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사도신경(성령을 믿사오며)

기독교 계통의 학교에서 한 교사가 반의 학생들에게 사도신경을 한 구절씩 외워오라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교사의 인도에 따라 학생 각자는 자신이 외운 사도신경의 한 구절씩을 외우기 시작했다. 한 학생이 일어나 “전능하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를 외우자 두 번째 학생이 일어나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했고, 또 다른 학생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끊어지고 말았다.

   교사가 다음 번 계속하라고 하자 한 학생이 “선생님, 다음의 ‘성령을 믿사오며’를 외울 학생이 결석했습니다.”라고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도 이와 같이 ‘성령을 믿사오며’하는 대목에서 빠지곤 한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 우리는 이제부터 성령을 믿는 사람입니까?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들입니까? 성령을 믿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받아 함께 하는 사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믿기만 하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과 함께해야 합니다.

페이스북의 담벼락과 예의

페이스북의 아이디어 중의 하나가 ‘담벼락’이다.
싸이월드 같은 SNS가 일기장이라고 보면, 페이스북의 담벼락이 훨씬 접근하기 좋다.
그러나 남의집 담벼락에 낙서하는 것도 예의가 필요하다.
그 집에 어울리는 낚서를 해 주어야 그 집 주인에게 기쁨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간혹 개인 홈이나 그룹에 담벼락에 자기 이야기만 한참 하고 가시는 분들이 있다.
이런 분들은 대개 다음에 다른 분들이 무슨 댓글을 달았을까? 그런것은 별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일방적으로 자기 할 이야기만 하고 나가버린다. 또한 이런분들의 특징은 한군데다만 낙서하지 않는다. 
온동네를 다니면서 이집 저집 다 매닥일을 해 놓는다. 그리고는 가버린다. 

문제는 세상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경우라면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복음을 전달하려는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상대편에게 불쾌감만 줄 뿐이다.
복음은 복음적인 방법으로, 기쁨으로 상대편이 받을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전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했다. @ 이영제

사오정의 면접(사오정 시리즈)

한 때 유행했던 사오정 시리즈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오정이 회사 면접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먼저 앞에 사람이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물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축구선수는 누굽니까?” 
“과거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박지성입니다.” 
“당신은 UFO가 존재한다고 믿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또 면접관이 묻습니다. 
“산업혁명이 언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까?” 
“예. 19세기 초반부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대답을 잘 했기 때문에 면접관도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보냈습니다. 

그가 나오자마자 사오정이 들어갔습니다. 자신을 가지고 질문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면접관의 질문이 달랐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전에는 차범근이었는데 요즘은 박지성입니다.” 면접관이 기가 막혀서, 
“당신 바보 아니야!”했더니 
“과학적으로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면접관이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당신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소?” 물었더니, 
“19세기 초반부터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더랍니다. 

세상에서 바보중의 바보는, 문제도 모르고 답만 외우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의 기준에 넣어버리는 겁니다. 요즘 우리가 이런 교육을 하지 않나 생각해야 합니다. 요즘 심지어는 예의 범절 까지도 회사에서 가르쳐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고 CEO들은 혀를 찹니다.

조바심은 믿음을 방해합니다.

우리가 좀 큰 마트에 들어갈 때 짐이 있다면 그 짐을 맡기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만약 들어갈 때 짐을 맡겼는데 그 짐이 잘 있는지 의심이 생겨서 5분 만에 나와서 짐 맡은 사람에게 “내 짐 잘 있죠!” 라고 물으면 짐 맡은 사람은 “짐 잘 있으니 안심하시고 돌아보시고 물건 사 가지고 오세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들어갔다가 다시 5분 있다 나와서 “내 짐 잘 있죠?”라고 하고 또 다시 5분 있다 나와서 물어보고 이렇게 계속 10번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아무리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도 뭐라고 하겠습니까? “짐 가지고 가세요. 저를 그렇게 못 믿으시면 짐 가지고 가세요.” 라고 말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우리 인생을 맡깁니다. 해 놓고서는 잠깐 있다가 “주님 제 인생 잘 챙기시고 계시는 거죠? 저 잘 인도하시는 거죠”라고 5분마다 조바심이 나서 주님께 물어본다면 주님이 뭐라 하시겠습니까? “너! 나를 믿고 맡겼으면 믿어야지 왜 그렇게 조바심을 내니, 너 나를 믿기나 하는 거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요?

등대지기와 우편집배원

한 외딴섬에 등대가 있었다. 어느 날 우편집배원이 섬을 찾았다. 
집배원은 한 명 때문에 섬을 찾은 것에 짜증을 내며 불평했다. 
“기껏 편지 한 통 배달하느라 기차타고, 버스타고, 배타고 꼬박 하루 걸려 이 섬에 도착했소.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기분이 나빠진 등대지기가 한마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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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자꾸 투덜거리면 일간신문 구독할 거야.”

 

산골짜기 논과 썰매

요즘처럼 기온이 영하 10도를 오르락 내리락 할 때면 어릴적 설매를 타던 기억이 납니다.
저희집 앞 아래쪽에 큰 스케이트장이 문을 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랫마을에서 온 아이들과 가끔은 서울에서 온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만국기가 펄럭이면서 스케이트장이 개장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썰매를 들고 들어갈수가 없습니다. 물론 돈도 내야 하구요.
그래서 나는 썰매를 타려고 우리집 앞에 있는 논에 꼭괭이와 삽을 가지고 가서 골을 파고 물을 댓습니다. 
논둑을 한바퀴 돌면서 쥐구멍이 있는 곳 같은 곳은 다 막았습니다. 물이 흘러 나가지 않도록이요.
그리고 기다리는 거죠. 그리고 요즘처럼 한 영하 10도쯤 내려가면 논에 댄 물이 잘 얼지요. 
그곳으로 썰매를 메고 가서 하루종일 탔습니다.

그런데 아래 스케이트 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아랫동네 아이들과 서울 아이들이 제가 놀고 있는 논으로 왔습니다. 
돈을 받는 사람도 없고, 아래 스케이트장보다 얼음이 더 잘 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결국 그 스케이트의 기세에 밀려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좀더 산골짜기로 올라가 다시 논에 물을 댓습니다. 그곳도 물이 잘 얼었습니다.
그러면 또 아래에서 타던 아이들이 올라옵니다.
저는 그렇게 자꾸만 산골짜기 논으로 올라갔습니다. 

@ 이영제

 

장로님의 소금(소곰)설교

어느 두메 산골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 교회 전도사님이 잠시 볼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우시게 되자 그 교회 장로님께서 수요 기도회를 인도하시게 되었답니다. 할 수 없이 맡기긴 했어도 워낙 학식이 없으신 데다가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신 분이시라 심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장로님을 만나 신신당부를 드립니다. “장로님, 설교하시려고 하지는 마시구요 그저 성경말씀을 많이 읽으신 다음 교인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드디어 수요일 저녁이 되어 장로님이 기도회를 인도하러 올라갑니다. 전도사님이 그토록 부탁을 하셨건만 강단에 올라서고 보니 마음이 달라지는 겁니다. 오십여명 되는 교인들이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말씀만 읽고 내려가기는 조금 싱겁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이 기회에 우리 교인들에게 뭔가 신앙적인 교훈을 하나 심어 주리라는 결심을 하고는 평소 생각해 두었던 구절을 읽어나갑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봉독한 다음 ‘너희는 세상에 소금이라’ 라는 말씀을 가지고 점잖게 말문을 열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가리켜 세상의 ‘소곰’이라 했습니다. ‘소곰’이 뭡니까? 소와 곰을 말하는 것입니다. 소와 곰이 어떤 동물입니까? 소는 온순하고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동물이요 곰은 사납고 힘이 강한 동물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소처럼 온순하게 주님 앞에 순종하고 또 곰처럼 믿음으로 씩씩하게 우리 인생을 살아갑시다.”

은하와 민하자매 어린이

우리교회에 어린이 중에 은하와 민하가 있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린 망우리에 사는 고모들을 따라 산본까지 먼저 은하(7살) 아이가 나왔습니다. 우리교회는 몇분안되는데다 저하고 비슷하여 다 숙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지나가시는 분이 한분 들어오셔서 잘 인사도 못하고 그럽니다. 그런에 은하가 ‘어서오세요?’ 그러면서 사람에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말을 그렇게 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하를 ‘어린이 전도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한 1년전에 어머니가 나오기 시작하고 동생 민하(5살)가 함께 왔습니다. 동생은 말은 많이 안합니다. 그냥 안아주면 착 안기면서 그것도 몸의 힘을 완전히 빼고 고개를 떨구고 안아주는 사람품에 완전히 의지합니다. 
언니(은하)와 동생(민하)은 우리교회 귀염둥이 자매랍니다.

다윗의 믹담과 토브

시편 16편의 제목을 “다윗의 믹담”이라고 했습니다. 
“믹담”은…. [미크탐]이란 단어로 “조각, 새김”을 뜻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말이 “조각한 어떤 것 곧 광석, 금”을 뜻하는 [케템]이란 단어에서 왔다고 하여 “믹담”을 「황금의 시」로 “다윗의 걸작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믹담”이란 제목이 붙은 시가 시편 16, 56~60편의 6편입니다. 또 한 편에서는 이 “믹담”이란 말이 “덮다”를 뜻하는 외래어로「속죄의 시」라 하기도 합니다. 

2절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복”은…. [토브]란 단어로 복수로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의 “복” 속에 많은 것이 들어 있습니다. “선하고, 좋고, 아름답고, 잘되고, 기쁘고, 즐겁고, 옳고, 낫고, 보배로운 것”을 말합니다. 처음 사용된 곳은 창세기 1:4절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주심으로 번영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또 물질적인 복에서 영적인 복으로 복의 개념이 발전되고 있습니다.

표류자와 왕(파스칼의 소품집)

파스칼의 소품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항해사가 항해를 하다가 파선하여 표류하던 중 어떤 섬에 닿게 되었다. 그런데 그 섬의 주민들은 그를 왕으로 모셔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섬을 다스리던 왕이 행방불명되었는데 우연히도 표류자의 인상이 실종된 왕과 비슷한 때문이었다. 표류자는 하루아침에 섬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표류자는 처음 얼마 동안은 어리둥절하고 불안하며 양심의 가책이 되어 자기 신분을 밝히고 왕 자리를 사직하려고 생각도 해보았으나 날이 갈수록 왕 노릇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양심의 소리는 적어졌고 왕 노릇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양심의 소리는 적어졌고 오히려 진짜 왕이 나타날까봐 불안을 느꼈으며, 도리어 섬사람들을 학대하고 혹사하며 전제군주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