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기억하며 삽시다.

1.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2:25
2. 예비하라 ……………………………………………눅12:40
3.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라……………………눅12:35-36
4. 그날이 너에게 뜻밖에 오지 않도록 주의하라…..눅21:34
5.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1-32
6. 아무도 너를 속이지 못하게 주의하라………….. 막13:5-6
7. 주인이 언제 올런지 알지 못하니 깨어 있으라막13:35-3

아름다운 눈물

시편은 온통 눈물 바다입니다. 감정의 극치입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Bandar 42:3).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Bandar 80:5).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Bandar 102:9).

[1] 눈물의 원인
○ 후회로 인하여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창27:34).
○ 죽을병으로 인하여왕하 20:1-5 ○ 대적을 인하여 – Bandar 6:6 (7을 보라)
○ 학대로 인하여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4:1)
○ 패배로 인하여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나의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너의 농작물에 떠드는 소리가 일이남이니라(사16:9).

[2] 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눈물?
1) 회개의 눈물
○ 다윗-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 베드로닭이 곧 두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생각하고 울었더라(Hanya 14:72).
2) 사랑의 눈물
○ 바울-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Korintus 2:4,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Talian 20:21).
○ 나사로를 위한 그리스도의 눈물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John 11:34-36).
3) 감사의 눈물
○ 예수의 뒤로 그 발곁에 서서 올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7:38, 44).

[3] 아름다운 눈물을 흘린 자에 대한 보상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Bandar 126:5)고 하였습니다.
하늘에서는 눈물이 없을 것임
1)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Empat 25:8).
2)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믿을 수 없는 사회

어느 국회의원 예비후보라고 하면서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지킬 수 있는 약속만 하겠습니다
왜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지? 약속은 당연히 지키려고 하는것 아닌가요.

북한에서 오신 분들이 교육받는 하나원 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교육하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정착금주면 몇일 못가서 대부분 다 탕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한사람 믿지말라!’는 슬픈 교육을 합니다. 광고믿고 투자했다 다 날리고, 책 사서 공부하면 자격증 따고 돈 많이 번다고 해서 했는데 그렇지 않고
북에서 있을 때 소원이 자동차 타는 것이라 당장 자동차(중고) 뽑으러 갔는데 그만 사기 당하고, 그 피해 사래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는 교육하러 오신 분 중의 교수님이 명함을 돌리고 갔습니다.
탈북하신분이 급할 때 필요할 때 연락하라고 준 것인줄 알고, 연락하니 왜 했냐는 식입니다. 이분이 하는 말이 그러면 자기에게 왜 명함을 주었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명함 없습니다.

노아의 방주

예전에천지창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 영화는 하나님의 창조부터 시작하여 출애굽까지를 영화한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 중간에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엄청나게 큰배를 만들고 그 배에 그렇게 많은 짐승들을 태우고 그리고 문을 닫자 폭우가 쏟아집니다. 그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은 바로 8명뿐입니다. 노아와 그 아내와 3아들과 자부들과 그 배 안에 있던 짐승들만 구원받았습니다. 
방주를 배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배와 방주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방주는 바지선과 같은 땟목과도 같은 것입니다.
배는 배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배 안에 있습니다. 돛단배는 돛이 있고 증기선은 화구가 배 안에 있습니다. 전기선은 전기장치가 있고 동력선은 동력이 배 안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배를 어거하고 제어하는 제어장치가 배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방주는 그렇지 않습니다. 동력장치도 없고 제어 장치도 없습니다. 
방주는 오직 하나님이 인도하시기를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방주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대로 조정해서 가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안됩니다. 
우리의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과 구절이 짝이 있다고 오해한 본문

* 우리가 성경의 모든 내용과 구절이 짝이 있다는 것으로 본문을 오해한 부분입니다.
본문은 에돔과 열국이 멸망당하게 될 것을 예언한 부분에서 그 땅이 황패하여져서 새들이 깃들게 될 것이라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진멸하시기로 한 백성 위에 내려 그를 심판할 것이라”(Empat 34:15) 
부엉이가 거기에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각각 제 짝과 함께 거기에 모이리라”(Empat 34:15)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Empat 34:16) 

이것들 가운데서는 새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문에제 짝에 해당하는 단어는 친구를 뜻하는 레우트(tW[r])입니다. 15절과 16절이 같Adakah니다. 그리고 15절의 본문의 중심은 동사 ‘모으다’, 카바쯔($b’q;)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새들은 다 제 친구 짝이 있고 모은다는 말입니다. 
이 본문을 마치 모든 성경의 본문들이 짝이 있다는 것으로 오해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저도 몰랐을 때는 그렇게 배웠고 그런 줄 알았습니다.
성경에 짝이라는 단어는 본문 위에문 짝”( 41:24, Amsal 26:14)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2:14)라고 나옵니다. 제가 이것까지 이야기해야 되겠습니까?
Anda! 국어 왜 배웠습니까? 이 정도의 문법은 중학교만 나왔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인데 이상하게 성경은 마음대로 봅니다. 제일 신경 써서 봐야될 책이 성경입니다.

한국어

저희 교회에서 외국인을 한국대학교에 입학시키고자 장학생으로 데려온 학생이 있습니다.
이 친구가 한국어 언어연수 받고 있는 중입니다. 스마트폰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도 하나 사 주었습니다.
이제 제법 한국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신이나서 저에게 문자메시지로 
‘목사님! 나에게 기도하세요?’ 라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어제는 5살짜리 선교사님 아들이 나에게 전화를 해서 
‘목사님! 나 감기걸렸어요. 목사님도 감기드세요?’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이렇게 미숙하여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말씀의 연속성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 1:3) 말하고말하고말할 것이니라” 한글(개역개정) 성경에는 ‘말하고’가 세 번 나왔지만 원문에는 이에 해당하는 ‘싸파르’라는 단어는 한번만 나옵니다.

그 대신 ‘아들, 후손’()이 세 번 나오고 도르(영원히), 아헤르(다음 세대, 영원)가 나옵니다. 말만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시전달 자체보다는 계시의 연속성과 역사성이 강조된 명령입니다. 복음을 잇지 못하면 실패입니다. 현 시대에 크리스찬이 몇 %이냐, 교회에 얼마나 많은 분들이 출석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 친구

제게 오래된 친구 한 명이 있습니다. 신학교 동창입니다. 그런데 신학교 졸업하고 어느 날 그 친구는 대만으로 갔습니다. 공부를 하러 간 것인지 선교하러 간 건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20년은 족히 더된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에 혼자서 밤에는 아파트 경비 서가며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거기서 5년 넘게 지내다보니 중국어와 영어, 일본어까지 하게되더군요. 저는 그게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왜 나도 얼른 중국이든 대만이든 필리핀이든 나가지 못하고 집안의 장롱처럼 북박이가 되어 가지고 대한민국에 남아서 선교한다고 하니 우습기도 하고 내 자신이 영어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내가 때로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해외를 제집 드나들 듯이 다니다 보니 늘 저는 그 친구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친구로부터 연락이 오기 전에는 제가 연락할 방법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꼭 잊을만하면 한번씩 연락이 오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때는 5년이 넘어서 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선교는 안하고 무역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의 사정은 모르고 만날 때마다 왜 그 좋은 실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려야지 세상일을 위해 사용 하냐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또 연락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5년이 더 지난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그랬던 것처럼 느닷없이 연락이 왔습니다. 추석 명절인가요? 굴비를 보내겠다는 겁니다. 그때는 참 잘 나갔나 봅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본인 말로는 청와대도 갔다 왔다는 겁니다. 몇 백 명의 사원을 선발하는데 자기가 다 뽑는답니다. 아파트 한 채 사는 것은 일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굴비는 잘 먹겠다고 하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 같은 사람하고는 지낼 시간이 없나 봅니다. 잊은 듯이 보였습니다. 가끔 생각은 나지만 어디서 잘 살고 있겠지 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또 한참을 지나 연락이 왔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목소리가 가라앉았습니다. 예전의 언제나 자신 있는 씩씩한 그 목소리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 잘 나가던 회사가 IMF때 무너진 그 회사 중의 하나였습니다. 자기도 회사 간부로 있어서 어느 정도의 법정 책임과 물질적 책임도 있는 모양입니다. 집에도 못 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작은 전자업체의 물건 하나를 가지고 와서 저에게 설명을 하면서 그것을 대만에 같다가 팔아보겠다고 하고 갔습니다. 그런 일이 잘 안 되자 비슷한 일을 몇 번 더 한 것 같습니다. 그 때 제가 왜 하나님 일은 안하고 사업을 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안되겠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게 싶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대만에 같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아버님이 하시던 일이 있었는데 그게 문제가 생겨서 장남인 자기에게까지 문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만 해결하고 다시 가서 선교해야지 하고 손댄 것이 그만 사업을 하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느 복지 단체의 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참 재주가 많은 친구인 것은 분명합니다. 언어에 능통한 것뿐만 아니라 말에도 재능이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하고 바꿔서 해야 하는데 늘 그 재능이 부럽고 아깝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위급한 상황은 다 넘기고 그 친구가 저에게 직접 연락을 해 왔습니다. 가보니 중환자 실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는데 멀쩡한 곳이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복지관 승용차를 몰고 밤길에 졸음 운전을 해서 내리막길에서 위에서 내려오던 탱크롤러트럭이 승용차를 깔아버린 겁니다. 승용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졌다고 합니다. 거기서 살아 나온 것이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살기는 살았는데 그것이 현대의료 기술덕분으로 산 것입니다. 다리는 절단을 해야 하는데 본인이 우겨서 겨우 철심을 박아서 자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심장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심장이 절반의 기능밖에 못하기 때문에 심장이식을 받든지 아니면 심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은 확률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언제 멈출지도 모르는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가지 방법은 심장이식 수술을 받는 겁니다. 물론 그것도 성공의 보장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심장이식 받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심장이식 받으려는 사람은 많고 심장은 없는가 봅니다. 이 친구가 중국어를 잘 하니까 자기가 중국에 가서 심장을 구해 보겠다고 직접 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교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중국 가서 심장이식은 받지 않고 선교지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한참만에 나타나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다시 불렀다고 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이제 언제까지 살지 모르나 하나님 위해서 남은 시간을 바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그 몸으로 중국 가서 뭐가 제일 힘들었냐고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중국에는 화장실이 대부분 좌변기가 없어서 자기는 다리가 철다리가 때문에 다리를 구부리지를 못해 앉아서 용변을 봐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감사하게 잘 인도해 주셔서 그래도 다녔다는 겁니다. 그 친구는 언제 심장이 멈출 줄 모릅니다. 심장 환자들은 심장에 무리가 오면 도로에서 운전하다 바로 병원으로 가야합니다. 그래서 비상등 켜고 갓길로 운전한 적도 몇 번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근래에 연락을 해보니 또 연락이 안됩니다.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겠지요? 늘 그랬던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나를 또 한번 놀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이영제 목사

사철나무를 열대지방에서 키우려면

(태국 촌부리에서 사역하시는 김정웅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열대지방에 계신 선교사님들이나, 여러분들이 사철나무를 열대지방에 옮겨 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경우 사철나무는 열대지방에서 거의 다 적응을 못하고 죽어버립니다.
그 이유를 알고 보니(이미 알고 있는 것), 겨울이 없어서입니다. 사철나무는 흔히 나이테를 그려가며 한해를 나는데 열대지방은 추운 겨울이 없어서 사철나무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철나무에게 추운 겨울을 만들어주면 됩니다. 

이것이 야외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야외에서 사철나무는 키우지 못합니다.
겨울을 만들어주는 방법은 영하로 내려가도록 실내를 만들고 한 일주 일 쯤 그곳에 놓아두면 나무가 겨울이구나 생각하고 그 때 나이테를 만들고 한해를 지냈다는 것을 알고 계속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춘화처리 : 저온처리에 의한 개화 촉진
춘화처리(vernalization)는 충분히 수화한 종자나 자라는 식물체에서 저온처리를 하면 개화가 촉진되는 과정이다. 건조한 종자는 저온처리에 반응하지 않는다. 저온처리를 하지 않으면 춘화처리를 필요로 하는 식물체는 개화가 지연되거나 영양기에 머물게 된다. 많은 경우에 이들 식물들은 줄기가 신장하지 않고 로제트형으로 자란다.
로제트는 월년성(越年性) 초본식물에서 볼 수 있다. 가을에 이루어져서 겨울의 추위에 잘 견디면서 생활한다. 이듬해 봄 민들레와 같이 잎이 없는 꽃줄기만을 추출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달맞이꽃이나 개망초류와 같이 높게 뻗어 자란 줄기에 많은 잎을 착생하는 것도 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서 다시보는 동방박사 이야기(1)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T 2:2)라고 한다. 이 동방의 박사들을 이해하려면 뭐 별들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그것이 사실이냐, 이런 이야기들은 본문의 핵심이 아니라고 본다.
마태가 왜? 유대인이 아닌 멀리 이방(동방)의 박사들을 소개하느냐 하는 것이다. 마태는 이 복음서를 유대인에게 보내고자 쓰고 있다. 유대인들이 이 편지를 받아보고 무엇을 느끼겠는가? 생각이 있는 유대인이라면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우리가 선택받았던 민족이 아니냐? 우리가 어떤 민족이었는데 왜? 우리가 예수를 못 찾고 저 이방의 사람들이 예수를 찾는가? 그리고 마태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유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요나서를 배웠다. 요나서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엘리야, 엘리사 다음에 요나 선지자를 보냈을까? 그 회개치 않을 것 같던 이방의 니느웨가 요나가 반나절 외쳤는데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 성읍이 멸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마태의 입장에서 유대인에게 그와 같이 이방인은 예수를 영접하러 오는데 너희 유대인은 무엇이냐? 하는 반문을 마태는 하는 것이다. 바로 동방박사들이 떠난 나라들이 니느웨 가까운 지역이라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