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까지 복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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زندگی عیسی مسیح(19. 아홉까지 복①) / T 5:1-6. 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①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②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③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④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⑤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⑥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⑦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⑧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⑨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한국교회 성도를 보고 지나치게 축복신앙을 강조하고 또 믿고 있다고 우리 스스로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좀 솔직해 집시다. 복을 싫어하십니까? 세상에 복을 싫어할 사람이나 민족은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민족은 복에 대한 강한 집착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 복()자를 많은 곳에 보이게 새기고 장식했습니다. 어려서 수저에 福자가 새겨진 것을 사용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늘 복을 생각한 것입니다. 문을 나가고 들어올 때도 볼 수 있도록 문창이나 여름에 치는 발 같은 곳에도 예외 없이 福자를 새겼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오강에도 福자를 새겼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먹고사는 것, 정상적으로 배설하는 것이 모두가 복입니다.
상서(尙書)에 오복이란 수( ; 오래 삶), ( ; 많은 재물), 강녕(康寧 ;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 유호덕(攸好德 ; 어진 덕을 닦음), 고종명(考終命 ; 하늘이 내린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이라 했습니다. 보통 이()가 5복중의 하나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강녕’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도 오복 중에 하나여” 하는 말은 우리 몸의 대문 격인 입안이 건강하지 못해서야 몸도 마음도 편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저도 이가 좋지 않아 그 아픔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정말 이가 튼튼하다는 것은 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복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복에 대한 관점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하고 우리가 생각한 것이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서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는 바로 산상보훈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9가지 복은 핵심이요 요약입니다.
한때 인도의 국부로 불렀던 모한다스 간디를 사람들이 “마하터마”(위대한 영혼)이라고 불렀습니다만 그는 언제나 이 말을 거절했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위대한 인도의 아버지에게 어느 날 젊은 대학생이 방문하여 ”마하터마 간디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우리 인도 국민들이 잘살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때 그가 “우리 인도 국민이 잘사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습니다”به بالا. 그는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습니다만 늘 곁에 성경을 두고 이 산상보훈의 말씀을 묵상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도독립을 위한 무저항운동이 바로 여기 산상보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산상보훈은 천국시민의 성품과 삶에 대한 귀중한 말씀입니다. 천국백성은 이렇게 되어야하고 또 이렇게 살아야합니다.

8복이 아니라 9복을 말씀하심
오늘 본문의 말씀은 흔히 산상보훈으로 팔복으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는 복은 9가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3절부터 11절까지 ‘복이 있나니’는 원문에 매 절 처음에 나타나는 단어로 makavrioi(마카리오이)로 ‘축복, 행복’이라는 복수입니다. 저는 복을 좋아해서 8복으로 말하기보다는 9복으로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복이 하나 빠지면 되겠습니까? 하나라도 더 받아야지요.
그러면 전통적으로 팔복으로 보는 이유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0절과 11절에 나오는 복의 구분을 하지 않고 11절은 10절의 설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으로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복이 있나니’를 9번으로 구분하셨기 때문입니다.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와 11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를 구분한 것입니다. 8번째 복은 “의”를 이야기했고, 11절은 “예수님을 위해서”를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을 별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으로 보려면 6절 “의에 주리고”와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용상으로는 7개가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7가지로 보든 8가지로 보든 9가지로 보든 크게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저는 많은 것이 좋으니까 9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몇 개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3بخ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6:20에서는 “가난한 자”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심령’(마음)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영적인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가난’이라는 것은 마음부터 나옵니다. 마음이 가난하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부자면 부자입니다. 그럼 그런 마음의 부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런 뜻은 아닙니다.
본문 말씀을 서민들이 사용하는 말로 번역한다면 “마음이 거지(빈민)인 자는”으로 볼 수 있습니다. 누가가 “가난한 자”로만 기록한 것에 오히려 더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가난한 자는 부자에 비해서 교만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기댈 곳에 없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힘들 때, 억울할 때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오직 의지할 것은 주님 밖에 없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가난은 오히려 제일 큰 축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바로 이런 자에게 천국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قرنتیان 8:1-2절에 보면 ‘마게도니아 교회들은 가난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은혜를 받고 환난과 많은 시련을 이겼습니다. 그리고 극한 가난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헌금을 넘치도록 드렸다고’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비운 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의 욕심이 없었습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다윗과 일행이 그일라에 있을 때 삼상 23:16-18 “16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17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18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요나단에게 욕심이 있었다면 아버지 사울왕을 이어 왕이 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친구인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습니다. 요나단은 마음이 가난한 자 이었습니다. 요나단의 이러한 약조로 다윗은 엔게디 황무지(삼상 24장)의 굴에 있을 때 사울이 군사 3천과 함께 굴에 들어와 다윗이 사울을 죽일 기회를 맞이하였지만 다윗은 그의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훌륭하지만 요나단의 이러한 약조가 없었다면 다윗도 어떤 행동을 취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성경에 진짜 마음이 가난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왕권도 그분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마음뿐이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도 요구하시는 것이 이 마음입니다.

4بخ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사람은 상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흔히 ‘속상하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속상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 속상한 것이 이웃집 아이가 우리 아이보다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아니면 나보다 더 좋은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에, 또는 나보다 더 빨리 승진했기 때문에 속상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속상한 것은 죄가 이 땅에서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병든 사람을 보면 속상합니다. 죄에 빠져 있는 사람을 보면 속상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사단의 방해가 속상한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애통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입니다. 그가 쓴 책의 제목이 ‘예레미야와 애가‘입니다. ’애가‘라는 말은 ‘어찌하여’라는 탄식과 비통의 감정을 말하는 ‘에카(ekah)’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백성은 포로 끌려갔습니다(B.C.587). 그래서 그는 5개의 애가를 지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백성들이 사단의 하수인 노릇하는 것을 애통해야합니다.
이런 아픔이 우리에게 있으면 주님은 위로해 주십니다. 위로는 paraklhqhvsontai(파라칼레오)로 ‘곁으로(para)’와 ‘부른다(kalevw)’의 합성어입니다. 위로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가야합니다. 주님의 곁으로 우리를 부르는 것이 ‘위로’입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이 눅 2:25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یوحنا 14:16)가 되시기 위합니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LXX)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뜻은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있을 때에도 의로운 자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보살피신다는 것을 굳데 믿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사랑과 같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도 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땅’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에만 45회에 걸쳐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 특정 지역(4:15, 9:26), 하늘과 땅(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 9:6), 육지(14:24), 온 세상(12:40)로 나타나지만 본문의 땅은 창 15:18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축복의 약속의 땅입니다.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주리고”는 인간의 욕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무엇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욕구가 ‘의’에 있는 사람은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회적 관심을 위해서, 불의한 사람들을 위해서 노력하는 분들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것도 전혀 틀리다고는 할 수 없으나 세상의 정치적 이념에서 어느 쪽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의’라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축복에 관한 것으로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로 보아 그 욕구가 충족됨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의’를 그토록 이루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신호 형제를 보면서 그것을 느낍니다. 지난번에 종엽이가 신호형제에게 ‘이번 박사학위 마치면 제일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는데 신호형제 대답이 ‘나는 파키스탄을 가고 싶다’고 했답니다. 선교하고 싶은 욕구 그것이 의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이 주앙교회를 부흥시켜 하나님의 나라에 꼭 필요한 교회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바램이요 소원입니다. 우리는 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할렐루야-

사실 제가 구태여 8복이라고 하지 않고 9가지 복이라고 했지만 몇 개이든 간에 가만히 보면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지는 사실은 하나임을 발견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나를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그곳에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길거리에 금발의 미녀가 헐레벌떡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한쪽 가슴을 내어놓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의아하게 쳐다보고 급기야는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왔습니다. “당신은 지금 풍기 문란이오. 당신이 내놓은 왼쪽 가슴 노출 죄로 체포할 수 있소” 그러자 그 여인은 “오 마이 갓. 웨어 이즈 마이 베이비” 이 말을 경상도사투리로 바꾸면 “아이고 우짜꼬, 내 아이는 어디 갔노?”입니다. 내용인즉 그 여인은 버스 안에서 아이에게 젖을 먹이다가 버스가 내릴 때 서둘다가 아이를 버스에 두고 내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은 참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사람, 정신나간 사람은 생명의 주님을, 천국을 믿기만 하면 준다는데 가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곰을 잡으려면 곰이 다니는 길목에 큰돌을 달아놓으면 된답니다. 곰이 가다가 돌에 텅~하고 부딪히면 곰이 생각하기를 “예전에 없던 것인데” 하고는 다시 한번 텅~하고 부딪혀 봅니다. 곰은 더 큰 충격을 받게되고 머리가 얼얼해 집니다. 그러나 곰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텅~하고 부딪힙니다. 그러면 추는 더 멀리 나라 갔다가 돌아오며 곰의 머리에 부딪힙니다. 그리고 점점 세게 받습니다. 그러면 제아무리 단단한 곰의 머리라도 배겨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복을 곰처럼 머리로 들이받고만 있는 것은 아닌 지요? 예수님 말씀하신 복은 안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신약에서 의에 주린 대표적인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가 로마서 15:28-29에서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29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열매로서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전달해 주는 것을 마치고 서바나(스페인)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전달해 주고 체포됩니다. 그리고 가이사랴에서 감옥살이를 2년 합니다. 그리고 죄수로 포송줄에 묶여 로마 감옥으로 호송됩니다. 그리고 그의 바램이었던 서바나(스페인)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 갈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가고자 했던 서바나가 이제 우리가 전해야할 땅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되어서 내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애통해하며, 온유한 마음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되어서 바울이 이루지 못했던 스바나(땅 끝)까지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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