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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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رام. 12:2)
요즘 영국은 그야말로 박지성(30) 센세이션입니다.
맨유 팬들이 환호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이 지난 9일 첼시전에서 보여준 기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지성은 주심이 경기 시작 휘슬을 분지 35초만에 신예 하비에르 에르난데스에게 깜짝 킬패스를 연결, 선취골을 만들어냈습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의 새 역사를 쓸 맨유의 19번 째 리그 우승에 9부 능선을 넘게 한 귀중한 도움이었습니다.
맨유 팬들은 골을 넣은 에르난데스와 네마냐 비디치보다 박지성이 첼시전에서 가장 돋보였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습니다. 팬들은 박지성 놓고 재미난 토론도 펼쳐지고 있습니다. manutd789란 아이디를 쓰는 팬은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박지성은 인간인가’(Is Park Ji Sung a Human?)이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많은 팬들이 댓글로 박지성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한 팬(Michael Stokes)은 ‘박지성은 놀라움 그 자체다. 첼시 선수들에게 지속적인 압박을 가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팬(IamConnor17)은 ‘박지성은 7개의 폐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며 90분 내내 쉼 없이 뛰는 박지성의 활동량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맹활약의 원동력을 궁금해하는 팬들도 있었습니다. 한 팬(Dirty Harry)은 ‘박지성의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는 인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manutd789 팬은 ‘박지성은 종종 끓인 개구리즙을 마시곤 한다’고 했습니다. 별의 별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박지성 선수는 평발입니다. 운동선수로는 큰 약점인 평발을 극복하고 쉴 세 없이 열심히 뛰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열심히 하니까 결과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요즘 한나라당 보니까 지난번 선거의 패배를 딛고 당을 추수리느라 바쁜데 중요한 것은 ‘인물’을 찾고 있습니다. 한나라당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인물’을 찾고 계십니다.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하여, 어떤 일을 위하여 시간과 정열과 물질을 쏟으며 살아갑니다.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자기가 믿던 남편이 아니면 사람은 절망합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하늘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철학적인, 원론적인 질문 같지만 왜 살아갑니까? 제일 좋은 길은, 제일 아름다운 길은, 제일 능력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도구’가 무엇입니까? 도구는 쓰는 사람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도구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하나님의 어떤 부족함을 채우려고 우리를 쓰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능력이 부족하여 지혜가 부족하여 우리를 쓰시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쓰셨을 때, 모세를 쓰셨을 때, 제자들을 쓰셨을 때 무슨 조언을 구하거나 무엇을 요청한 일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능력이 아니라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다윗의 능력이 아니라 다니엘의 능력이 아니라 제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چهار 44: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제자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실 때는 이 말씀 속에 무엇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약속’입니다. 내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약속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도구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مطبوعات 3:11). 모세는 자기의 능력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릅니까? 모세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와 사정과 무능함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주어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바라보면 일을 못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무능함이요 하나님은 능력이십니다. 사탄은 항상 나를 보게 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나를 보면 힘이 빠지고 나의 약함과 한계를 보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보게 만드십니다. 부어주실 능력을 생각하게 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یوحنا 14:10)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یوحنا 15:7)او. 능력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모든 운동경기의 요령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들이지 말고 힘을 빼고 하라는 것입니다. 힘을 빼고 공을 차고, 치고, 넣어야 합니다. 그런데 힘이 너무 들어가 있으면 오히려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붓글씨 잘 쓰는 비결도 알고 보면 같습니다. 명필을 쓰는 사람일수록 손에 힘을 빼고 씁니다. 오히려 너무 잘 쓰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잘 하려고 하지말고 하나님께 내어 맡기기를 바랍니다.
다윗 동산에 놀러가서 택민이가 큰곰을 보고 목사님 안아줘, 무서워하면서 그냥 안깁니다. 또 힘이 드니까 목사님 힘들어 안아줘 하면서 안깁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이와 같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치고 쓰러질 때 내가 다 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그분에게 택민이처럼 무서워요, 힘들어요 하면서 안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은 나의 논리로 자꾸만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설득 당해야지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들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ساموئل 15:11)ا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설득하여 왕으로 세운 사람이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설득을 당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언제나 사람의 생각은 실패로 끝납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도구’는 누가 사용하느냐 따라 달라집니다.
사탄이 사용하면 나는 사탄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무슨 요술 방망이를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방향이 바뀝니다. 사탄에게로 가던 것이 하나님께로 행합니다. 나만 보았고 세상만 보았는데 하나님을 봅니다. 이전까지는 내 기쁨을 위해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해 거룩한 찬양을 드리는 입술로 변하는 겁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손이 남을 돕는 손으로 변하는 겁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비록 작지만 비록 보잘것없지만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지속적인 쓰임을 받으려면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단 일회성으로 마치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까지 쓰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삼손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나실인으로 소개되면서 상당히 비중 있게 소개됩니다. 아마도 예수님 외에는 출생에 대해서 그처럼 많이 소개된 사람은 없습니다. 사무엘보다 더 많이 출생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빨리 끝납니다. 그러나 바울 같은 사람은 마지막이 깁니다. 다윗은 소년 때에 부름을 받아서 평생 하나님께 헌신합니다. 목자일 때나 왕일 때에도 변치 않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성경 보다보면 언 듯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 하나가 나타납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مطبوعات 4:24)است. 지금까지는 “모세야! 모세야!”하시면서 그렇게 다정하시게 모세를 부르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돌변하신 것입니다. ‘만나사’라는 단어가 ‘파가쉬’인데 이 뜻은 거칠게 접촉하다는 뜻입니다. 적대적인 관계에서 만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잠 17:12) 여기에 ‘만나지 말 것’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잠언서 기자가 말하는 것은 미련한 자 만나는 것은 이렇게 위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호적인 만남은 ‘카라’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행동에 대하여 그 대답은 다음 성경구절에서 나옵니다.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مطبوعات 4:25-26). 할례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생후 8일이 훨씬 지난 아들들을 할례를 행하지 않고 데리고 다녔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پنجره 17:10). 모세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소홀히 여긴 것은 그의 이방인 부인 십보라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죽게 생겼으니까 십보라가 자진해서 자녀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사실 이 사건 후에 십보라는 아들들을 데리고 미디안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많은 시간이 지나서 남편과 재회합니다(مطبوعات 18:2).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절치 못하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는 사실상 모세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문제없이 잘 진행되어 가던 하나님과 모세의 사역에 갑자기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는 이 엄청난 일을 우리는 대하면서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역에 아무 문제없이 잘 진행되는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 없는지 점검해 나가야 합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본문의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한가지 묻겠습니다. 악인이 형통합니까 안 합니까?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잠 24:1)
우리는 무조건 세상 사람 보기에 형통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세상 사람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나 하나님께 형통하는 삶, 하나님께 쓰임 받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윗동산에서 곰을 보았습니다. 장로님이 곰을 사육하시는데 돌아오기 전에 곰 새끼를 우리에서 꺼내어 밖에 다니게 했습니다. 그런데 곰 한 마리가 쓰레기 통해서 뭘 찾아 먹으려고 쓰레기통이 구멍이 동그란데 그곳에 머리를 쳐 박고 계속 들어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아예 쓰레기통을 뒤집어쓰고 있더라구요. 그리고 우리로 들이기 위해서 과자 한 개씩 놓아주니까 그것을 먹으면서 우리에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가더라구요. 곰은 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곰처럼 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쓰레기통이나 뒤지다가, 저 먹을 것이나 탐내다가 세상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적당한 타협입니다. 하나님께 나의 부족함은 문제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خطبه : کشیش juanggyohoe yiyoungj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