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전예배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요 9:11)

소제와 소금언약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막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레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바울은 에베소와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세월을 아끼라”(엡 5:16, 골 4:5)고 했습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것에 어떤 뜻이 있겠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 또한 최선을 다해서 드려야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더 아름다운 예배, 더 주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지 배워야 합니다. 봉급을 의미하는 영어 샐러리(salary)라는 말은 소금(salt)에서 나온 말입니다. 샐러리는 소금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샐러리맨에게는 샐러리가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또한 생명력 있는 예배로 드려져야 합니다. 이런 생명력 있는 삶의 예배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바르게 깨달아,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번제
구약시대 제사의 방법 중에 번제와 소제가 있습니다. 번제는 생명이 있는 것을 바쳐 피를 흘리는 제사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자기의 생명을 드려, 보혈의 피로 말미암는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구약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번제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이 번제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사는 영원한 제사가 되어서 다시 드릴 필요가 없도록 완벽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라고 했습니다. 제사 중에 번제가 없다면 다른 모든 제사가 무의미 합니다. 먼저 번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번제를 드릴 수가 없는 것이고 번제에 해당하는 해결 방법이 바로 내가 드려야할 번제를 다시 드릴 필요가 없도록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소제
그러나 우리가 아직까지 드려야할 제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제입니다. 소제는 성도가 하나님께 약속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헌신의 표인 것입니다. 구약과 같은 방법으로 드릴 필요는 없지만 구약에서 이 소제를 드릴 때 어떻게 드렸는지를 알면 오늘 우리가 좀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제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번제가 드려짐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드려야할 제사의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제인 것입니다.
소제의 히브리말 뜻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드린 자도 기쁘고 받는 자도 기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과 평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혹시 선물을 주고 후회해 본 적이 있습니까? 공연히 내가 주었구나 하는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은 언제 준 것이라도 기억할수록 기쁜 것입니다. 받은 선물도 괜히 받았다 하는 선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소제는 드리는 사람도 기쁘고 그 선물을 받으시는 여호와 하나님도 기뻐하는 제사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나는 이런 제사를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16) 고 했습니다.

소제의 재료
첫째, 필요한 것은 세 가지 입니다. 레 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고운 가루, 기름, 유향이 필요합니다.
고운 가루는 제일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충실한 열매를 골라야 됩니다. 쭉정이나 상한 곡식이 아니고 충실한 열매를 골라서 이 열매를 볶아야 됩니다. 그리고는 이 열매를 빻아야 됩니다. 그리고 채로 쳐서 부드러운 가루를 만들어야 합니다. 곡식 그대로는 하나님께 바칠 수 없습니다. 충실한 곡식이 볶아지는 과정 그리고 빻아져서 고운 가루로 변하는 그 가루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그 곡식 자체가 완전히 죽으려면 볶아져야 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입니다. 곡식이 볶아지는 과정입니다. 곡식의 모양이 그대로 있어서는 가루가 나오지 않습니다. 곡식이 빻아져야 됩니다. 우리의 육을 죽이고 주님 앞에 죄를 회개하는 육이 깨어지는 과정이 있어야 영적으로 가루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의 덩어리가 빻아져야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나쁜 습관의 덩어리들이 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온갖 죄악의 덩어리들이 깨어져서 가루가 되어야만 소제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 익은 것으로 여호와께 드릴 지니라.”(레 2:11) 고 했습니다.
가전제품 중 요즘 유행하는 모델은 아마도 고화질 TV(High Definition, HD TV)일 것입니다. 일반 아날로그 TV에 비해서 무엇이 차이가 있냐하면 바로 해상도입니다. 선이 가늘고 많이 선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고품격으로 드려지려면 고운 가루가 되어서 고화질이 되어야 합니다.

다음에 기름이 필요합니다. “기름을 붓고” 그랬습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사람에게 부을 때에는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에게만 기름을 붓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뜻합니다. 고운 가루만 가지고 안 됩니다. 우리의 희생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성령과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또한 재료 중에서 유향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 유향을 만들 때 출 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라고 하셨습니다. 소금을 쳐서 정결해야 해야합니다. 유황은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향으로 기도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 생활을 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기도 생활을 쉬면 안 됩니다.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둘째, 금지된 재료도 세 가지입니다. 첫째 누룩이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둘째 꿀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레 2:11). 셋째는 처음 익은 곡식으로 드리지만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단에 올리지 말지며”(레 2:12) 라고 했습니다.
누룩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마 16:6)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마 16:12)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잘못된 교훈들이 누룩입니다.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꿀도 안됩니다. 단 꿀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이 먹는 빵은 누룩을 넣어야 됩니다. 부풀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꿀을 넣어 단맛이 나야 빵이 맛이 있습니다. 육을 위해서 먹는 빵은 반드시 누룩과 꿀을 넣어야 됩니다. 과자나 빵이 달지 않으면 맛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육신을 위해서 먹는 빵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되는 누룩과 꿀을 넣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누룩은 거짓교훈을 말합니다.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니라”(잠5:3)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 멍에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25:27)
꿀을 많이 먹는다는 것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꿀은 달기 때문에 자꾸 먹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을 부리는 것을 꿀에다가 비유했습니다. 거짓 교훈과 악을 재물에 섞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 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가 강의하는 것은 온갖 것으로 재미있게 꾸미고 인기를 얻기 위하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는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은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십니다(레 1:9, 13, 17, 2:2). 그런데 왜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단에 올리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꿀처럼 달고, 향기로운 것은 하나님께 언약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으로 지금도 많이 하나님께 드리는지 모릅니다. 이것들은 순수하지 못한 불순한 것들입니다. 마치 선교하면서 내가 했다고 하는 일 중심, 업적 중심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본문 레2:13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고 했습니다. 소금 없이는 소제 자체가 불가능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소금을 강조하셨겠습니까?
김장철에 입이 무성한 파란 배추를 가져다가 소금을 팍 쳐서 절궈 놓아보세요? 몇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강했던 배춧잎이 기가 팍 죽어있습니다. 우리의 자랑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이 있다면 소금을 쳐서 기를 퍅 죽여야합니다. 하나님께는 교만함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첫째, 소금은 맛을 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눅 14:34)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욥 6:6)
생선을 먹기 힘들게 하는 것은 특유의 비린내인데 소금은 이 비린내를 줄여줍니다. 소금을 뿌리면 비린내를 내는 주성분인 ‘트리메탈아민’ 이 생선살 밖으로 빠져나온답니다. 이렇게 소금을 뿌려 비린내를 제거한 음식을 ‘자반’ 이라고 부릅니다. 해산물 중에는 끈끈한 점액을 내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문어나 전복은 끈끈한 타액을 내어 먹는데 불쾌감을 줍니다. 점액이 묻은 부위에 소금을 뿌리고 긁어내면 쉽게 없어진답니다.
사람에게 맛을 느끼게 하는 성분은 나트륨이온(Na+) 입니다. 이 나트륨이온의 농도가 적당하면 입맛을 다시지만 과하면 불쾌감으로 바뀝니다. 소금은 골고루 쳐야합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지난번 결안 부침을 먹는데 소금을 잘못 쳐서 한쪽은 짜고 한쪽은 싱거운 것입니다. 소금은 골고루 쳐야 합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되 잊지 마셔야 할 것은 골고루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염분)이 없으면 지구의 많은 생물은 목숨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소금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사람의 경우 고혈압, 신장병, 심장병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염분 과잉 섭취를 두려워하여 소금을 너무 섭취하지 않아서 병원에 실려 가거나 사망하는 사람도 나오고 있답니다.

둘째, 정결케 합니다.
출 30:35에 향을 만들 때도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예전에 마땅한 약이 없을 때는 소금이 제일이었습니다. 소금으로 소독을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에 보면 이방민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겔 16:4) 라고 했습니다. 소금은 깨끗하게 하는데 필수적입니다. 1리터의 소금(큰 숟가락으로 하나정도)을 물에 넣고 20분 정도 삶으면 때가 깨끗하게 빠집니다. 기름으로 더러워진 때도 말끔히 빠지면서 섬유는 상하지 않습니다. 프라이팬이의 생선기름도 프라이팬을 달구고 소금을 조금 넣어 닦아내면 깨끗해집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풍습이 있었습니다. 아주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집에 왔다 가면 “소금 뿌려라.” 그럽니다. 죄 많은 사람이 왔다갔기 때문에 그 죄를 씻어야 한다는 표시입니다.
“아비멜렉이 그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삿 9:45) 고 했습니다.
어느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이런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아이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대답은 교수, 의사, 법조인 등 여러 가지가 많이 나왔는데 한 어머니가 답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아이가 미안합니다. 제 잘못이라는 말을 정직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변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민 18:19)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대하 13:5)
어느 날 콜럼버스는 포르투갈 해변을 거닐다가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 열매를 보며 틀림없이 바다 건너편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다 끝까지 가 보기로 작정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긴 항해는 그 열매의 원산지인 아메리카 신대륙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한 작은 열매 속에서 거대한 세계를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1492년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나와 소금으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까? 소금은 맛의 왕입니다. 모든 맛을 지배하는 맛이 소금이라고 합니다. 소금의 맛을 이길 다른 맛이 없답니다. 단맛도 신맛도 소금을 이기지 못한답니다. 그러므로 소금은 모양을 부풀게 하고 맛을 변질시키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맛을 더 맛나게 하는 근본 맛이 소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소금도 없이 간 내먹다.’ 는 말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련하지도 않고, 또 밑천도 없이 큰 이득을 차지하려 하거나, 몹시 인색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금도 없이 나아가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 소금이 있어야 합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 없어질 때 비로소 골고루 퍼지게되고 맛이 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완전히 녹아지고, 부서지고 빻아져서 고운 가루가 되어 하나님께 소제로 드려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와 스팸(SPAM)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2-36)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가혹한 차별 대우를 받은 사람이 조선시대의 백정입니다. 백정은 기와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고 비단 옷도 입지 못하게 하였으며, 공부도 못하게 하였고 항상 허리를 구부리고 다니게 했습니다.
이런 일을 안타깝게 여긴 사무엘 무어 선교사는 양반과 상놈의 구분 없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면서 고종의 주치의인 의사 에비슨과 함께 백정들에게 전도했습니다. 첫 번째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박성춘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고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왕에게 탄원하여 마침내 1895년 6월 6일 백정 신분을 철폐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박서양은 1908년 6월 세브란스 의과대학 제1회 졸업생 일곱 명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2). 사람을 자유케 하는 일을 실천하는 자가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하신 일을 이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내 명예와 학식, 물질 등으로 다른 사람을 자꾸만 노예로 삼으려고 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는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참다운 자유는 아무리 높이 평가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 투쟁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투쟁은 대부분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혁명이나 명예혁명, 불란서의 대혁명, 미국의 독립전쟁이나 노예해방을 위한 남북전쟁 우리나라의 3.1. 만세운동 등이 모두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어느 역사학자는 『세계사의 의의와 가치는 자유와 해방을 위한 투쟁에 있다』고 했습니다. 페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습니다. 스탈린의 딸도 철의 장막인 소련 공산체제에서 망명해 나왔습니다.

종이 왜 됩니까?
정신 못 차리고, 가난하니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가난은 왜 옵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오는 가난은 하나님에 의해서 오는 것입니다. 축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처음 하신 말씀이 복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후에도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고 하셨습니다.
모세에게도 신 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며 복을 주시기 위해서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복을 주시려고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더 발전된 상태로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 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불러주신 것은 구약성경에도 명백히 기록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바벨론 70년 종살이했다는 것 역시 지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 예수님께 자기들이 종살이 한 적이 없다고 한 것은 거짓일 뿐만 아니라 교만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습니다. 종살이하는 것입니다.

자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 자유와 또 하나는 영혼의(정신적) 자유입니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하나님은 만드시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꾀임과 인간의 교만으로 그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죄가 인간에게 들어왔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적인 용어로 ‘원죄’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원죄’와 내가 지은 ‘자범죄’가 있습니다.
본문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때린 사람은 오그리고 자도 맞은 사람은 다리 뻗고 잔다.”고 했습니다. 육체적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신적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정신적 자유가 죄인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2호선 전철을 타고 당산역을 지나 한강을 건너가면 바로 오른쪽으로 보이는 곳이 절두산입니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쓰면서 여기서 천주교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는데 정확한 수는 알 수 없고 약 1만 여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즉 “먼저 자르고 본다.”는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광기 어린 칼 아래 머리를 떨구었고 그래서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때 목을 베던 자가 칼로 한 사람씩 목을 베면 그 영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칼을 주면서 내 목도 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예수님에게는 자유가 있습니다(고후 3:17).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사람들은 자유를 잃은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토스트예프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에 보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사회의 암적 요소인 고리대금업자 노파만 없어지면 그 사회의 여러 사람들이 경제적인 압박에서부터 자유 하리라고 생각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노파를 살해합니다. 그러나 라스콜리니코프는 정당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정의와 자유가 실현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 자신이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형벌을 받게 될 때에 그는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자유
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종의 멍에가 무엇입니까? 본문의 말씀처럼 바로 죄를 범하는 자입니다. 죄를 범하면 종이 됩니다. 누구에게 종이 됩니까? 죄에게 종이 됩니다. 사단에게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천하만국을 다 보여주면서 그것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원래 하나님의 것인데 사단이 뭘 주겠다는 겁니까? 그것은 유혹이었습니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사단에게 빵을 받아먹으면 사단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것은 선언입니다. 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인간의 원죄와 나의 자범죄를 모두 해결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케 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
신 15:18 “그가 육년 동안에 품군의 삯의 배나 받을 만큼 너를 섬겼은즉 너는 그를 놓아 자유하게 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종이 안식년이 되어서 나가겠다고 하면 자유롭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남을 속박하려고 합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 일 수 있습니다. 공산당은 사람을 속박하였습니다.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그 결과 망했습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해 주세요.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스팸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창의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산업시대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손으로 만든 것은 싸고, 기계에서 나온 것은 다 비싸다.” 는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이 많아서 인권비가 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이 하는 일은 아무리 정교해도 100% 똑같기는 어렵습니다. 조금씩은 다릅니다. 그러나 기계가 찍어낸 것은 다 똑같습니다. 창의적이지 못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것이 음식 문화에까지 파고들어 1920년대부터 미국인들의 식탁에 올라오게 된 호멜(Homel Foods)사의 돼지고기 햄 통조림 상표인 스팸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 김치를 지나치게 획일화(표준화) 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김치에 표준이 어디 있습니까? 만드는 사람마다 집집마다 맛이 다른 것이지요. 획일적인 것은 다양성을 헤치기 때문에 창의성을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스팸이 한국에는 미군부대를 통해서 의정부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여기에다 김치를 넣어서 끓여 먹었습니다. 이것이 ‘부대찌개’의 원조가 된 것입니다. 한국에 오면 스팸도 변화됩니다.

둘째는 강제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스팸이 지금처럼 보통 명사가 된 것은 영국에서였습니다. 광고로 이루어진 드라마에서 손님이 좋아하든 아니하든지 간에 끊임없이 강제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광고 제작자는 마치 정보의 홍수시대를 예견이나 한 것처럼 마구 밀어 부쳤습니다. 결국 “무차별적으로, 쓰레기 같은” 이미지가 붙여지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이러한 스팸메일이 전체의 8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요즘 선교로 사용하는 영어단어 Mission에 대해서 굳이 고집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없는 용어일 뿐 아니라 너무 남에게 밀어붙이는 성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선교를 제한하는 나라들에 갈 때는 굳이 Mission을 사용하지 말자는 의견입니다. 대신에 ‘서비스’를 강조하자는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 또는 도와주는 사람으로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강제로 밀어 붙여서 되는 일이 아니라 섬기며 봉사할 때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고전 8: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자유함의 절제
벧전 2: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우리가 자유하게 되어서 약한 자를 핍박하고 내 악을 가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속된 말로 남을 등쳐먹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 22:22),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신 10:18) 라고 말합니다.
고전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자유는 스스로 다스려질 수 있을 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자유가 내게 주어진 것은 나 혼자 잘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그의 저서 『기독교인의 자유』에서 『기독교인은 모든 것 위에 서 있는 자유로운 군주로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은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고 종으로서 누구에게도 예속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유자인 동시에 종인 것입니다.

본문 35절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란 종이 아닌 아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릅니다. 아들은 영원합니다. 아들만이 자유를 줄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주인이 종을 풀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자유자 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유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시 사용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와 속죄제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레 5:8 제사장에게로 가져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 그 머리를 목에서 비틀어 끊고 몸은 아주 쪼개지 말며 9 그 속죄제물의 피를 단 곁에 뿌리고 그 남은 피는 단 밑에 흘릴지니 이는 속죄제요 10 그 다음 것은 규례대로 번제를 드릴지니 제사장이 그의 범과를 위하여 속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몇 일전 서은이하고 동화책을 보았습니다. 동화책에 푸른 언덕 위에 교회처럼 생긴 아름다운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교회다”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서은이가 “교회 아니야!” 그러는 겁니다. “왜?” 그랬더니 “십자가가 없잖아!” 하는 것입니다. 서은이의 말은 정답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요즘 십자가 없는데 교회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5살 어린이 서은이보다 모른단 말입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하고 직접 만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을 뽑으라면 당연히 모세입니다. 모세만큼 하나님하고 가까이에서 많은 만남과 대화를 나눈 사람은 없습니다. 출 24: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그리고 모세는 십계명 돌 판을 가지고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증거입니다. 아마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아서 모르지 당시 사람들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을 있었으니까 석공처럼 십계명을 파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치 도마 같은 의심 많은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직접 새기신 것은 누가 보아도 사람이 쪼아서 새긴 것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증거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기 이전에 제일먼저 만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것을 둘 증거궤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출 25:10-16). 그리고 이 증거궤를 둘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곳을 속죄소라고 합니다(출 25:17-22). 성전의 핵심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전은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이냐 하면 속죄소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장막 가운데 거하시려고 했던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곳을 만드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여기까지가 출애굽기입니다. 성경 다음 권은 레위기 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다룬 책입니다. 성전을 만드셨으니 이제 어떻게 하라고 그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속죄제는 먼저 드려져야 합니다.

레위기의 핵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성전의 목적이 속죄소를 만드는 것이었다면 제사도 마찬가지가 되어야합니다. 제사 역시 속죄제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본문 레 5:8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을 먼저 드리되…”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제사가 있지만 사람이 자기 죄를 속하려고 제사장에게 와서 속죄제를 부탁하면 다른 모든 제사를 미루고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제일 먼저 드려져야할 제사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제사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 23:26)

혹시 제 설교를 너무 잘 들으셔서 기억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구약 제사에 관해 대략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사의 종류와 순서를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시나요? 처음 제사가 무엇이라고요? 속건제 -> 속죄제 -> 화목제 -> 소제 -> 번제입니다. 그런데 속건제와 속죄제에 대해서 이해를 잘 하셔야 합니다. 레 5:6 “그 범과를 인하여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양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속건제를 드리되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과 문제로 속건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나 자신의 일로 이 또한 속죄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렵습니까? 다른 사람의 문제로 죄 사함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은 곧 내게는 속죄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건제는 속죄의 방법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5장 23절로 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식으로 보면 속건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님 간증입니다.] 서대문에서 목회 할 때 대게 성도들이 극빈자이고 교회 재정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학생 한 사람이 도움을 청하여서 우리 교회에서 밤에 교회를 지키고 교회를 돌보면 등록금을 우리가 대어 주고 그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주일 예배를 필하고 난 다음에 월요일 날 오니까 이 사람이 달아나고 없는데 보니까 교회 그 날 주일날 헌금 거두어서 넣어 놓은 금고를 깨어 가지고서 돈을 다 훔쳐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저는 아주 그냥 절망에 처했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매주일마다 받는 헌금을 가지고 겨우겨우 교회를 운영해 나갔는데 그만 돈이 송두리째 없어졌으니 그 충격은 말로다 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한 결과에 하나님이 도와 주셔서 교회는 그대로 그 충격을 이겨냈는데 한 3년이 지난 후에 제가 어느 곳에 가서 부흥회를 하는데 아주 이발도 하지 않고 수염을 기르고 행색이 굉장히 초라한 한 젊은이가 내게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목사님! 저를 알지요.” “알고 말고.. 너 고학생으로써 우리 교회에서 도와줬는데 금고를 깨고 돈 훔쳐간 놈 아니냐?” 그러니까 그 놈이 하는 말이 “그것다 옛날 일입니다. 나는 그때 이후로 기도원에 가서 죽도록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다 받았습니다. 목사님도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속죄제와 속건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은 속죄제물만 드리면 되지만 하나님과 사람에게 범죄 한 것은 속죄만 해서는 안 됩니다. 속건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보상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했더니 머리 좋으신 분이 그럼 하나님께 잘못한 것 용서받는 것이 더 쉽네요?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가벼운 용서가 아니라 지독한 희생을 치러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값없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 갚기도 힘든데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은 어떻게 갚습니까? 사실 갚을 길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속죄제물을 먹어야 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속죄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속죄제 희생은 지극히(가장, 제일) 거룩하니 여호와 앞 번제 희생을 잡는 곳에서 그 속죄제 희생을 잡을 것이요”(레 6:25) 번제는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의 의미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바로 이 번제를 드리는 장소에서 속죄제의 희생제물도 함께 바칩니다. 우리의 속죄는 곧 하나님께 나아가는 번제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이 드린 속죄제물 중 불살라 바친 내장부위를 제외한 나머지 고기를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했습니다. 속죄제의 고기는 거룩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고기를 만진 사람도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레6:27). 우리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마지막 밤을 제자들과 지내면서 만찬을 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마 26:26) 예수의 몸은 속죄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속죄제물은 거룩한 것이고 이것을 만지는 모든 자가 다 거룩해 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속건을 위한 속죄제는 누구나 드려야합니다.

속죄는 지극히 개인적이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아무도 이 속죄제를 드리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제물이 필요합니다. 제사를 지내는데 제물 없이 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담이 되어 가난한 자는 제물이 없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죄제 만큼은 각자의 수준에 맞추어 드릴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첫째, “…양떼의 암컷 어린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레 5:6)
둘째, “만일 힘이 어린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 가되”(레 5:7)
셋째,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일을 예물로 가져다가”(레 5:11) 드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속죄제를 못 드린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에바 십분 일은 약 2.2리터입니다. 한끼 먹을 수 있는 양식만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 속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이 규례는 가난한 자를 위한 규정이지 충분히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비둘기나 고운 가루를 드리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눅 21:2-4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이것은 감사하기 위한 것이지 속죄하기 위한 제물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주셨습니다.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도 필요 없습니다. 본문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구약시대 제물을 바칠 때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 1:4)고 했습니다. 제물의 머리 위에 안수하는 것은 나를 대신하여 이 양이, 염소가 또는 비둘기가 아니면 고운 가루가 내 대신 드려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 대신 죽는 동물에게 얼마나 미안하겠습니까?
제가 5-6살 때 아버님이 장터에서 옷 장사를 하셨는데 내가 장에 나가면 옷에서 뒹굴고 장사를 방해하니까 어머님에게 연락해서 항상 나를 데리고 가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장날을 알고 내가 나가는지 모른다고 부모님이 그러셨습니다. 어떻게 장날을 알았느냐? 그 비밀을 공개합니다. 시골 장날이 되면 소장이 먼저 열립니다. 우리 집 고개 너머의 마을에서 소가 줄을 이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날이 바로 장날입니다. 그런데 소 눈을 보면 눈물이 한 방울 맺혀있습니다. 그리고 ‘엄마~’ 하며 웁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갈 것을 소가 아는 모양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속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만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아픔이 있습니다. 쓰라림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선교사였던 보먼 박사가 인도 켈거타의 나환자 수용소 안에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준공식이 있던 날 82세의 한 인도 노인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을 하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박사가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나이에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했습니까?” 그러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많은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해서 죽어준 신은 한 분도 만나보지 못했는데 예수님만이 나를 위해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 모든 죄를 지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공로를 통하여 값없이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의인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십자가가 없다는 것은 속죄제물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오직 우리의 죄를 속해야 가능합니다. 우리의 죄가 속해지느냐 아니냐는 이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속 하신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롬 8: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속죄제가 마쳐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죄가 속해 졌으니 정죄함이 없고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겸손으로 맞이하는 하나님의 말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41. 겸손으로 맞이하는 하나님의 말씀) / 본문 :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감리교의 창시자는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입니다. 두 사람은 목회의 방법이 같았고 구령의 열정도 똑같았습니다. 그러나 신학에 대한 이해는 달랐습니다. 하루는 이 두 사람의 신학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던 한 사람이 휫필드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웨슬리 목사님과 신학과 진리에 대한 이해가 다른데, 목사님께서 천국에 가시면 웨슬리 목사님을 만나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휫필드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천국에서 웨슬리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휫필드의 대답이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은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우주에 관해 아는 지식은 바닷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바다의 신비에 대해 아는 지식보다 적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교만한 자가 세상의 큰 인물이 되었거나 존경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혜롭고(sofw’n:솝혼)는 ‘현명한, 깨끗한’ 이라는 뜻인데 이 단어는 본문과 평행 구절인 눅 10:21에 나오고 두 번 더 나오는데 바울이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고전 1:19)와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고전 3:20)로 사용함으로 예수께서 사용하신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와 마 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에 사용한 ‘frovnimo”:프흐로니모스’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슬기 있는 자들(sunetw’n:쉬네톤)은 ‘집중하다, 현명한’ 인데 어근은 ‘sunivhmi:쉬니에미’에서 나왔습니다. 이 뜻은 ‘모으다, 이해하다, 경건하게 행동하다, 고려하다’입니다. 이 단어 역시 바울이 고전 1: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라고 사용했습니다.
이 두 단어의 결론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에 이르기 위한 지혜와 슬기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자신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예수님 보다 하나님 보다 더 똑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신 무리는 놀랍게도 어린 아이들입니다.
어린 아이들(nhvpio”:네피오스)은 ‘말 못하는 갓난아이’를 말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e[po”:에포스’(말)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아이를 강조하기보다는 ‘말’을 강조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본문과 평행 구절인 눅 10:21에 나오고 성경에서 한번 더 나오는데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고 했습니다.

말 못하는 이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마음이 닫혀 있는 것도, 무비판적인 것도 아닙니다. 겸손이란 자신의 한계점을 인정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또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서는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 139:6)라고 고백합니다. 본문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고 했습니다. 왜 이 고백을 먼저 하셨겠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천지의 주재’ 천지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고백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반(反)계몽주의도, 반(反)지식주의도 아닙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남의 무한하신 존재가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초월하시며, 그의 생각과 길이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그렇게 우리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사 55:8, 9),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로 그를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고전 1:25)는 것을 겸손하고도 진지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후 10:5에서 바울은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은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대로 바울은 자신의 지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도 공부해야 하고, 구원에 이르는 방법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가 오랜 해외 순회공연을 마치고 귀국하여 독창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팬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공연 시간이 다 되었는데 가수는 나타나질 않습니다. 사회자가 사색이 되어 지금 비행기가 늦게 도착하여 좀 늦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다리는 동안 촉망받는 신인가수 한 분의 노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신인 가수가 무대로 올라와 정중하게 인사를 하지만 청중들은 본체도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누구 한사람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 그 때 갑자기 2층 출입구에서 한 아이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빠 정말 최고였어요.” 신인 가수의 눈에선 눈물이 반짝였습니다. 그리고 청중들 사이에 따스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신인 가수는 바로 루치아노 파바로티였습니다. 훗날 그는 오페라 공연 때 한시간 동안 박수가 그치지 않아 165번이나 커튼콜을 받는 기록을 남기며 세계 최고의 테너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는 말 못하는 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호랑이요? 곳감이요? 아닙니다. 교만이 제일 무서운 것입니다. 교만 때문에 죄가 하와와 아담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런데 교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못 들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 교만의 죄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목사입니다. 목사의 책임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용기 없는 자에게 용기를 주고, 힘이 없는 자에게 힘을 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 자신은 힘들고 어려워도 말하지 못합니다. 목사가 힘이 없어 축 늘어져서 설교해 보세요. “목사님께 은혜 받으려고 왔는데 내가 은혜를 주고 가야 되겠네” 그러실 겁니다. 그렇다 보니 저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늘 거짓으로 설교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단에서 용기를 가지고 단호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면 자칫 거만하게 될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사의 딜레마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강단이란 “높이 들린 곳” 이어서 오직 여호와의 보좌만이 누려야 할 그런 높고 고귀한 장소입니다(사 6:1). 감히 그곳에 홀로 서 있는 목사의 심정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목사를 위해서 왜 기도해 주셔야 하는지 아셔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것이 두려워서 교회 목회를 안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을 뭐라 할 것이 못됩니다. 목사 자신도 자신의 영혼이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용감한 목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만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윌리엄 캐리는 위대한 선교사이며 우수한 언어학자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인도의 34가지 방언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가 선교사로 인도에 왔을 때 어떤 이들은 혐오와 경멸의 눈으로 그를 보았습니다. 어느 만찬회 석상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한 사람이 캐리를 망신시키려고 여러 사람이 듣도록 큰 소리로 “캐리씨, 당신은 옛날에 구두 짓는 사람이었다면서요?”라고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캐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구두 짓는 사람이 아니라 구두 수선공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겸손한 설교자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사색에 따라서 성경에 다른 것을 덧붙이거나, 자기 자신의 편견에 따라서 성경의 내용을 제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자가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바로 여기 또 있습니다. 성경이 밋밋하다고 생각하여 자기들의 끓어오르는 거품으로 그것을 신선하게 만들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다 자기 자신의 독창성을 부여한다고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그것을 개선시키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때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말씀을 빼는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오늘날에도 신학을 계속하여 발전시킨다는 명목아래 행해지는 신학적 자유주의(theological liberalism)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내는 사색가가 아닙니다. 현재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그것을 잘라내는 편집가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복음주의적 설교가로 유명한 존 스토트(John R.W. Stott)목사 같은 분도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산상수훈을 한 절씩 설교해 나가는데 이혼 문제에 대해서 주께서 말씀하신 마태복음 5:31, 32절을 다룰 차례가 되었습니다. 목회사역 25년째 되는데 그동안 한번도 이혼 문제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문제를 덮고 지나가고 싶었습니다. 이혼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수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목사로서 전문가가 아니야 하고 지나갈 수 있는 문제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교를 하게 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교인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얼마나 고민하고 그냥 넘어가려고도 몇 번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는 청지기어야 합니다. 누구의 청지기입니까? 하나님의 청지기이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존경할만한 청지기 역할을 한 분들이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선구자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는 당시 제도권의 교회에 홀로 잘못된 것을 지적한 사람입니다. 이 당시에 다른 성직자의 잘못을 비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교황주의의 부패와 화채설의 오류들을 담대하게 공박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롤라드(the Lollards)라고 부릅니다. 이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단 죄목으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녹스(John Knox)의 용기도 대단했습니다. 1559년 제네바의 유배 생활에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는데 이 때 잉글랜드에서 란돌프(Randolph)를 특사로 임명하고 엘리자베스에게 긴급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습니다. “500개의 나팔을 귀에다 계속해서 울리는 것보다 한 시간 동안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더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Queen Mary)이 스페인의 왕 펠리페(Philip)의 왕자 돈 카를로스(Don Carlos)와 결혼을 추진하자(이 일을 통해서 교황의 권세와 스페인의 종교재판(Inquisition)을 스코틀랜드로 끌어들이는 일) 녹스는 공개적으로 그것을 반대하고 설교했습니다. 메리 여왕은 그를 몹시 싫어하게 되었고 눈물을 흘리면서 원수를 갚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녹스는 1572년 사망하여 에든버러(Edinburgh) 센자일스(St. Giles’) 교회당 뒤뜰에 묻혔는데 그 당시 섭정을 했던 모튼백작(the Earl of Morton)은 그의 무덤에서 말하기를 “절대로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 여기에 누워있다” 하였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해 왔으며 이를 위하여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스스로 말씀을 피하거나 더하는(꾸미는) 일을 우리 자신들도 모르게 하고 있습니다. 전달하는 목사는 골라 전할 수 있지만 말씀을 받는 여러분 또한 골라서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까? 내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입니다. 그 출발선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서는 안됩니다. 내 것은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것만이 말씀을 받는 비결입니다. 말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될 때 하나님이 내게로 들어오십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바로 여기서 말하는 이 지식의 의미가 오늘 본문이 말하는 지식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을 교환합니다. 지식이 빨리 교환된다는 것은 이 지식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오늘날 교만한 자들도 힘을 합합니다. 사단은 겸손을 막고 있습니다. 바로 지식으로 막고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위대한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있었던 일화입니다.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처가 도착할 기차역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기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은 1등 칸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손님이 다 내릴 때까지 슈바이처 박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2등 칸을 타고 왔나 생각해서 사람들은 다시 2등 칸 쪽으로 몰려갔습니다. 역시 거기에도 슈바이처 박사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3등 칸 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3등 칸의 맨 끝에서 슈바이처 박사가 내리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박사님처럼 위대하신 분이 왜 3등 칸을 타고 오셨습니까. 1등 칸을 타고 오실 수 있었을텐데요.” 그러자 슈바이처 박사가 말하였습니다. “4등 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성경의 중심, 인생의 중심 십자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9. 성경의 중심, 인생의 중심 십자가) / 본문 : 요 19:23-30

“23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들에는, 제일 중요한 사건은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기사는 두 개의 복음서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과 십자가의 사건은 모든 복음서 기자가 기록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엄청난 양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배경과 달리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은 떠들썩하게 지내면서 정작 예수님의 죽음에 우리는 함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전도서 7:1-2에서는 출생하는 집이나 잔치 집에 가는 것 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났다고 했습니다.

대개 전기의 종류들은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부분들이 아무리 많아도 전체의 10%가 넘지 못합니다. 간디나 마틴 루터킹 목사 같이 암살 당하고 정치적으로 상당히 의미를 가지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의 약 삼분의 일 가량이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부활에 관한 기사는 사복음서 모두가 기록하고 있지만 양으로 볼 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개 전기를 기록할 때 인물의 업적이나 공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그의 학문적 지식이나 업적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죽음은 그저 슬그머니 넘어가는 것이 상식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들(통일교)의 주장처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메시야로서 실패를 했다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그가 메시야가 아니었다면 굳이 그의 참혹한 십자가의 사건을 이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기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나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 적어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야기를 많이 기록하였겠습니까? 요한사도는 그의 복음서 맨 마지막에서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요 21:25)고 했습니다. 엄청나게 몰려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병 고침을 받고 환호하는 사람들, 오병이어 때, 칠병이어 때 예수님께 물고기와 떡을 얻어먹은 사람들의 간증들, 베드로와 제자들이 목격한 물 위로 걸으신 사건과 하늘에서의 소리들 그 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기적이야기, 예수님이 어떻게 숙식을 해결하고 다니셨는지,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결을 했는지 등 수 많은 이야기 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 듯 보면 재미도 없고 비슷한 이야기를 네 명의 성경 기자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의 일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중심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바울사도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에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학자입니다. 그런 그가 십자가를 만나고 세상 모든 학문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 형벌은 고대 군주 국가인 페르시아나 페니키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로마 제국의 확장으로 인해 일종의 사형 제도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형은 당시의 사형 제도 중에서 가장 참혹하고 잔인한 제도였기 때문에 자국민인 로마인에 대해서는 이 형벌을 적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에 포청천이라는 판관이 나오는데 이 때 사형을 집행하는 방법이 목을 자르는 작두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두형을 받을 때 두 가지 작두가 나옵니다. 하나는 서민을 처형시키는 개 작두이고 하나는 고위층을 사형시키는 용 작두입니다. 한번은 드라마를 보는데 자기는 양반이니 죽여도 꼭 용 작두에 죽겠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로 말하면 용 작두가 아닌 개 작두인 샘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달려야할 그 참혹한 십자가에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왜 하필 섭리는 가장 결정적인 때 얼굴을 감추고 마는 걸까?
마치 맹목적이고 멍청하며 무자비한 자연의 법에
스스로 굴복해 버리는 것처럼…(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구약성경을 속독하여 내려오다 보면 유대인들을 택하신 하나님은 애굽을 탈출하여 엄청난 기적을 베푸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잘 듣고 순종하면 늘 축복이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아들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언제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불타는 가마솥에서도 죽지 않았습니다. 출애굽의 여파와 온갖 기적으로 가득 찬 구약의 여운이 아직 귀에 쟁쟁하고 눈에 어리는 가운데 신약의 첫 성경인 마태복음에 이르게 되고 어느덧 오늘 본문의 말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마지막 한 마디가 귓가에 남습니다. 본문 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셨는다는 것인지?

예수님이 마지막 주간을 보내신 기간은 유월절 기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출애굽 할 때 맨 마지막 재앙에서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도 모든 첫 것, 장자를 죽이셨는데 양의 피를 발라 유대인임을 표시한 집안은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모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대인의 유월절을 기억하고 모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기적이 마지막으로 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보여주신 갖가지 기적들로 볼 때 충분히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하실 분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호산나’를 외친 것입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느꼈을 ‘아 끝장이다!’ 하는 심정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망치로 머리를 맡은 것처럼 멍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둘 실망에 차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뒤돌아보며 발길을 돌렸습니다.

누구보다도 제일 실망한 것은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6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한 그 사랑의 제자,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마지막까지 있었던 요한이 영적 통찰력이 제일 뛰어난 복음서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 부분에 최후의 만찬 사건을 제일 길게 다룹니다. 요한복음 13-17장에 걸쳐 나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역시 유대인이기 때문에 유월절 떡과 포도주를 먹고 기념하기 위해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최후의 만찬이지 제자들은 당시 그것이 최후의 만찬이라고 생각한 제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출애굽 기념으로 모였을 때 제자들이야말로 그 날의 영광을 재현할 분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애굽’이라는 단어 대신에 이제는 ‘로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꿈이 성취되는 듯한 흥분에 사로잡혔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눅 22:29)야겠다고 하셨고,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셨으니 착각할 만도 합니다. 그리고 계속 요한복음을 읽어가노라면 그 날 밤 만찬의 흐름을 단절시켰던 사건이 소개됩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요 13:3)이라고 하시고선 난데없이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십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요 13:4) 일어나 마치 종의 모습을 하신 체 허리를 굽혀 제자들의 발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주십니다. 베드로는 발을 예수님께 내 놓기가 민망했던지 안 닦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아마 발이 더러웠던지 아니면 지금 예수님이 발이나 닦고 있을 그런 한가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일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기는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당시엔 발을 씻기는 일은 하도 천해서 종이 유대인인 경우엔 아무리 주인이라 해도 그런 행위를 요구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발을 씻기는 장면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스캇 펙(M. Scott Peck) 같은 작가는 이 일을 예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습니다. 갑자기 수건을 두르신 예수님이 맨발로 내려와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아마도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상식적으로 당시의 사회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신경이 날카로워 졌습니다. ‘서로 누가 높으냐’ 이런 토론 할 기분이 아닙니다. 괜히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고 있을걸 3년의 세월이 그 고생이 헛것이 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실망감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다 이루었다”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이제 그를 따라 다녔던 제자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성경의 중심에 두셨습니다. 십자가 그 모든 것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십자가를 하나님은 오페라로 말하면 클라이막스로 만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모두 맞춘 것입니다. 무엇이 포인트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알면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으면 우리 모두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두 담겨 있는 것, 하나님 은혜의 모든 것, 우리를 위해 대답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대답하십니다. 이 한 분이 지신, 이 하나의 사건이 온 인류의 억 만가지 문제를 풀어주고 짐을 벗겨주며 길을 열어줍니다.

세계 3대 박물관을 꼽으라면 영국 박물관,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 그리고 사람들이 머뭇거립니다. 미국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을 거론할지 아니면 중국의 보물을 다 가져다 놓은 장개석의 타이완 박물관일지, 그러나 영국의 초등학교에서 가르치기는 세계최고의 박물관은 러시아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쥐 박물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에르미타쥐 박물관에는 레오나르드다빈치, 라파엘로, 고흐, 피카소 등 엄청난 진품들이 있습니다. 제가 1995년 처음 방문했는데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 이 박물관을 팔면 러시아가 3백년동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모나리자, 비너스도 있습니다. 이태리 바티칸 박물관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있습니다. 엄청난 보물들입니다.
박물관마다 최고가 있습니다. 그럼 전 세계 최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영국 박물관에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입니다. 로제타스톤은 프랑스군이 이집트에 가서 작전을 하는 1779년에 군인들이 가서 로제타라고 하는 마을에서 작전을 하다가 그곳에서 많은 유물, 문화재를 발굴해냅니다. 그 당시는 점령한 군인들이 가져가는 것이니까 프랑스 군대가 그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가져가다가 영국군하고 싸움이 붙어서 영국군한테로 넘어갑니다. 영국 박물관이 갖고 있는 가장 값진 보화입니다. 그건 비석입니다. 길이가 114cm 폭이 72cm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은 돌로 된 비석이 어떻게 세계에서 최고로 유명한가 하면 그것은 바로 이 비문 제일 위에는 이집트 상형문자가 있고, 중간에 이집트 Demotic가 있고, 맨 아래 그리스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이 상형문자을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 것입니다. 알파벳은 모두 아니까 이 알파벳을 통하여 애굽의 상형문자의 해석의 길이 열렸습니다. 애굽은 세계를 가장 오랫동안 지배했던 최강대국입니다. 4천년을 강대국으로 내려왔습니다. 세계를 지배했지만 그 많고 많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의 문헌은 비석이든 책이든 하나도 못 읽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상형문자라 모릅니다. 어떤 고고학자도 어떤 학자도 상형문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들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이 상형문자를 알 수 있는 길이 제 각각 어떤 짐작을 할 뿐이지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길이 없는데, 로제타스톤이 나오면서 그리스어가 있으니까 그리스어로 이걸 풀다 보니까 전 애굽의 수많은 그 비문, 말할 수 없는 역사적인 자료가 한 순간에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제타스톤이라고 하는 것은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귀한 보화 중에도 보화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를 푸는 키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문제를 풀 수 있는 로제타스톤입니다. 로제타스톤은 애굽에 있는 그 글만 알려줄 뿐이지 세계 인류의 문제를 대답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많고 많은 문제, 국가의 문제, 가정의 문제가, 오늘 날 이렇게 과학이 발달해도 못살아 가지고 야단인데 이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인류의 죄의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줍니까? 해결을 고사하고 알 수도 없습니다. 공자도 물론 모릅니다. 공자는 ‘내가 아침에 알면, 나는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또한 獲罪於天(획죄어천), 無所禱也(무소도야)니라 ‘하늘을 향해 진 죄는 빌 곳도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민 고민 하다가 고행을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나도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業報衆生 濟度不能(업보중생 제도불능)이라 ‘자기가 진 죄는 자기가 다 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인간은 어느 길로 가야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인생의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우리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짐은 어떻게 벗어야 합니까? 누가 우리를 자유케,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래서 성경을 보화이며 비밀의 책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푸는 키입니다.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마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막 8:34, 눅 9:23)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한참 전에 십자가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별도로 마 16:2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오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십자가를 지셨고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천하를 모두 넘어뜨려도 십자가 앞에는 맥을 못 춥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도 십자가로 무장하지 않아서 어정쩡한 군인이 되어 그렇지, 진짜 십자가 바로 믿고 바로 서면 여러분을 당할 자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패배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죽음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굴복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우리 사람의 중심이 되는 십자가입니다.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마침표입니다. -아멘-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8.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 본문 : 마 21:1-11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출생지 : 베들레헴, 성장한 곳 : 나사렛, 나이 : 33세, 혈통 : 유다 지파이며 아버지는 요셉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함, 학력 : 없음, 직업 : 목수의 아들로 자랐으나 목수 일은 하지 않고 제자들을 모아 갈릴리 지방을 중심으로 떠돌아다니고 있음 결론은 무직, 주요활동사항 :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가 감당치 못할 분임을 소개함, 산과 들, 회당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있음, 많은 불치병을 고쳤음, 오병이, 칠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킴, 그의 제자들에 따르면 바다를 걸으신 적이 있고, 하늘에서 광채와 소리가 들린 적도 있다고 함.
대략 이런 내용으로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공의회에 보고되었을 것입니다. 산헤드린 공의회는 대중을 선동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등 위험인물이기 때문에 좀더 면밀히 관찰하고 그와 직접 대화를 시도하여 그의 진정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율법에 관한 한 당시 능가할 사람이 없는 서기관과 율법사를 예수께 은밀하게 접근시킵니다. 이런 활동을 3년이 넘게 하고 다녔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이들과 수많은 질문과 답변을 했습니다. 중요한 답변과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약 40번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 이들의 결론은 문제를 만들어서라도 책을 잡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역사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시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난한 자와 함께 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을 귀찮아 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계속하여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이기보다는 계속하여 오병이어와 같이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아담 때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죄의 문제이며 영혼의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모든 것이 한계가 있음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보냄을 받으신 것은 궁극적으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3번에 걸쳐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이루실 때가 지금이라는 것을 결정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십니다. 이 때는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인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또한 이러한 대열에 포함되어 계셨던 것입니다. 오시는 중에 두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마20:29-34). 이곳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4km입니다. 당시 성인 남자가 하루동안 걸어갈 수 있는 길이었으나 예수님은 해발 900m의 군사 도로를 통해 예루살렘에서 약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도착하십니다. 여기서 하룻밤을 지내신 후에 다음날 즉 일요일에 다시 감람산 남동쪽 기슭에 위치한 벳바게에 도착하셨습니다. 감람산은 해발 약 800m에(수리산 489m) 위치한 네 개의 봉우리로 되어있는 산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언덕보다 약 90m정도, 시온 억덕 보다는 약 30m 정도가 높아서 동쪽으로는 요단 계곡과 사해의 웅장한 모습 그리고 남쪽으로는 유다 광야와 서쪽으로는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여기 서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바라보시며 성전을 바라보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오래 전에 스가랴를 통하여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슥 14:4) 하신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이곳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하여 준비하십니다. 먼저 제자 두 사람을 시켜서 마을로 내려가면 그곳에 매여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물어보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면 즉시 보내 줄 것이라고 말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하여 여러 가지 추측을 합니다. “두 제자들 중의 하나가 나귀 임자였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님과 나귀 주인 사이에 이미 그렇게 하자고 동의하고 짰을 것이다. 아니면 예수님을 잘 아는 이를테면 병을 고쳐주어서 거절할 수 없는 사람 중에 하나일 것이다.” 등의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네 가지를 분명하게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랐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것을 알고 계시고 예언자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여기서 예루살렘까지는 3km가 채 안됩니다. 이 길을 걸어서 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시고 가시는 것은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하신 말씀을 본문 4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셋째는 지금까지 메시야이심을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세상에 공개하심으로 3차에 걸쳐 제자들에게 예언하셨던(마 16:13-20) “예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져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속의 역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한때는 예수님이 원활한 사역을 위해서 당신이 메시야 구세주임을 함구하도록 제자들에게 지시했었습니다(마 16:20, 17:1-9). 그러나 이제 당신이 만물의 주관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모퉁이의 머릿돌’(42-44)임을 드러내셨습니다.
넷째는 본문 5절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마가와 누가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 기자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탔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 될 사람은 튼튼한 군마를 타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셨다는 것은 세상을 통치하는 그런 왕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나귀는 군마에 비해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동물이어서 왕이 될 사람이 아니라 동네 언른 들도 잘 안타고 다니는 동물입니다. 아이들이나 타고 놀기에 딱 좋은 동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대의 건장한 33세의 남자가 타기에는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예수님의 겸손과 순수함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무력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군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니며 주시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은 예수님이 스스로 예루살렘에 오게 됨으로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여기서 끝장을 내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작정을 하고 들어오셨기 때문에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이제 더 물러설 곳도 물러설 이유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다음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십니다(12-17). 성전 정화를 시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로 생명력 없는 형식적인 신앙을 공박하셨습니다(18-22).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역공을 하신 후(23-27) 두 개의 비유(28-32, 33-46)로써 책망을 가하셨습니다. 이로써 이들은 이제 예수를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로 여기게 되고 본 장 이후에 예수를 살해할 음모를 노골적이고도 급속도로 진행합니다.

그러나 이들과 반대로 천군만마대신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하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본문 10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온 성이 소동하여’ 너무 점잖은 번역 같습니다. 한마디로 예루살렘성이 뒤집어 졌다는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예루살렘성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있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외친 한마디는 ‘호산나’ 이었습니다.
‘호산나 : 구원하소서. 구원해 주세요.’ 라는 소리를 들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는 뜨거운 피가 올라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이토록 구원자를 부르짖고 환호하는 어린아이들과 사람들의 소리는, 그 어떤 군악대의 요란한 나팔소리보다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과 공의로서 당신의 나라를 다스리시되 무력이나 권모술수로서 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낮추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영원하신 평강의 왕이셨던 것입니다(사 9:6).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이미 예수님을 만났거나 알고 있던 사람도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유대인 성인 남자들이라면 누구든지 가야하는 명절입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모든 사람에게 예수가 나타난 것입니다. 누군가 “이는 누구뇨?” 하였고 모여든 무리 스스로가 대답을 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나사렛은 당시에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던 지역이었습니다(요 7:41, 52). 예루살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지역인 갈릴리 사람들에게조차 멸시를 당했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예수를 조롱하려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요 19:19)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했습니다.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에 어머니가 밭에서 일하시다가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았다고 몸빼 바지를 입고 학교에 나타나셨을 때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싶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나니 그 어머니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랑스런 어머니였습니다. 나사렛은 이제 자랑스러운 곳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성전 돌을 다듬는 석공들이 하루는 돌을 다듬는데 모든 고른 크기의 돌들 중에 크기와 모양이 다른 돌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돌을 본 공사장 감독은 “이건 잘못된 쓸모 없는 돌이군. 왜 이런 돌을 보냈지? 이 쓸모 없는 돌을 언덕 아래로 굴려 버려라.”하고 거침없이 말했습니다. 감독의 명령에 따라 이 돌은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버려졌습니다. 그 후 7년이 지나서 이제 기둥을 세워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감독은 사람을 보내 석공에게 “이제 기둥을 세워야 하는데 주춧돌이 필요하니 보내주게” 하였습니다. 석공은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난 벌써 오래 전에 주춧돌을 보냈다네.” 가만히 생각해 보니 7년 전에 기드론 골짜기로 필요 없다고 굴려 버린 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프랑스의 샤르니가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의 친구들은 물론 가족들에게도 잊혀져갔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오던 가족들의 면회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돋아났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잎사귀에 부어주었습니다.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우고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왕비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황제에게 재고를 건의했고,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돌보십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자랑이요 기쁨입니다. 이제 그분이 부끄러운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한 목자와 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7. 선한 목자와 양) / 본문 : 요 10:11-18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한 양치기가 매일 아침 연한 풀을 들고 양의 우리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매우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하루는 마을의 한 사람이 양치기를 따라갔습니다. 양치기는 다리가 부러진 양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습니다.
“어쩌다가 양의 다리가 부러졌습니까? 사나운 짐승에게 물린 것입니까?” 양치기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부러뜨렸습니다.” 마을 사람이 깜짝 놀라서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처럼 양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소. 그런데 양의 다리를 부러뜨리다니요…”
양치기는 양을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이 양은 자꾸만 길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가까이 가면 슬슬 도망을 가지요. 그런데 목장 주변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많아요. 그래서 다리를 부러뜨린 것입니다. 매일 음식을 먹이면서 정을 쌓기 위해서지요. 제 목자를 알아볼 때까지 꼴을 먹일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또한 양이 길을 잃으면 주인은 개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 개는 양을 잡아먹으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양을 몰고 오게 하기 위합니다. 하나님은 가끔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련을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못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아 복을 얻게 하심입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kalov”:칼로스)”이란 말은 “아름다운, 정직한”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막 10:17-18 “17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질문자가 구원에 대한 질문과 같이 선한 주체를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선한이는 하나님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최종적인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 속에는 선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정직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반대로 거짓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거짓말은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이 들어갔을 때 한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9계명으로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 20:16)입니다.
시 5:6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시 101:7 “거짓 행하는 자가 내 집안에 거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가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수박밭을 가꾸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별다른 문제없이 농사를 지었지만 한 가지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밤마다 누가 수박을 따 가는 것입니다. 농부는 생각 끝에 꾀를 내어 수박밭에 팻말을 세웠습니다. “이 중 한 개의 수박에는 청산가리를 주사했음” 다음날 농부가 수박을 세어보니 그대로였습니다. 농부는 기쁜 마음에 돌아가려다가 팻말 밑에 적혀 있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이제 두개가 됐음”

거짓의 대장은 사단입니다.
합 2:18 “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복음을 대항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가 좋습니까? 악한 목자가 좋습니까? 질문을 하는 제가 바보이겠지요.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악한 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선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잘 모르는지 모릅니다. 이승복 어린이가 1968년 11월 2일 삼척시의 바닷가를 통해서 대한민국으로 무단 침입한 북조선의 무장간첩에 의해서 12월 9일 밤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살해당했고 그의 형과 아버지는 크게 다쳤습니다. 공산당은 이승복에게 “북조선이 좋으냐?, 남조선이 좋으냐?”는 질문에 이승복 어린이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하고 죽었습니다. 악한 것에게 당해보지 않은 분은 악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잘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삯군 목자는 나쁜 목자는 아닙니다. 직업적인 목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임무에 충실한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목자입니다. 보수를 받고 거기에 해당하는 만큼 일하는 목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할 때 선한 목자다라고 이야기합니다. 미쉬나(Mishnah)에 보면 삯군 목자의 책임의 한계는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양을 보호하지 않더라도 책임을 추궁 받지 않습니다. 자신의 안위가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삯군의 한계는 자신보다 먼저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 봅시다. 양이 중요합니까? 자신의 생명이 중요합니까? 우리는 다 양 같은 존재입니다. 사실 하잘 것 없습니다. 버려도 그만입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는 이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립니다. 삯군 목자는 고용된 사람이기 때문에 양의 실태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의 상태에 대해서 완전히 꿰뚫어 보듯이 압니다.
14, 15절에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 같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정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직업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인격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목자는 양을 알고 양은 목자를 압니다.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14 하반) 그리고 15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합니다.
본문 14, 15절에는 각각 안다는 단어가 두 번씩 들어가 있습니다. 여러분 알아준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눈치 없는 남편들이 뭘 자꾸 아내에게 사서 바칩니다. 그런데도 아내는 마음을 풀지 않습니다. 아내가 원하는 것은 알아주는 것입니다. 힘들다는 것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양이 목자를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양은 참 무지합니다. 어느 정도 무지한가? 어리석을 정도로 무지합니다. 양은 길을 잃으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개는 길을 찾아옵니다. 연어도 고향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양은 못 찾아옵니다. 양은 자기 앞에 가는 양을 따라갑니다. 요령을 피울 줄 모릅니다. 앞의 양이 낭떨어지에 떨어지면 함께 떨어집니다. 그 정도로 무지합니다. 그리고 양은 재주가 없습니다. 호랑이도, 사자도, 코끼리도 다 서커스단에서 재주를 넘지만 양이 재주넘는 일은 역사 이래로 없습니다. 여러분, 재주 부리는 양이 되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생활에 인간의 요령과 재주를 거둬내야 합니다. 그래야 양이 됩니다. 양은 재주를 부릴 지혜가 없습니다. 뒤집어져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양은 매우 더러운 동물입니다. 제가 영국에 가서 양 구경을 하면서 제일 실망을 했습니다. 저는 양에 대한 환상이 깨어진 것입니다. 그림 속의 양은 얼마나 깨끗하고 뽀얗고 탐스럽습니까? 옆에서 보니 그렇게 더러운 짐승이 없습니다. 씻을 줄 모릅니다. 악취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더럽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그런 더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바랍니다. 항상 깨끗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한없이 더럽습니다. 그리고 양은 공격형 무기가 없습니다. 뿔 가지고 받을 줄도 모르고, 발톱가지고 할퀼 줄도 모르고, 이빨 가지고 물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양에게 주신 은사가 있습니다. 자기 목자 음성은 알아듣습니다. 자기 목자 음성 외에는 어떤 짐승의 아름다운 소리도, 어떤 사람의 낯선 소리도 다 구별합니다. 자기 목자 음성의 휘파람 소리, 말소리를 그대로 알아듣고 따라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부족해도 하나님의 말씀의 음성을 듣는 귀가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양입니다.

야고 부부는 오랜 세월 동안 팔레스타인에서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야고씨는 북 아일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양치기의 복장을 하고 나서면 쉽사리 아라비아 양치기로 통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브엘세바 지역을 방문하고 있던 야고 선교사는 길옆에 앉아있는 한 무리의 목동들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양들은 돌 투성이인 언덕에서 풀을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선교사가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당신 양떼를 부르죠?” 그러자 한 양치기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양떼들에게 보내는 신호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선교사도 그 양치기의 소리를 아주 정확하게 흉내냈습니다. 그렇게 한 두 번 연습한 후 야고 선교사는 양치기의 외투와 지팡이를 빌려 가지고, 풀을 뜯고 있는 양떼 사이를 지나다니면서 양들에게 신호를 되풀이해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짜 양치기의 신호에는 머리를 쳐들고 반응하는 양은 단 한 마리도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양치기가 외투나 지팡이를 전혀 갖지 않고서, 선교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신호를 양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진짜 양치기의 신호를 들은 양들이 그 즉시 풀 속에 파묻었던 고개를 쳐들고 재빨리 자기 주인에게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이 양치기들의 말에 의하면, 자기 주인의 신호를 듣지 못하고, 가짜 양치기의 신호를 쫓아가는 것은 병든 양뿐이라고 합니다(레이몬드 에드몬).

그리고 양은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양입니다. 우리 성도가 왜 귀한지 아십니까? 우리 숨을 거두는 우리 생애를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끝낼 때 내 인생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서 끝내기 때문입니다. 양은 제물 중에 가장 제물답습니다. 양의 가치는 제물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양은 제물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치가 없습니다. 본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10)를 기억하십시오.
양은 홀로 있을 때는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고 더럽고 싸울 줄도 모르는, 조그만 쥐 앞에서도 어쩔 줄 모르는 존재이지만 목자가 있을 때는 그렇게 당당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이란 목자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서 따라가는 양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좋은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양은 겁이 많고 성격이 급한 동물입니다. 어떤 때 목자가 양을 나무에다 묶어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양이 왔다 갔다 하다보면 묶어놓은 끈이 꼬이게 됩니다. 이 때 양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끈이 꼬여 있을 때는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양의 못된 성격 때문에 그 끈을 자기가 풀어보겠다고 하다가 끈이 더 꼬여 나중에는 목에 메여 죽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시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어려서 목동이었기 때문에 잘 압니다. 목자가 얼마나 양을 위하여 신경을 쓰고 수고하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양에게 참된 목자만 있다면 그분께서 알아서 양을 인도한다는 것 또한 잘 압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으십니다.
마음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고집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유혹을 따라간 영혼들을 찾으십니다
알지 못하여서 아직 우리에 들지 않은 자를 찾으십니다

예전에 설교제목을 길게 정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오후에 주보를 맡겼던 인쇄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주신 내용 중에 설교 제목이 좀 짧습니다. 설교제목을 다시 좀 알려주십시오?”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입니다.”
그랬더니 인쇄소 직원은 이상하다는 듯이 한번 더 물어 보았습니다.
“그것 외에 더 있습니까?”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랬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목사님은 약간 늦게 도착하셔서 어제 준비한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서서 시작하려는데 설교제목이 이렇게 쓰여져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목사님은 어딘가에 크게 충격을 받으신 것처럼, 계속 이 제목을 몇 번씩 되 세기고 계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그 크기에 따라 값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을 정한다고 합니다. 양의 성질을 테스트하는 방법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봅니다. 이때 양이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몸이 마른 양이라도 값이 오르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살이 쪘더라도 값이 내려갑니다.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는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의 미래를 갖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는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은 보다 쉬운 것들에 집중하라는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믿음도 그렇습니다. 사단은 지속적으로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해이해 지도록 유혹합니다. 편안하다고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기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6. 포기하지 않는 기도 ) / 본문 : 눅 18:1-8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휴대폰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잘 안 가지고 다닙니다. 금요일에 나갈 일이 있어서 어쩌다 한번 가지고 갔는데 “오빠, 지금 전화 줘.”라는 문자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기가 막히고 놀라웠습니다. 저는 누나는 있어도 여동생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저더러 오빠라고 할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00자매가 나한테 오빠려고 할려나? 스팸으로 들어온 메시지입니다. 전화했다가는 아마 돈이 몇 만원 그냥 빠져나가든지 아니면 분명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스팸에 걸리면 80넘은 할아버지도 오빠가 되는 것입니다. 컴퓨터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도라는 선물은 단 한가지도 부정적 요소나 역기능이 없습니다. 100번 기도하면 100번 다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고 말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합니다(토마스 카라일).”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다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남겨놓아 걸림돌이 되게 하는 사람과, 하나님께 기도하여 디딤돌로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걸림돌도 디딤돌로 만드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야기에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재판장입니다.
이 재판관은 그냥 재판관이 아니고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 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사람을 얼마나 무시하겠습니까? 동정심도 없고 백성의 억울한 사정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빈정거리며 골치 아프지 않은 사건을 중심으로, 그리고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할 그런 위인인 것 같습니다.
또한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근심에 찬 한 과부가 등장합니다. 이 과부는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탄원하기 위해서 재판관을 계속 찾아갑니다. 우리는 이 과부의 억울한 사정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 당시의 과부들은 아무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권리를 가집니다. 그런데 선교사님들이 다른 나라에 가 계십니다. 가끔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들이 받히고도 나중에 경찰서에 가보면 반대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외국인으로서 권리가 없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원문의 과부라는 말은 “버림받다. 빈곳에 남겨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재판관과 과부는 상대가 안 됩니다. 그러나 이 과부는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무감각한 재판관은 과부의 탄원하는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시간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부는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4절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재판관과 과부의 의지가 격돌하는 것을 봅니다. 한참동안 과부의 탄원을 무시했지만 재판관은 스스로 생각합니다. 이 과부가 얼마나 더 괴롭게 할까? 과부는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무기도 없습니다. 그녀의 무기란 끈질긴 것입니다. 끝까지 해 보겠다는 의지입니다. 원문의 “괴롭게 하다”는 말은 “눈언저리에 멍이 들게 하고 타박상을 주기 위한”이란 뜻입니다. 그녀는 결국 지칠 줄 모르는 간구로 재판관을 굴복시킵니다. 여기서 한가지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굴복하신 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비유의 대조는 비교입니다. 무엇을 대조한 것인지 그 답은 7절 말씀에 나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불의한 재판관과 같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불의한 재판관과 다르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고 속히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해서 늘 준비하고 계시고 속히 응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7절 하반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속히 응답이 오지 않을 때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왜?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네 가지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항상 하나님을 찾게 합니다.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것을 지금 다 응답 받으셨다고 하면 하나님께 간절히 나오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집에서 또는 어디 경치 좋은데 놀러 가셨을 것 갔습니까? 어쩌면 오늘 교회에 안나오시는 분들은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처음부터 모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다 응답 받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절에 “항상 기도하고”라고 합니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시 105:4)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제방에 구멍이 뚫어져 있어도 물이 없을 때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물이 차면 제방에 물이 세어 들어오니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물보고 저기 제방이 뚫어져 있으니까 들어가라고 그 때 그때 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루 다니다가 어느 곳에든지 틈이 있으면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단도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2.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나의 요구를 분명하게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그 요구가 무엇인지 우리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요구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의 인생을 걸만큼 중요한 것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응답하신 것이 값없이 버려지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요즘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물건을 잊어버리고도 찾아가지 않는답니다. 우리 어렸을 때는 물자가 귀해서 몽당연필에 볼펜 껍데기를 끼워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방을 잊어버리고도 찾아가지 않는답니다. 부모님이 쉽게 다시 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면 우리는 그것이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자녀가 작은 것에도 감사를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땀을 흘려서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값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테스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 하시느니라”(잠 17:3)

3.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우리를 더 성장시킵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것을 가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영국에 갔을 때 WEC선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아프리카 한 지역의 선교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부족에게 20년 동안 선교를 한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20년 동안 선교본부에 아직도 한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했다고 선교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들이 다시 그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또 20년을 선교했습니다. 그 아들 역시 아직까지 한 사람도 구원시키지 못했다고 편지했습니다. 그러다가 근래에 그 부족마을의 사람들이 추장부터 예수 믿겠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약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헌신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들 선교사가 물었습니다. 왜 진작 나의 아버지가 계실 때 믿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제야 믿느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부족의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가 당신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아버지를 보고 믿는 것이라고 헸답니다.
제가 여러분 부모님들 전도하시고 구원시키기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분들이 지금 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시고 또 듣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늘 복음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증거 해 놓는 일입니다. 어린아이가 10가지 셀 때 1,2,3,4하고 5,6,7을 다 순서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1부터 10까지 자꾸 말하면 어느 날 그것이 순서대로 다 연결되어 알게됩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현재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4.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기다릴 줄 모릅니다. 죽도록 사랑한다고 하고선 군대 가고 나면 2년 6개월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무신 거꾸로 신고 많은 남자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8절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끈기 있게 포기하지 않는 기도는 믿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모태신앙이신 분들을 보면 “못해, 못해” 그래도 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때로는 형식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꾸준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을 보면 언제는 참 믿음이 좋은 것 같고 열심인 것 같은데 금방 시험에 들고 왔다 갔다 합니다.

아프리카는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로 반군의 활동이 활발합니다. 지금 케냐, 소말리아, 챠드 등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지난달 말 차드 반군과 정부군간의 전투가 수도 은자메나에서 치열하게 벌어져 몇 백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 챠드에 모두 38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는데 수도인 은자메나에 17명, 수도에서 18km 떨어진 외곽의 센터에 18명의 선교팀이 구성되어 활동 중이었고 김영섭 선교사 가족(3명)이 카메룬 국경의 남쪽지방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수도에 있던 17명은 프랑스군 기지로 먼저 대피했고, 김영섭 선교사 가족은 국경을 통해 카메룬으로 무사히 빠져나간 상황. 센터에 남아 있던 18명만 최후까지 고립되었던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양승훈 선교사님은 저희 선교회를 방문하셨고 저도 잘 알고 있는 분입니다. 챠드에는 지난해부터 반군과의 간헐적인 교전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주 초에 북쪽지방이 반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목요일(1월31일)에는 전화가, 금요일에는 모든 통신과 라디오 등도 끊겨버리면서 긴박한 상황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요일 오전에 인편으로 편지가 도착했는데, 주불 대사관을 통해 전해진 소식은 빨리 대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시간에는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양상이었습니다. 시내에 체류하고 있던 박근성 선교사님과 이시우 한인회장님 가족이 대피소로 우선 피신했고, 두 분은 끝까지 현지에 남아 한국대사관 프랑스 대사관 외무부 등과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고립된 저희 18명을 피할 수 있도록 진두지휘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는 반군이 대통령궁을 제외한 시내 전역을 완전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수도에서 서남쪽 카메룬 국경까지 20킬로 되는 그곳까지 이미 피난민들로 꽉 차 있어서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센터에 남아 있던 저희 18명은 고립된 상태에서 국경쪽으로 빠져나갈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12킬로 지점의 미군기지로 이동하면 안전할 것 같아 상황을 알아보았는데, 이미 미군기지는 민간인들이 장악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그때는 모든 통신이 두절돼 현지인들을 통해서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이미 피난민들의 행렬로 꽉 차 있어 국경을 넘을 수는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할 지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일단 저희는 시내로 들어가 프랑스 군 기지로 가야 살 수 있다는 판단이 들어 현지인을 통해 계속 상황을 파악해 본 결과 후퇴하는 반군을 쫓아 정부군이 뒤쫓고 있어, 시내 쪽에는 군인들이 대부분 빠져나갔다는 것을 파악하고 다리를 건너 시내진입을 시도하기로 결정하고 3대의 차량에 18명이 타고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전쟁의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사체들이 이곳저곳 나뒹굴고 있었고 폭격으로 폐허가 된 건물들… 약탈과 방화로 무법천지로 변한 아비규환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이동하는 저희 차량을 누군가 세워 빼앗았다면 뺏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7km를 이동해 시내로 통하는 다리에 도착했는데, 그곳 역시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뤄 꼼짝을 못하는 상황, 그런데 시내 쪽으로 가는 사람이나 차량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들 그곳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희는 오히려 그곳을 향해야 했으니…
적막이 흐르는 그곳으로 가던 도중에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기도하고 나서 고개를 드는 순간 차드 적십자 차량을 만났습니다. 저희는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달라고 도움을 요청하자, 그 사람들이 본부와 연락하더니 저희 차에 깜박이를 켜게 하고 저희를 에스코트해 주었습니다. 얼마 안 가서 코너를 도는 순간, 시내를 지키고 있던 정부군의 대포가 저희 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적십자 차량을 만나지 못하고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면 정부군에 의해 폭격을 맞을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최고의 기도는 일방적으로 내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기도입니다. 여러분! 대화할 때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 이것이 최고 아닙니까?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톨스토이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변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사회가 아니고, 아내가 아니고 나 자신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렘 25:4)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을 때, 하나님도 우리의 기도를 기쁘게 들어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일방적인 과부의 기도를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목숨을 위하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35. 목숨을 위하여 ) / 본문 : 마 6:25-34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무디는 “성경은 우리의 지식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R. C. Savage) “하나님 앞에서 차가운 지식보다 뜨거운 무지가 훨씬 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지식은 의미가 없습니다. 알고 있는 것은 실천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고 믿음이란 지켜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믿음은 목숨을 구하는 일입니다.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나음이니라.”(전 9:4)고 했습니다. 생명은 고귀한 것입니다. 생명을 경시하기 시작하면 그 사회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하나님 입장에서는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하면 안됩니다. 아직도 내 생명이 나의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안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나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하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질문하나 하지요.
여러분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목숨’입니다. 운동은 왜 합니까? 건강은 왜 지키려고 합니까? 모두가 목숨을 위한 것입니다. 밥을 왜 먹습니까? 살기 위해서, 목숨 때문에 먹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오늘 본문의 “목숨을 위하여”(th’/ yuch’/ uJmw’n:테 퓌스케 휘몬)의 ‘퓌스케’는 육체적 부분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부분으로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멸절되지 않는 영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퓌스케’는 죽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퓌스케(목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염려해야 하는 것이 ‘퓌시케(목숨)’이라는 말입니다.
본문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는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한 것이고, 몸이 의복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은 목숨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의복은 몸을 위하여 필요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귀한 존재입니다.

본문 26절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귀하다(diafevrw:디아페로)”는 “다르다, 구분된다, 지탱해 나가다”의 뜻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귀합니까?
1) 26절 “공중의 새”가 유사한 본문인 누가복음 12:24에서는 ‘까마귀’로 나옵니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일반적인 생명체인 하늘의 새를 말합니다.
2) 28절 “들의 백합화”(30절 들풀도)는 갈릴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다니던 마석초등학교 교가 가사 중에 “천마산 푸른 정기 몸에 지니고 북한강 맑은 물에 덕을 닦아서 튼튼하게 자라는 마석 어린이…” 그런데 제가 다닐 때는 “북한강 맑은 물에”가 아니라 “배롱내 맑은 물에” 였습니다. 그곳에서 목욕도 하고 물장구치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제가 중학교 갔을 때쯤 주변에 목장이 많이 들어와 똥물이 되다 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롱내 맑은 물이 아니라 배롱내 똥물이 되었다고 했는데 언제 “북한강 맑은 물로” 바뀌었네요. 그런데 그렇게 오염되던 그 때 천마산과 배롱내 주변에 돼지, 닭, 오리를 많이 키우던 농장들이 있었습니다. 이 돼지와 오리들이 더러운 물을 먹는 것을 보고 “만약 사람이 저렇게 돼지나 오리들처럼 더러운 물을 먹고산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다. 저는 아직 돼지나 오리가 폐결핵에 걸렸다는 소식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돼지와 오리를 기르십니다. 들의 백합화 들풀도 하나님이 기르십니다. 사무실에 있는 난과 화초 몇 개는 제가 벌써 죽였습니다. 겨울이 되면 온도 조절이 안돼서 죽입니다. 그런데 들의 풀은 아무리 겨울이 되어도 얼어죽지 않습니다. 다시 봄이 되면 생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기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대충 생각하고 넘어가는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본문 26절 “공중의 새를 보라”의 “보라(ejmblevyate:엠브렙사테)”는 “눈을 뜨고 살펴 보라”는 뜻입니다.
본문 27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의 “생각하여 보라(katamanqavnw:카타만다노)”는 ‘카나’라는 말은 철저하게, ‘만다노’라는 말은 ‘배운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중의 새에게도, 들의 백합화를 보면서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사업하고 실패하고, 아무 생각 없이 도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인생의 삶을 대자연 속에 비쳐보며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여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옛날 칼타고의 한니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애꾸눈이었습니다. 어느 날 화가를 불러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화가는 열심히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자신을 한눈 없는 병신으로 그려 놓은 것을 보고 그를 죽여버렸습니다. 며칠 후 다른 화가를 불러 다시 초상화를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며칠 전의 죽은 화가 얘기를 들은 이 화가는 아주 온전한 두 눈을 가진 한니발을 그렸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내가 눈이 하나인데 어찌 두 눈을 그렸느냐”며 그도 죽여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안 다른 화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그리면 살아날 수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화가는 한니발의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러자 한니발은 애꾸눈이 가려진 자신의 옆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보고 아주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사업이 안되고, 가정적으로 불행하고, 실패와 시련으로 인생의 앞길이 모두 막혀 있는 것만 같아도 바로 그 다음에, 또 아주 가까운 곳에 행복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염려하지 않는 것을’ 입니다.
“염려(merimnavw:메림나오)”의 어근은 “분열되다, 나뉘다”의 ‘메리조’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음식을 위하여, 의복을 위하여 지나친 근심 걱정으로 인하여 정말 고민해야할 ‘퓌스케(목숨)’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염려하지 않게 됩니까?
본문 30절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면서 믿음을 가지기를 촉구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다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내가 보지 못할 때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다 볼 수 있어서 믿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내가 이해하지 못할 때 순종하는 것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마 10:19) 라고 하셨습니다.
1943년 봄 김세홍 목사는 교회인가를 얻기 위해 중국 금주성 반산형공서를 방문하였는데, 경무과 특무고장 구로다(흑전)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높습니까? ‘아마데라쓰오오미가미’가 높습니까? 속에 있는 대로 안심하고 대답하시오.” 그러나 답변을 잘못하다가는 불경죄로 구속당할 판이었습니다. 이 때 김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문제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마치 국민학생에게 묻기를 아버지가 더 높으냐? 학교 선생이 더 높으냐고 물으면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집에서는 아버지가 높고 학교에서는 선생이 높지요. 그와 같이 ‘아마데라쓰오오미가미’는 일본의 신이고 여호와하나님은 기독교인의 하나님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26절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본문 30절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본문 32절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본문 33절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퓌스케(목숨)’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믿음뿐입니다.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삶이 초라해 집니다. 믿음을 가지십시오.

마지막으로 기억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공중의 새도 들의 백합화도 들풀도 하나님이 다 기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염려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까?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딱 한가지가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숨을 위하여, 또한 목숨이 살아있는 한 해야할 일입니다.
본문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순위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바쳐야하는 것은 구약 성경에 보면 모두가 첫 것입니다. 두 번째 것은 안 받으십니다. 자식도 첫 자식을 바쳐야 하고, 양도 처음에 태어난 것을 바쳐야 하고, 곡식도 첫 것을 드려야 합니다(출23:19, 레2:14, 4:21). 첫 월급타면 어떻게 해야 합니다. 부모님 속옷을 먼저 사드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나오는 가인은 그 제물이 첫 것이라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저 유명한 ‘앤드류 보나’라는 사람은 세 가지 중요한 인생의 철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드리기 전엔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둘째는 무릎을 꿇기 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셋째는 성경을 읽기 전에는 어떠한 책도 읽지 않는다.

여러분! 이제 우리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시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