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에서(정 선교사 파송예배)

본문 : 엡 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었던 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한민국에 약 1,000만 명의 성도와 7만 명의 목회자, 45,000개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나라에는 20만 명의 역술인(무당)이 있으며 첨단 시대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700번 서비스 ARS와 인터넷으로 역술사업 규모가 연간 1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사명을 확인시켜 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오늘 파송을 받게되는 에스더, 에스라가 가게되는 A나라에는 공식적인 통계에는 개신교인 0%로 나옵니다. 그리고 카톨릭 포함하여 0.02%라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이곳에 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운명적 삶을 살았습니다. 마치 힌두교의 사상처럼 원래 그런 팔자를 타고 태어났다는 식으로 운명이라며 잘못된 것도 수용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소설이나 동화에 보면 이런 양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는 약자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강자의 태만과 실수에 의해서 문제가 해결됩니다. “흥부와 놀부”에서는 두 형제 공히 문제 해결을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능한 흥부는 마음씨 나쁜 형의 눈칫밥을 먹으며 살아갑니다. 문제의 해결은 전혀 뜻밖의 제 삼자의 개입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심청전에서도 제 삼자의 개입으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장화홍련전은 미해결 비극으로 끝나는데 단지 압제자에 대한 막연한 경고로 끝을 맺습니다.
이런 사고의 틀에서 깨어나 이제 문을 두드리며 문제를 해결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되었습니다.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깨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복음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선교사를 보내고 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여…”(사 61:1)

2.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기독교의 믿음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기독교는 예수를 떠나면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선교하며 왜 복음을 전합니까? 그것은 모든 일을 예수 안에서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슬람은 마호멧은 있어도 예수는 없습니다. 이곳에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1885년 최초의 목사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도착했을 때 이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들이 처음에 왔는데,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오는 사람이 79명이나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서상륜(1849-)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집안이 어려워서 20대부터 보부상으로 만주로 다니며 한약재와 인삼을 팔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다 1878년 만주 땅에 있을 때 열병에 걸려서 죽게되었습니다. 그 때 그의 친구들이 아일랜드 출신의 의료 선교사 헌터(Joseph M. Hunter)가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스코틀랜드 출신 장로교 선교사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에게서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개종한 그를 맥킨타이어는 영국 성서공회 선교사인 로스(John Ross)에게 소개해 줍니다. 이 때 그는 이응찬이라는 사람과 함께 한문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1887년 최초의 한글 성경인 “예수 셩교 젼서”가 발간됩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치를 펴서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는 “금지된 나라, 은자의 나라”였습니다. 서상륜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합니다. 1883년 성경 100권을 밀반입하려다 중국국경에서 조선관리에 의해 체포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있는 한 관리로부터 도움을 얻어 가까스로 풀려나게 됩니다. 그 후에 그는 도피하여 은둔생활을 황해도 소래라는 작은 마을에서 하게됩니다. 그곳에서 은밀하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한국 최초의 개신 교회인 소래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는 소래를 떠나 서울로 들어갑니다. 그는 로스에게 부탁하여 1884년 상해를 통해 성경 6,000권을 제물포에 들여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성경을 받은 그는 서울의 동료 포부상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 해 13명의 결신자를 얻게됩니다. 그리고 다음해 언더우드, 아펜젤러가 왔을 때 79명이 세례를 받겠다고 나간 것입니다.
서상륜이 전도할 때, 그의 봇짐에는 항상 세 가지를 가지고 다녔답니다. 성경, 금계랍이라는 한약재, 그리고 씨감자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필요도 함께 전달해 준 것입니다. 오늘 A나라로 파송을 받게되는 에씨네 부부도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을 오늘날 전문인 선교사라고 합니다.

3.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주진국(1944-2005) 선교사님이 들려준 선교사의 삶을 요약하면
1)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처럼 선교지에서의 생활 그 자체가 선교가 되어야 한다.
2) 선교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3) 선교는 말이 아니라 액션(action)이다. (컴퓨터의 일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액션입니다.)
애국과 종족우월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되 모든 민족 속에 위대한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미션(mission)은 예수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이요, 영웅주의를 버리고 스스로 낮은 곳으로 오신 겸손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며,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원하지 않는 방법과 행동을 하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신처럼 살고 행동해야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 12:5)

1) 기쁨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기쁨이 없이는 못합니다.
요한복음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2) 성령이 충만하여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이 충만하여 한다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3) 감사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12: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공동번역(개정)] “그 날, 너희는 이렇게 감사의 노래를 부르리라. “야훼께 감사하여라. 그의 이름을 외쳐 불러라. 그가 하신 큰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그 높으신 이름을 잊지 않게 하여라.”
 

삶에 관한 비유(3) 두 아들 이야기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78. 비유(16) – 삶에 관한 비유(3) 두 아들 이야기) / 본문 : 마 21:28-32
 

[개역한글]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표준새번역(개정)]
“28.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해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런데 맏아들은 “싫습니다 !”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작은 아들은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는 가지 않았다. 31. 그런데 이 둘 가운데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 예수께서 이렇게 물으시니,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어떤 군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의 행동이 망나니 같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 동안 너의 행동을 참고 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 내가 너를 산에 데려가 크게 혼내겠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산 길이 하도 험하니까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 좀 쉬었다 가요.” “이 놈아 쉬기는 뭘 쉬어.” 아들은 계속 쉬어가자고 사정합니다. 그래서 잠시 쉬는데 아들이 말합니다.“아빠하고 등산하니까 참 좋네요.” “이 녀석아. 조금 더 가면 크게 혼날 건데 좋긴 뭐가 좋아.” “아빠랑 등산하는 것이 처음 이예요. 혼나러 가는 길이지만 이렇게 좋을 수 없네요.” 곰곰 생각해보니 아들과 등산 한번 간 적 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만 마음이 풀려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아들과 산을 내려왔습니다. 아버지와 손잡고 가는 길은 항상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찬송가 456장을 불러보세요.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날에 예수님께서 개선장군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위치면서 예수님을 맞이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종교지도자들은 기분이 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업친데 덥친격으로 예수님은 성전에서 비둘기 팔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들은 종교지도자들의 비호아래 장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마 21:13)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간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한마디로 그동안 골 맡던 것이 터진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힐문하기 시작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23절)
예수님도 이들에게 세례요한의 권위에 대해 반문을 하셨습니다.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로냐?”(24-25절). 이 질문으로 종교지도자들은 딜렘마에 빠져버렸습니다. 만약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요한은 믿으면서 왜 예수는 믿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걸릴 것이고,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하면 당시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의 반란이 염려되어 결국 그들은 겁쟁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27절)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27절). 하시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인 두 아들에 관한 비유를 시작하셨습니다. 두 아들 모두 아버지로부터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한 아들은 안 가겠다고 말했다가 후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또한 아들은 가겠다고 말은 넙죽 해놓고 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31절)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먼저 번 아들입니다.”
(* 주 : 개역한글 성경에는 맏아들과 둘 째 아들의 내용이 뒤바뀌어 있음, 표준 새번역에서는 바로 잡았음)

본문의 내용을 해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아들은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은 것이 문제요, 한 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했지만 나중에 돌이키고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이 비유는 “누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인가?”, “누가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포도원은 교회요, 하나님의 일터입니다. 두 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교회에, 하나님의 일터에 와서 일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공공연하게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했던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순종하기를 거절했지만 나중에 회개하고 돌아와 일합니다. 두 번째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는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위선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는 다른 어느 문제보다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느냐 행치 아니하느냐에 놓여있습니다.
“아버지여 가겠소이다”라고 말만하고 가지 않은 둘째 아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경을 조금 깊이 묵상하시는 분이라면 이 말씀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말을 말아야지! 말해놓고 지키지 못하면 그것이 죄야!”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시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아무 고백도, 약속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앙고백을 반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신앙고백을 통해서 참된 신앙과 연관짓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반대하시는 것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하는 거짓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고백을 사도신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주일 예배에 하나님께 함께 고백합니다. 그리고 또한 많은 예배 때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입으로만 하는 고백이 아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에 싫다고 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한 첫째 아들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첫째 아들도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심으로 결국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이 맏아들의 경우 결과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정당화 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아들도 처음에 아버지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첫 번째는 불순종입니다. 감히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불순종적인 교만한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솔직한 젊은 세대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솔직한 모습이라는 것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입니다. 솔직한 것이 모두 용납되고 죄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에게 전도하는데 이런 말을 합니다. “너무 빨리 가서 믿을 것이 무엇이냐? 그냥 편히 살다가 죽을 때 주여 믿습니다. 하고 죽으면 되지요.” 분명히 말씀드리면 이것은 사단의 소리입니다. 지금 지체하고 예수님 안 믿고 나중에 그가 잘 믿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 바로 예수를 믿을 때임을 아셔야 합니다. 첫 번째 아들은 늦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참 다행한 일입니다.

이 비유에는 네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 가서 일하라”(28절)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일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요 감사한 것입니다. 예전에 보면 일거리가 없어서 그저 먹여만 주고 잠만 재워주면 일하겠다고 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할 일이 많습니다. 열심히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교회에서만 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 속에서 일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벌어서 헌금하세요. 그리고 자녀교육 바르게 시키세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모두 하나님의 일터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일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해서 일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셋째는 지금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한 것입니다. 1871년 10월 8일 주일날 밤에 D.L. 무디는 시카고에서 제일 많은 회중들 앞에서 설교했습니다. 설교제목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대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였습니다. 설교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나는 여러분이 집에 가서도 이 제목을 거듭거듭 마음에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에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나사렛 예수님께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어서 아이라 생키(Ira Sanky)가 찬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구주 부르시네. 세상 피난처 사라지니, 의의 폭풍 몰아치고 죽음 가까웠도다.” 그러나 이 찬송을 마치기 전에 소방차가 밀어 닥쳤습니다. 그 날이 시카고 대 화재의 밤이었습니다. 무디는 나중에 회중에게 “다음주에 결정하자고 한 것을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넷째는 의무입니다. 이 의무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면 아들 된 자의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아니라면 이 물음은 필요가 없어집니다.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얘”로 번역된 부분은 원문에 “아들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포도원에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두 가지 목적으로 삽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worshipper)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일꾼(worker)입니다. 예배와 일, 기도와 노동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두 가지 목적입니다.
예배가 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일은 주로 교회 밖에서 이루어집니다. 예배가 곧 하늘을 향한 감사의 고백이라면 일은 곧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예배자로 부르시고(소명), 세상으로 일꾼으로 보내셨습니다(사명).
예배와 일은 때로 상충되기도 하고 가끔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일할 시간이 없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예배할 틈이 없습니다. 예배에 전념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일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열심히 일하다 보면 또한 예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둘은 반드시 함께 가야 합니다.
이 둘을 하나의 영적인 삶으로 승화시킨 사람이 6세기의 수도자 베네딕트였습니다. 성 베네딕트는 수도원에서 일은 하지 않고 기도만 하는 사람들에게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의무화했습니다.

옛날 예루살렘에 시장에서 일하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대제사장을 찾아 왔습니다. “대제사장님, 저는 20년 간 시장에서 일해온 장사치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가진 소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거룩한 지성소를 들어가 하나님 만나 뵙는 일입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대제사장이 말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사꾼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간청했습니다. 할 수 없이 대제사장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좋소.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허락하겠소. 당신이 직업을 그만 두고 성전으로 들어와 3년 간 마루를 닦고 쓰레기를 치우고 제사장을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남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드디어 3년이 지났습니다. 대제사장도 이제는 거절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사꾼을 데리고 성전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기 보이는 저 문을 열고 들어 가시오. 그 문을 지나면 지성소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이 있을 것이오. 그 문을 열면 당신이 찾던 지성소요. 거기에서 부디 하나님을 만나시오”. 남자는 떨리는 마음으로 지성소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그 마음에 온통 하나님에 대한 환상과 기대로 가득 차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입니까? 지성소의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생선 냄새가 나는 시장이 나왔습니다. 놀란 장사꾼이 다시 주변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가 20년이나 일했던 시장이 분명했습니다. 그 때 그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하던 시장이 지성소였단 말인가? 지성소는 따로 없었단 말인가?” 유대인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계시는 지성소는 바로 우리가 일주일 동안 사는 가정이요 직장이요 세상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 지성소로 향하는 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세상으로 나가는 거룩한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하면 하나님 계신 일터요 직장이요 가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