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활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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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و کسانی که?(5. 나의 부활이신 예수님) / متن : 요20:1-18
이슬람교도와 기독교인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슬람교도는 뽐을 내며 자랑합니다. 우리의 성지 메카에 가면 으리으리한 마호멧의 묘지가 있소, 당신들 예수의 무덤은 있소? 그러자 기독교인이 대답합니다. 그렇소 우리 예수님은 무덤은 없소, 예루살렘에 있긴 하지만 그것은 빈 무덤이오, 그리고 그것이 당신들과 우리의 차이점이요, 마호멧은 죽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였다오,
بله. 한 종교의 교주, 성인군자, 어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 죽었습니다. 석가도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나의 가르침은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도 죽었습니다.
제가 예수님에 관해서만 1년 동안 설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항상 그 때의 제목을 보면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주제나 제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역시 제일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해서 죽으셨다고만하면 아마 기독교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패의 종교일 것입니다. 제가 어느 유대인이 쓴 글을 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사건까지 부분적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인즉 유대인들은 밤에 죄인을 체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의 법이 있었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밤에 혈기가 등등한 산헤드린공의회의 수비병들과 함께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캄캄한 밤에 예수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가 예수께 다가가 입을 맞춤으로 이들에게 신호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을 분명히 밤에 체포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은 지금도 예수님 체포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말할 때 부활의 장면을 제일 처음에 목격한 마리아들과 제자들이 환영을 보았다고 부정합니다. 정말 이 부활의 사건이 제자들에 의해서 꾸며지거나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환영을 본 것일까요?
지금부터 저는 세 가지 측면에서 부활 사건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اول,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죽음과 부활이 예언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미리 계획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주님은 이전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즉 우리와는 다른 그분은 실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치 앞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추측하거나 거짓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16:21)یافت که.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하신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만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뿐일 것입니다.
دوم,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유대인들은 일주일의 기준이 안식일이기 때문에 안식일로부터 계산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은 토요일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였고, 지금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이며 즉 일요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일곱 귀신 들렸다가 예수께서 고쳐주신 후 예수를 따르며 봉사했으며(막16:9, 눅8:2),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를 따라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도 지켜보았던 여인입니다(요19:25). 공관복음에는 이 여인 외에 여러 명의 여자들이 함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마28:1, 막16:1, 눅23:55, 24:1). 요한도 2절에서 “우리”라고 복수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막달라 마리아 이외에 사람이 더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돌이 옮겨간 것을 예수의 시체를 누군가(제자들?) 훔쳐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찾아가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와 제자들은 급히 예수님의 무덤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요한은 본문에서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3-4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요한의 세심한 기록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요한 자신도 지금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제자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달려갈 때 베드로보다بخش저 도착한 제자가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5절)بود به نام. 요한은 자신의 이름이 나타날 곳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중의 하나입니다. 이로 보아 그리고 그의 정확한 증언으로 보아 요한이 먼저 베드로보다 무덤에 빨리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6-7절)به بالا. 우리는 여기서 세마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세마포가 부활의 증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자신도 이런 것을 미리 염두 해 두고 기록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 급박한 상황에서 있는 그대로의 본 것을 증언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여러분 빈 무덤이 예수의 부활 증거가 됩니까? 예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나 다른 사람 누군가에 의해서 예수의 시체가 도둑맞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론 당시의 최고 군대인 로마의 군병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무덤이 지켜졌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은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그들에게 술을 먹여 졸게하고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보는 것 등입니다. 이 때의 문제는 예수의 무덤을 잘 지키지 못한 로마 군병의 책임론으로 이 사건은 종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사건에 대해서 다시 증명할 수 있는 증거물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세마포 옷 예수님의 수의였던 것입니다. 본문을 원문으로 보면 “예수님이 입으셨던 세마포가 그대로 있는데 마치 예수님의 몸이 증발해서 빠져나온 것처럼 세마포가 그대로 있었다”고 표현합니다. 어렸을 때 벌래를 본 적이 있는데 벌래가 나방으로 바뀔 때 자신이 입고있던 집을 쏙 빠져나온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꼭 그런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람이 옷을 벗을 때는 이와 같이 벗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그저 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육체는 단순히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신비스러운 다른 부활의 몸을 입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육체는 병들지 않는, 썩지 않는, 다시 죽음이 없는 분명 그러한 육체를 입으신 것이 틀림이 없었습니다.
언젠가 TV에서 가정의 문제를 다룬 드라마를 본적이 있습니다. 아마 실제사건이었던 모양입니다. 어느 자매가 시집을 갔는데 남편을 의심하여 자기 것을 늘 별도로 챙겨놓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이혼을 당하게 될 때 잘못하면 알몸으로 쫓겨나니까 미리미리 분명히 해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습니다. 남편은 급기야 참다못해 정말 이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새댁이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가 보니까 언니 셋이 있는데 모두 어떤 이유에선지 이혼을 한겁니다. 그래서 동생에게 가르쳐 주기를 시집을 가자마자 남편을 믿지 말고 챙길 수 있는 것은 모두 챙겨놓으라는 언니들의 이야기만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세마포가 진짜 물증이 될 수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시체를 훔쳐 가는 도둑이 어떻게 이와 같이 수의를 벗겨놓고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시체를 훔쳐 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수의를 벗겨놓고 시체를 훔쳐갔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아마 요한도 이러한 자신의 기록이 부활을 이토록 철저하게 증거 해 낼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의 기록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어떤 기록이 더 있어야 이 역사적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마는 부활 후 첫 번째 나타나신 광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 자국과 손에 못 자국을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두 번째 나타나실 때에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요20:27)او.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은 끝이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사실인 것도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강제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이 없는 자는 의심이 많은 자요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며 남이야 더욱 못 믿는 것입니다. 결국의 삶은 불행의 연속인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고전13:7)بود به نام. 당신을 위해서 부활하신, 첫 열매가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سوم, 예수님의 부활은 내 부활의 증표로 믿어야 합니다.
저는 앞에서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땀을 뺐습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실상은 육체를 입고오신 하나님이신 데 사실 무엇을 못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이 무어라 하든 꼭 그렇게 무덤에서 나오는 방법이 아니어도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가셔야할 길을 떠나셨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에게 억지로 어떤(부활하신) 모습을 보여주실 필요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와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이 부활이 아무나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다닐 때, 몇 년이 되었는데도 사실 제 마음속에서는 이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찬송도 배우고 기도도 하고 그리고 성경의 좋은 말씀들도 대략 이해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부활을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제 스스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과 단판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제가 기도원을 찾을 당시는 우리나라에 성령운동과 더불어 방언의 은사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다 찾아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0일 금식기도를 작정하고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기도원 목사님은 우리기도원은 저녁에 술 먹고 올라온 사람도, 강아지도(그 정도로 방언 받기가 싶다는 뜻으로) 방언을 받아간다는 기도원이었습니다. 뭐 방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예수님의 부활만 믿게 해 주시면 방언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통해서 믿어진다면 그것을 주셔도 좋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저는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기도원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내려오고 저는 힘이 빠져서 비관한 상태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결국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부활에 대한 믿음과 함께 각종은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왜 그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빨리 은혜를 주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통해서 저는 인내와 싶게 믿어진 결과보다는 어렵게 믿어졌기 때문에 결코 잊을 수 없는 감사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 지금 솔직히 다 믿어지지 않지만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여러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때가 되면 깨닫게 하시고 믿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او. 예수님이 이러한 방법으로 부활하신 것은 우리에게 당신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첫 열매로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성도들의 실제 부활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어날 것에 대해서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2:12)고 완료형으로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계획해 놓으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공동번역 고전15:12)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사도들의 전한 복음이란 오직 부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그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입증이었습니다. 제자들이나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하며 선포할 때에 그들은 의미 심장하게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를 사용하여 그 사건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꼭 “그가 부활하셨다”가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지셨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깊은 영적 통찰력으로 그 일어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행위이며
1943سال, 조국 독일에서 포악한 히틀러 정권과 맞서 자유와 평화를 외치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된 본 회퍼 목사는 2년 후 프로센부르크 강제수용소에서 처형당했습니다. 1945년 4월 9일, 그는 동료 죄수들과 지상에서의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다음과 같이 격려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광명과 소망의 세계가 있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배 후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본 회퍼 목사는 고개를 돌려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새 생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오른팔이 그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행하신 일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행2:24, 32, 3:15, 4:10, 롬6:49, 고전15:15). 흉악범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은 정통파 유대인의 생각에는 충격적일 뿐 아니라 실제로 참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은밀한 기대를 가졌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십자가 형벌로 인해 그의 거짓됨이 드러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서 가장 고귀하고 대담한, 희망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과 예수님의 메시야 권에 대한 하나님의 인치심, 그리고 그의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입증이 나타난 것입니다. 부활 이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소망의 사건을 보여주신 것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바울은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습니까?"(고전15:29)라고 반문하며 말합니다. 우리는 증표로 세례(예수와 함께 죽었다가 살아남)를 행합니다. 이 세례의 증표를 행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함께 임한 것인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부활하는 날,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을 꼭 만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