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일군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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عیسی مسیح گفت ،(66. استعاره(6) – 포도원 일군들(2) ) / متن : T 19:30-20:16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3 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우간다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이 이런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그곳에 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하도 못살고 굶어죽어 가는 것을 보고는 “온 세상 마귀가 우간다에 와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요즘 제가 보기에는 “온 세상 마귀가 북한에 가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이 하는 말이 남쪽에 십자가가 너무 많아서 마귀가 발붙일 곳에 없어 북한으로 다 갔다고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온 세계가 남북한의 문제로 우리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UN에서는 연일 북한문제로 회의가 열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북한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에도 성도가 있습니다. 그분들이 비록 이제 믿기 시작했지만 그들 또한 하나님이 같은 달란트를 주실 줄 믿습니다.

가만히 보면 목사님들도 저마다 늘 강조하고 반복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에게만 한 이야기 또 한다고 하지 마세요. 다 비슷합니다. 목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도 즐겨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즐겨 하시던 말씀은 형태가 약간 다르긴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같습니다. متی 18:4, 23:12, لوقا 14:11, 18:14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위대해 질 수 있는지를 말씀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T 23:12).
이것은 예수님의 공식입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2:6-7)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함께 보겠습니다. متی 19:30절입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바로 이 말씀이 오늘 본문 16절 마지막에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구절 사이에 오늘 본문 말씀이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이에 괄호 안에 놓인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므로 ‘포도원 품군’ 이야기는 “나중 될 자와 먼저 될 자”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를 이해하면 됩니다.

포도원의 일군들이 주인과 약속하고 일하러 들어오는 시간이 다릅니다. 첫 번째 사람은 ‘하루(12시간)’입니다. 그 다음에 들어오는 사람은 제 3시, 그 다음은 6시, 9, 11시에도 들어옵니다. 하루 열두 시간 일하는 것으로 계산해서 첫 번째 사람은 하루종일 12시간을 일하는 것이고, 그 다음 사람은 3시에 들어왔으니까 9시간을, 그 다음은 6시에 왔으니 남아있는 6시간을, 9시에 들어온 사람은 3시간만, 11시에 온 사람은 1시간만 일하면 됩니다. 그러나 주인 시간에 관계없이 모두 품삯에 대해서 미리 한 데나리온에 계약합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임금을 계산합니다. 사실 서로에게 얼마를 받기로 하고 들어왔는지 모르고 일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계산할 때 보니까 다 똑같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이 계약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인의 계산에 대해서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하시고 여기서 비유를 마치고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시각 장애인 강영호(박사) 교수의 말 가운데 “장애인은 불편하지만 불행하지는 않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는 시각장애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불편은 느끼고 있지만 절대로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새겨둘 만한 교훈입니다. 어떤 때는 없는 자가 불평할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있으면서도 더 불평할 수 있습니다. 속담에 “남의 밭에 콩이 굵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 것도 좋은 것입니다.

이 비유 자체는 명확하지만 사실 난해한 성격으로도 이해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을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시다 고 우리는 말하고 가르치는데 마치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먼저 와서 많이 일한 사람에게 많이 주면 그것이 공평한 것 아닙니까? 만일 오늘날 실제로 이렇게 임금을 계산한다면 고용된 사람들은 이 때 불편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데모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회사를 운영한다면 파산에 이를 것입니다. 이러한 난해한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본문은 수많은 해석이 시도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일찍 들어온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해석합니다. 일을 시간으로만 계산해서 일의 노동을 측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일찍 왔지만 신문이나 보고 대충 시간 보내고 가는 사람과 늦게 왔지만 열심히 일하는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뒷바침 할만한 어떠한 근거도 본문에는 없습니다. 주인의 노동량에 따라 임금을 계산하고 있다는 어떤 주장도 하지 않습니다. 작업량에 강조를 두고있기 보다는 주인의 은혜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15). 만일 일의 노동량으로 계산하신다고 했으면 일찍 온 사람이 일단은 유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날 우리는 죽도록 일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것은 역시 상을 받기 위함입니다. 아마 이런 식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면 좀더 적극적인 열심히 우리에게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점이 역시 있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은혜로 일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치 일찍 부름을 받았던 일군처럼 나중에 불평을 터뜨립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되는 재 초청에 스스로 거절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합니다. 그를 멸시합니다. 이런 이유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자신들의 교만입니다. 우리들도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처럼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직업과 물질을 통해서 사람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이 받았던 선교사의 피 값을 잃어버리고 마치 우리가 잘나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잘 믿는 것처럼 자만하면서 경제력이 없ㄴ믄 사람들과 선교지의 사람들, 북한 사람들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이야기 속의 포도원 주인은 참 좋은 주인입니다. 우선 주인은 포도원의 일꾼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부름을 합니다. 일꾼을 한번만 부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일꾼을 부릅니다. 새벽에 일꾼을 부르러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시간으로 오전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에도 일꾼을 불렀습니다. 이렇게 계속 일꾼을 부르고 있는 이 주인은 참 은혜로운 주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골고루 주고 있는 주인입니다. 그리고 일꾼을 조건 없이 부릅니다. 왜 여기 있느냐 내 포도원에 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شما! 포도원 주인은 우리가 경외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포도원을 세워놓고 일꾼으로 계속 부르고 계십니다. 조건 없이 부르고 계십니다. 주인의 그러한 부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꾼을 계속 부르는 이 은혜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세상이 심판을 받고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부르기 위해서 아직도 하나님의 심판은 종말을 고하지 않고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부름 받을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조건 없는 부름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일하러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에는 불변의 질서가 있습니다. 주인과만 계약을 맺었습니다. 2절에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라고 했습니다. 주인은 이 품꾼들과 한 데나리온씩의 약속을 하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주인과 부름 받은 품꾼의 계약입니다. 이 계약은 불변합니다. 절대로 파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주인의 뜻이 우선하고 있습니다. 이 계약을 잘 살펴보면 부름 받은 품꾼의 의지나 조건이 아니고 주인의 의지와 주인의 뜻대로 하루 한 데나리온씩 약속한 것입니다. 이렇게 주인이 품꾼들을 불러서 한 데나라온의 품삯을 약속하고 일을 시키는 이것은 은혜입니다.
7절에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있느냐.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불러주심으로서 인생의 실업을 면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지 아니하면 인생은 실업자가 됩니다.
شما! 세상에서 할 일이 없거든, 직장에서 쫓겨나거든 교회에 와서 열심히 일해 보세요. 지나치게 먹고사는 것 염려하지 마세요. 저를 보면 아시잖아요. 진짜 실업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포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보냄을 받은 이 사람들은 왜 마지막에는 그렇게 슬픈 인물로 나타났습니까?
اول, 계약을 하려고 합니다. 2절 “저가 품꾼들과 약속하여” 맨 처음 사람들의 경우에만 되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계약을 맺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을 명문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 곧 그들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의식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저희 때보다는 더 그런 것 갔습니다. 저는 묻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뻤든지요. 주일학교 교사라는 직책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دوم, 일을 평가합니다. 이 정도 일한 것이 얼마를 받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평가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간직하여 둡니다. 그들은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종일 더위와 수고를 견딘 것을 간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한 일만 생각합니다.
سوم,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기뻐하는 대신에 비참해지고 불평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모든 것은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실에서 결과되어진 것입니다. 가장 심각하고 무서운 일은 그들의 마음속에 집주인이 불공평하다는 감정을 가진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점입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바친 슈바이처 박사에게 청년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저도 아프리카에서 선생님처럼 훌륭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의욕에 넘치는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하라}به بالا. 슈바이처 박사가 청년에게 지시한 일은 땔감나무를 해오고, 물을 길어 오고, 청소하는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싫증이 난 청년은 박사에게 따지듯 물었습니다. “박사님, 저는 박사님처럼 훌륭한 일을 하러 왔지, 이렇게 장작이나 패고 물이나 긷고 청소나 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작은 일에 헌신하는 마음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큰 봉사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어떠한 계약도 맺을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언제 불러 주셨든지 간에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기쁨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봉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싫습니다. 봉사 그러면 마치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선심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계약보다 더 무서운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심에 감사하여 내게 주신 축복가운데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것이 또한 감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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