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은…(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말씀(128. 이것만은…(마태복음을 중심으로)) / 본문 :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이다 아멘)

성경에서 “아멘”은 예수님의 도장처럼 사용된 단어라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멘”은 한글로 주로 “진실”로 번역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만:알라”또한 아멘과 비슷하게 사용됩니다. 그만큼 이 단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만”은 원문의 ajlla;(알라)입니다. 이 단어는 a[llo”(알로스) “다른”이라는 뜻의 형용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다른 것들, 그러나”로 접속사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단순한 접속사가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오직, 다만, 유일하다” 등으로 사용됩니다. 사도행전 1:8에서 “오직”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414번나옵니다. 한글로 “오직”이나 “다만”으로 번역된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단어로 번역되거나 아니면 빠진 곳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전체를 이 시간에 말씀드리는 것은 무리이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 정도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단어는 좀더 넓은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제목대로 “이것만은, 반드시”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07년도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이 지나면 2008년이 됩니다. 한해에 꼭 해야될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만은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도 꼭 해야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ajlla;(알라)를 사용하셔서 말씀하신 것을 살펴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8)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요란한 가운데만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출애굽사건을 생각합니다. 지금도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시끄럽게 만듭니다. 조용하면 마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조용한 중에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시끄럽게만 하는 사람의 문제는 은밀한 중에 보고 계시다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4)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5)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8) “그러면”이 알라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는데 절대 화려함만을 따라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ajlla:알라)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예수님께서 꼭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6:12의 주기도문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는데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를 과거형으로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한 상태에서만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원망을 쌓아놓으면 가슴만 아픕니다. 나쁜 일은 빨리 잃어버리시고 좋은 일을 많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ajlla:알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했습니다. 단순히 용서해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3. 완전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ajlla:알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 “아니요 (ajlla:알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는 ajlla; plhrw’sai(알라 플레로사이)로 반드시 완전케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대속하심으로 우리를 완전케 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25에서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루려 함이니라” 이 단어가 마 5:17에서 “완전케 함이로다”의 원문 plhrw’sai(플레로사이)로 같은 뜻입니다. 히브리서 9:26-28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어떤 사람이 치과에 가서 이 하나를 빼는데 치료비가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의사가 2만원이라고 대답하자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아니, 뽑는 데는 1분도 걸리지 않는데 왜 그렇게 비싸죠?”
그러자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물론 환자 분이 원하시면 아주 천천히 뽑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랬답니다. 예수께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값없이 된 것이 아닙니다. 값이 있되 하나님이 계산을 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5.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ajlla:알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한글개역성경에서는 원문의 “알라”가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이 단어가 들어갈 곳은 “… 버리게 됨이라 (ajlla:알라) 새 포도주는 새…”여기에 들어가야 됩니다. 같은 본문인 막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고 바르게 번역되었습니다.
새 부대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담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오르간을 갖고 있는 것이 대체로 전자식입니다. 그것은 컴퓨터로 파이프 오르간 소리를 그대로 내는 것 같지만은 실제로는 오리지날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큰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려고 했는데, 첫째 조건이 온도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름, 겨울 관계없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려면 오르간의 값보다 유지비가 훨씬 더 드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했더니 귀한 것이기 때문에 온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라는 것입니다.
루브르 박물관(Le musee du Louvre)에 가면 모나리자, 비너스가 있는데 이것은 세계가 사랑하는 값진 보화들입니다. 얼마나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만지고 훼손하려고 하기 때문에 특별한 BOX에 넣어, 온도유지, 보관, 경비도 철저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죄와 마귀의 자녀 노릇하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4.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 10:20) 원문에 “ajlla:알라”가 있어서 번역에도 들어가야 합니다. 행 1:8절처럼 처음에 넣든 가 아니면 “곧”을 “오직”으로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복음을 전할 때 ” (ajlla:알라)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막 6:9)라고 했는데 여기도 “오직”이 들어갑니다. 온전히 성령님만 의지하라는 강력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ajlla:알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ta; tou’ qeou’ ajlla;”로 나옵니다. “네가 (ajlla:알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에 넣어야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만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ajlla:알라)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막 3:29)
우리가 평상시에 늘 하나님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선택해야만 하는 길이라면 하나님의 일을 선택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어느 가구점에 존이라고 하는 청년이 취직을 했습니다. 주인은 술집에도 잘 다니고, 나이트클럽에도 잘 다니는 아주 사교적인 사람입니다. 존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교회만 다니고 이렇게 사니까 그를 불러서 “남자란 술도 먹도, 춤도 추고, 그렇게 세상을 즐기며 살아야 하는 거라”고 설득합니다. 주인님, 저는 교회에 나가기 때문에 술 먹으면 안됩니다. 그런 데에 가면 안됩니다. 몇 달이 지났습니다. “남자가 그렇게 종생원 처럼 그러는데 아니야, 남자가 남자다워야 되는 거야. 술도 마시고, 사람도 사귀어야 되는 거야. 그래야 사업도 잘 되는 거야.” 라고 합니다. “안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것 먹어서 안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2년이 지난 어느 날 주인은 병이 들었어요.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주인은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부인이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회개하고 기도하면 은혜를 주실 거예요. 주인이 말합니다. 목사님을 찾지 말고, 우리 집에 목사님이 계시지 않느냐고 합니다. 존을 부르세요.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면 사람도 인정하고 하나님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ajlla:알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마 22:32)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왜 막 삶니까? 왜 교회를 핍박합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의 예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7. 임마누엘의 예수) / 본문 : 마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오늘은 크리스마스주일입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미사(예배)’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리스도께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한 날로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선물을 기다리고 어른들은 휴일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예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하지 않는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시면, 동방박사들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서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왕을 찾아갔지만 그에게 경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에 찾아갔지만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의 경배는 의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정성을 다한 경배였습니다.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라는 아주 값비싼 예물을 드리면서 경배했습니다(마 2:11).

성탄절은 과거의 사건을 단지 기념하며 축하하자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을 축하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시는 영적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역사적 사건으로만 끝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어도, 그리고 동방박사들로부터 그 소식을 들었어도, 헤롯왕은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 때문에 예수님의 탄생을 싫어했습니다. 헤롯 왕궁에 있었던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의 탄생이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고 경배하는 영적 사건이 이번 성탄절에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령으로 된 것이라(20절)

본문 18절에 보시면, 요셉과 마리아가 서로 정혼(일종의 약혼)하고 동거하기도 전에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이 일 때문에 고민했을 것입니다. 나와 약혼한 처녀가 임신했다는 것은 남자서는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율법대로 그녀를 정죄하고 돌로 쳐죽여도 시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정리하고 분노의 감정을 가라앉혔습니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약혼을 취소하고 모든 일을 없는 것으로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그는 꿈을 꾸게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요셉은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싫습니다. 그녀는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처녀가 임신을 했다고요.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제 마음이 허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자상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네 아내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수없이 많이 약속하셨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 그대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구약의 예언 그대로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예수님께서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라.”(요 5:3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이고 성취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성실히 이루어 주셨습니다.

둘째,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절)

본문 21절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을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1)고 합니다. “너희에게 전하노라” 너희가 바로 내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2000년 전에 당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면 오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 10:43)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구원을 주십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합니다.

알렉산더 플레밍(1881-1955)은 페니실린을 발견하여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 영국의 세균학자입니다. 사람들이 하루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박사님, 박사님께서 지금까지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페니실린’ 이라고 대답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플레밍 박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일생 중에 내가 발견한 것 중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내가 죄인이요 예수께서 나의 구세주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주,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여러분들에게 구원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23절)

본문 22-23절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큰복은 없을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족에는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훈련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마을의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하루는 그를 데리고 밀림 속 깊이 들어갑니다. 그것도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택하여 정글 속으로 정처 없이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칼 한 자루를 손에 쥐어주고 그곳에 혼자 남겨놓고 어른들은 돌아와 버립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깊은 밀림 속에서 혼자 밤을 지새워야만 합니다. 사나운 맹수의 울음소리에 온 몸이 오싹해지고, 주변에서 짐승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해 지고, 그렇게 두려움 속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이 아이는 아침이 되면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왜냐하면 밤새도록 자기 혼자인줄 알았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아이의 아버지가 완전무장을 하고 지켜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 아이가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하, 나 혼자가 아니었구나. 아버지가 내 옆에서 나를 지켜주셨구나’ 이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 아이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항상 지켜준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전 7:2)를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일에 우리는 동시에 마지막을 생각해야 합니다.

넷째 분부대로 행하여(24절)

모든 하나님의 역사에는 한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본문 24절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라고 말합니다. 요셉은 “천사의 분부대로 행하여”라고 합니다. 요셉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통적인 섭리로 나타납니다. 사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성장한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여러 사람이 보는 가운데 내려오시면 굳이 애매한 성령의 잉태설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마리아와 요셉의 입장을 또한 난처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잘 알 수 있도록 성장하게 하시고 우리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을 십자가에서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본부대로 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저는 선교지에서 남편 선교사를 잃고 혼자된 여 선교사님을 많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도 이러한 분이 많았습니다. 맥켄지 선교사는 캐나다 총각 선교사인데 당시 캐나다 장로교회 선교부를 찾아 100$을 내어놓으며 한국에 선교사로 갈 것을 자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한국에 올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 선교사로서 1893년 10월에 캐나다를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에 내항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소래지역으로 가게되었습니다. 자연히 소래교회 초대 목사처럼 되었습니다. 1895년, 예배당 건축공사가 거의 끝나, 마무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 전도차 장연읍을 다녀왔는데 뜻하지 않게 일사병에 걸립니다. 그리고 5일간의 고열 끝에 1895년 6월 23일 낮선 땅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일기에서 “…잠을 잘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너무 약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오후에는 전신이 추워지는 것을 느낀다. 옷과 더운 물주머니가 있어야겠다. 땀을 내야겠다. 조금 나은 듯하기도 하다. 죽음이 아니기를 바란다. 한국과 내가 한국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게 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내가 조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아래서 전도하고 밤이면 공기가 추워질 때까지 앉아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중략) 내 마음은 평안하며 예수는 나의 유일한 소망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신다. 몸이 심히 고통스러워 글을 쓰기가 너무 힘이 든다.”
그는 같은 날 에비슨(Oliver R. Avison)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써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발송하지 못한 채 그는 숨졌고,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한편 그의 여자친구는 창창한 청년 선교사와 함께 한국을 위하여 헌신하게 될 장미 빛 미래를 그리며 태평양을 항해하고 있을 때 애인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은 그녀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지만 도중하차하지 아니하고 소래에 내려와 애인이 잠들어 있는 무덤 앞에서 경건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고인이 된 애인을 위하여 한국을 떠나지 아니하고 원산지방에 머물면서 열심히 전도하고, 한국에서의 매켄지의 생애 “A Corn of Wheat or the Life of the Rev W. J. McKenzie of Korea”라는 제목의 책으로 남겼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매컬리(Miss Elizabeth A. McCully)입니다. 이런 분들이 ‘분부대로 행한’, 예수님의 명을 따라 산 분들입니다. 또한 이 분들에게 임마누엘의 예수님이 되십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분부대로 행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험을 이기는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6. 시험을 이기는 믿음) / 본문 :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어느 여자대학 교수가 제자의 청첩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좀 고상하게 축전을 친다고 요한1서 4장18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결혼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축전을 쳤습니다. 요한1서 4장18절은 “사랑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느니라.”입니다. 그런데 이 축전이 그만 오타가 되어서 요한1서의 ’1′자가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18절로 전달이 되었습니다. 제자가 교수의 축전을 받고 좋아서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남편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가 나왔습니다. 이 제자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면 이런 축전을 받고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면 곧바로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은 것 같은 사람도 순식간에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모든 예배시간마다 다 참석을 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 보이던 박 집사님이 오늘 점심 반찬 담당이었습니다. 그래서 박 집사님은 묵은 김치 한 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뭔가 착각하고 온갖 반찬들을 정성스럽게 마련해 가지고 왔습니다. 자연히 박 집사님이 가지고 온 묵은 김치와 이 집사님이 가지고 온 화려한 반찬은 비교가 되었습니다. 박 집사님이 갑자기 벌컥 화를 냅니다. “사모님! 왜 사람을 이렇게 망신을 시키십니까? 이 집사님이 반찬을 가지고 온다고 말씀하셨으면 저는 안 가지고 왔을 것 아닙니까?” “아니 그런게 아니고요 이 집사님이 뭔가 착각하신 것 같네요.” “그러지 마세요. 못 사는 사람은 교회에서 점심도 못 먹겠습니다.” 그리고 묵은 김치를 후딱 싸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영적으로 그렇게 건강해 보이던 박 집사님이 한 순간에 시험에 듭니다. 아마도 그 날 남편과 돈 문제로 심하게 다투고 나왔는데 하필 그날 따라 점심당번이 꼬여서 이런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그렇게 드렸던 예배와 헌신의 다짐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 것이지요. 참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지요.
남자 성도님들은 아마 이런 생각하실 지 모릅니다. 역시 여자는 한계가 있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정말 그렇습니까? 어떤 교회에서 장로님 투표를 했습니다. 후보에 오른 안수 집사와 아내는 목사의 기대 이상으로 열성적으로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목사는 몹시 마음이 아프고 속이 쓰렸습니다. 왜 탈락했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다 교회를 떠났습니다. 목사님은 지금도 왜 그렇게 장로가 되는 것이 하나님 믿는데 중요한 것인지 지금까지도 잘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시험에 듭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 뭘 그런 것을 가지고… 하다가도 막상 그러한 일들이 나에게 닥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어쩌면 사단은 죽음으로만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들을 가지고 가정과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아 2:15)고 합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했는데 여기서 시험이란 “시련”(testing)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신앙을 연단하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시험”(prirasmov”:페이라스모스)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만 악에서” 라고 나옵니다. “악”(tou’ ponhrou’:투 포네루)는 소유격인데 이는 남성 또는 중성으로 나옵니다. 중성으로 해석하게 되면 추상명사로 “악”을 가리키고 남성으로 이해할 경우 악한 자로서 사단을 가리키게 됩니다. 이 단어가 다른 곳에 더 나오는데요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그리고 살후 3:3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와 요일 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악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하옵소서”는 사단에게서 보호하고 지켜달라는 간구입니다. 사단의 꾀임에,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악에게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엡 6:16-17절을 보십시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12년을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고침을 받을 때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병만 고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합니다.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하면 우리의 삶은 초라해 집니다.”(R. W. Emerson)
믿음은 겸손과 낮아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교만은 믿음을 방해하는 제일 큰 요소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헌금이 많이 나오고, 커다란 건물을 가지고 있으면 큰 교회라 합니다. 모이는 사람도 몇 명 안되고, 아직도 보조를 받아야 교회가 유지되고, 예배 장소도 상가에 세 들어 있다면 작은 교회, 또는 개척교회라 합니다. 이러한 평가 기준은 거의 보편적이 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평가하는 기준은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사람들 숫자나, 헌금 액수나, 건물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부자 교회에 이렇게 경고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계 3:17)고 했습니다. 참된 교회의 기준은 큰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의 마지막 장면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군과 그 조카인 타냐와의 대화입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타냐는 혁명 중에 불길이 치솟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아버지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장군은 타냐에게 다시 질문합니다.
아버지와 헤어진 진짜 이유는 무엇이냐고,
소녀는 매우 당황해하며 주저하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내 손을 놓아 버렸어요.”
이때 장군은 잠깐의 시간을 가진 후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알고 있었던 코마노프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야 너의 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란다. 만약 코마노프가 친아버지였다면 아무리 불이 나고 혁명의 와중에 있었다할지라도 네 손을 놓지 않았을 거야.”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나의 손을 놓지 않으신다는 것을.

2. 구(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베드로가 도망갈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자세히 봅시다.
눅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의 믿음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시 66:19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으며 내 기도 소리에 주의하셨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3.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민수기 15:37-4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옷을 만들어 입을 때 “38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그리고 이 술을 볼 때마다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로 방종케 하는 자기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욕심, 눈을 따라가면 망하는 것입니다. 바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그랬지 않습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교만한 자를 가리켜 “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합 2:5)라고 했습니다. 교만과 욕심의 특징이 있습니다. 멈출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이 됩니다. 자기가 다 모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잡아다가 70년 간이나 포로생활을 하게 한 바벨론은 스스로를 자처하기를 만국의 어머니 같은 나라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7:8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뿐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이제 들을지어다”라고 하면서 교만에 빠져있습니다. 그리나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홀연히 임할 재앙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이것이 교만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했습니다. 욕심은 정지된 것이 아니며 계속 더 나아갑니다. 그래서 욕심은 만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부모님에게 효도하면 부모님이 가만히 계십니까? 아마 가진 것이 있다면 모두 효도하는 자식에게 줄 것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드시고 무조건 복종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영광을 돌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 149:9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지로다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라고 하셨습니다.

한 농부가 친구를 보고 하소연했습니다. “나에게는 땅도 많고 재산도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죽은 다음에는 이 모든 것을 자선사업에 쓰도록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유서를 써놓았다. 그러니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구두쇠라고 하니 속 상하구나.” 그러자 그 친구는 다음과 같은 우화를 들려주었습니다. 하루는 돼지가 암소를 보고 푸념을 늘어놓습니다. “나는 남들 보기에 많이 먹고 살도 쪘지만, 죽으면 내 살과 가죽을 고스란히 주인한테 바치지 않는가, 그런데도 남들은 왜 나를 보고 ‘돼지야, 돼지야’ 하며 손가락질하는지 모르겠어.” 그러자 암소가 핀잔을 줍니다. “너는 실컷 먹고 살이나 잔뜩 쪄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가 죽고 나서야 고작 쓸모 없는 고깃덩이나 주인한테 바치지만, 나는 어떠냐? 나는 열심히 밭을 갈아주고 짐도 져주고, 심지어는 우유도 바치지 않느냐? 나는 살아 있을 때에도 이렇게 도움을 드린단 말이다. 그러고도 죽은 다음에는 주인에게 고기까지 바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후 3:7-11절까지 “영광”이라는 단어를 매 절 10번을 사용해 가면서 이 영광이 결국 성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그 옛날 모세에게 내린 것도 영광인데 하물며 영의 직분을 맡은 우리가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하늘을 향해서 침을 뱉으면 그 침은 뱉은 자에게 떨어짐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내릴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교회에 대해서 “진정한 교회는 세상 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서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고 깨어 있어, 죽어서만 천국 가기 위한 신앙이 아니라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5. 성경 말씀) / 본문 : 마 1:21-22, 딤후 3:15-17, 시편 19:7-10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어느 날,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함께 뜰에서 구름을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저쪽 학의 날개와 같은 구름이 내거냐?”
“저 산봉우리 맨 위의 접시 같은 구름이 내거야?”
“그럼 그 아래 주먹 같은 구름이 내거야?”
아이들은 저마다 이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모양의 구름을 가리키면서 서로 자기 구름이 멋있다고 우겨대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름은 서풍에 의해 그 형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을 보자 한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습니다.
“왜 그래?” 두 아이가 일제히 물었습니다.
“우리 구름들이 다 없어지니 저절로 눈물이 나!” 한 아이가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했습니다.
“임마, 그럼 구름이 늘 그 모양대로 있는 줄 아니? 병신같이…”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무엇 때문에 우는 거야?”
“우리도 나중에는 저 구름처럼 없어지고 말게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는 자라서 어떻게 되었는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한낮 덧없이 사라지는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1. 성경을 기록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한 권의 성경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님의 연합하심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1,600여 년 동안에 걸쳐(구약 1500년, 신약 100년) 무수한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는데, 그들은 예언자, 목자, 음악가, 세리, 의사, 왕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과 저자들이 있었지만 그 내용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가지 관심과 주제를 가지고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① 기록케 하신 이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이는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하며 범죄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② 기록하신 이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령 하나님께서는 감동 받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깊은 뜻, 즉 범죄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구원의 약속을 전달하시기 위함입니다.

③ 기록된 것을 이루신 분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잡혀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때 한 제자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습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이 위기를 빠져나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2-54)
성부 하나님이 성령의 감동을 통해 기록케 하신 그 약속을 이루신 분은 성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그 약속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시고 가셨습니다.
1994년, 기독교 선교팀이 성경책을 나눠주려고 러시아의 스타브로폴 지역을 방문했다. 그 지역의 오래된 창고 하나는 1930년대에 강제노동수용소로 사용된 곳으로 당시 압수했던 물품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그때 압수했던 성경들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 성경을 트럭에 실으러 왔던 사람들 가운데는 하루 품삯을 벌려는 젊은 무신론자 학생도 한 명 끼여 있었다. 그는 성경 한 권을 훔쳐 작업장을 빠져나갔다. 얼마 후 동료들이 한 구석에서 울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수백 권의 성경 가운데서 그가 훔친 것이 바로 자기 할머니가 쓰던 성경이었던 것이다. 그 성경에는 자기 할머니의 서명이 그때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2. 성경의 역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은 크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도구이며 또한 인생들을 이끄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성경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디모데후서 3:15-17 말씀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15절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예수께서도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

② 교훈과 책망과 의로 교육합니다. 16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③ 우리의 행위를 온전케 합니다. 17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안전한 항구 되시는 하나님의 품에 이르도록 돕는 영적 인도서인 동시에 그 미래를 보장하는 소망의 책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게 될 때에 우리 인생 여정은 가장 안전하며 확실합니다. 성경 말씀이 아닌 다른 가르침을 좇음으로 인해 인생의 바다에서 표류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성경에 대한 바른 자세

올바른 성경 관은 올바른 신앙 생활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럼 올바른 신앙 생활을 위한 바른 성경 관, 즉 성경에 대한 성도의 바른 자세란 어떤 것일까요? 왜 같은 성경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변화를 받아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그대로 사는 것이겠습니까?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① 사모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② 신뢰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③ 역사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얹듯 믿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면 비전이 있습니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제게 뜨거워진 이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4. 성경이 주시는 은혜

시편 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라고 하십니다. 금은 귀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돈 대신 금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경제가 불안하여 돈이 값어치가 없어지면 금을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 금보다 훨씬 더 귀한 것입니다. 시편 19:7-10의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① 생명을 줍니다. 7절(상)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금은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죄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살리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합니다.

② 지혜를 줍니다. 7절(하)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금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를 미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지혜롭게 만드십니다.

③ 기쁨을 줍니다. 8절(상)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금은 있을 때는 기쁨이 있지만 없어지면 그 기쁨도 금새 사라지는 허무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훈이 주는 영혼의 기쁨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④ 영안을 줍니다 8절(하)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물질인 금은 탐욕을 우리 눈을 가려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정결한 여호와의 계명은, 그것을 지켜 행하는 자의 영안(靈眼)을 밝혀 천국을 보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이 아이는 성장하여 한국인 최초의 7인 목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숭실학교와 숭덕학교을 설립했으며 3.1 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입니다.
길선주 목사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11살 때 나이 많은 아내와 결혼하였습니다. 하루는 서당에서 오전 공부를 마치고 점심 먹으러 집에 돌아온 선주는 곧장 부엌에 들어가 솥에서 밥을 퍼담는 아내에게 손을 내밀며 “나 누룽지 좀 줘. 하고 졸라대었다.”
선주는 아내 등에 업혀 뒷동산에 올라가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자 어린 신랑은 아내의 두 귀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내려다보는 거야”
아내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흥, 등에 업힌 서방님의 강짜가 너무 심하네요”
그는 12세 글방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했는데 그 시입니다.
[농부의 아내를 만들지 말지니
해마다 고생이 이와 같도다
옥 같은 소니에 신고가 그치지 않고
꽃다운 마음속에서 팔자를 한탄하네
청루에 있는 것은 뉘집 딸인고
밤마다 끄리는 옷이 닳는 소리뿐일세]

그는 17세 때 안주에서 불량배 윤학영 3형제로부터 억울하게 무수히 구타를 당합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식구를 거느리고 평양에 이주까지 했으나 마음에 깊은 상처만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허망한 현세에서 불변의 영계(靈界)를 동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또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부친은 이미 늙어 그가 집안 살림을 보살펴야 할 처지였습니다. 그는 평양의 거상 이재경의 상점에서 1년 동안 상술을 익히고 18세 때 따로 상점을 경영하였습니다. 그는 성격이 맞지 않는 점포를 꾸려 가는 동안에 이해와 타산에 매인 생활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늘 자기 자신을 자책하며 살았습니다. 평양 북 마을의 면장으로 있으면서 첩을 두고 두 집 살림을 하던 형은 물건을 닥치는 대로 가져다 쓰고 원금도 갚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장사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에누리를 할 줄 몰라 매상은 올렸지만 이문을 내지 못해 결국 장사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그는 세태에 대한 실망과 혐오만 더하여 염세에 빠진 데다가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은 어혈(瘀血)로 허약한 몸에 중병까지 겹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부인의 극진한 간호와 부모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병세가 차츰 호전되었으나, 그는 세상이 싫어 살맛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후 수도에 뜻을 두고 김순도(호 창일)라는 사람을 만나 수도의 길을 걷습니다. 산신차력(山神借力)에 도가 틉니다. 19세에 관성교(關聖敎)를 숭상하고 21-29세까지 9년 동안 선도(仙道)에 심취된 도인 길선주가 하나님을 만나가 된 것은 어느 날, 평양에서 이런 소문이 떠돌고 있었습니다.
“평양에 괴상한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더라. 키가 꺽다리이고, 파란 눈이 우묵 들어가고, 코가 크고, 머리털은 볼그레하고 옷은 괴상하게도 쳇다리 같은 바지에 무당의 덧옷 같은 긴 저고리를 입고, 말은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데, 그게 바로 양귀자(洋鬼子)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사람이 양교(洋敎)라는 교를 가지고 와서 전하는데, 한번 거기 발을 들여놓으면 혼을 뽑아서 미치고 만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에 대한 이런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쫙 퍼져 온 성내가 떠들썩했습니다. 이 괴상한 인물은 한국에 파송 된 마펫(한국명 마포삼열, 인디애나주 매디슨 출생으로 1884년 하노빌대학을 졸업하고, 1889년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선교사로 와서 평양장로회신학교 세움) 선교사로, 그는 1890년 1월에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으며, 그 해 8월에 평양에 와서 여문 앞 김선달의 집에서 유숙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기독교에 귀화한 한석진(韓錫晋)씨가 평양에서 마펫 선교사의 일을 돕고 있었습니다.
길선주의 귀에 이 소문이 들어간 것은 그가 평양 널다리골에 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양귀자가 새 교를 전한다는 말에 호기심을 느끼고 어느 날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담론을 나누었는데, 그 선교사가 전하는 교에는 뭔가 취할 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도무지 알쏭달쏭하여 감히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 후 1893년 봄에 그는 친구 문흥준을 마펫 선교사와 한석진씨에게 소개하고, 그 해 여름에는 김종섭을 소개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뭔지 좀더 분명히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길선주가 23세 때 김종섭은 선도를 숭상하면서 도인 길선주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도리를 담론하고 형과 아우를 맺은 사이었습니다. 그런데 양교의 내용을 알아보라고 마펫 선교사에게 소개한 김종섭이 어느새 예수를 믿게 되고, 길선주에게도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양교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미 우리나라에 전해진 천주교를 새로 바로잡은 것으로 선도와는 댈 것이 아니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고 바르게 살아야 하오…”
“듣기 싫어요” 길선주는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양코가 뭔지 알아보라고 선교사에게 소개했더니 형님은 금방 양귀신에 홀렸구려. 그런 경솔한 변심이 어디 있단 말이오. 그러나 한편 길선주는 김종섭의 회도에 큰 충격을 받고, 필경 거기에는 그럴 만한 무슨 곡절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기독교를 철저히 연구하기 위해 중국 성서공회에서 발행한 관주 신약(貫珠新約)을 입수하여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관주가 있는지라 구약을 읽지 않을 수 없어 곧 한문으로 된 구약 성경도 구입하고, 성경 주석과 그 밖의 기독교 서적도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무슨 소린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전설이나 신화 같기도 하고 심지어 무당의 독백 같기도 하여 종잡을 수 없고, 불교와 같이 오도의 지름길을 설파하거나 유학과 같이 깊은 인륜도덕을 논한 것도 아니고, 선도의 주문처럼 신비의 교리를 제시한 것도 아닌 아리송한 내용으로 표현은 쉬운데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가타부타 비판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이 없이 사교에 젖은 머리에 하나님의 말씀이 쉽사리 들어갈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길선주는 평양성내 해주골 입구에 집을 마련하고 가게를 내고 있었습니다. 김종섭은 매일같이 그를 찾아와서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권면 했습니다. 형님, 글쎄 예수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덮어놓고 믿으란 말이오 그러나 김종섭은 실망하지 않고 그를 찾아올 적마다 회보(回報)인 [그리스도 신문]을 갖고 와서 읽어 주었습니다. 하루는 김종섭이 [이 선생전]이라는 전도 책자 한 권을 가지고 와서 읽어보라고 길선주에게 주었습니다. 그 책에는 아편 중독자로서 방탕한 생활을 하던 어떤 중국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게 된 경위가 쓰여 있었습니다. 길선주는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렇게 방탕한 생활을 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고 착해졌다는 이야기가 신기하기는 했으나, 별로 감동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김종섭은 다시 [장원양우 상론(張元兩友相論)]이라는 다른 책 한 권을 꺼내 주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주고받은 두 사람의 대화가 담긴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길선주는 상당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종섭은 또 다른 책한 권을 읽어보라고 주었는데 그것은 [천로역정:게일 선교사가 번역한 것, 18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기독청년회 지원으로 25세 되던 1888년 12월 15일 기포드와 함께 내한했습니다. 성경번역을 주도했는데 마펫과 게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으로 관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신문 주간이었고 그는 제2대 독노회장을 지냈고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와 연동교회를 설립했습니다.]이었습니다.
길선주는 별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 장롱 밑에 밀어 넣고 여전히 선도에 몰두하였다. 그 날도 주문을 열심히 외우고 있는데 김종섭이 찾아왔습니다.
“아직도 삼령 주문을 외우고 있소?”, “그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는게 어떻겠소?”
길선주는 날마다 삼령신군에게 기도하였습니다.
“삼령신군이시여, 예수교가 참 도인지 거짓 도인지 알 수 없으니 가르쳐 주옵소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기를 며칠이 지나니 선도가 과연 영생불사(永生不生)의 도인지 차츰 의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는 지금까지 썩은 새끼줄을 튼튼한 생명줄로 잘못 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김종섭 처럼 예수교를 냉큼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 예수교 역시 구원의 길이 보장되는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러 지도 못하고 저러 지도 못하는 가운데 심한 번민에 빠져 입맛을 잃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는 문득 김종섭이 갖다 준 [천로역정]이 생각나 장롱 밑에서 꺼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뜻밖에도 이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큰 감동을 받아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길선주는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령하신 하나님이시여, 저는 심히 마음이 괴롭습니다. 오랫동안 영생불사의 도로 알고 정성껏 선봉 해온 선도에 대해 의심이 생기고, 저 예수교의 도리는 영생의 진리인지 아직 알 수 없으니 저는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나이다. 저를 바른 길로 인도해 주옵소서! 예수가 참으로 인류의 구세주인지 아닌지 분명히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기도를 미쳐 마치기도 전에 천장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크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너무나 놀랐고 두려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엎드린 채, “사랑하시는 아버지여, 저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를 살려 주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그는 찾아오는 손님을 피하여 100일 기도와 성경 연구에 열중하였습니다. 전에는 아리송하기만 하던 성경 구절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인간을 생명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신령한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꿀맛처럼 달아, 밤을 새워가면서 탐독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도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으로 이루어진 감격스러운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원한 예술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에 입신하여 조사가 될 때까지 신. 구약 성경을 20번쯤 통독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메시아에 대해 예언한 대. 소 선지서, 시편, 신약의 복음서, 로마서, 요한서신 등은 개별적으로 50번 가량 독파하고 중요한 대목은 거의 다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는 성경의 심오한 진리에 도취되어 성경 해석에도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 자신이 은혜를 받기 위해 그를 가끔 집회에 초대하여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의 설교에는 청중의 심령을 찌르는 영력이 깃들어 있었으며 그의 기도에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기도와 성경의 사람]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1907년 1월 6일에 장대현교회에서 2,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부흥회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 많은 회중들이 회개의 눈물을 쏟았습니다.
1898년 길선주는 30세에 평양 널다리골교회 목사가 되었고,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35년 안남도 고창교회(高昌敎會)에서 집회 설교도중 뇌일혈로 67세에 순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할 일은 이 말씀을 사모하고 열심히 읽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반드시 전달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성경을 컴퓨터보다 좋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우리가 성경을 좋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곁에 두시고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기다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4. 기다림) / 본문 : 눅 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1950년대 미국의 어느 시골 소녀가 편지겉봉에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분에게’라고 적은 편지를 보내었답니다. 주소도 없이 보낸 그 편지는 영국의 처칠 수상에게 배달되었다고 합니다. 역사는 처칠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인류를 나치의 탄압으로부터 구한 영웅이며 전후 세계평화의 기반이 된 국제연합과 유럽연합을 제창한 역사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칠은 처음부터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바다를 넘고 우뚝 선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랜돌프는 아내에게 “아들이 목사가 되기에는 성격이 너무 안 좋고 변호사가 되기에는 머리가 나쁘니 군인밖에는 할 것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로 아들의 능력을 낮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어머니 제니는 워낙 바람기가 많은 여자여서 아이들의 양육을 유모와 하인에게 맡겨 버린 채, 거의 관심을 쏟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들이 일곱 살 무렵이 되자, 기숙학교에 보낸 뒤 돈을 보내 주고 가끔씩 편지를 쓰는 것으로 어머니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의 처칠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줄곧 성적이 좋지 않았으며 게다가 수업태도마저 좋지 않아서 늘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문제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공부에 소질이 없었고 게다가 고집이 셌기 때문에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교사의 눈 밖에 났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성적이 나빠 샌드 허스트 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두 번이나 시험에 낙방했고 아버지로부터 “전혀 쓸모 없는 놈”이라는 심한 꾸지람을 들은 후에 하는 수 없이 고시원에 들어가 6개월 간 과외 선생들로부터 집중적인 교육을 받으며 세 번째 시험을 준비했답니다.
그때 사관학교 입시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 중에서 하나를 정해 그 나라의 지도를 자세히 그리는 문제가 출제되는데, 처칠은 고민을 하다가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수많은 나라 중에서 뉴질랜드를 찍어서 집중적으로 준비했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나라 중 뉴질랜드를 그리라는 문제가 나와 기적적으로 세 번째 시험에 간신히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는 여든 살이 넘어 노벨 문학상을 받을 때까지 늘 지긋지긋한 빚 독촉과 돈 걱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열 세 살 때부터 폐렴을 앓았고 심장병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좌우명은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였습니다. 수상직에서 물러나 모교 대학에서 연설을 할 때 그는 학생을 행해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포기하지 마시오! 결코, 결코….”라고 말하며 연단에서 내려와 뚜벅뚜벅 걸어나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을 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다실 오실 때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대강절에는 네 개의 촛대를 준비하여 한 주에 하나씩 켜나가서 성탄절 주일에 마지막으로 제일 큰 촛대의 불을 켜는 것으로 마쳐집니다.
대강절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성탄절이 오기 전, 4주 동안 지키는 절기입니다. 대강절을 처음 지키기 시작한 것은 5세기경부터입니다. 처음에는 6주간을 대강절로 지켰는데 이 기간동안 결혼을 금지하였고, 사제들은 매일 금식을 하도록 법으로 정하였습니다. 오늘날 대강절은 11월 30일을 기준으로 해서 가장 가까운 첫째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1. 주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예비해야 합니다.

대강절의 의미는 첫 번째로 “기다림”입니다.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에서는 기다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결핍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같이 교회에 나오기로 했던 전도한 분이 안나오면 예배시간 내내 그분을 기다립니다.
자녀가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부모님은 애타게 기다립니다.
오늘날에는 예전보다 잘 살게되어 기다림에 대한 갈망이 많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또한 북한에 사는 사람보다 갈망이 상대적으로 약해졌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계 2:25)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눅 12:40)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눅 12:35)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많은 사람들은 기다림의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 지배아래 있었습니다. 로마는 각 지역마다 총독을 통하여 각종 세금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대다수 서민들은 나라에 세금을 바치고, 대지주들에게 노동력과 생산물을 착취당하게 됩니다. 또한 바리새인 같은 종교 엘리트들에게 차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성전에 한번 들어가기 위해서도 세금을 내야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들의 생활상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스스로 소작인이 되거나, 부채를 감당하기 어려워 노예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해야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옛날 다윗 왕 시대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다윗 왕의 혈통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이 비참하고 비굴한 삶에서 건져 줄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입니다. 다윗 왕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와서 정의로운 통치를 실현해 줄 것이라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서를 써 보내면서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을 화려한 왕통으로 소개하는 것은 예수께서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처럼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요한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약대 털옷을 입고”(낙타 털로 짠 볼품 없는 옷)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축 늘어진 옷이니까 허리띠를 해야 겠지요), “메뚜기와 석청(들 꿀)을 먹더라” 그랬습니다. 단순, 소박하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사람인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요한이 광야에서 생활을 하다가 마을로 내려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곧 그가 메시아 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사실 요한이 등장하기 전에도 스스로 메시아 행세를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사이에는 약 400년 간의 공백기간이 있는데 이 기간동안에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회는 극도로 불안해 졌고, 가짜 예언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세례 요한이 등장했는데, 요한은 말하길 자기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그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고 말합니다. 이 얼마나 겸손한 모습입니까?
이것을 볼 때 세례요한 또한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대강절 기간에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되, 우리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모습으로 그분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대강절이 안고 있는 의미는 “준비”하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것은 단순히 기다리는 것 보다 적극적인 형태입니다. 집에 귀한 손님이 오실 때면 우리의 어머니들은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법이 없습니다. 방마다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먼지를 닦고, 거실을 정갈하게 정리합니다. 그리고 손님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해 놓고, 동네 어귀까지 마중을 나가서 손님을 맞이합니다.
우리네 삶이 이럴진대 하물며 구세주를 맞이하는 이 기간을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되겠습니까?

히브리어의 산성이란 단어는 ‘미스가브’(misgab)입니다. 이 단어는 높다, 안전하다는 뜻인 ‘사가브’(sagab)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마사다’(masada)라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높은 산성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최후까지 로마에 항거했습니다. 이 마사다도 ‘미스가브’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마사다는 환난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울 때 계획했고 안정된 시기에 축성하였습니다. 탈무드에는 “겨울에 땔감을 사는데 쓰지 않으면 안될 돈을 여름에 놀며 쓰지 말라”, 잠언 6:8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니니라”고 합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순식간에 닥칠 가장 어려울 때를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세르반테스는 “준비되었다는 것은 절반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일을 추진하는 시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준비를 얼마나 열심히 했느냐에 따라서 일의 성과는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시인 오비디우스는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지 말라. 오늘 준비가 되지 못한 자는 내일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준비해야 할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생활한 것은 바로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2. 깨어있어 홀연히 임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본문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성경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한다는 것이 잘 안됩니다. 스스로하면 죄를 지을 확률이 많아집니다. ‘법 없이도 산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분들 아니겠습니까? 누가 이제 우리에게 총 들고 강제로 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고 막는 일이 있지만 복음을 믿으라고 강제로 시키는 나라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해야합니다. 스스로 나 자신을 지켜 내야하고, 우리 가족을 지켜 내야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은 누가 시키면 잘 안 합니다. 그래서 ‘하던 일도 멍석 깔아 놓으면 안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만 그렇겠습니까? 사람은 눌러서 강제로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교육을 많이 받은 민족도 드뭅니다. 그러나 정말 공부를 잘하고 바른 사람으로 교육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부분은 하고 싶어서 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강제로 시켜서 한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엘는지, 밤중엘는지, 닭 울 때엘는지, 새벽엘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의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막 13:35-36)
그런데 예수께서는 요 5:30절에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15절에서는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고 했으며, 요한복음 17장 10절에서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라”이라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온갖 능력을 다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고 있는 것인지 말해줍니다. 우리가 사실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죄를 물리치려면 반드시 주님과 동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스스로란 예수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3. 뒤돌아보지 말고 미혹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막 13:5-6)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 17:31-32)
본문에 보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뒤돌아보는 것은 세상에 미련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가 어려운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자는 이 세상에 많은 미련이 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지나친 욕심이 있으면 미혹 당하기가 싶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해 못할 집단을 만납니다. 바로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놀랍게도 제사장 그룹입니다. 제사장이 부활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당시의 제사장들은 로마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크고 화려한 성전을 보면서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이라면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막 13:1)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제사장)들은 성전 세를 받아 챙기니 얼마나 좋습니까? “마음이 둔하여 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현실에 만족해하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뒤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눌러 앉으려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 많습니다. 아마 갈수록 더 생길지 모릅니다.

어떤 한 젊은이가 경건한 마음을 가진 노 교수님을 찾아가서 얘기를 합니다. “사람이 죽기는 꼭 죽는가보지요?” “그럼” “그럼 죽기 전에 미래를 위해서 준비해야 되겠군요.” “그럼.” “그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그거야 그저 몇 분이면 되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옆에 있던 강도가 죽기 몇 분전에 딱 한마디 말하고 구원받지 않았나? 그렇게 시간 많이 안 걸려. 죽음 준비하는 것은 그저 몇 분이면 돼.” “간단하군요. 그러면 더 좀 실컷 놀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 예수님만 믿으면 되겠군요.” 노 교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한가지 묻겠는데 자네, 언제 죽을 줄 아나?” “그게 문제군요.” 여러분, 항상 현재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이 나의 마지막날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이 주님을 맞이하는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 때 영광 중에 맞이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3. 만물 위에 계신 예수님) / 본문 :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오늘날 천문학자들은 각 은하마다 1,000억 개가 넘는 무수한 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太陽系) 은하수(銀河水) 성운(星雲)중에서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이렇게 크고 기묘한 우주와 무수한 별들이 신비롭게도 질서정연하게 조화를 유지하며 운행된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의 주장처럼 수소(水素) 가스와 헬륨 가스(He gas)를 발생시키는 “빅뱅(Big Bang)”으로 폭발하여 오늘날 현재의 우주로 진화했다는 가정은 마치 보석가게가 폭발하여 정확한 시간을 맞춰 주는 고급 시계를 만들어 냈다는 우스운 신화와 같은 것입니다.
생명이 우연히 생겨났고 발전했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천문학자, 물리학자의 90%이상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 될 수록 천지와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재 과학자인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인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과학자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10가지 이유를 설명한 내용입니다.
1. 지구의 돌아가는 속도의 정상화입니다. 즉 지구는 시간당 1,600km로 돌고 있습니다. 이 지구가 만약에 한 시간당
160km로 돈다면 사람들은 낮에는 타 죽고 밤에는 얼어죽을 것입니다.
2. 지구와 태양이 떨어진 거리가 신비스럽게도 아주 알밪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지구가 23.5도(度)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4계절이 나타납니다. 만약에 지구가 수평이라면 하루에 두 번 물에 잠기게
되어 대양(大洋) 증발(蒸發) 수증기(水蒸氣)로 남북은 어름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4. 지구와 달이 80,000km의 알맞은 거리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는 하루에 두 번씩 물에 잠기는 일이 없습니다.
5. 지구의 두께가 3m만 더 두꺼웠다면 산소(酸素)가 없어 모든 동식물은 살 수 없습니다.
6. 대기권의 두께가 지금보다 얇았더라면 지구는 별똥들에 의해서 날마다 불바다가 된다고 합니다.
7. 연어의 경로입니다. 연어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바다에서 태어나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강물로 올라갑니다.
8. 장어의 행로입니다. 장어가 바닷가에서 알을 낳고 죽으면 새끼들은 다시 호수나 강으로 돌아옵니다.
9. 호주의 선인장이 빠른 속도로 번식되는 것을 억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선인장만 갉아먹고 사는 곤충이 있기 때문입니다.
10. 사람은 폐를 가지고 있으며 곤충은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관이 성장을 억제시킵니다. 만약 곤충이 폐를
가지고 있었다면 사람만큼 성장할텐데 다행스럽게 곤충은 더 성장할 수 없는 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연의 사실은, 어떤 영적 사실의 상징이다.”(R.W. Emerson)라고 했습니다.
아마 과학자들을 모아놓고 이런 신비스런 아직까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끝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이런 설교 계속하면 남자들은 계속 재미있어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 분들은 따분해 하십니다. 벌써 졸려고 하는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뇌수술을 받으러 가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수술에 성공해서 생존할 확률이라고 해야 고작 10퍼센트. 황량한 마음을 가눌 길 없이 차에 오르며,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차가 서서히 움직여 대문을 나섰을 때였습니다. 그때 거리 양쪽 모든 집의 현관문이 일제히 열리고 동네사람들이 나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습니다. 이웃사람들이 그의 수술 성공과 건강을 기원하며 모두 함께 격려해주자고 약속한 일이었습니다. 절망했던 환자는 ‘나는 사랑 받고 있어.’ 하는 생각에 가슴 가득 새로운 희망과 용기가 솟아올랐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이런 두 가지 상황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주적으로 준비하신 축복이요 하나는 나 자신을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18)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이분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기를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라고 하시며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9)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창조와 신비

첫 번째 창조가 우주적 창조였다면 두 번째 창조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사 65:18)
사람이 아무리 돈을 벌어도 만일 그것을 함께 누릴 사람이 없다면 그 가진 것이 무의미 한 것입니다. 선물은 크고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선물을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합니다. 돌을 맞이한 준혁이와 하민이에게 선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본문 “위로부터”(a[nwqen:아노덴)는 위로부터란 뜻도 있지만 동시에 “처음부터, 새로, 다시”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유대인)을 지켜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지니라”(신 27:8) 왜 그렇게 하나님이 율법을 강조하시고 기록하라고 하셨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을 지켜야 살고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26) 이렇게 언약하시고 이 백성이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 28:2)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며 그들의 불순종으로 하나님은 떠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삼상 16:14)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한때 다윗을 통해서 나라가 반석 위에 서는 듯 했으나 그의 아들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분열국가가 됩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B.C 931~586:19대 왕조:345년)와 북 이스라엘(B.C 931~721:20대 왕조:210년)로 나누시고 혹시나 하시는 마음에서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떠난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하’에는 이스라엘의 제일 악한 왕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나옵니다. 아하시야는 제위기간이 2년을 지냅니다. 그런데 자기 집 난간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신하들을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파리의 신)에게 자기 병을 나을 것인지를 물어보라고 보냅니다. 도중에 엘리야가 나타나 “너는 누운 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왕하 1:3하반절)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다니시면서 목사에게 물어보지 않고 점보는 집에 가서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하나님께 오세요.
이사야 30: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 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많은 재산과 축복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묻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비는 모습니다. 하나님은 오라고 하시는데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세붑에게, 이집트에게 빌붙어서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더 이상 치졸하게 돈을 바라고 세상의 권위를 세우려고 하나님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결코 하나님은 치욕스럽게 만들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로 포로 70년을 지내게 되고 이후에 하나님은 여러 예언자를 보내시고 구약시대를 마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침묵이 이어집니다. 구약의 마지막성경 말라기가 기록되고 세례요한이 나타나기까지 약 400년이 흐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하신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하신 말씀처럼 “위로부터”(a[nwqen:아노덴)는 다시, 새롭게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동행하시는 하나님

본문 위로부터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 “오시는”(ejrcovmeno”:에르코멘스)는 어근 “e[rcomai:에르코마이”입니다. 이 단어는 나타나다 이전에 “동반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데 절대 혼자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인 하나님의 영과 같이 오시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요 10:30)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요 10:38) 예수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오셨다는 사실은 이 땅의 사람과 다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죄인의 모습이 아닌, 능력이 없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시는 분을 말합니다.

만물 위에 계심

본문에서는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 위에 계시나니” 두 번 만물 위에 계심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 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요 3:35)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고전 15:27, 계 1:18)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주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선물의 내용물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성폭행 당한 여성에게 성폭행을 우발하는 행동을 했다고 하여 태형 90대가 내려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90대가 200대가 되고 징역 6개월이 늘어났습니다. 이유는 언론을 통해 공론화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담당했던 변호사는 면허를 박탈당하고 법정 출석을 금지시켰습니다. 이것이 이슬람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만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여자와 노인과 약자의 편입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불볕더위가 한창인 어느 여름날, 주인과 하인이 길을 가다가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 금이 가득한 것이 아닌가! 뜻밖의 횡재를 한 주인은 신이 나서 하인에게 당장 그 상자를 가져다 자기 집의 창고에 넣어 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자를 짊어지고 가야 할 하인에게 뜨거운 여름날에 상자의 무게는 어떻겠습니까? 정말 죽을 맛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반대의 상황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상자를 발견한 주인이 하인에게 ‘자네의 집으로 가져가 살림에 보태 쓰게’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하인에게 그 상자는 무겁겠습니까? 실제 무게는 여전하겠지만, 하인의 어깨에 눌리는 무게 감은 가벼운 새털 같을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는가? 신나고 가볍게 느껴지는가?’ 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 금 상자를 짊어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에 따라 행하는 모든 행동이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확신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고 신앙생활이 달라지며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하는 말은 부모 자신을 위해서만 결코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당신을 위해서만 우리보고 존재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주님의 명령들은 곧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2. 하나님께 영광을) / 본문 : 눅 17:11-19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미국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에 오래 전에 이민가신 권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네 아들을 하나같이 미국에서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키워 교회와 이웃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권사님은 29살에 남편을 여의셨습니다. 당시 남편은 숨을 거두면서 권사님을 불렀습니다.”여보,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미안하지만 이제 한 가지만 약속해 주오. 우리 네 아들을 꼭 책임지고 키워주오” 권사님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약속할게요”라고 했습니다. 미국에 있는 전도사님이 그러는데 요즘은 LA 길거리에서 한국인 거지를 가끔 본답니다. “그분들도 한 때는 꿈을 안고 미국을 왔을 텐데…” 하면서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답니다. 미국 땅에 아들 넷을 남겨놓고 떠나는 남편의 약속에 대답은 했지만 외국에서 사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것은 아닙니다. 권사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믿음밖에 없었습니다. 이 믿음밖에 없는 젊은 과부는 갖은 고생을 하며 어린 네 아들을 키웠습니다. 공부를 특별나게 더 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밥상에 먹을 것이 있을 때는 “주님, 먹을 것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했고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자식들을 앉혀놓고 “주님, 오늘은 금식하게 해주셔서 감사 드립니다”라고 하면서 아들 넷을 키웠습니다. 양식이 있건 없건 감사를 드리면서 아들을 키운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이들을 돌봐 주시지 않겠습니까?
“고려 사람은 바위 올려놔도 살아난다”는 러시아에서 고려인에 대한 대표적인 속담입니다. 초기정착, 독립운동지원, 강제이주, 구 소련의 해체 후 다시 시작되는 방랑의 길, 험난했던 고려인 이주 140년을 잡초처럼 다시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이 좀 강해져야 합니다. 경제적인 부만 쌓여간다고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감사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고 했습니다.
시 50:23에서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좋게 되면 행복이고 나쁘게 되면 불행이라고 하는 단순한 논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며(롬8:28), 부해도 가난해도 자족할 줄 아는(빌4:11)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떤 한 촌에 들어 가셨습니다. 거기서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서로 접촉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문둥병 환자들은 다같이 불행한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불행한 가운데 서로 동정하면서 한 집안이 되어서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유대 사람이나 사마리아이나 사람 할 것 없이 같이 지냈던 모양입니다. 문둥병자가 되었으니 따질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유대인이면 뭐하고 사마리인이면 뭐합니까?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문둥병은 죽음과 같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죽은목숨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이 병에 걸리면 격리시켰습니다. 사회에서 완전히 추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병에 걸린 사람들끼리 모여 지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가족을 만날 수도 없으며, 친구를 가질 수가 없었고 단순히 같은 병에 걸린 것 때문에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사람들이 있는 곳 가까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들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직접 뵙게 되니 너무 감격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하여 절실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문둥병이 심하면 소리지르는 것도 어렵다고 합니다. 죽을힘을 다해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 환자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레 13:1-14)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문둥병환자들은 서로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저희는 예수님이 말씀을 들으면서 아무런 느낌도 변화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병에서 깨끗해져라”고 하시면 온몸이 불덩어리 같이 뜨거워지든지, 감당할 수 없는 경련을 일으키든지,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하든지, 어떤 체험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체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사람들은 기대하는 바와는 달랐지만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릅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제사장에게로 가다가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많은 문제와 요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는데 응답 받지 못하는 일이 많아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위하여 충분한 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마세요. 주님은 그 다음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저 오늘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 환자는 함께 고통을 받았습니다. 함께 울었습니다. 함께 한숨쉬었습니다. 함께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 듣고, 함께 순종했더니, 함께 병이 나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쁨이 충만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이 깨끗이 나은 것을 보이고 다 나았다는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일반 사회 사람들과 같이 지낼 수 있었고 그립던 가족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 뛰며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는 물으십니다. 창세기 3:9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던 말씀과 똑 같은 뜻으로, 사람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고 이탈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들은 당연히 예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할 아담이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아홉 사람은 왜 주님께 감사 드리지 못했습니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간구 합니다. 그 후에 우리가 그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에서 건짐 받고 나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영국의 트렌치 목사는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내려가다가 자기가 믿는 바로는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제일 드문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양에 내려오는 말 중에도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라고 한 것이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다윗도 스스로 자기 영혼을 깨우면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라고 스스로 말했습니다.

이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 버렸는데 이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전부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인이요, 또 은혜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인이 아닙니까?
이 유대인들은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여러 선지자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매 안식일이면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은 전부가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당연히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은혜가 너무 크면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작은 은혜는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열심히 간절히 하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믿음 있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 것인가?, 불평하면서 살 것인가? 우리가 결정해야 됩니다. 불평은 불평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을 낳게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를 잘 하느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얼굴을 보면 압니다.
우리는 당연히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근이지요, 당근은 속어로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아기오이가 엄마오이에게 묻습니다. “엄마 나 오이 맞아?” 하니까 엄마 오이가 웃으면서 “당근이지” 그랬습니다. 이 말은 당연하지 하는 말인데, 아기오이가 오해를 하여 “어머나 나는 오이가 아니고 당근이구나” 하고 가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거기에 인생의 행복이 있고 거기에 만족이 있습니다. 거기에 감사가 있습니다. 순종이 없는 곳에는 절대로 행복도 만족도 감사도 없습니다.
비싼 개와 싼 개의 차이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비싼 개는 주인의 말을 잘 알아듣습니다. 비싼 개는요, 아무리 굶어도요 아무나 던져주는 고깃덩어리를 먹지는 않습니다. 주인이 ‘먹어’ 해야 먹습니다. 그러나 똥개는 아무거나 먹습니다. 주인이 말하든지 말든지 제 맘대로 합니다. 개도 그렇지만 말도 그렇다고 합니다. 중동에 가면은 말을 많이 타는데, 비싼 말은 수십 억 원도 넘는다고 합니다. 비싼 말과 싼 말의 차이도 같습니다 비싼 말은 수십 킬로를 달려와도 주인이 ‘물먹어’ 해야 먹는다는 것입니다. 싼 말은 막 먹는 것이지요, 고깃덩어리 값밖에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짜리 인생입니까? 인생의 값은 하나님에게 얼마나 순종하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 안에 행복이 있고 만족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한 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

1. 감사는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14절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레 13:1-14)고 하신 것 외에는 없습니다. 즉 돌아와서 나에게 감사하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감사는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명령으로 되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의 속성은 스스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하는 것이 강제로 됩니까? 스스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없으면 못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2. 감사는 표현을 해야 합니다.
첫째, 15절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라고 했습니다. “큰 소리로” 했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숨어서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치의 병을 고쳐 주셨는데 말못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께 모든 것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이들은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했습니다. 고쳐달라고 할 때는 문둥병이 들려있는 상태에서도 소리를 지르고 고침을 받은 후에는 침묵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화장실 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소리 높여 주님을 찬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16절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eujcaristw’n:유카리스테오, 깊은 환희와 기쁨속에서 나오는 감사)하니”라고 했습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한 고드란트 생활비 전부를 연보궤에 넣은 것(막 12:42-43)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마라아인인 이 사람이 문둥병자로서 병고침을 얻었지만 주님께 드릴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그는 죄송하여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례였습니다.

3. 감사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아는 것으로 말하면 유대인이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은혜란 자신을 돌이켜 보고 그 축복들이 어디서 왔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할 수 없되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4. 감사는 믿음이었고 구원입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사마리아인이 이 사람은 주님 앞에 나와 절하고 감사의 표현을 한 것 밖에 없습니다. 문둥병을 고침 받은 것만 해도 기쁜 일인데 유대인에게만 있을 줄 알았던 구원을 받게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욥이 고백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삶이 예술(藝術)이라면…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1. 삶이 예술(藝術)이라면…) / 본문 : 요 17:17-19

“17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11월 11일입니다.
빼빼로데이는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등과 함께 상업적 마케팅으로 만들어진 날입니다. 농림부에서는 이런 국적 없는 기념일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쌀 소비 촉진을 위해 ‘가래떡데이’로 하자고 합니다.
세계 교회는 해마다 11월 둘째 주일을 ‘박해받는 교회를 위한 세계 기도의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올해는 11월 11일인 바로 오늘입니다. 세계의 수백만의 기독교인과 수천 곳의 교회에서 일제히 박해 아래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를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빼빼로데이는 알면서 박해받는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우리가 안타깝습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받는 곳은 이슬람권과 공산권일 것입니다.
압둘(가명)은 중동의 어느 나라에 사는 기독교인입니다. 그 역시 이슬람을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열성 이슬람 신자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이슬람에서 배운 것은 증오였다. 알라신을 섬기지 않는 사람, 특히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증오하라고 늘 배웠다. 그러나 내가 얼마 전 만난 두 가정은 나에게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나는 일찍이 이슬람 사회에서 이웃과 사람을 그토록 사랑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이후 나는 그들이 기독교인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성경책 한 권을 주기는 했다. 나는 그들이 믿는 예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신의 아들이며, 평화와 기쁨을 주시는 분이라고 했다. 그분이 주는 평화와 기쁨은 사람이 일찍이 맛보지 못한 평화이며 기쁨이라고 말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예수께로 달려갔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예술로 바뀌는 것입니다. 원망과 증오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예술(藝術)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술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요? 예술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예술은 경험과 상상력을 통해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인간의 활동, 작품을 말합니다. 순수 예술과 교양 예술로 나뉘고, 어떤 사물이 우수하거나 아름답게 생겼을 때도 사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예술이라는 말은 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어머니 음식 솜씨는 예술이야”, “오늘 설교 제목 예술이야!”, “당신의 말은 예술이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시인’으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일 전에 우리 집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닮을 쌓을 때 큰돌을 쌓는데 큰돌로만은 닮을 쌓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큰 돌 틈으로 작은 돌을 넣어야 큰돌이 중심을 잡고 닮을 잘 쌓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이 예술 아닙니까?

예술 중에 행위 예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체를 이용한다는 측면에서 신체예술,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과정예술로 불리기도 합니다. 한 때는 해프닝, 이벤트 등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퍼포먼스라는 용어로 통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 포퍼먼스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이사야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을 당하게 될 애굽과 구스 백성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2 곧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니라 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종 이사야가 삼년동안 벗은 몸과 벗은발로 행하여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예표와 기적이 되게 되었느니라”(사 20:2-3) 이사야의 벗은 몸과 발을 미리 보여 주심으로 애굽과 구스의 멸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마치시지 않았습니다. 우주 최대의 포퍼먼스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을 통해서 영원히 남을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 삶을 “예술”이라는 단어보다는 “거룩”이라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술이 여러 가지 기술을 가지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의 제일 아름다움을 “거룩”이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룩”(aJgiavzw:하기아조)은 성별(consecration)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분리된 삶을 말합니다. 세상 죄와 분리된 사람을 말합니다. 구약에서 하기아조는 선지자들을 불러 세상과 구별하여 세울 때 사용했습니다(렘 1:5).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울 때에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을 맡겼습니다(출 28:41).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입니다.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 아름다움은 추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진정한 예술이란 하나님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말씀 진리”(17절)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절)라고 했는데 “진리”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뒤에 나오는 진리는 헬라어 본문에서는 관사 없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앞의 진리와 구별하기 위함인데요 즉 앞에 나온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뒤에 나오는 것은 “참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자신의 삶을 가리킨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고 그 말씀을 이루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려주신 것은 세상의 그 어떤 학문적 이론이나 기술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물려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거룩입니다.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9절) 또한 이 거룩함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또 아버지가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제자들을 세상에 보냈었다고 하십니다.

거룩한 삶은 마땅히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거룩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는 모든 것이 인스탄트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하나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곧바로 거룩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은 순간 순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으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보다 주님을 세상에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거룩은 사람들로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 성도들에게는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도들이 거룩하지 않으면 범죄 하는 신자처럼 이는 주님의 이름에 불명예와 부끄러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한 값, 그리고 우리에게 부여하신 은혜가 거룩한 삶을 위한 우리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은 발전되어 가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할 때 성령님은 한 단계씩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예수를 영접한 뒤 얼마 동안 한 산으로 기도를 많이 갔었습니다. 기도원에는 나보다 서너 살 위인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거기 있었는데 산기도 초보자들의 인도자였습니다. 그는 대단히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목이 쉬었는데 사람들 이발도 해주고 기도도 도와주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가 몇 달 후 다시 가보면 여전히 그는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것인가? 나가서 일할 생각은 없는가?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다음에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에 그는 40일 금식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기도원장은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게 쓰실려고 그렇게 기도만 시키시는지…”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가 목회를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신앙 인들은 어느 정도 기도를 하고 어느 정도 세상의 일을 해야 하는가? 그저 기도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필요한 때 일을 주시는가?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사역을 위해서 준비해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삶이 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일은 기도와 더불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서 언제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인 그리스도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광야에서 홀로 떨어져 지냈습니다. 요한의 모든 것은 단 하나의 목적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의복도, 음식도, 행동도, 요구도. 그의 삶은 그의 말과 일치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한 유대인 부부가 첫 아이에게 지어 줄 이름을 가지고 의견을 달랐습니다. 그들은 결국 랍비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남편은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기 원하지만, 저는 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 주고 싶습니다.” “당신 아버지의 이름이 뭡니까?” “요셉입니다.” 랍비는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요셉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부인이 다시 말을 꺼냈습니다. “시아버지는 말 도둑이었고, 제 친정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내 아들이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친정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윽고 대답했습니다. “그 아이를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세요. 그러고 나서 그 아이가 말 도둑이 되는지, 정직한 사람이 되는지 지켜보세요. 그러면 어느 쪽 아버지의 이름을 따른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것과, 우리의 삶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삶이란 어느 일 부분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침례교인이 침례 받으러 물 속에 들어가다가 깜짝 놀라며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 내더랍니다.
목사님이 묻기를 ‘그것이 무엇이오?’
성도 ‘돈지갑입니다.’
목사 ‘돈지갑을 넣은 채로 침례 받으십시오. 바로 그 돈지갑이 침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면 걸작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이 걸작이 바로 거룩한 삶 아니겠습니까?
레위기 19장 2절에 보면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거룩한 습관을 지니고 계셨습니다. 앤드류 모레이는 모든 크리스천은 ‘순종학교’에서 순종의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5:8-9절에서 예수님은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 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도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이루려고 하기보다도 내 뜻을 추구하고 이루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 기도 들어주지 않으면 교회 안 나올래요! 하나님께 엄포를 놓고 공갈을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이란 한 마디로 자기를 항상 부인하는 자기와의 싸움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쳐 복종시키는 삶인 것입니다(고전 9:27).

2차 대전 때 한 병사가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병원에 입원해서 큰 수술을 받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선생은 그를 위로하려고 애썼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회복될 것입니다. 한 쪽 팔을 잃었다고 절망하지 마세요’ 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때 그 병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오히려 의사선생을 향해 ‘선생님!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팔을 잃은 것이 아니라 바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병사의 눈은 슬픔에 잠긴 것이 아니라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실 없어진 한 팔에 대해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바쳤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차이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것’ 아니겠습니까?

인생의 삶은 한번만 무대에 올려집니다. 다시 할 수 없습니다. 실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이 거룩한 대열에 합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합심하여 구하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20. 합심하여 구하라) / 본문 : 마 18:19-20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경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한 사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롬 8:5). 육신에 속한 사람은 육신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을 위해서 일합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돈일 것입니다. 돈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영의 사람에게 주어지면 영을 위하여 사용할 것입니다.
‘돈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남에게 주어버린다면 그 사람은 돈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사랑은 주고 나면 더 많이 남습니다. 이것이 바로 돈과 사랑의 차이입니다.’(템플턴) 사랑하며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피조물 가운데 사람처럼 다양성을 가진 존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생긴 모습도 다 다르고 신체구조도 다 다릅니다. 지문도 다르고, 목소리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얼굴 모습도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한 하나님께 창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취미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취미 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즐긴다 해도 그 도가 지나치면 영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늘 유념해야 합니다.

바둑에 심취한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토요일 하루종일 새벽 1시까지 바둑을 두었습니다. 주일 예배 기도순서를 맡았기 때문에 졸리는 눈을 비비며 강단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바둑알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합니다. 까만 머리는 까만 알, 흰머리는 흰 알, 의자는 바둑판의 까만 줄로 보이는 것입니다.
장로님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이러면 안되지!”라며 허벅지를 꼬집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자 바둑 용어가 뛰쳐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겨우 기도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잘 마치는가 싶었는데 그만 아멘을 해야 하는데 대신 “아다리”했다는 겁니다.

성경에는 영혼이 건강하다는 말과 기운이 쇠한다는 말이 나옵니다(욥 33:4, 요삼 1:2). 우리의 영혼이 건강할 때도 있고 쇠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강건할 때는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힘이 있어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 쇠하면 간단하고 쉬운 일에도 두려움이 앞서게 됩니다. 일하는 것이 겁이 납니다. 이럴 때는 내 영혼에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고 했습니다. 육신이나 영혼이나 쉼이 필요합니다. 휴식을 통하여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쉬기만 한다고 힘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어야 하는 것처럼, 육체적 회복을 위하여 양식이 필요한 것처럼 영혼을 위해서도 새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우리가 날로 새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말씀과 기도 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은 기도 중에서도 합심기도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교제하는 방법이요 새로운 능력을 받는 비결인데, 우리는 흔히 기도라고 할 때 개인기도만을 생각하기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합심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앞에서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기도 또한 육신에 속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합심 기도는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합심기도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라기 보다는 공동의 관심사를 위한 기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 교회주의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왜 모여 가지고 부담을 가지냐는 것입니다. 모이지 않는다면 합심하여 기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한다고 할 때 공동의 관심사를 가지고 기도하지만 개인의 일도 얼마든지 합심기도의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옥문을 열렸고 자유롭게 됨을 알았습니다. 바울도 이러한 함심 기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각처에 흩어진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후 1:11)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살기 좋아지면서 기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약 먹지말고, 병원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못살 때는 약 사먹고 병원가지 어려우니까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모든 일을 기도로 하려고 하는 마음이 식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작은 일에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 배아프면 약 사러가기 전에, 병원 가지전에 배에 손을 얹고 기도주세요.

제가 알게된 한 집사님이 계신데 이분은 서울 강남의 모 교회에 다니십니다. 외국인 노동자를 7년여 동안 전도하여 50-70명을 그 교회에 인도한 분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이 시험에 들어 저에게 상담을 했습니다. 올 초에 교회에서 결정하기를 집사님은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손 떼세요? 그랬다는 겁니다. 알고 보니 필리핀에서 현지 목사를 데려오고 국내 책임자로는 모 신학교 여 교수님을 임명해서 이제 외국인 노동자는 그분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 집사님은 하도 기가 막혀서 눈물을 흘리며 저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집사님 말씀으로는 자신은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밀려났다는 겁니다. 다른 여러 말로 그래도 교회를 떠나지 말고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니 꾸준히 봉사하라고 일러 드렸습니다.
그런데 몇 일전 전화를 했더니 간난아이 울음소리가 나더라구요. 어찌된 것이냐고 하니까 필리핀 여성이 아이를 낳는데 돌봐줄 사람도 없고 병원에서는 150만원이면 된다고 해서 갔는데 350만원이 나왔답니다.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어 집사님이 생각나서 연락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원가서 아이를 데려와 돌봐주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병원비는 보험이 있다고 생각하고 150만원 정도 불렀는데 보험이 없어 350만원이 나왔답니다. 이런 일을 기도하며 해결하고 다니셨는데 교회에서 이 일을 알아 가지고 집사님을 불러서 손떼시라고 했는데 왜 자꾸 관여 하냐고 해서 참다못해 한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 훌륭한 시스템과 최상의 학력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합심”이란 말의 헬라어는 “쉼프호네오”(sumfwnevw)라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조화되다. 규정하다, 일치하다, 합심하다”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쉽프호노스”(suvmfwno”)로 “함께 소리내는, 일치된, 조화된” 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쉽프호노스”는 “쉰”(suvn)이라는 “교재, 함께, 도움, 동참”이라는 단어와 “프호네”(fwnh)는 “말, 목소리”를 말하는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케스트라의 ‘심포니’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이 오늘 본문의 “합심” 바로 헬라어 ‘쉽프호네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어 보세요. 서로 다른 악기들이 모여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내지만, 그 조화가 기가 막힙니다. 큰 악기, 작은 악기가 서로 하나가 되어서 훌륭한 음악을 연주해 내는 것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에 동원된 악기의 종류들이 다 다르지만, 훌륭한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우리들 각자가 서로 다르지만, “쉼프호네오”의 합심기도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마음이 맞으면 삶은 도토리 한 알만으로도 허기를 면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주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얼마나 진실하시겠습니까.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교회의 역할 중에 교제가 있습니다. 이 교제 역시 단순히 사람 사귀어서 인맥을 만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교제의 역할은 바로 기도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로서 하나되지 못한다면 교재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합심기도는 바로 서로를 엮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1970년 4월 아폴로 13호가 발사됐는데, 그만 예상치 못한 고장이 났습니다. 우주선에 탄 우주 조종사들이 살아 돌아올 확률이 당시로서 0.001% 정도 밖에 안됐다고 합니다. 이런 뉴스가 나가게 되니까 미국인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이때 당시 대통령이던 닉슨이 텔레비전을 통해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전 국민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의 무사귀환을 위해서 여러분 모두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그 날을 기도의 날로 선포하고, 관공서마다 국기를 반기로 게양하고, 모든 교회는 종을 울리고 국민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국민이 하나로 엮어진 것입니다.
무사귀환의 확률 0.001%의 희박한 상황이었지만, 3일 후에 그들은 기적처럼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은 너무너무 기뻐서 국민들에게, “이번 주에는 모두가 하나님께 나가 감사의 예배를 드리자”고 말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우주 기지의 과학자들은 우주선이 발사한 후에는, 항상 합심 기도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금만 뭘 하려고만 하면 돼지 머리에다 절하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는데,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예전에 모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사다놓고 돼지머리 상 차려 가지고 절을 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던 외국인들이 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한국에 아직도 이렇게 미개한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까?”라고 했답니다.

이 나라에 우상이 사라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PC통신이 처음 생기고 얼마 안되었을 때입니다. 국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하는 한 통신사가 초기화면에 ‘오늘의 운세’라는 메뉴를 만든 것입니다. 제가 그래서 “‘오늘의 기도’는 초기 화면에 올려주지 않으면서 ‘오늘의 운세’를 올리다니 이것이 한국의 정보화입니까? 실망했습니다.” 그랬더니 지운다고 하더니 몇 일 사라지더니 다시 슬그머니 올리더라구요.

올해는 특히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되었던 대부흥운동(1907.1.2)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한국최초의 목사 7인이 안수 받은지(1907.9.17)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북한을 위해서도 합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6.25사변 때의 일이었습니다. 어떤 미군 소대장이 병사에게 물었습니다. “괜찮다면 지금 정찰하러 나가지 않겠나?” 그 병사는 지금은 나갈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소대장은 그 병사가 겁이 많은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녁 6시쯤 되어서 그 병사가 다가오더니 “소대장님, 지금 정찰하러 나가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아해진 소대장은 아끼는 나가지 않겠다고 하고 지금은 나가겠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병사가 대답하기를 “소대장님, 바로 이 시간이 어머님이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시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지원하는 형제, 자매들로 인해 위기 속에서도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그 위대한 사역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저에게 그런 비밀은 없습니다. 있다면 일만 오천 명의 성도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저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성도들의 승리는 자기의 능력이나 지혜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기도해준 사람들로 인한 것이 많습니다. 특히 목회자의 승리는 교회 성도들의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배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합된 기도의 지원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9절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합심의 최소 단위는 두 사람입니다. 사람만 많이 모였다고 합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20절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열 제자가 문을 단단히 잠그고 모였을 때에 홀연히 그들 가운데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에도 나타나셨으며 500여명이 성도들이 모인 곳에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냥 사람 많은 길거리나 시장에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있는 곳에 나타나지도 않으셨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제자들에게 성도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처음 성령이 내렸던 것도 마가의 집 다락방에 120명의 성도들이 모여 합심하여 기도할 때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합심하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실 줄 믿습니다.

개혁의 완성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19. 개혁의 완성) / 본문 : 계 21:4-7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 날에는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걱정이 되는 것이 의사 선생님들입니다. 아픈 사람이 없으니 의사 선생님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의사 선생님들, 아무래도 직업을 빨리 다른 것으로 알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글쎄 모르겠습니다. 건축은 어떻게 될지. 아마 주님이 우리의 집을 짓고 계신다고(요 14:2) 했으니 건축하시는 분도 다시 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병이 따라다닙니다. 그 만큼 병을 앓았는데도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과거에 있었던 질병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중세기 재앙으로 불렸던 페스트까지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호흡하던 공기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질병과 사망을 가져다주는 수많은 유해한 박테리아로 공기는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개혁이 완성되는 날에는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과거와 다른 세상이 열립니다. 일단 오염된 땅과 하늘이 바뀝니다. 새것으로요.
한 어린이의 어머니인 여성도가 죽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와서 “울지 마! 네 엄마는 하늘로 갔어!”라고 말하면서 어린 아이를 달랬습니다. 이튿날 장사를 지냈습니다. 어머니의 관은 무덤을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는 “여기가 하늘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는 파 놓은 무덤을 보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직까지 눈물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변함 없는 믿음이 요구됩니다. 본문 6절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복음의 절대성

1517년 10월 31일 종교개혁의 시작은 마틴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서 갈라디아서 속에 있는 복음 진리를 깨닫게 되면서입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엄청난 진리를 깨달으면서 그 진리가 루터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이 폭발할 때 그가 수도원을 뛰쳐나올 수가 있었고 그의 인격이 변화될 때 그 감화를 받은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성원하고 협력하고 해서 위대한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갈 1:7-8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절대적 성격을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당당하게 말합니다. 이 절대화, 진리의 절대화, 복음의 절대화,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은 이 현대의 큰 병인 상대주의에 빠져 가지고 말이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이래 생각하고는 근데 요것이 조금 더 좋은 거 같기도 하고, 이러면서 허우적거리고 표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 복음, 너희가 받은 복음, 이 복음 진리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누구라도,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이 절대적 신앙, 이 절대적 확신, 이것이 그 마음속에 솟아오를 때 개혁의 용기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상대적 진리가 아니라 절대적 진리입니다. 누구 눈치나 보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개혁에 용기를 내세요.

존 칼빈 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자가 있습니다. 루터 다음으로 이어서 종교개혁을 완성하게 되는 훌륭한 개혁자인데요. 그분이 쓴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해(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라는 책이 있습니다. 굉장히 크고 방대한 책인데 기독교 교리를 잘 정리해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볼 때마다 감탄사가 나옵니다. 어떻게 이런 방대한 책을 쓸 수 있을까! 이 책은 우리 개신교 교리의 바탕이요 근본입니다. 한마디로 교과서 같은 책입니다. 어떻게 500년 전에 이런 책을 썼을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책을 칼 빈이 27살 때 쓴 책이라는 겁니다. 27살에 이런 진리를 깨닫는 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대단한 복음적 교리를 완성한 존 칼빈이 프랑스에서 종교개혁을 하려고 하니까 너무 핍박이 많아요.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역시 학자가 조금 약한 데가 있어요. 이 대 학자가 독일 스트라우스버그라고 하는 곳에 가서 조용하게 글이나 쓰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야겠다 생각을 하고 도피 행각을 합니다. 그러던 중에 제네바에 머물렀습니다. 제네바에 갔을 때에 거기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있는 파렐이라고 하는 분이 이 칼빈을 딱 만나더니 우리를 도와주세요, 여기서 종교개혁을 이룹시다, 하고 붙드는 겁니다. 칼빈은 “아니요. 나는 조용하게 책이나 쓰면서 살렵니다.” 그럽니다. 영 설득이 안됩니다. 말로, 교리로 칼빈을 당하겠습니까? 그러나 파렐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칼빈을 향해서 마지막 파렐이 직격탄을 날립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 가운데 보내주셨는데 만일에 당신이 우리의 요청을 듣지 않고 저 시골로 가 버린다면 당신은 저주를 받을 것이요” 그랬습니다.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칼빈은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셨다. 나를 제네바로 보내셨다. 이 날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제네바 종교개혁을 완성하게 됩니다.
여러분! 내가 하고 있는 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거기에 얼마만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까?
마틴 루터는 스투트가르트라고 하는 곳에서 그가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거기 한 번 방문하게 되면은 루터가 섰던 자리에 표시를 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곳에 가게되면 꼭 한번 그 자리에 서 보려고 합니다. 그가 거기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I have no choice (하나님 나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선택이 없습니다.)” 그렇게 담담하게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자의 용기입니다.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면서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대문에 붙임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이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가 제국회의를 소집하고 루터를 소환했습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 가야합니다. 가면 돌아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면서 한 말이 너무 유명해서 이 말이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보름스 회의의 기왓장처럼, 집의 기왓장처럼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가리라.” 그리고 모든 친구들의 권유와 만류를 뿌리치고 갑니다. 그 용기, 그게 어디서 온 것이겠습니까? 복음의 용기요 진리의 용기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는 확실한 용기입니다. 본문 7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을 믿고 간 것입니다.

내가 개혁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정치인들은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새롭게 대통령이 되는 분마다 개혁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개혁을 외치는데 개혁되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개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혁에서 자신은 제외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개혁을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가만있고 다른 사람 뜯어 고쳐서 사회 개혁을 완성시켜 보겠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암을 죽이는 죽지 않는 세포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암으로 죽지 않고 사는 길이 열리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죽지 않는 세포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암세포였습니다. 죽지 않는 세포 그것이 암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사회 개혁을 한 집단이 바로 공산당입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개혁하겠다고 하는 것이 공산당입니다.

고리키라는 사람은 세계를 뒤흔든 사회주의 혁명가 레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다고만 역설되는 나라 러시아에서, 아니 이 세상 전체에서 레닌만큼 심각하고 강하게 불행과 슬픔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저주한 사람을 나는 보지 못했다. 고통은 인생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물리쳐야 하고 또 물리칠 수 있는 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가 특히 위대한 인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고리키가 평가한대로 레닌은 그가 주도한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습니까? 사회주의 혁명으로 공산주의가 지배했던 지난 80여 년의 구 소련은 엄청난 죽음과 고통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인한 고통은 오늘날 러시아에게까지도 말할 수 없는 혼란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결과 발트 3국의 하나였던 에스토니아에서 시작된 레닌 동상 제거작업은 소련 각 국으로 퍼져 나가 이제 그의 동상은 형체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에스토니아를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이 나라 사람은 지난 70여 년 간 끔찍한 공산주의에 편입되어 지배를 받으며 살았는데요 제가 갔을 때는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유로운 나라에서 그렇게 살기 원했는데 마치 바벨론 포로 70년의 세월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레닌의 혁명은 역사에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레닌은 자신이 죽기 2년 전 “레닌 사상의 가장 탁월한 계승자로” 판단하여 당 서기장으로 스탈린을 임명했습니다. 스탈린은 성직자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을 따라 들어갔던 츠빌리시 신학교를 5년 간 다녔는데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츠빌리시 철도 노동자들로 구성된 한 학습 모임을 지도하는 것을 시작으로 직업혁명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이 당 서기장에 올라서 1934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은 당과 군의 최고위 지도자들이 다수 처형된 것을 비롯하여 수천만 명이 체포되고 피의 숙청을 당했습니다. 이 숙청의 피 냄새가 채 가시기 전에 터진 2차 대전을 통해서 소련 국민 2-3천만 명이 희생당했습니다. 인간적인 사상이나 정치, 경제의 혁명의 결과는 이처럼 엄청난 인류의 고통과 죽음을 초래했습니다.

자기 개혁 없는 사회 개혁은 무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면 내가 개혁의 대상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되고 개혁되어집니다. 천하보다 내가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을 볼 때 자기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 자기 개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신앙의 문제입니다 신앙 없이는 개혁이 되질 않습니다. 신앙 없이 개혁해 보아야 인공적인 암 덩어리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죽고자 하는 진리에 설 때, 변하지 않는 진리 위에서만이 개혁이 완성될 수 있습니다. 신앙과 믿음이 들어가면 사람이 정직해 집니다. 사단은 거짓 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실이요 진리요 참 인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5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하십니다. 이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로 개혁된 우리 모두가 들어갈 것입니다. “하노라”로 번역된 헬라어 포이오(poiw’)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이루어주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것을 예언적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포이오는 현재 시상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 부여되었는데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새롭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 새 하늘과 땅에 들어갈 약속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남아공 양승록 선교사 편지에 있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6.25처럼 슬픈 날이 아니지만 힘든 날이었습니다. 바로 우리교회 노총각 이삭의 결혼식 날이었답니다. 토요일 예식은 신부집에서 9시에. 축복의 비가 계속 내리는 가운데 도착한 결혼식장에는 하객도 없고, 천막도 말 그대로 걸레모양. 급기야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관계로 결혼식장을 교회로 옮겼고, 교회는 장식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이래저래 시간은 흘러가는데 기다리는 또 다른 문제1. 교회 담임목사의 주례거부. 이유인즉, 신랑이 먼저 찾아와서 인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함께 갔던 우리교회 목사는 주례할 수 있는 자격증이 없어서 못하고. 문제2. 신부가 교회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신랑측에서 소를 잡아 반씩 나누기로 했는데 머리 절반과 다리가 오지 않았기에 신부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결혼식은 우여곡절 끝에 오후 늦게 진행되었답니다.

제가 5년 전에 주례를 처음 했던 자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축복해주셔서 제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요. 5년 전 이날을 생각할 때 오빠들은 전원 결혼 반대로 예식장도 안 들어오고 엄마는 아버지의 명령과 그늘 밑에서 평생 사셔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에 혼자 어쩔 줄 몰라하시며, 결국 오빠들의 비 협조로 손님차도 제대로 초청하지 못하고 치룬 막내딸 결혼식을 생각하며 마음 무너져 하셨습니다. 가끔 그때를 생각을 하시며 너무 가슴아파 우십니다.” 결혼 초기에는 어려움도 많았지만 남편이 하나님을 만나고 지금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남편도 가끔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남편은 교회에서 간증도 하게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사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혁 하니까 너무 사회적이고 나와는 거리가 너무 먼 이야기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개혁되어야 우리 가정이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정이 됩니다.

개혁의 완성은 그 날에 주님이 장식하십니다. 그 때에 주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다시는 아픔과 죽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세상 개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앙개혁을 이루어 내셔서 새로운 세상에서도 반드시 다시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