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4. 크리스마스) / 본문 : 누가복음 2:1-7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아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제가 중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그 때는 교회에 나가기 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몇 일 지나서 교회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시골교회라 정말 마구간 같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성극에 사용했던 용품들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저는 호기심에 가까이 가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로 사용했던 것 같이 보이는 아기인형도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그 아기 인형을 우리 집으로 가져오고 싶었지만 도둑질을 하는 것 같아서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 아기 인형이 기억납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언제 그런 연극이 있었는지 잊어버리고 버려진 아기 예수 인형처럼 예수님을 버리시거나 잊으시면 안됩니다.

미국에서의 어떤 심리학 교수 한 분이 40명 여명의 학생들에게 단어 연상 테스트를 실시했습니다. “크리스마스”란 단어를 주고, 생각나는 것을 하나씩 적어보게 한 심리 테스트였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트리, 가시나무, 선물, 칠면조, 휴일, 캐롤, 산타클로스, 사슴” 등 모두 각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를 적어낸 학생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크리스마스는 무엇입니까? 혹 예수가 빠져있는, 예수가 버려진 크리스마스는 아닌가 생각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오직 예수’를 위한 날입니다. 따라합시다. ‘오직 예수’. 성격이 급하신 분은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줄여서 “오 예~~”입니다. 따라합시다. “오 예~~”

언제인가 일본에서 여자중학교 2학년 학생이 수석을 다투던 동급학생을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 아이 생각에는 그 놈만 죽이면 자기가 수석을 독차지 할 수 있을 것이란 경쟁심 때문에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것은 경쟁사회가 갖다주는 비극을 잘 설명해줍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보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야기의 요점은 달리기를 잘하는 토끼라도 나태해서 상대의 추격을 우습게 알고 낮잠을 자면 질 수 있다는 비유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경쟁사회가 만들어낸 어른중심의 이야기입니다. 거북이 입장에서 보면 이 게임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달리기를 하는데 거북이는 너무나 불리한 신체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북이가 잘 하는 것으로 할 수도 있는데 처음부터 토끼에게 너무 유리한 게임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창의성을 무시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유일하게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이야기하나를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마 20:26-28에 나옵니다. “26 …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성탄절기가 되면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성탄절은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생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크리스마스(Christmas)의 단어 뜻은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의 합성어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을 축하하는 경배의 날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정확한 크리스마스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에 기록된 언어인 헬라어에 보면 그리스도에 해당하는 단어인

헬라어 명사는 주격으로 쓰면 (시그마)가 붙여져 ‘크리스마’를 주격으로 사용하면 (크리스마스)가 됩니다. 즉 ‘그리스도(크리스마)’ 는 예수의 공적직함으로 구약에서는 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기름부음으로 그 직능을 수행한 것인데, 신약에서는 오직 예수께 이 용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 가지의 직능의 완성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신의 직분을 어떻게 완성해 가셨습니까?
사람들 위에 군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자랑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사람인척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능력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제일 많이 사용한 자신의 신분을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人子입니다. 즉 나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는 단순한 것입니다(미국의 힘, 러시아의 힘).
1969년. 미국의 나사는 우주비행사를 달에 보내려는 중요한 순간에 볼펜을 우주에서 사용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볼펜은 중력에 의해 잉크가 밑으로 흘러내리는 원리를 이용해 볼에 묻혀 쓰는 것이었으니 무중력 상태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나사는 10년 동안 120만 달러의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우주는 물론이고 바다 속에서도 쓸 수 있는 볼펜을 개발해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우주인들은 … 그냥 연필을 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섭리적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과 마리아가 예언 성취를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성취시키기 위해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구스도는 호적령을 내려 인구조사를 통해 세금을 징수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아구스도는 자신이 통치하는 백성들을 정책적으로 이용해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임으로 막강한 나라를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다른 것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대로(미 5:2)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베들(집) 레헴(빵, 떡) 두말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즉 그 뜻은 ‘빵집’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요 6:35, 48)으로 오셨습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 6:50)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이 땅에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구약 시대에 에브랏(창 48:7, 룻 1:2, 삼상 17:2), 에브라다(미 5:2)로 불렀습니다.
그 곳에서 라헬이 죽었고(창 35:19), 룻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 곳이요, 다윗이 나서 자란 곳(삼상 16:1, 삼하 23:15)이어서 다윗의 동네로도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요즘처럼 좋은 의료기기가 갖추어진 병원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뜻하고 훈훈한 안락한 방에서 탄생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관(여관)에 있을 곳이 없어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해산할 여인을 몰인정하게 방치해 버린 민심이었습니다. 누구도 곧 해산할 여인에게 방을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메시야의 탄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실을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라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가 되어 저학년 담임선생님이 자기가 맡은 반의 학생들을 데리고 성극을 해야 했는데 무척 똑똑하고 영리한 학생 둘을 골라 한 아이는 마리아를 시키고 한 아이는 수염을 달고 남장을 하여 요셉으로 분장케 했는데 그 이 학년 반에는 왈레스라는 키가 크고 못생긴 일 학년에서 낙제를 한번 했고 또 이 학년에서도 낙제를 한 공부는 못하고 아주 우둔한 학생 하나가 있는데 비록 못 생기기는 했지만 마음은 선량한 아이였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도대체 이 학생에게 무엇을 시켜야하나 하고 생각하다가 생각해 내기를 연기의 대사가 제일 짧고 간단한 역으로 나오는 즉 여인숙의 주인 영감으로 분장 시켜 성극을 연습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바퀴가 달린 목마를 끌고 무대에 나타나서 여인숙의 문을 두드리면 여인숙 주인이 안에서 나오게 되 있고 요셉이 여인숙 주인을 향해서 “주인님, 호적을 하려 온 사람입니다. 여관방마다 만원이고 이 추위에 아내는 해산할 때가 되었고 어디 쉴 곳이 없으니 방 하나 만 빌려 주십시요.” 하면 여인숙 주인이 “안됩니다. 모두 만원이어서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가면 주인으로서의 제일 장면이 끝나고 다시 요셉이 대문을 두드리면 다시 주인이 호롱불을 들고 나와서 “글쎄,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들어가는 것으로 여인숙 주인의 대역이 끝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성극으로 말미암아 전 미국에 큰 화제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 같이 연극이 시작되어 장내는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마리아와 요셉이 하룻밤을 자고 가자고 하니까 여인숙 주인이 “안됩니다. 절대로 안됩니다.” 하는 장면입니다. 주인이 거절을 하고 들어가자 마리아와 요셉이 쓸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어찌하나? 이 추운 겨울날에 여관방마다 만원이고 어디다시한번 사정을 해보자.”하고 요셉과 마리아가 대문을 두드리니 주인이 두 번 째 나타나 “안됩니다. 만원이라 절대로 안됩니다.” 하고 거절하고 들어가면 여인숙 주인의 역할은 끝나는 것인데 주인이 두 번째 나와서는 할 말을 못하고 멍하니 서있기만 합니다.
담임선생님이 급히 막 뒤로 뛰어가서 대사를 읽어 줍니다. “안됩니다. 만원이라서 절대로 안됩니다.” 선생님의 그 말을 받기만 하면 되는 데 전혀 못하고 난처한 얼굴로 서 있기만 합니다.
선생님이 “왈레스야 빨리 하고 들어와야지” 세 번, 네 번 재촉하며 대사를 읽어 주니까 할 수없이 “만원이 되어서” 한마디 해 놓고 또 멍하니 서있고 또 선생님이 재촉하니까 “안됩니다” 하고 멍하니 서있고 퍽 난처한 듯이 머뭇하고 서있습니다. 선생님이 “절대로 안됩니다.” 한마디만 하고 들어오라고 막 뒤에서 재촉을 하니 그제야 이 어린 소년이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 흘리면서 낮은 음성으로 손을 저으며 말하기를 “절대로 안됩니다. “말끝을 흐려버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대로 대문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성극은 계속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무대 동쪽으로 천천히 목마를 끌고 사라져 나가면서 “아, 어찌할꼬, 이 추위에 이렇게 먼길을 지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왔는데 또 어디로 간단 말인가 ?” 하면서 요셉이 추워서 떨고 있는 마리아의 등을 어루만지며 한숨 짖고 있는 이 장면에 자기의 대사를 끝내고 사라졌던 왈레스 소년이 문틈으로 이 장면을 내다보고 있다가 후다닥 뛰어 나왔습니다.
자기차례도 다 지나고 연극의 각본에도 없는 장면입니다. 여인숙 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막 퇴장하려는 요셉과 마리아를 불렸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리 좀 오세요.” 성극을 지도하던 선생님은 물론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고 놀랬습니다. 장내는 모두 긴장되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영문을 모르고 오라고 부르는 대로 다시 여인숙 대문 앞에 왔습니다.
여인숙 주인의 두 눈에는 언제부터인지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우리 여인숙 방은 손님들로 인해서 만원입니다. 그렇지만 손님, 내 방이 있습니다. 내 방에라도 모시겠습니다. 이 추위에 이렇게 피곤하고 무거운 몸으로 어디를 가시렵니까 ? 자 어서 들어갑시다. 내 방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고 긴장하여 보고 있던 청중들은 눈물과 감격에 사무쳐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열광적으로 보내었고 막은 조용히 내렸습니다.

이것은 마음씨 좋은, 사람들은 좀 우둔하고 모자란다고 하는 왈레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천사들은 당시 똑똑하고 율법을 연구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먼 이방지역의 동방의 박사들하고 당시 천시 받는 직업이었던 목자들에게 메시야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는 초라하게 짐승의 먹이통에 누우셨습니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현장이었지만 이는 분명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10절). 화려한 왕궁에서의 탄생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큰 기쁨을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마가도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

죽음의 덫에 걸려 있는 인생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영원한 사망에서 어쩔 줄 모르는 인생에게 주님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참이 없는, 진실이 없는, 꼬여 있기만 한 이 세상에 이제 참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한 희망입니다. 기쁨이 분명합니다. 우리를 구원할 구주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따뜻한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한 도시에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부부 짐과 델라가 살았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각각 걱정이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선물은 하고 싶은데 너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편 짐은 아내의 긴 머리에 꽂을 머리핀을 사기로 마음먹고 갖고 있던 시계를 팔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내 델라는 남편에게 시계 줄을 선물하기로 하고 자신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았습니다.
두 사람은 시장으로 나가 선물을 구입했습니다.
짐과 델라는 서로를 기쁘게 할 마음으로 거의 같은 시간 집에 도착했습니다.
짐은 머리핀을 들고 아내의 머리에 꽂아 주려고 했으나 아내의 머리는 이미 짧게 깎여 있었습니다.
델라 역시 시계 줄을 들고 있었으나 남편에겐 이미 그 시계가 없었습니다.
준비된 선물은 쓸모 없게 됐었지만 부부는 부둥켜안고 행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은 추위를 녹입니다.

정신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간호사가 주사를 놓기 위해 병실에 들어가니 환자가 침대에 누워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간호사 : 누구한테 편지를 쓰시는 거예요?
환자 : 응. 나한테.
간호사 : 뭐라고 쓰셨는데요?
환자 : 그거야 받아봐야 알지.

여러분! 이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받아보아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내 편리함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을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위하여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그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당신을 위하여 구세주가 오셨습니다.’고 힘있게 성탄의 종소리를 울리는 복음의 메신저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를 기다린 사람 시므온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3. 주를 기다린 사람 시므온) / 본문 : 누가복음 2:25-33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은 유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이름가운데 하나입니다. 시므온보다 더 많이 나오는 이름은 ‘시몬’입니다. 베드로의 별명이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구레네 시몬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시므온이 나오는 곳은 레아가 낳은 야곱의 둘째 아들(창 29:33)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후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의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1절에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요 교사로서 니게르라고도 부르는(행 13:1)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이름은 시몬, 요한 만큼 이스라엘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름중의 하나입니다. 흔한 이름이다보니 어떤 학자들은 당시 잘 알려진 유대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이며 그가 A.D. 13년에 산헤드린회장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추측일 뿐 정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세상의 어떤 직위에 있었던 사람이냐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을 기다려온 시므온이 소개됩니다.

첫째,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부모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소개될 때도 의인이요, 흠이 없고 계명과 규례대로 행했다(눅 1:6)고 했습니다. “의롭고”(divkaio”:디카이오스)는 “정의로운, 공정한, 흠 없는”이라는 뜻인데 한가지 더 있습니다. 이 단어는 “적당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우리말에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기를 때, 아이가 하는 대로 놔두다보면 버릇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통제가 안됩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아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아이들을 통제하다보면 반항을 하거나 힘이 없는 것을 알면 복종을 합니다. 이런 아이들은 어른이 되면 반항아가 되든지 아니면 창의성이 떨어지고 시키는 것 외에는 알아서 잘 못하게 됩니다. 이러니 아이 키우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의롭다”는 말이 어려운 것입니다.
제가 몇 일전에 오랜만에 목욕탕에 갔습니다. 때가 많이 나와도 저는 손으로만 때를 밉니다. 그런데 쉽게 해보려고 다른 사람이 다 사용하는 이태리타월로 오른쪽 다리와 팔뚝을 밀어봤습니다. 정말 잘 밀리더라구요. 그래서 재미도 있고 해서 살살 더 해봤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저는 지금 오른쪽 팔, 다리가 아픕니다. 너무 밀어서 그렇습니다. 때를 닦은 것이 아니라 살가죽을 벗긴 것 같습니다. 적당한 때는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부과에 사람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때를 너무 밀어서 생긴 것이 많답니다. 적당히 밀어야 합니다.
의롭다는 말에는 깨끗하다란 의미보다는 적절히, 공정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심을 잡는 중립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의롭다는 것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위로”(prosdecovmeno”:파라클레시스)는 “간청, 애원”이라는 뜻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주님을 간절히,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에 이스라엘은 400년 동안 영감 받은 선지자 없이 침묵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이런 때에도 포기하지 않고 간절이 사모했습니다. 에리미야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고 한 말씀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시므온처럼 위로 받기 위해서는 간절히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조목사님 아들 조수아 하고 캄보디아에 갔었습니다. 24개월이 조금 안된 아이 입니다. 너무 어렸습니다. 낮선 외국에서 부모님이 안보이면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없으면 그 다음에는 접니다. 만일 나 까지 떨어지면 이 어린아이에게는 정말 큰일입니다. 그래서 바지가랑이 잡고 계속 울어댑니다. 6.25때 전쟁고아들 보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울고 또 울어도 부모가 오지 않습니다. 다 죽었거나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만납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세째,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5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이렇게 세 번 “성령”이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시므온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시므온은 26절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면서 평생을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면 살았습니다. 시므온의 소원이 하나 있다면 자신이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시므온의 뜻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는 이제 주님을 보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입니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조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ly Shea)옹의 이야기
1928년 황금의 바리톤 목소리를 소유한 목사의 아들이었던 한 그리스도인 청년이 돈이 없어 대학을 중퇴하고 보험회사 세일즈 맨이 되었습니다. 우연히 방송국 공개홀에서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NBC방송국의 전속가수로 활약해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23세였습니다.
그 앞에는 이제 돈과 인기가 보장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그가 좋아하는 교회에서 그리고 복음집회에서 찬양할 기회가 날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며 기도하던 그가 자기 집 응접실 피아노앞에 앉았을 때 어머니가 평소에 좋아하여 10년을 애송해온 신앙시 한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시를 읽어 내려가던 그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 제 목소리, 제 존재, 제 젊음 모두 주를 위해서만 드리겠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솟아오르는 멜로디를 어머니가 애송하는 신앙시에 맞추어 작곡을 시작합니다.
이날 탄생한 찬송이 찬송가 102장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조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ly Shea)옹의 이야기입니다.
그후로 그는 전도자 빌리 그래함을 만나 그와 더불어 평생을 동역하며
찬양과 간증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역에 헌신하게 됩니다.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것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존귀하고 소중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96세인데 아직도 찬양사역을 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이분이 시므온 같은 분 아니겠습니까?

“이제는”(Nu’n:뉜)으로 시작하는 시므온의 찬양은 일명 ‘시므온의 고별송(Nunc Dimittis), 이제는 떠나가게 한다’로 14세기동안에 걸쳐 즐겨 찬송가로 부르고 기도문으로 낭독해 왔습니다.
시므온은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에서 자신과 하나님을 분명히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주재(despovth”:데스포테스)”로 불렀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주(퀴리오스)”와 함께 사용되는 “주인, 주권자, 절대자”를 말합니다. 신약에서 56회 사용되었는데 25번은 하나님을 직접 부르는 말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시므온 자신은 “종(dou’lo”:둘로스)”으로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제일 많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의미를 잘 모르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대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어떠한 경우라도 순종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죽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 의미 없이 주님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시므온의 노래 본문 30-32절 함께 읽겠습니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노래를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구원을 보았사오니”입니다.
시므온은 ‘메시야’를 보았다고 하지 않고 구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질 역사를 본 것입니다. 메시야를 통해서 구원이 구체화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본다는 것은 예수를 통해서 일어날 구원의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역이 어린 아기 예수를 본 시므온은 알았습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 갓난아기이지만 예수를 본 시므온은 즐겁고 평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이 완성된 시대에 살아갑니다.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둘째, 이방인의 구원을 선포한 것입니다.
“…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선민 사상으로 가득 찬 유대인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시므온 성령의 인도함으로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기 예수는 장차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을 위한 구원도 포함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강도해서 말합니다. “만민, 이방”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명령도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입니다. 복음은 특정 민족과 혈통에게 제한될 수 없습니다. 빛이 비추이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피부가 검거나 희다고 해서 빛이 골라 비추지는 않습니다.
로마의 시인 테르툴리아누스는 말합니다. “햇빛은 하수구까지 고르게 비추되 햇빛 자신은 더러워지지 않는다.” 훌륭한 사람은 진흙 속의 진주 같아서 진흙과 함께 있을지라도 주위 환경에 오염되지 않습니다.

칼 막스 이야기
오래 전(1830년대) 어느 날 독일 트리에(Trier)에 살던 유대인 소년이 그의 법률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유대인인데 왜 유대인 회당에 안가고 교회(독일 루터교회)에 나가요?’
아버지의 대답은 전혀 신앙적인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아,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외면(왕따) 당하지 않고 이 땅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단다’
본래 이 소년의 할아버지는 유대인 랍비였습니다.
그의 큰아버지도 역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랍비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감각이 빠르고 세상 이치에 밝았던 이 소년의 아버지는
유대인들에 대한 사회적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개신 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심의 경험이 없었던 그는 자기 아들에게 아무런 신앙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었습니다.
나이 6살에 유아세례를 받게 했지만 그것이 이 소년을 믿음의 아들로 자라나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자라던 이 소년은 대학에 들어가면서 교회를 완전히 떠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 1847년 그는 엥겔스라는 사람과
영국 런던에서 유명한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칼 막스(Karl Marx)입니다.
결과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만일 이 소년이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다면
세상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교회 안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교회 안에서 자라나고
교회를 출입하며 살아가면서도 믿음을 배우지도 못하고 믿음을 지키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예비하여 비추시는 하나님의 빛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면밀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희망이 없던 인류에게 빛이 비추었습니다. 흑암 과도 같았던 이 땅에 한줄기 빛이 되어 오셨습니다.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과 대가를 요구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학문을 배워 전진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땀을 흘려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은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사랑은 주어도 주어도 부족한 것이고, 다 주고도 또 부족한 것이 없나 뒤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악은 악으로이길 수 없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증오를 낫습니다. 주님의 방법이 옳습니다. 사랑으로만 우리의 문제가 치유될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비춰주시는 빛입니다. 모두 이 빛으로 나오시며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죄인에게 하신 말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2. 죄인에게 하신 말씀) / 본문 : 누가복음 15:1-2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오늘은 성서주일입니다. 성서주일은 200년 전 영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영국 웨일즈에서 성경 한 권을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은 가난한 소녀, 메리 존스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영국 런던의 한 종교인 모임에서 전해지면서 성경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성서공회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현재 전 세계 142개국에 성서공회가 조직되어 성경 보급사업이 수행되고 있으며 이들 나라의 성서공회는 성서공회가 아직 조직되지 못한 이웃나라에 성서를 보급하는 사업을 지원하고 있는데 이를 모두 합치면 230여 개 나라에서 성서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선교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그 성장이 빨랐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이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초대 장로교회는 이런 말을 사용했습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장로교회가 아니다.’ 그만큼 장로교회는 선교에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의인이 아닌 죄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삽니다. 그러나 어떤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죽습니다.
성경에 ‘말씀’이라는 단어가 제일 많이 나타나는 본문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입니다(마 13:18-23).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결론은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마 13:23), “말씀을 듣고 받아”(막 4:20),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고 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 출애굽기 3:5절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죄인이 하나님을 만난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것을 고백했기 때문에 그것이 신성모독죄로 판단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판단하게 된 것 역시 죄인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나폴리의 총독인 오수나 공작이 한번은 죄수들이 노를 젓는 배를 시찰한 일이 있었다. 총독은 죄수를 한 사람씩 만나서 어떤 죄를 짓고 여기에 오게 되었는가 물었다. 죄수들은 한결같이 누명을 썼다느니, 함께 죄를 지은 자가 자기에게 죄를 다 뒤집어씌웠다느니, 판사가 공정한 판결을 내리지 못했다는 등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죄수는 이렇게 말했다.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1.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 / 본문 : 마가복음 2:13-17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제가 섬기는 한국컴퓨터선교회(KCM)와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ACTS)가 산학협력을 맺고있어 2006년도 학생 선발에 특별전형으로 신학과, 선교학과, 기독교교육학과, 선교영어학과에 각각 1명을 추천할 수 있습니다. 추천하는 학생은 고교내신성적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보지 않았어도 됩니다. 그런데 무조건 합격이 되는 것은 아니며 두 가지 시험을 봅니다. 성경고사 20%(200점), 구술면접 80%(800점) 총점 1,000점으로 뽑습니다. 수능성적은 미 반영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을 이 정도로 들어가는 것이면 거의 그냥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추천을 아무나 해주나요? 또 추천되었다고 학교에서 아무나 뽑나요? 구술면접이 80%반영됩니다. 이게 제일 쉬운 것 같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제일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도 제자를 뽑으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으로 뽑으시냐 하면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는 사람을 뽑습니다. 한마디로 죄인을 뽑습니다. 아마 제가 대학교에 전과가 있거나 현재 죄인을 추천하면 떨어질걸요? 면접이 80%아닙니까 그러니 안되지요. 차라리 시험을 보면 관계없을지 모릅니다.

범죄의 전과가 있는 분이 직장을 구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또다시 범죄의 길을 가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름대로 살아보려고 노력을 하지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것이 변명이 되어 죄를 짓는 것이 합리화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을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정치적으로는 혼란했지만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던 때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만들어놓은 계명은 248개의 지켜야할 계율과 365개의 금지조항과 613개의 세세한 규정을 나누어 놓았습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1,521개의 수정 조항을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예수님이 산헤드린공회 같은 정계나 교계로 진출하시려면 자기관리를 잘하셔야 합니다. 꼭 그런 곳에 가시지 않더라도 랍비의 칭함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려면 자기관리를 잘하셔야 합니다. 자기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은 특히 이 사회에서는 사람들에게 눈총 받는 일을 하면 안됩니다. 제사장과 랍비, 바리새인의 세력을 절대 무시하시면 안됩니다. 이 상류층 지도자 그룹을 무시하고는 유대 사회에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신경을 전혀 안 쓰십니다. 아예 사람들의 눈은 의식조차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식사하자고 하면 거절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집이 누구의 집이던 관계없습니다. 너무 시장하셔서 그럴까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또 제사장이나 고고한 집에서는 부르지도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대의 100부장만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 집으로 예수님을 초청할 수는 없고, 자기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중에 찾아오지 않습니까. 이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은 바리새인들과 당시 주류사회가 볼 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바리새인보다는 비천한 세리를 칭찬했습니다.
자신이 메시야라는 것을 최초로 밝힌 것은 다섯 번이나 결혼에 실패한 여인 에게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마지막 용서했던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이 낳은 유명한 기독교인입니다. 그는 시장 아버지와 첩이었던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이었을 때 양친이 모두 죽었으며, 그는 가족 농장으로 보내져 계모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신체적으로 학대를 당했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였으며, 남은 생애 동안 외로움의 상처를 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왜 나 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부모를 원망하면서 성장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몸이 약해 검사해 보니 폐결핵 3기였습니다. 그는 소망 없이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 모퉁이에 우두커니 기대서서 역시 자기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에 북 치고 나팔을 불면서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났습니다. 저들이 전도하면서 외칩니다.

준비하는 믿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20. 준비하는 믿음) / 본문 : 마태복음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철학자들과 성인이라고 말하는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사상가들은 저마다 인생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진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죽어갔고 정확하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통계에 보니까 교회에 나오는 분들 중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많더라 구요. 이것은 자신이 어느 길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같은 겁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어느 길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산에 등산을 하는데 어디로 가서 어디로 내려올 것인지를 알고 가야지 그냥 막 올라갑니까? 그렇게 한번 가보세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가면서도 어디쯤 왔는지? 또 어떻게 갈 것인지를 모른다고 해 보세요. 가면서도 답답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벌기 위한 길은 잘 아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이 없는 겁니다.

길을 먼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1) 악의 길이 있습니다(잠 1:15, 16).
이 길은 굽은 길입니다(잠 10:9).
어둠의 길입니다(욥 24:13).
죄의 길입니다(호 2:6).
황폐케 되는 길입니다(사 59:7).
허무한 길입니다(욥 6:18).
사망의 길이 됩니다(잠 14:12).

2) 의의 길이 있습니다(시 23:3).
진리의 길입니다(시 25:10).
평탄한 길입니다(시 27:11).
정직한 길입니다(잠 2:13).
생명의 길입니다(잠 2:19).
평강의 길입니다(잠 3:17).
구원의 길입니다(요 14:6).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막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경찰관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지는지 아세요? 소방관에게 집니다. 왜냐하면 물불을 안 가리니까 그렇습니다. 소방관도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 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요. 시각장애인은 남에게 돈을 빌려줘서 못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각장인도 다른 사람은 다 이겨도 노인은 못 이깁니다. 노인한테 집니다. 왜냐하면 노인은 다 살았으니까.
우리가 성령 받을수록 막 살면 안됩니다. 성령 받았다고 물불 안 가리면 안됩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경제의 논리만 있습니다. 이슬람 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논리만 있습니다. 오래 전에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선교사가 사러갔는데 유럽, 일본제품은 잘 나오는데 한국 것만 잘 안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그래도 한국사람이 한국상품 안 사주면 누가 사주나 하고 한국제품을 선택했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켜 보니까 잘 나오드레요. 그래서 다시 그 상점에 가보니까 점원들이 한국 것만 잘 안나오게 틀어놓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 것만 잘 나오게 하고 다른 것은 잘 안 나오게 하고 돌아왔답니다.

좁은 길로 가세요.

본문 14절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35:8에는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이 다른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가라고 한 길로 가는 사람이 대로를 걷는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대로를 가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들은 선교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지난번 양화진에 갔을 때 제일 가슴에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교사 자녀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고국에 있었으면 죽지 않아도 되는데 부모님이 선교하러간다고 해서 따라온 아이들입니다. 양화진에 순수한 선교사의 무덤은 111기인데 이중에 36기가 선교사 자녀들입니다.
이렇게 살다간 선교사님들과 자녀들은 ‘대로로 간 것입니까? 좁은 길로 간 것입니까?’ 개인적인 삶의 고난을 생각하면 좁은 길로 간 것이며, 남이 안가는 좁은 길로 간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로 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대로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좁은 길, 대로 모두 무슨 길입니까? ‘의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1676년 영국의 베드포드 감옥에 존 번연(John Bunyan)이라는 가난한 사색가가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영어로 쓰여진 가장 유명한 책 중의 하나인 천로역정(The Story of Pilgrim’s Progress)을 섰습니다. 이 책은 한 사나이가 ‘위험한 여행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여행길을 마치고 천국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오직 한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바울이 AD 65년경에 로마로 들어갔다가 이년이 안되어서 순교를 당합니다. 로마 황제 네로가 로마를 불바다로 만든 후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이지 못하고 칼로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지금도 그 현장이 로마에 남아 있습니다. 네로는 계속 방탕한 삶을 살다가 태후를 죽이고, 왕비를 죽이고, 스승인 세네카를 죽이고, 나중에는 방탕하여 14년만에 독약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바울은 대로로 간 사람임과 동시에 좁은 길로 간 사람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계획을 짜세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여행계획을 짤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을 동원해서 짤 수 있습니다. 돈으로 우리가 가는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이 참여하는 계획을 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선교대회 프로그램 짤 때 보니까 꼭 큰 교회목사님을 한 분모십니다. 이로 인한 폐단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게 짜지 않으면 경제적인 문제를 책임지는 사람이 없게됩니다. 그래서 꼭 한 분 정도는 예산을 책임질만한 분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여행계획을 짜면 누가 책임져 주십니까?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내 맘대로 짜고 내 맘대로 가면 주님은 관심이 없으십니다.

여행가서 제일 재미없는 것이 외로움입니다. 즐거우려고 갔는데 외로운 겁니다. 혼자가면 그렇습니다. 인간은 외로움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처음 창조 될 때 아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남녀가 함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자매들은 남편보고 ‘오빠’라고 하더라구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니 오빠하고 어떻게 같이 삽니까?
시편 기자는 “나는 광야의 올빼미와 같고 메마른 땅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누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마치 지붕 위의 외로운 새 한 마리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시102:6-7 의역)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그들 보호해 주십니다.
시 121:7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아멘.

영국의 특급 열차가 빅토리아 여왕을 태우고 안개가 짙은 밤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기관사는 시간 내에 무사히 목적지까지 모시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한참 달리고 있는데 강력한 헤드램프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곧 교량이 가까워 오는 지점이라 기관사는 급정거를 하고 차장과 열차 승무원들이 밖에 나가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이상한 예감이 들어 몇 십 미터를 더 나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만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량 한 가운데가 급류에 휩쓸려 나갔던 것입니다. 만약 그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다면 여왕을 비롯한 수백 명이 기차와 함께 강물에 빠져 몰살당하는 사고가 났을 것입니다.
그 후 교량이 복구되고 그 열차가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으나 그 이상한 현상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기관사가 기관차 헤드라이트 아래쪽을 살펴보다가 큰 나방 하나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날개가 라이트 유리에 붙어서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관수가 차에 올라가 헤드라이트를 켜보니 바로 그 날개가 깃발을 흔드는 사람으로 보였음을 알아냈습니다. 여왕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자 여왕은,”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방법이었소.”라는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외로움을 극복할 뿐 아니라 그 분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부터 노아 홍수이전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제일 오래 산 사람 므두셀라도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모두 다 ‘죽었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말이 8번나옵니다. 그러나 창 5: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고 다시 옮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여행하시고 하시고 주님 품으로 돌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집에 종이 한 사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종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주인은 장난 삼아 그에게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두 사람의 감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9. 두 사람의 감사) / 본문 : 누가복음 18:10-14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은 미국 교회가 만든 좋은 절기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각 나라에 전달될 때 생겨난 풍습과 같은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상황 화되었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새벽기도입니다. 새벽기도를 교회가 정해놓고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에만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조상들이 제단을 쌓던 풍습을 교회가 기도하게 만든 것입니다. 심방 제도도 만찬가지입니다. 다른 나라는 심방을 정해놓고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가는 사람들이 점술가들은 정초에 찾아와 부적을 주며 일년축복을 빌어주는데 교회 목사가 안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찾아가 성경구절을 적어주고 축복해 주기 시작한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크리스마스 역시 상황 화된 날짜를 만들어 지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독교의 풍습을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 좋게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한 절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좀더 상황 화되었다면 추수감사절은 추석에 함께 보내는 것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미국식으로 오늘 지내게 되었습니다. 요즘 어떤 교회들은 상황 화하여 좀 일찍 지내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것은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어쨌든 1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추수감사절로 좀더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어 또한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감사를 주님이 비교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은혜 받고자 합니다.

바리새인의 감사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행 2:15, 3:1, 10:9).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있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 습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기도를 보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1)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감사
11절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자기의 기도를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감사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비교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죄보다 내 죄가 없어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교만입니다.
“서서 따로 기도”했다는 것은 바리새주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처음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해에 반대하여 경건성을 유지하려는 생각에서 구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제는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배타적 독선주의로 탈바꿈 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는 자신들은 하나의 더러움도 없이 깨끗하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마태복음 19:20에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하는 청년과 같습니다. 248개의 무엇을 하라는 적극적 계명과 365개의 ‘…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치의 교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죄가 있다고 하는 고발성 기도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교만을 하나님께 드러낸 것입니다.

2) 행위의 감사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의 두 번째 잘못은 금식을 자랑하고 십일조 드리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금식이, 십일조 드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행위를 자랑하고 강조하므로 그들이 이러한 행위를 하나님께 자랑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것을 가지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 즉 자신의 목숨도 주셨습니다. 어제 TV에 보니까 어떤 의사 분이 공항에서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는 분을 보고는 응급조치로 가슴을 누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분이 죽은 것입니다. 유가족들은 이 의사 분을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의사가 이 때 응급조치를 잘못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려 보겠다고 노력한 것에 대한 칭찬은 고사하고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달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이분은 말을 잃었습니다. 바리새인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이와 같았습니다.

세리의 감사
바리새인들과 달리 세리들은 죄인이라는 의식 속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시피 했습니다.

1) 겸손의 감사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기껏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 이방인의 뜰이었을 겁니다. 그저 죄인이라는 생각 속에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조차가 죄스러웠을 것입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들하고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어느 백인 교회학교에 흑인 아이 하나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흑인이 백인교회에 다니려면 따가운 눈총이나 여러 가지 서러움을 당하게 되지만 이 철없는 어린아이는 늘 좋은 마음으로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그에게 “너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저는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옵니다” 라고 정말 예쁜 대답을 했습니다.

2) 죄인의 감사
“…다만 가슴을 치며” 이 모습은 죄인으로서 통회 자복하는 기도입니다(23:48, 마11:19). “가슴을 치며”의 ‘치다’ 동사 (e[tupten:에튀프테)는 ‘주먹으로 치다, 심하게 때리다’로 미 완료형입니다. 계속해서 때리고 때리는 반복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저 죄인으로 자기 가슴을 칠 뿐입니다.

3) 불쌍히 여기옵소서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불쌍히 여기옵소서”는 ‘전정 하옵소서, 분노하지 마옵소서’의 뜻으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관대한 처벌을 바라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몇 년 전에 천주교에서 “내 탓입니다”라는 구호를 만들고 이것을 차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구호를 차 뒤쪽에 붙여 뒷사람에게 보이게 했습니다. 내 탓이면 내가 보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보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보아야 합니다. 다른 교회 잘못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교회 자랑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 잘못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나 자신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진짜 문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못이 없다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저는 고집이 있어서 내가 잘못한 것 같지 않으면 도망가지 않고 서서 어머니가 때리는 매를 다 맞았습니다. 제 동생은 그저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빌던지 아니면 도망갑니다. 저는 빌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교만이요, 부모님을 아프게 한 잘못한 것인지 압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찬송가 356장 “성자의 귀한 몸”을 지은 사람은 로버트 로우어 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 찬송을 지은 것은 남북 전쟁으로 초토화 된 때였다고 합니다.
그가 전쟁에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절망과 슬픔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그가 힘을 얻은 것이 바로 성자의 귀한 몸이라는 찬송입니다. 4절에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시간은 가고 있다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윈스턴 처칠이 어느 날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를 방송하기 위해 BBC 방송국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가 택시를 잡아타고 “BBC 방송국으로 갑시다 !” 했더니 이게 웬 일입니까 ? 운전기사가 승차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까닭인즉슨 이제 한 시간 뒤에 위대한 정치가 처칠 경이 중요한 방송을 할 터인데 자기가 BBC 까지 가다보면 그 방송을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칠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1파운드를 내놓으면서 “그러지 말고 좀 갑시다” 하고 짐짓 애원 조로 부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 기사 아저씨, “에라 모르겠다” 하더니 중얼거립니다. “타세요! 처칠인지 개떡인지 내가 알게 뭐람. 돈이나 벌어야지”.
우리도 이와 같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날 도적같이 소리 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세요. 그 분을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감추어진 마지막 날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제일 관심이 있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제1순위가 마지막 날일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오늘 본문 말씀으로 대신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실망입니다.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노아 때의 이야기를 하셨을 뿐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해서 가르치고자 했던 것 역시 천국과 마지막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뽑은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 49개입니다. 이 모든 비유가 마지막 때가 있기 때문에 그 때를 위해서 준비하고 깨어있으라는 내용입니다.
(등불 비유(마5:15-16), 씨뿌리는 비유(마13:3-23,막4:3-20), 곡식과 가라지 비유(마13:24-30), 겨자씨 비유(마13:31-19), 누룩 비유(마13:44), 감추어진 보화 비유(마13:44), 잃은 양 비유(마18:12-14,눅 15:3-7),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눅11:5-8), 주인을 기다리는 종 비유(눅12:35-40), 지혜 있는 청지기 비유(눅12:42-44), 열매 없는 무화과 비유(눅13:6-9), 잃은 돈의 비유(눅15:11:32), 탕자 비유(눅15:11-32),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 관원에게 구하는 과부의 비유(눅18:10-14), 포도원 일군 비유(마20:1-16), 예복이 없는 손님 비유(마23:11-14), 열 처녀 비유(마25:1-13)) 등

이런 많은 비유들로서 종말에 대한 질문을 대신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역시 비유 속에 끼어서 나온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0장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해서 그리고 본문 뒷장 25장은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종말 일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더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그 날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인기를 끌 목적으로 종말일을 말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1992년 10월 28일 휴거를 공수표로 날려버리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이 또 나타났습니다. 1992년 당시 먼저부터 불었던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32명의 집단 타살 사건과 사회적으로 걸프전과 맞물려 종말론은 꺼질 줄 모르고 급기야는 갈 데까지 가고야 말았다. 당시 이러한 현상은 선교지에서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공산권의 대표적인 나라 소련이 무너지자 너도나도 선교하러 간다고 들어갈 때 다미선교회의 이장림씨 역시 이곳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휴거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한 불똥은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교회 인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주며 한국인 선교사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만큼 선교하는데 타격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암적 종말론이 근래에 또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 세력이 미약하나 언제 바람이 휘몰아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국제적으로 9.11 태러와 이라크전쟁 등을 통해서 고조되어왔습니다.
국내에서는 ‘7기약 영원한복음’(발행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소재)의 소책자를 전국교회에 배포하고 영문교회(서울시 서초구 신원동 소재), 영문기도원(경상북도 함안군 군복면 소재)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모른다고 하셨으면 더 이상 알려고 하면 안됩니다. 아이들 말로 ‘다칩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그렇게 못 믿으십니까? 그 날을 안들 우리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부작용이 더 크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어린 자녀에게 부모님이 안 가르쳐 주는 것은 다 필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일을 미리 고하고 준비하는 일을 하는데 이 천사들 역시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위에 아무도 모르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할 일은 다했다.

38절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할 일은 다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일상을 말한 것입니다. 정죄하려는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관심있는 일은 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구원받는 사람들이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몰랐습니다. 자기들의 생활에 바빴습니다. 구원을 위한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

39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본문에서 강조되는 말이 있습니다. “다 멸하기까지”(kataklusmo;”:카타클뤼스모스)입니다. ‘홍수가 범람하여 씻어 버리듯 파멸하기까지’입니다. ‘쓰나미’때 해변에 있다가 당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전혀 준비를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닥치는 큰 파도에 덮쳐 쓸려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그와 같은 광경을 말합니다. 이것은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고집스럽고 어리석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우체국에 편지 부칠 일이 있어서 갔는데, 한 아주머니가 전보문을 쓰지 못하고 울며 손을 떨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예, 내가 손이 떨려서 쓸 수가 없습니다. 좀 대신 써 주세요.” “왜 그러십니까?” “내 딸이 나와 의견이 충돌된다고 해서 집을 나갔습니다. 1년 동안 종적을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딸이 있는 곳의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전보를 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뭐라고 쓸까요?” “딱 한 마디만 써주세요. 그냥 집으로 돌아오라, 어머니.”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돌아 오라,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깨어 예비하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깨어 예비할 것을 당부하시기 위함입니다.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가 제일 둔감한 것이 있는데 세월 가는 것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없다보니 가끔 다른 아이들 크는 것보고 “참 세월이 많이 흘렀네”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혹 시한부 종말론 자들 때문에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시간은 흐릅니다. 종말을 행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종말이 아니어도 개인적인 종말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저는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어떤 종말이든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종말을 맞이합니다.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어느 청년이 진정으로 사역하고 싶은 교회를 발견하여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내일 새벽 3시까지 교회로 나오게’하고 가버리시는 것입니다. 혹독하게 추운 날씨지만 이튿날 새벽 3시에 정확하게 교회에 도착했지만 교회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동이 터 오고 목사님은 아침이 지나 10시쁨 어슬렁어슬렁 사무실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유년부 학생에게나 어울릴 만한 문제를 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몇 권인가?”
“66권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여섯째 날 무엇을 하셨나?”
“네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입니다”
“자 끝났네 자네는 합격일세. 그럼 내일 다시 교회로 오게 당회에 추천하겠네”하시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했지만 전도사는 합격이라는 말에 기뻤습니다.
다음날 당회에서 목사님은
“이 청년을 우리교회 전도사로 추천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청년을 테스트해본 결과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나는 이 청년에게 극기 시험을 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추운 날씨에도 먼 거리에서 새벽에 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정확성과 약속에 대한 테스트도 합격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내가 일곱 시간이나 지나서 왔는데도 참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내 시험에서도 합격입니다. 마지막으로 신학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 너무 기초적인 성경 상식을 물었는데 기분 나쁜 표정하나 짓지 않고 겸손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청년을 우리교회 전도사로 추천합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당회원들은 만장 일치로 전도사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

여행 계획을 짜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7. 여행 계획을 짜라) / 본문 : 마태복음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함께 공부하셨던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항상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단정하게 하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한의사에 가까울 정도로 의료에 관심이 많으시고 늘 육식보다는 채식을 즐겨 드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에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봄에 동기모임을 모였을 때 건강하셨는데요.
베드로는 인간의 삶을 나그네로 비유했습니다(벧전 1:17, 2:11). 성경에만 그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행로(人生行路)’, ‘인생여로(人生旅路)’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인생은 어디론가 가는 것이며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나 여행이라는 것은 어디론가 간다는 것입니다. 기태가 영국에 있는데 유럽을 돌다가 12월중으로 온답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를 다닐 것이냐고 했더니 아프리카 여행하면서 알아둔 친구도 있고 해서 여행계획을 짠 모양입니다. 누구나 여행을 다닐 때는 돌아올 것을 계산하고 여행계획을 짭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것이 여행이라면 반드시 계획을 짜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여행계획을 어떻게 짤 것인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철학자들과 성인이라고 말하는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사상가들은 저마다 인생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진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죽어갔고 정확하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통계에 보니까 교회에 나오는 분들 중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많더라 구요. 이것은 자신이 어느 길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같은 겁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어느 길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산에 등산을 하는데 어디로 가서 어디로 내려올 것인지를 알고 가야지 그냥 막 올라갑니까? 그렇게 한번 가보세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가면서도 어디쯤 왔는지? 또 어떻게 갈 것인지를 모른다고 해 보세요. 가면서도 답답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벌기 위한 길은 잘 아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이 없는 겁니다.

길을 먼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1) 악의 길이 있습니다(잠 1:15, 16).
이 길은 굽은 길입니다(잠 10:9).
어둠의 길입니다(욥 24:13).
죄의 길입니다(호 2:6).
황폐케 되는 길입니다(사 59:7).
허무한 길입니다(욥 6:18).
사망의 길이 됩니다(잠 14:12).

2) 의의 길이 있습니다(시 23:3).
진리의 길입니다(시 25:10).
평탄한 길입니다(시 27:11).
정직한 길입니다(잠 2:13).
생명의 길입니다(잠 2:19).
평강의 길입니다(잠 3:17).
구원의 길입니다(요 14:6).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막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경찰관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지는지 아세요? 소방관에게 집니다. 왜냐하면 물불을 안 가리니까 그렇습니다. 소방관도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 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요. 시각장애인은 남에게 돈을 빌려줘서 못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각장인도 다른 사람은 다 이겨도 노인은 못 이깁니다. 노인한테 집니다. 왜냐하면 노인은 다 살았으니까.
우리가 성령 받을수록 막 살면 안됩니다. 성령 받았다고 물불 안 가리면 안됩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경제의 논리만 있습니다. 이슬람 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논리만 있습니다. 오래 전에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선교사가 사러갔는데 유럽, 일본제품은 잘 나오는데 한국 것만 잘 안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그래도 한국사람이 한국상품 안 사주면 누가 사주나 하고 한국제품을 선택했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켜 보니까 잘 나오드레요. 그래서 다시 그 상점에 가보니까 점원들이 한국 것만 잘 안나오게 틀어놓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 것만 잘 나오게 하고 다른 것은 잘 안 나오게 하고 돌아왔답니다.

좁은 길로 가세요.

본문 14절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35:8에는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이 다른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가라고 한 길로 가는 사람이 대로를 걷는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대로를 가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들은 선교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지난번 양화진에 갔을 때 제일 가슴에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교사 자녀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고국에 있었으면 죽지 않아도 되는데 부모님이 선교하러간다고 해서 따라온 아이들입니다. 양화진에 순수한 선교사의 무덤은 111기인데 이중에 36기가 선교사 자녀들입니다.
이렇게 살다간 선교사님들과 자녀들은 ‘대로로 간 것입니까? 좁은 길로 간 것입니까?’ 개인적인 삶의 고난을 생각하면 좁은 길로 간 것이며, 남이 안가는 좁은 길로 간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로 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대로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좁은 길, 대로 모두 무슨 길입니까? ‘의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1676년 영국의 베드포드 감옥에 존 번연(John Bunyan)이라는 가난한 사색가가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영어로 쓰여진 가장 유명한 책 중의 하나인 천로역정(The Story of Pilgrim’s Progress)을 섰습니다. 이 책은 한 사나이가 ‘위험한 여행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여행길을 마치고 천국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오직 한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바울이 AD 65년경에 로마로 들어갔다가 이년이 안되어서 순교를 당합니다. 로마 황제 네로가 로마를 불바다로 만든 후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이지 못하고 칼로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지금도 그 현장이 로마에 남아 있습니다. 네로는 계속 방탕한 삶을 살다가 태후를 죽이고, 왕비를 죽이고, 스승인 세네카를 죽이고, 나중에는 방탕하여 14년만에 독약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바울은 대로로 간 사람임과 동시에 좁은 길로 간 사람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계획을 짜세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여행계획을 짤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을 동원해서 짤 수 있습니다. 돈으로 우리가 가는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이 참여하는 계획을 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선교대회 프로그램 짤 때 보니까 꼭 큰 교회목사님을 한 분모십니다. 이로 인한 폐단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게 짜지 않으면 경제적인 문제를 책임지는 사람이 없게됩니다. 그래서 꼭 한 분 정도는 예산을 책임질만한 분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여행계획을 짜면 누가 책임져 주십니까?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내 맘대로 짜고 내 맘대로 가면 주님은 관심이 없으십니다.

여행가서 제일 재미없는 것이 외로움입니다. 즐거우려고 갔는데 외로운 겁니다. 혼자가면 그렇습니다. 인간은 외로움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처음 창조 될 때 아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남녀가 함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자매들은 남편보고 ‘오빠’라고 하더라구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니 오빠하고 어떻게 같이 삽니까?
시편 기자는 “나는 광야의 올빼미와 같고 메마른 땅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누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마치 지붕 위의 외로운 새 한 마리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시102:6-7 의역)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그들 보호해 주십니다.
시 121:7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아멘.

영국의 특급 열차가 빅토리아 여왕을 태우고 안개가 짙은 밤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기관사는 시간 내에 무사히 목적지까지 모시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한참 달리고 있는데 강력한 헤드램프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곧 교량이 가까워 오는 지점이라 기관사는 급정거를 하고 차장과 열차 승무원들이 밖에 나가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이상한 예감이 들어 몇 십 미터를 더 나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만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량 한 가운데가 급류에 휩쓸려 나갔던 것입니다. 만약 그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다면 여왕을 비롯한 수백 명이 기차와 함께 강물에 빠져 몰살당하는 사고가 났을 것입니다.
그 후 교량이 복구되고 그 열차가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으나 그 이상한 현상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기관사가 기관차 헤드라이트 아래쪽을 살펴보다가 큰 나방 하나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날개가 라이트 유리에 붙어서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관수가 차에 올라가 헤드라이트를 켜보니 바로 그 날개가 깃발을 흔드는 사람으로 보였음을 알아냈습니다. 여왕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자 여왕은,”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방법이었소.”라는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외로움을 극복할 뿐 아니라 그 분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부터 노아 홍수이전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제일 오래 산 사람 므두셀라도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모두 다 ‘죽었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말이 8번나옵니다. 그러나 창 5: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고 다시 옮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여행하시고 하시고 주님 품으로 돌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마리의 양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의 말씀(16. 한 마리의 양) / 본문 : 마태복음 18:12-14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한 마리의 양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다른 많은 양이 있다고 해서 한 마리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나와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있어야 됩니다. 내가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다른 사람이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소중한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십시오. 심지어는 단점까지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초라하게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배용준과 닮았으면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남자 분들은 별로 그런 생각 안 하는데 여자들은 많이 하나 봅니다.

해외 갈 때마다 입국심사 대에 서게됩니다. 별 것 아닌데도 약간은 긴장이 됩니다. 천국에도 이런 입국심사대가 있는데 유난히 시간이 걸리는 줄이 생기더랍니다. 가만히 보니까 특히 한국 여자들이 길게 서 있더랍니다. 왜 길게 서있나 보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원본하고 달라서 대조하느라고 시간이 걸린답니다.

우리는 다른 누구와 비교하기 위해서 창조된 사람이 아닙니다. 항상 누군가를 모방만 하고 흉내내는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자신만 비참해질 뿐입니다. 또한 자신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제인간의 집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성을 떨어뜨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양성을 좋아하십니다. 제가 늘 주장하는 것 중의 하나가 다양성입니다. 누가 큰 교회에서 지성 전을 자꾸만 짓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봅니다. 제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저는 다양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모습으로 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것이 저의 대답입니다. 생태계가 얼마나 건전하냐는 시내로 비유를 들자면 얼마나 다양한 물고기가 살고있느냐로 그 생태계가 얼마나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 평가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방하려고 애쓰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창조의 모습을 찾는데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소중한 조언을 듣지 말고 고집을 부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만이 제일인줄 아는 안하무인에 빠지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잣대로 획일적인 평가는 부분적으로는 필요하고 옳은 것인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는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들이 만든 잣대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내가 만든 상자에 넣고 평가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은 내 스타일로 억지로 꿰어 맞추려고 하면 안됩니다. 많은 사람이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기분 좋게 출근했는데 직장 동료가 좋은 새 차를 몰고 오는 것을 보고 기분이 확 잡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갑자기 힘이 빠집니다. “나는 뭔가?” 자기 재능이나 능력, 교육 수준을 남과 비교하는 것은 자기 배우자를 남과 비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보실 때도 비슷합니다. 다른 목사님들과 비교해서 우리 목사님은 목소리가 쉰 음성으로 기도해서 거룩하게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기도도 안 하시나 봐!”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제가 제일 웃기 다고 생각하는 것은 목사님들 중에 다른 분 목소리 따라하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주신 이 어눌한 목소리 얼마나 창조적입니까? 제 발음이 시원치 않아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한답니다. 만일 사람의 목소리가 다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르기 때문에 소리로만 듣고도 누군지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개성을 주셨습니다.
우리 나라의 교육열은 대단합니다. 아마 세계의 어떤 엄마들 보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교육열이 오늘의 한국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가지는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 아이를 누구와 똑같이 키우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저 다른 사람이 하니까 따라서 우리 아이도 해야 된다는 식의 교육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만의 경주를 하며 독특한 존재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누구를 따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4-20 “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태국 갈 때 타이항공을 타고 갔습니다. 비행기에서 음료수 가져다주잖아요. 그 때 무엇을 먹을 것인지를 물어봅니다. 그래서 제가 “물 주세요.”그래 보았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저를 처다 보는 것 같았고 태국 여 승무원은 약간 당황해 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의도적으로 “물 주세요.”를 다시 했습니다. 여러분!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의 여 승무원은 간단한 한국말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국을 안 하니까 승무원들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한국 사람이 한국말 하는 게 창피한 것입니까? 한국 사람이 세계화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한국말 다 잊어버리고 영어만 하면 자기 자신은 잃어버리기 때문에 이것은 실패입니다. 앞으로 비행기 타시면 자신 있게 한번 해 보세요. “물 주세요.”

이제 한국인의 의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금번에 역사적인 인물을 많이 만났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최찬영 선교사입니다. 이 분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최초의 한국 선교사입니다. 지금은 미국에 살고 계시며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중국에서 성경을 찍어서 보급하는 일을 하십니다. 일년에 천만 권이 넘는 성경을 찍어 중국 전역에 보급한답니다.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미국 시민권을 가지시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베트남에 가셨을 때 한국 사람들이 한 줄로 서서 빨리 들어가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도 그 쪽 줄에 서서 들어가려고 하니까 여권을 보더니 저 쪽으로 사라고 하더랍니다. 여기는 한국여권이니까 빨리 들어가는 것이고 당신은 미국여권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더랍니다.

우리는 최고의 엄마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엄마가 되시기 바랍니다. 저도 최고의 목사는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 때 남과 비교해서 평가하시면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를 선택하실 때 “여호수아야 네가 모세와 똑같이 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15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수 1:15-16)고 하셨습니다.

최고의 칭찬을 하십시오.

자녀에게 이렇게 말해 보세요.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사람이 절대로 못한단다.” 그래요 안 그래요. 반드시 그렇습니다. 저는 피카소가 그린 그림보다는 예지가 그린 그림이 더 마음에 들더라구요.

이번에 제가 인도차이나 대회에 가서 무슨 이야기하고 다녔겠습니까? “미션 매거진”입니다. 보는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태국 촌부리에서 사역하는 김정웅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지역별로 선임선교사님을 자문위원으로 하려고 하는데 김정웅 선교사님에게 자문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했습니다. 몇 일을 이야기 하니까 선교사님이 웃으시면서 아무 말도 못하시더라구요. 캄보디아에서 오신 정병대 선교사님은 목사님에게 여기 오면서 지금까지 이 이야기만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시간이 없어서 못 뵌 강승삼 목사님은 식당에서 차에서 완전히 넉 다운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진경 목사님이 헤어지면서 저에게 별도로 하신 말씀은 “아까 그거 말한 것 한 번 잘해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숭실대 이사장님으로 계시는 이원설 박사님도 서울에 비서실에 연락해서 도울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콕의 이정익 장로님(전 전주대 총장)도 흔쾌히 허락하시고 또 미국에서 케냐로 들어가는 동아프리카 최초의 선교사 임종표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이분은 금년에 연세대에서 주는 언더우드선교상을 시상한 부부입니다. 어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태국 행사장에서 비행장으로 가는 동안 완전히 녹였습니다. 그래서 가실 때 “제 이름이 필요하시면 목사님 필요한 곳에 사용하세요.”하고 가셨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그분들의 방법으로 전도하며 선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법으로 전도하고 선교하고 교회를 부흥시켜야 합니다. 어떤 교회를 따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방법이 있습니다.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 왜 그렇게 우리를 찾습니까? 그저 우리가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귀한 존재이기에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십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당당할 권리가 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아멘.

 

섬기는 자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스코틀랜드 가정의 표어 가운데 ‘봉사하기 위하여 구원받았다(Saved to serve)’란 말이 있습니다.
섬김을 모르는 삶은 구원의 감격이 없는 삶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고침 받은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일어난 것은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어떤 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