습니다. 광화문 다음에 나오는 곳이 흥례문입니다. 흥례문 앞까지는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그냥 구경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바로 나오는 곳이 국보 223호로 지정되어있는 근정전입니다. 그 뒤에 왕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던 사정전이 있고 그 뒤에 침전이 있습니다. 근정전 왼쪽으로는 경희루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동궁이 있습니다.
동궁쪽으로 나가면 국립민속박물관이 있습니다. 1993년 국립중앙박물관 청사로 사용하던 건물인데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이곳에 민속박물관을 만든 것입니다.
경복궁에서도 제일 많이 눈에 띄는 관광객은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을 안내하는 안내인은 열심히 설명하고 일본 사람들은 잘 듣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부끄럽지만 근정전을 가까이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근정전이 눈앞에 들어오는 순간 조선의 위엄이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나치게 불필요하게 외모 중심으로 치장하지 않은 실제적이면서도 규모 있는 건축물이 꼭 조선에 맡는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 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왕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국립민속박물관에 들려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이 오늘날 이렇게 발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역사가 있습니다. 저는 영국 대영 박물관도 들러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것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로마에서 가져다 놓은 것이 거의 다였습니다.

우리민족을 어디에다 내 놓아도 자랑스러울 만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광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옥의 티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민속박물관을 거의 관람을 마칠 때 즈음에 너무 많이 걸어서 지쳐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광화문 옆으로 들어와서 처음 대한 흥례문 앞에 근위병들이 생각났습니다. 관광객을 위하여 조선시대 복장을 하고 교대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적지 않이 실망했습니다. 그들은 관광객들하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사진 찍어주는 것이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 만큼이나 지쳐 있었습니다. 힘이 하나도 없이 마치 조선시대 복장이 그래서 그런지 신발을 질질 끌며 힘없이 걷는 모습에서 조선의 위엄과 대한민국의 위엄이 다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영국에 갔을 때, 영국 왕궁 앞에서 본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눈빛이 빛나고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부동 자세는 위엄이 있었습니다. 그저 사진 찍으려면 옆에 살짝 가서 찍는 정도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아르바이트 학생을 쓴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해병대로 바꿔야 합니다. 해병대가 안되면 최소한 헌병으로 모두 교체해야 합니다. 어설픈 서비스는 오히려 국가에 대한 이미지만 실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 자신이 어설픈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바울은 본문 3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빌레몬서 1:1-2절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2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좋은 병사는 누구입니까? 어떻게 해야 예수의 좋은 병사가 됩니까?
첫째, 병사는 단순합니다. 복잡한 사람은 좋은 병사가 되기 어렵습니다. 지혜롭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맡겨야합니다. 군대에 들어왔으면 뭐만 잘하면 좋은 군인이 됩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군대 생활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은 모두 단순한 사람입니다.
명품을 만드는 곳은 여러 가지 취급 안 합니다. 한가지만 합니다. 음식점도 잘하는 곳은 여러 가지 하지 않습니다. 한 두 가지만 합니다. 신앙생활도 제대로 하는 사람은 단순합니다. 자기가 다 성경보고 연구한 것 아니잖아요. 그럼 누구 말 들으면 됩니까? 오래 동안 연구하고 성경보고 신앙 생활한 목사의 말을 들으면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 다니는 성도님들을 보면 저는 복잡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 신앙 참 단순합니다. ‘오직 예수’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루터 때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도 단순함에 있습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단순한 핵심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본문 1절에 바울은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라고 말합니다.
찰스 스탠리의 아들로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앤디 스탠리가 있습니다. 그가 사역 중에 큰 어려움을 격게 되어 낙심과 좌절 속에 헤맬 때였습니다. 그 때 나이드신 성도님이 심방을 요청하여 그 집에 갔습니다. 그 자리는 앤디 스탠리를 위로하기 위한 심방요청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화가 루벤스가 그린 “사자 굴의 다니엘”이라는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그림에 무엇이 보이십니까?” “사자 몇 마리와 굴 안으로 들어오는 빛줄기, 그리고 다니엘이 보입니다.” 그랬습니다. “더 자세히 보십시오.” 나이든 성도가 말했지만 앤디는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나이든 성도가 말하기를 “다니엘의 눈빛을 보십시오. 그의 눈은 사자가 아닌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앤디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무서운 사자를 바라봅니다. 풀리지 않는 세상일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만, 예수 그리스만 바라봅니다.

셋째,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2절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고 합니다. “명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선생이 되면 좋은 제자가 생깁니다. 내가 먼저 충성스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성이라는 말 가운데서 자꾸만 어떤 일을 생각합니다. 마치 큰 일을 꾸며야 충성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우주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 6:29)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 짓지 않고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죄에 대해서 무뎌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생활하면서도 죄에 대해서 민감했습니다. 그가 어려서 수도원에 있을 때 너무 자주 죄에 대해서 가져 오니까 교부가 말하기를 “루터야 죄를 한꺼번에 모아 가지고 오너라”고 했다지 않습니까. 수도원에서 뭐 죄 질 일이 있겠습니까? 다 마음으로 지는 것이지요.

구약성경에 보면 바벨론 70년 포로 생활을 하고 70년 만에 돌아온 이야기가 에스라서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80년이 더 지나서 2차 귀환이 에스라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성전에 드릴 금, 은 각종 예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와서 바칩니다. 여기까지는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동안의 잘못을 회개하기 위한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에스라서 9장에 보면 에스라가 당시에 이스라엘 땅에 살고있던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혼인하여 섞이게 되자 하나님 앞에 대성통곡을 하며 옷을 두 번씩이나 찢고 회개 기도를 합니다. 자기 민족을 위하여 모세도 하나님께 회개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저는 에스라 만큼 통회하며 회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말을 못합니다. 말하기조차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포도(捕盜) 군사의 은동곳 물어 뽑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둑으로 잡히고 나서 옥으로 끌려가면서도 포도 군사의 상투에 꼿힌 은동곳을 뽑는다는 것입니다. 도둑의 버릇은 좀처럼 고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말로만 회개했다고 하면 그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래가 죄인입니다. 그만큼 죄 짓는데 익숙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죄 짓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 쳐야 합니다. 죄를 그저 날름 날름 고기 잡아먹듯이 하면 언젠가는 농약 먹은 새나 물고기 먹다가 죽습니다. 반드시 죽게되어 있습니다. 죄는 처음에는 작은 것이지만 나중에 점점 커집니다. 이 죄 때문에 사람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충성되지 못하는 것도 이 죄로 인함입니다. 죄를 밤 먹듯 짓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부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명장이란 좋은 선생이란 철저하게 회개하고 다시는 죄 짓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병사들하고 참 오랫동안 지냈습니다. 자신을 포로로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압송할 때 로마 병사가 맡았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귀환 했을 때 유대인들에게 잡혀서 몰매를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이 소문이 로마 군인 천부장에게 들리고 그가 와서 이 사태를 진정시켰습니다(31-32).
사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 군사는 예수님을 처형시킨 장본인이며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자기 나라를 쳐들어와 지배하는 군인에 불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병 하나 하나를 볼 때 그 정신을 본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지키면서 집에도 가지 않고 사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마 이러한 로마 군병의 모습을 보면서 저와 같은 생각을 했니 봅니다.
훈련된 군사, 정신이 살아 있는 군사,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군사 바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이런 모습을 본 받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연안에 있던 고대 도시 폼페이(Pompeii)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상업도시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폼페이는 베수비우스(Vesuvious)산의 화산 활동으로 그 주변은 온천으로 인해 로마 귀족들의 요양과 휴식을 위한 별장과 신전과 극장들이 지어졌습니다. 환락의 도시였습니다. A.D. 79년에 로마 황제 티투스(Titus Vespasianus Augustus)가 등극했습니다. 그 해 베수비오산은 대 폭발하였습니다. 화산재가 온 도시를 덮어버렸습니다. 삽시간에 매몰되어 그 자취가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이후 1748년 나폴리의 국왕 샤를로(Charlot)에 의해 그 흔적이 드러났으며, 1755년 독일의 고고학자인 요한 빙켈만(Winckelmann)이 로마서를 뒤지던 중 그 곳이 로마의 도시 중 하나인 폼페이임을 확인했습니다. 폼페이의 발굴 중 벽화를 포함한 초기의 발굴 품은 현재 대부분 나폴리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거의 1700년이 지나 화석이 된 채 발견된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 처참했습니다. 화산이 폭발하는 엄청난 재앙의 절박한 순간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발굴되었습니다. 거대한 화산 폭발에 황급히 도망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하여 각양각색 사람들의 모습이 발굴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부둥켜안은 채 숨진 것도 있었고, 어떤 여자아이는 손에 황금노리개를 그대로 움켜 쥔 채 달리다가 넘어진 자세로 숨져있었습니다. 또한 뜨거움에 견디지 못하여 웅크린 채 입을 크게 벌리고 굳어버린 안타까운 모습도 있었고, 죽음이 언제 오고 있는지 전혀 상관없이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채 굳어진 모습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눈여겨볼 부분은 성곽을 지키는 로마병정의 모습입니다. 그는 자신의 초소에서 자리를 지키다 의연히 죽음을 맞이한 모습으로 발굴되었습니다. 그 로마병정은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가지 않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꼼짝 않고 창을 들고 서있는 참 군인의 모습으로 발굴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화산이 폭발한다 할지라도 이 로마병정처럼 도망가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거룩하게 하옵소서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4-17)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 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 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적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들을 놓아 헤엄치게 하였을 때 저 은빛 날개를 만들어 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 오르게 하였을 때 하나님도 손뼉을 치셨습니까?
아! 정말로 하나님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릅니다. 예수님 때의 사람들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말씀보다는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천지창조도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도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자기 하인을 고쳐주기 위해서 예수님께 “말씀으로만 하옵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4:1-11 보면 사탄이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라”(3절)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6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시험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내게 주리라”(9절)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시험 중에 마지막 시험은 이해가 됩니다. 자기에게 절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굴복을 의미합니다. 또 자신의 신분과 세상의 것과 바꾼다는 의미에서 확실히 시험이 맞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시험과 두 번째 시험이, 왜? 이것이 시험이 되는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냥 사탄이 말한 대로 다 보여주면 그것은 시험에 지는 것이고 안 하면 이기는 것인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세 번째 시험에서는 나오지 않는 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시험에서는 나옵니다. 바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3, 6절)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께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말을 듣는 그 자체가 시험이며 잘못입니다. 예수께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도 알고 사탄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은 사탄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을 살리는데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사탄을 물리치실 때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절)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는 영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육신을 위해서만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영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육신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한정된 것입니다. 반드시 죽음이 있습니다. 육신만을 위해서 산 사람은 영원한 것을 위해서 전혀 준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신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주라
14절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으며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다. 우리 또한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저는 가보지 않았지만 여러분들이 가보면 확인해 보세요. 중국에 공자의 묘에 가면 그 앞에 묘비가 하나 있답니다. 그런데 그 묘비에는 글자가 하나도 없답니다. “공자 앞에서 문자 쓰지 말라”고 그래서 그렇게 세웠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문자 쓰지 말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너희는 나라들 가운데에 전파하라 공포하라 깃발을 세우라 숨김이 없이 공포하여 이르라 바벨론이 함락되고 벨이 수치를 당하며 므로닥이 부스러지며 그 신상들은 수치를 당하며 우상들은 부스러진다 하라”(렘 50:2)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이 있습니다.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확실합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신실하신 분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한국사람이 얼마다 재능이 많고 부지런합니까?
“대한민국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다.”, “안되면 되게 하라” 그래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긍정적인 사고가 사회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미국 헐리우드에서 한국 사람이 어떻게 영화와 드라마를 만드는지 탐방을 왔답니다. 대본에는 날씨가 비가 안 오는데 촬영하는 날 비가 오는 거예요. 감독은 즉석에서 대본을 바꿨습니다. 비가 오는 장면으로요. 그리고 배우는 금방 비가 오는 장면에 맡게 연기를 합니다. 얼마나 변화에 잘 적용하는지 모릅니다. 헐리우드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혀를 내두르고 갔답니다. 이 재능 가지고, 순발력 가지고 복음 전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말라.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14절)
사탄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이루어졌습니다. 사탄의 전략은 세상 것을 가지고 유혹하는 일입니다. 사탄이 영원한 것을 가지고 유혹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사탄은 우리에게 영원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세상에 속하고 싶어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 같도다”고 하셨습니다. 이리 가운데서 살아남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지혜이고 하나는 순결입니다. 순결이 있어야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신학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입니다. 실천신학분야는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을 어떻게 현장에서 적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나중에 생긴 것입니다.
성경신학은 “무엇이 다른가?”에 관심이 있는 분야입니다. 주로 합동교단입니다.
조직신학은 “무엇이 같은가?”에 관심이 있는 분야입니다. 주로 통합교단입니다.
합동은 너무 나누어서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이 학문이 필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속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신학, 신학 하는지 아십니까? 신학의 배경이 없이 열심만 있으면 신비주의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세상과 합하게 됩니다. 세상이 우리는 싫어한다면 정상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좋아한다면 비정상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말고 예수께 속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우리를 싫어하면 할수록 예수님은 우리를 좋아하십니다.
34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9년 9월 27일 후르시초프를 초청해 놓고도 만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갔습니다. 우리나라에 미국 대통령이 여러 번 왔지만 예배 드렸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처음부터 큰 나라가 된 것은 아닙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시작된 것은, 더구나 대통령 선출이 시작된 것은 불과 200여 년 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짧은 역사 속에 200년 전 미국 인구는 700만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주일을 잘 지키는 민족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성도되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하라
15절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주님 가르쳐 주신 마 6:13에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처음에는 아이 낮고 하는 말이 “다만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해 놓고는 키우면서 욕심이 늘어납니다. 다시 마음을 비웁시다.
요즘 수능을 본 아이들 집집마다 난리입니다. 솔직히 서울에 있는 몇 개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저는 그 학교에 들어가는 학생이 이상한 학생 같습니다. 수능시험을 망치고 실실 웃고 다니는 딸을 보고 엄마가 한마디합니다.
“너는 시험 망쳐놓고 웃음이 나오냐?” 그랬더니 엄마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자기라고 웃어야 할 것 같아 웃었더니 엄마가 되어 가지고 딸의 기분도 모른다고 또 난리가 났습니다.
현,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님이 서초동에 살고 계시는데 딸을 유학시키겠다고 장로님들에게 말하니까 얼굴색이 달라지시더랍니다. 그래서 광주에 작은 학교가 있는데 그리로 보내겠다고 하니까 장로님들의 얼굴이 펴지시더랍니다. 서울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중간이 안되던 아이가 광주의 시골학교로 가서 공부를 하니까 반에서 1, 2등 한답니다. 서울 강남에서 유일하게 전학 온 학생이랍니다. 처음에는 무슨 사고 치고 온 아이가 아닌가 생각했답니다.
현재 미국 풀러선교대학원 한국학부 부원장으로 계신 이광길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대학에 왜 가야하는지를 몰라서 공부를 안 해서 재수를 5번했답니다. 그렇게 재수를 많이 하니까 공부 못하는 사람이 이해가 잘 된답니다. 어려워 보지 않은 사람은 어려움을 모릅니다.
우리 아이가 지금 건강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하셨지만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 없이, 감당할 능력 없이 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최종적인 기도는 악에서 구해 달라는 것입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17절)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 25:5) 다윗의 주의 진리로 지도 받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는 주님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인도하시기를 바라야 합니다. 주의 진리는 주의 말씀가운데서 나옵니다.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시 119:43)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말 2:6)라고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여러분은 ‘거룩’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으나 저는 이 거룩을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제일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하셨습니다.
미얀마에 가면 ‘쉐다곤 불탑(파고다)’이 있습니다. 미얀마를 세운 1453년 페구왕조 때에 세운 것인데 둘레가 426m, 높이가 98m입니다. 이 탑 꼭대기에는 73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박혀있고 총 5,448개의 다이아몬드 2,317개의 루비, 사파이어, 대형에메랄드가 박혀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미얀마 갔을 때 이곳에 갔는데 저는 안 들어갔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입장료가 50불입니다. 저는 돈 들어가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결국 절에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두 번 째는 그곳에 들어가려면 신발을 벗어야합니다. 신발을 벗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들은 그곳을 거룩한 성지로 여기는 것입니다. 저는 신발 벗고 그곳에 들어가기 싫었습니다. 예전에 인도에 갔을 때도 소 우상 있는 곳을 모르고 신발 벗고 들어갔는데 난리를 떨어 가지고 그냥 나왔습니다. 제가 약간 고 지식 한데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만이 거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분 앞에서만 신을 벗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말이 ‘거룩’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다니요. 예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룩한 지경까지 데리고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가 이루어 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고 베드로가 권면합니다.

마지막 날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부르면서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요 4:8)
 

전부를 넣었느니라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막 12:41-44)

오늘은 제가 돈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돈 이야기를 하니까요. 교회 가니까 돈 얘기만 하더라. 돈 소리만 나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지시는 분이 있는데 마음놓고 들으십시오. 오래 전에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는 돈에 대해서 너무 많은 얘기를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돈에 대하여 바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요한 웨슬리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구원을 체험했다고 하십시다. 그가 정말 새 사람이 되었다면 저는 먼저 현저한 변화를 가져와야 할 삶의 영역 중에 하나가 돈 씀씀이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헌금에 반영되지 못한다면 우리의 회심과 구원, 우리의 신앙, 우리의 변화를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헌금은 헌신의 상징이며 감사의 열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잘 아는 지극히 평범한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결코 평범하지 않은 헌신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42절에 보시면 본문에 나타난 주인공의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가난했습니다.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성경은 그녀가 과부였다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경제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외로운 여자였습니다. 정서적 고통을 안고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귀감이 되었던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서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성전에는 들어갈 수 있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아무나 다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제일 바깥에 이방인의 뜰이 있습니다. 이방인은 여기까지입니다. 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방인의 뜰이 있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여인들의 뜰이 있습니다. 여인들은 여기까지 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의 뜰 바로 맞은편에 보면 거기 미문 이라고 하는 문이 하나 있습니다. 아름다운 문입니다. 그런데 미문 곁에 아마 예수님은 그 어느 곳에 걸터앉아서 성전 입구에 있는 헌금함에 헌금을 드리고 그 안에까지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본문 41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하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처럼 예루살렘 성전도 헌금함에다가 헌금을 넣었어요. 예수께서 ‘보실새’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보실 새라는 단어가 헬라어에서는 미완료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미완료시제라는 것은 계속적인 의미가 있어요. 주님이 그냥 헌금함에 헌금 내고 들어가는 사람들을 어쩌다 한번 슬쩍 보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속 예수님이 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헌금함에 헌금을 넣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예수님이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특별히 예수님의 시선이 한 여인에게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슴은 아마 뛰고 계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바로 이 여인에게서 예수님은 그 시대의 참된 헌신,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헌신의 모습을 발견하셨습니다. 이 여인이 보여준 그 헌신의 본질, 거기서 우리는 참된 헌신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참된 헌금은 우리의 삶의 주인 되신 하나님만을 의식한 결과 이여야 한다라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누가 보는 것, 알아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것, 선한 행실 모두가 살아 계신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한 결과가 되어야 한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그냥 헌금함이 하나만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는 헌금함이 13개가 있었습니다. 13개가 주~욱 나란히 놓여 있었어요. 그리고 이 헌금함은 놋쇠로 만들어졌습니다. 놋쇠로 만들어 진 헌금함을, 흔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당시에 나팔궤라고 불렀습니다. 나팔궤라고 왜 불렸느냐 하면 헌금함의 입구가 나팔처럼 생겼어요. 아마 헌금함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 13개의 헌금함이 다양한 헌금의 용도들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제사용으로 대부분 많이 쓰여졌고 한 9개 정도는 여러 가지 다양한 제사에 따라서 그때그때 드려지는 제물헌금 들이었고 한 4개 정도는 특수한 용도였습니다. 성전유지용, 성전보수 용, 혹은 구제를 위해서 쓰여지기도 했고, 어떤 것은 제목을 지정하지 않은 자유 헌금함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헌금이라는 것은 지폐가 아니라 동전이었기 때문에 더군다나 헌금함은 놋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헌금을 집어넣으면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런 데 아마도 그 당시에 자세히는 몰라도 성전을 관리하던 관리자 측에서는 이 헌금을 증가시키려던 어떤 순수하지 못한 의도를 가지고 아마 놋쇠로 제작했을 가능성도 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많이 넣는 것, 적게 넣는 것을, 돈이 떨어지는 소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구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좀 많이 가치가 있는 돈을 넣으면 쟁그렁 하고서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집니다. 그러나 좀 시원찮게 내시면 그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쨍하고 조금밖에 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4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아마 부자들이 먼저 앞서서 헌금 넣고 들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부자들이 다 그랬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아요. 어떤 부자는, 아마도 아주 가치가 높은 그러한 양의 화폐를 뚝 떨어트리면 소리를 냅니다. 쟁그렁 그러면 어깨에 힘을 주고 아마 이렇게 하면서 내가 돈 많이 냈다는 것을 과시하는 형식이었을 것입니다.
42절에 보시면 본문에 “한 가난한 과부는” 과부 차례가 됐어요. 이 과부가 얼마를 넣었 다구요?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의 화폐 단위 가운데에서 최소 단위가 고트란트입니다. 최소 단위. 유대 사람들의 화폐단위가치 중에서 제일 작은 것이 렙돈이였어요. 렙돈이 얼마나 되느냐. 한 렙돈 이 달러로 환산하면 8분의 1센트예요. 8분의 1센트.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10원도 안돼요.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렙돈 이라는 말의 뜻 자체가 ‘얇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얇은 동전. 그래서 렙돈을 집어넣으면 퉁 소리도 별로 안나요. 소리도 안나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내는지를 알 수 있었던 그 놋쇠 헌금함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서 아마 이 여인은 이 장면에 와서 굉장히 주눅이 들고 또 자기 열등감을 가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보다 앞서서 그리고 상당한 양들의 돈을 집어넣고 당당하게 행진해 들어가던 부자들의 모습, 쟁~그렁. 그 다음에 이 여자 차례가 되었을 거란 말이죠. 두 개의 렙돈 중 하나를 집어넣었습니다. 쟁 소리가 안나요. 누가 나를 보지 않을까? 이 순간 자기를 의식하면서 상당히 부끄러워질 수도 있었고 상당히 무안해질 수 있는 순간입니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나 같으면 아예 헌금을 안 했을 겁니다. 창피 당하려고 뭐 하러 헌금을 하겠어요. 그러나 저는 이 순간 이 장면 속에서, 이 여인이 하나님만을 의식했다는 것을 보게됩니다. 주님이 그것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양이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그녀의 최선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하나님만을 의식한 이 여인의 태도가 이 헌금을 넣을 수 있게 했습니다. 여러분! 많은 것을 드리기가 쉽습니까? 적은 것을 드리기가 쉽습니까?

영국의 캠브리지대학의 찰스 스터드라는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부도 잘 했어요. 학교에서도 일등을 달리는 학생이었고 크리캣이라는 운동선수였어요. 영국 전체에서 금메달을 따기도 했습니다. 보장된 출세의 길이 그 앞에 열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캠퍼스집회에 참석했다가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는 선교사로 가기로 선포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장된 출세 길. 돈과 그리고 명예와 권력과 그 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자 누군가가 와서 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 친 희생이 아닌가? 이때 찰스 스터드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시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캠브리지 7인의 한 사람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후에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 복음화를 위해 일했습니다. 53세가 되던 1913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프리카 심장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기에령 콩고(옛 자이레공화국)에 ‘아프리카 심장 선교회(The Heart of Africa Mission)’을 설립하였고, 이것이 ‘WEC 국제선교회(1918)’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한 사람의 비전으로부터 시작한 WEC 국제선교회는 복음주의적 국제 선교 단체가 되어 현재 50개국에서 모인 1,700여명의 선교사가 75개국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WEC은 개인적인 헌금 모금을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기도하면서 자비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선교사님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영국의 WEC선교사들은 기도합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살아있습니다. 이 정신과 믿음이 WEC을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창립자 찰스 스터드에 관한 일화가 있습니다. 중국으로 선교하기 위하여 영국을 떠날 때 빈손으로 갔었습니다. 부자 집 아들인데 돈을 가지고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집이 있었는데 그 집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은 선교하러 가니까 그 집은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영국에서 모은 것이니 영국정부의 것이라고 하면서 정부에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중국에서 20여 년 선교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영국 정부는 개인재산을 모두 국고로 돌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재산의 일부를 찰스 스터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주었습니다. 그 재산은 부동산으로 주었는데 정원이 있는 큰집을 두 채를 주었습니다. 당시에 그 한 채를 팔아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서 사용하고 현재 그 한 채를 WEC의 본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가 2003년 8월 14일(목)에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WEC에서 3일 체류하였습니다. 숙소를 배정 받아 찾아가는 길은 디귿 자 모양의 건물이라 상당히 복잡했습니다. 처음 찾아가는 사람은 1주일정도 있어야 파악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구조의 건물에는 약 200여 개의 방이 있고 로비와 세미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1층의 작은 방들은 각 팀별로 사역을 관리하는 방들이 제각기 있었습니다. 그리고 건물 옆의 부속건물 같은 곳에는 각종 기계들이 즐비했는데 각종 농기계들 그리고 지프차가 몇 대 있었습니다. 이 차들은 아프리카의 각 국가의 승인 형식이 다르기 때문에 필요할 경우 그곳에 맡도록 수리하여 보내진다고 합니다. 본부는 입구서부터 건물까지 1km는 족히 넘어 보였으며 사방으로 잘 다듬어진 드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봉사하는 분도 영국의 시골에서 목회하고 은퇴하신 목사님 부부가 주방을 맡아 봉사하며 섬기고 있다고 했습니다.(예’ 한국선교사 훈련받을 때 일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하나님의 것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아껴야 합니다. 절약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라도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끼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남아서 드리는 것, 시간이 남아서 드리는 것은 하나님은 별로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사무엘하 23장 13-17절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서 도망 다닐 때 아둘람 굴에 숨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 했던 용사들을 기록하면서 그들의 아름다운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더운 추수 때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의 시원한 물을 마셨으면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립니다. 이 소리를 들은 삼십 두목 중 세 용사가 목숨을 걸고 블레셋 사람의 진영에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옵니다. 목숨을 건 다윗에 대한 사랑과 충성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17절에서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면서 “피 같은 물”을 마시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께 부어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헌금은 ‘피 같은 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헌금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헌금은 하나님의 나라 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선교를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값지게 사용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빌 하이블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빌 목사님이 교회 사무실에서 개인 용도의 편지를 비서를 통하여 발송하였습니다. 그런데 비서가 교회의 우표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늦게 알고 빌 하이블 목사님은 이 일을 두고 하나님께 깊은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작은 것이 없습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개념이 문제입니다.

베트남에 갔을 때 선교사님 집에서 지낼 때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생활이 그렇게 좋지 못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통장에 70만원이 있었는데 이 돈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이 돈을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70만원의 돈은 한국의 어느 시골교회를 갔을 때 어느 권사님이 헌금한 것인데 쓸 수가 없습니다.”, “왜요?” 권사님은 교회에 나오시는 길이 버스정거장으로 두 정거장 되는데 이 길을 10년을 걸어서 다니시면서 150원 하던 교통비를 아껴서 모아둔 돈을 가장 중요한 일에 쓸 거라고 모아 두셨답니다. 그런데 선교사님이 그 교회를 방문했을 때 헌금을 한 것입니다. 돈이라고 같은 돈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피 같은 돈입니다. 이것이 헌금입니다.

우리가 십일조에 대해서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렸으니까 나머지는 내 것이다라는 생각이예요. 아닙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십의 구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십일조 정신에 근거하여 드렸다면 어떻게 되냐하면 십분의 일을 드린 후에 십분의 구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해요. 십분의 일 드렸으니까 다했다. 끝이 아니라 나머지 십분의 구도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십분의 구를 어떻게 사용할까?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쇼핑하십니까? 기도하고 쇼핑하세요? 내가 십분의 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인도하심 따라 내가 이렇게 쓸 때 하나님이 기뻐 하실까? 십분의 구도 마땅히 그 분의 것이라면 나에게 맡겨 주신 것에 불과하고 그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 분의 뜻에 맞도록 내가 십분의 구도 관리하는가? 이것이 온전한 십일조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마르틴 로이드 존스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이 쓴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국의 어떤 농부가 소를 기르는데 그 소가 새끼를 낳았어요. 송아지를 낳았어요. 두 마리를 낳았어요. 농부가 너무너무 기뻐 가지고 자기도 모르게 할렐루야 송아지 새끼 두 마리 낳고서 너무 감사해 가지고 자기 부인보고 이 농부가 말하기를 여보 송아지 새끼 두 마리야 우리 하나는 주님의 것으로 하고 주께 드리십시다. 아내도 아멘 하고 동의했습니다. 얼마 후에 송아지 새끼 한 마리가 비실비실 앓더니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농부가 울상 이 돼 가지고 방안에 있는 자기 부인에게 하는 말이 “여보! 큰일났어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어. 주께 드린 송아지가 죽었어.” 왜 하필 주님의 것이 죽지요. 자기 것이 아니 구요. 이건 주님의 것, 이것은 내 것이 아니예요. 내 전체가 주님의 것입니다 100% 주님의 것입니다. 이게 헌신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의 십의 일조를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를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행위를 주님께 보여야 합니다. 그 때만이 하나님도 우리를 향해서 하늘 문을 여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사 60:1-4)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변화하게 되는가?, 어떤 계기가 주어졌기에 변화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서 사람은 만들어지고 다듬어 진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많은 교육과 가르침을 주었는데도 도무지 변화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설문조사에 보니까 목사님들이 제일 무력감을 느낄 때가 어느 때냐고 물었습니다. 첫 번째가 “수많은 설교를 통해서도 꿈쩍도 안 하는 사람들을 볼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교육을 통해서 알기는 아는 것 같은데 그것 가지고는 변화가 안됩니다. 사람이 움직여지지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사람은 180도 달라집니다. 새로운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우다가 하나님의 궤를 빼앗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며느리 비느하스가 임신하여 아기를 낳게 되는데 그 때 시아버지와 남ㅍ편이 죽었다는(19)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게서 떠났다고 한탄하면서 아기의 이름을 ‘아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꿰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 하였더라”(삼상 5:22)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궤와 하나님이 함께 했습니다. 성전 제일 안쪽에 바로 이 하나님의 궤가 놓여 있었습니다(대하 6:11).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 비느하스는 믿음이 좋은 여자입니다. 자기가 지금 아들을 낳았지만 하나님의 궤를 생각하면서 자기가 아들을 낳은 것에 대해서는 20절에 관념하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아이(아가봇)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죽었으니까 대제사장이 될 아들입니다. 그러나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니 자기 아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궤 없는 제사장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전 총신대 총장을 지내신 김의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일제 시대 때 초등학교를 다니셨습니다. 4학년 때 일본 선생님이 교실마다 걸려있는 일본 신사의 검이라고 하면서 신사의 실제 검이 있는데 그것은 2300년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의환 4학년 학생은 그 검이 2300년 되었다면 녹슬어서 칼이 부러져 지금까지 있을 수 있겠느냐고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순전히 과학적 호기심으로 질문한 것인데 담임 선생님은 자기 집으로 끌고 가더니 칼을 뽑아들고 흥분을 해서 목에 겨누었다 떼었다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신사의 검이 부러졌다”고 말한 것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지금 죽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분을 못 참고 한참을 칼을 가지고 목을 겨누었다고 합니다. 한참을 그러더니 분이 누그러졌는지 그만두고 다음날 선생님들을 다 소집하고 이 학생을 당장 퇴학시켜야 된다고 했답니다. 그 때 부 교장이 한국선생님이었는데 이 학생을 퇴학시키려면 먼저 나를 해고하고 이 학생을 퇴학시키라고 하면서 만일 퇴학시킨다면 나는 일본 고등법원에 이 사건을 상고하겠다고 하여 그냥 없던 일로 마쳤답니다. 일본 신사도는 상징이지요. 무슨 그 검이 일본을 지켜주겠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궤가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궤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에게 예수가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 없는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없습니다.

김의환 목사님은 그 때부터 반일감정에 사로잡혀 꼭 일본을 원수로 갑아 주리라는 생각 속에 공부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 믿고 보니 일본사람이 그렇게 불쌍해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그래 일본에 선교사로 가기로 생각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OMF 국제 선교단체에서 싱가포르에서 훈련을 받고 일본에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비자를 주지 않고 입국을 거부하여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를 하실 수밖에 없었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을 모를 때는 ‘이브람’(큰 아버지) 였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의 이름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는 더 이상 ‘아브람’ 큰 아버지가 아닌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라고 고쳐 주셨습니다. 큰 아버지는 유대인만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열국의 아버지는 온 나라의 아버지입니다(창 17: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두면 안됩니다. 물은 가두면 썩습니다.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움직여야 됩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일단은 편안한 같지요. 그러나 실상은 죽어 가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움직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이 우리가 복된 것 8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8가지 복이지만 제일 중요한 한가지가 있습니다. 9절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화평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잖아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다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부분적인 복으로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화평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요 화평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영광입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의 영광은 없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회개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베풀기 위해서 주십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라고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 19절에 나옵니다.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거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혼자 잘먹고 잘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은 베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고 합니다.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환상을 보여주면서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에스겔이 과학적 증거들을 들이대면서 “절대 안됩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3)라고 대답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국의 축복은 하나님이 선교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2007년 여름 사태 이후 한국인들은 모두 철수하라는 정부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5년 간 사역한 C선교사 부부는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은 문화사역을 하는데 그들의 언어 문화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TV방송국의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곳 방송국과 우리나라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그곳에 계속 있을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지를 새롭게 하고자 대장금을 방영하고자 지원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대장금이 방영된 후에 한국을 예의 바른 나라, 음식이 발전한 나라로 다시 보는 것입니다. 한류 열풍은 한국선교의 길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동시에 그 메시야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본문 4절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고 하십니다. 사방을 보세요. 넓게 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세요.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나아옵니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로 나아옵니다.

선교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열심히 돈 벌어서 헌금하는 것도 선교하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선교학적 용어로 멤버케어, 토탈케어 라는 말이 요즘 등장했습니다. 한마디로 선교사를 잘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선교지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쉽게 풀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보니 항상 마음의 무거움이 그분들에게 존재합니다. 어떤 선교사는 필리핀에서 빠찡꼬에 빠져서 패인이 되다 시피한 분도 있습니다.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쟁을 하다보면 사상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분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캐나다에서 오신 분이 이야기하는데 “수다 선교회”가 있답니다. 참 좋은 선교회입니다. 우리는 정신과 상담 받으라고 하면 꼭 무슨 병자처럼 취급되고 또 그것도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수다 선교회는 너무 좋습니다. 부담 없이 수다만 떨면 됩니다. 수다 떨다보면 스트레스 다 날아가고 회복이 됩니다.
지난번에 한 선교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전에 오셨는데 그분하고 저녁까지 함께 지냈습니다. 처음에 그 선교사님은 힘이 하나도 없이 축 처져서 들어오셨고 저는 쌩쌩한 체 오전에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선교사님은 살아나고 저는 축 쳐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선교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나누어야 합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북한에서 태어나 미국 가서 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어차피 고향을 떠난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미국까지 가게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분들 중에 한00라는 분이 계십니다. 미국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서 집도 있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진이 일어나 집이 부서지고 보험도 들지 못해 한푼도 건지지 못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망한 것은 물론이지만 정신적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 때 북한의 굶어죽는 어린이들이 생각났습니다. 두만 강변을 다녀온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습니다. 부인에게 더 이상은 못 견디겠다고 하면서 나 북한 사람들 위해서 살아야 할 것 같다고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짐 싸주면서 가라고 해서 현재 12년째 사역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북한에 들어가서 김일성 초상 앞에 데리고 가더랍니다. 그 앞에서 고개 안 쑥이면 큰일입니다. 그런데 절 안 하니까 남자 몇 명이 오더니 끌고 가더랍니다. 그러더니 당신이 진짜 예수쟁이라고 하면서 북한에 빵공장 만드는 것을 허락해서 현재 매일 3만 명에게 빵을 무료로 급식해 주고 있습니다.

내년 2010년이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선교대회가 열린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10년 6월 14일(화)에 열렸습니다. 한국에서도 15명이 참석했습니다. 이중에는 게일 선교사, 마펫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윤치호 선생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때 보고한 내용에 보면 당시 한국은 960만 명의 인구 가운데 20만 명의 성도로 급성장했다고 했습니다. 또 예배당을 짓기 위해 자신의 소를 파는 이들이 있었다고 보고합니다.

지금 한국처럼 축복 받은 나라가 없습니다. 제사장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종엽이가 어제 총신대학원 시험 치렀는데 경쟁률이 5대 1입니다. 장신대원도 다른 신대원도 비슷합니다. 4명은 그냥 집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일본에 가면 기가 막히게 잘 지어진 캠퍼스 학교가 있습니다. 고베신학교입니다. 미국의 어떤 대학교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역사도 100년이 넘습니다. 그런데 학생이 5년 전에 12명이었는데, 그 중에 한국 학생이 3명입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한국학생이 6명, 일본 학생이 1명 있답니다. 유럽 신학교의 고민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학생이 오질 않는 답니다. 독일은 목사만 되면 국가에서 목사에게 필요한 것은 다 지원해 줍니다. 1년 4차례 양복과 안경 등은 다 해 줍니다.
그런데 독일 교회를 빌려서 한인교회하던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꽤 큰 교회라 그 교회는 독일 목사가 3명 있는데 돌아가면서 일한답니다. 주일에 한국 목사님이 필요한 일이 있어 담임 목사님을 만나야 되는데 그 목사가 없어서 다른 목사님에게 물어 보았더니 교회에 안 나왔답니다. 주일날 목사가 교회에 안 나온 겁니다. 그것도 담임 목사가 말입니다. 그래서 물어 보았답니다. 왜 교회에 안 나왔냐고요? 그랬더니 하는 말이 이웃교회는 이혼해서 목사가 그 교회에서 쫓겨났답니다. 이혼 당하는 것보다, 집에서 아이들하고 놀아주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하더랍니다.
짐 싸서 북한에 보내준 집사님이 잘하시는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경찰서에서 나온 아들을 다시 어머니가 돌려보냈습니다. 너 혼자 나와서 잘 살아서 뭐하냐고 다시 가라고 해서 가서 순교하셨습니다. 한국 여자들 좀 독한데 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위해서 잘하는 것입니다.

한국인에게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정이 있습니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하면 안됩니다. 머리에 열 받으면 안됩니다. 머리는 서양 사람들이 발전했습니다. 시스템을 잘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슴이 없습니다. 뜨거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정이 있습니다. 밥 먹다가 한사람이 더 오면 국에다 물 좀 더 붓고 숟가락만 올려놓으면 몇 명이 더 와서 먹어도 문제없습니다. 침대도 그렇습니다. 이부자리 하나 더 피면 됩니다. 좀 끼어서 자면 다 잡니다. 한국인은 융통성이 있습니다. 긍휼이 있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따뜻한 가슴이 있습니다. 정이 있습니다. 눈물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만 모시면 됩니다. 바탕이 좋습니다. 옥토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외국 선교사님들도 한국사람처럼 하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코리안 스타일로 합시다” 통성으로 기도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울고불고 뜨겁게 기도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코리안 스타일은 열정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다면, 우리에게 물질이 있다면, 우리에게 지혜가 있다면 모두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이러한 축복이 우리 주앙교회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시 91:1-7)

한국 속담에 ‘업친데 덥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 속담이 있습니다. “염병에 까마귀 소리”라는 말입니다. 고치지 못할 병에 재수 없이 까마귀소리까지 들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모습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에게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같이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소망을 두면 다릅니다. 기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 기쁜 소리가 성경에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오늘도 이 복음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9년 6월 11일, 세계보건기구가 H1N1 인플루엔자의 전염병 경보 수준을 대유행으로 격상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의 대유행 선언은 1968년 이후 4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1918년 인플루엔자는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유행성 독감의 일종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유행하는 동안 5,000만 명에서 약 1억 명의 감염자가 발생하여 사망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1914년부터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났으니까, 4년 4개월 동안의 전쟁은 1918년에 발생한 전염병 때문에 마쳤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싸울 수가 없습니다.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죽으니까요.
인류 역사상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 때 4년 4개월 동안 약 900만 명이 전쟁으로 죽었는데 인플루엔자에 걸려 1년 동안 죽은 사람이 5,000만 명 – 1억만 명이니까 전쟁으로 사망 한 것 보다 전염병에 결려 죽은 사람이 약 10배 이상 많은 겁니다.
하나님은 보다 못해 전염병을 보내셨는지 모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의 주요 연합국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는 모두 기독교 국가입니다. 마찬가지로 독일에서 루터가 나왔고 개신교가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민족적인 감정 때문에 싸웠어요.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생명을 15년 동안 연장 받았습니다(왕하 20:1-11). 그가 회복된 후에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외견상으로는 히스기야를 축하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를 설득하여 앗수르 세력에 대항할 비밀동행을 맺으려는 것이었습니다. 주의가 산만한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에게 그의 창고를 모두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그런 그의 행동을 크게 책망했습니다(왕하 20:12-19). 앗수르는 유다에게 강제로 과중한 조공을 요구하였고 예루살렘을 파괴하기로 결정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전염병을 보내어 하룻밤에 18만 5천 명의 앗수르 군을 죽게 함으로써 그 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전염병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재앙으로 나옵니다. 물론 그러한 관점에서만 기록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심판하시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전쟁(칼)과 기근과 전염병입니다. 우리는 혹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는 구약의 상황과는 다를 지라도 이러한 일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는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회개할 것이 있는지 우리 자신들을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사명을 받고 애굽의 바로를 만나서 하는 말입니다.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전염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출 5:3)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굽을 떠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전염병으로 죽이실 것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애굽의 바로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이 더 두려운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와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정탐을 두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아름다운 땅과 과실은 탐나지만 그곳에 자신들이 이길 수 없는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실망감은 곧 하나님이 이 백성에게 실망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도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더 이상 이 민족에게 더 무엇을 보여 주어야 한단 말인가?”하는 하나님의 실망이 어찌나 크셨던지 민수기 14:11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 하겠느냐 …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하시면서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2)고 모세에게 제안합니다. 이제 그들은 전염병으로 다 죽여버리고 다른 크고 강한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간청으로 이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죄에 대한 벌로 전염병을 보내십니다.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무리하게 인구조사를 하여 하나님께 범죄 합니다. 다윗은 이 일을 후회하면서 말하기를 “다윗이 백성을 조사한 후에 그의 마음에 자책하고 다윗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 24:10) 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통계조사를 잘 했는데 왜 이것이 하나님께 범죄가 되었는지 언 듯 이해가 안됩니다. 우리는 24절에 요압장군의 보고를 통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만 명이요” 전쟁을 위해서 인구조사를 했다는 겁니다.
성경의 민수기는 말 그대로 인구를 조사한 책입니다.
민 1:1-2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종족과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라고 말합니다. 2차 인구조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26:1-2).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했습니다. 자기의 생각에 의지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한다고 일을 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일은 안됩니다.

다윗의 이 불신앙으로 하나님은 갓 선지자를 보내 세 가지 재앙의 벌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아뢰어 이르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은 왕이 왕의 원수에게 쫓겨 석 달 동안 그들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은 왕의 땅에 사흘 동안 전염병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무엇을 대답하게 하소서 하는지라”(삼하 24:13) 다윗은 고민 끝에 사흘 동안 전염병을 선택했습니다. 그 때 죽은 사람이 15절 “칠만 명이라” 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차라리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하건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삼하 24:17) 자신의 집을 벌해달라고 통곡합니다. 이 양 무리가 무엇을 알기에, 또 무슨 죄를 지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징벌에 놓일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다 이해가 안되실 것입니다. 왕의 범죄로 인하여 백성이 이유 없이 죽게된다는 사실을,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적어도 그랬습니다.

오늘 시편 91편은 이런 경험을 똑똑히 한 다윗이 기록한 것입니다. 그는 전염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전염병이 왜 백성에게 일어났는지를 알았습니다. 3절 “심한 전염병”(데베르 후오트)은 치명적인 전염병입니다.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자신의 불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염병에서 벗어나려면
첫째, 본문 1절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하나님의 그늘 아래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면 안돼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그늘에서 사는 것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그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CF에 “집 나가면 개 고생이다”라는 카피가 있었습니다. 집 나가면 개 고생으로 끝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품이 얼마나 좋습니까. 어머니의 품 같은 곳 아닙니까.

둘째, 본문 2절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7절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셋째, 여호사밧 왕이 기도하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 20:9) 했습니다. 교회에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요즘은 백신에만 의지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전염병이 한번 돌면 백신이 없고 치료제가 없었으니까 그냥 속수 무책으로 죽는 겁니다.
청일전쟁 후 심한 전염병이 서울에서 번져 나갔습니다. 이 때 두 분의 의사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닥터 윌리암 제임스 홀(미국 감리교 해외 선교회 소속)입니다. 제임스 홀은 30세에 조선에 온 선교사입니다. 그가 조선에 올 수 있었던 것은 17살 때(1877년 1월) 목수 견습공으로 일할 때 심한 기침과 열이 계속되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홀은 “이제 나에게 주어진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공부를 하기로 결심을 하고 당시 교실이 하나밖에 없던 그렌 뷰엘 학교에서 공부하고 교사자격증을 따서 2년 간 교사 생활을 합니다. 그는 그밖에 생명보험회사 세일즈맨으로 일해서 번 돈을 가지고 1885년에 온타리오주에 있는 퀸즈 대학교 의과 대학을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대학에서 선교회를 접하고 조선까지 오게됩니다. 처음 부산항에 도착하여 인천항으로 들어와 서울까지 오게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선교지인 평양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 영국 영사관에서 철수를 권고했으나(당시 미국 영사관은 없었음) 의사로서 죽어나가는 환자들을 버리고 갈 수 없어 환자를 치료하다 과로와 전염병에 걸려 자신이 죽었습니다. 당시 평양은 외국인 금지 구역이었습니다. 자신은 죽었지만 1897년 2월 평양에서 개원한 감리교병원. 일명 기흘병원(홀 기념병원)이 세워졌습니다. 남편을 잃은 아내 닥터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혼자서 나중에 서울로 와서 ‘동대문 부인 병원’(현 이대 부속병원)을 세우고 현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 전문학교’를 열었습니다. 이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파송한 미국 못지 않은 의료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덕분입니다. 복음 때문입니다. 주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 버리면 안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신종 인플레인자만 위험한 전염병이 아닙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적으로 약 20억 명이 비만이라고 추정합니다. 지구 인구의 3분의 1이 비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미국은 알코올, 마약, 먹기 중독 등 3대 중독자의 나라라는 말을 듣습니다. 미국 성인의 65%중에 6∼19세 청소년의 비만이 15%입니다. 비만은 고혈압, 심장병, 동맥경화증, 당뇨병의 원인이 되고 지방을 제외한 다른 영양소의 부족으로 각종 질병에 취약합니다. WHO는 비만을 악성 전염병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국제연합 산하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8억 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으며, 매일 25,000명 이상의 사람이 기아로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1초에 다섯 명 꼴의 어린이가 기아로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 속담에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 아무리 남의 큰 걱정이라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관계없는 일은 대단하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의 염장(염통) 썩는 것 보다 내 손톱 썩는 것이 아프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남의 아픔을 다 알고 함께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힘써야 합니다. 멀리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첫째요, 또 다음이요 오직 이 한 법만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낭비하지 맙시다. 주님은 그런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에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면서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은 나의 이름을 아십니다. 나를 부르십니다.

저는 상이라는 것을 타본 적이 없어 제 이름을 부르는 경험을 별로 해 보지 못했습니다. 강수경 집사님은 어머님 말씀을 들으니까 어려서 공부를 너무 잘해서 학교에서 항상 맨 앞줄에 서 있었데요. 상타러 빨리 뛰어 나가야 하니까요.
저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한번 있었습니다. 군대 훈련소에서 훈련을 다 받고 퇴소식 하는데 제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상을 준 것은 아니구요, 퇴소식을 마치기도 전에 저를 장성이 타는 지프차에 태워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이건 상보다 더 대단한 영광입니다. 많은 동료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그렇게 나왔습니다. 아마 동료들은 분명히 대단한 집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감동 그 자체일 것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나를 높여 주기 위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초대입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 이름이 불려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부르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