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를 영접하신 예수님
Rev yiyoungje TSeanmóir MP3 Éisteacht
예수님은 누구 신가?(43. 어린아이를 영접하신 예수님) / T 18:1-6, Just a 9:33-37, 눅 9:46-48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T 18:1-6)
“33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Just a 9:33-37)
“46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 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 9:46-48)
본문말씀은 같은 사건을 공관복음 세기자가 모두 기록한 것입니다. 3개의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것은 그만큼 이 사건이 성경저자들이 잘 기억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잘 알려진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께 나와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여쭌 것으로 마가는 “노중에서 제자들이 쟁론한 것을 아시고 질문하신 것으로” 요한은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세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 사건에 대해서는 마가가 제일 정확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행로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면을 참고해 주세요.]
본문에 “가버나움에 이르러”라고 나오고 “노중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어느 곳으로부터 “가버나움”에 오신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지명의 언급은 막 9:30에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앞의 지명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Just a 9:2에 보시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라는 것이 나옵니다. 여기서 또 이 “높은 산”이 어느 산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산은 “다볼산”이라고 하는데 “다볼산”은 갈릴리 바다 남서쪽에 위치한 평평한 산으로 해발 560m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 산을 “높은 산”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과 현재 예수님의 행로와도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이 산을 대체적으로 해발 2,850m의 헤르몬(Hermon) 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산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이 산에서 변화되셨으며 그 산 아래로 내려오셔서 귀신을 쫓으시고 벙어리, 귀먹은 자를 고쳐주셨을 것입니다(Just a 9:25).
그리고 오늘 본문의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쌔”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집은 정확히 누구의 집인지 언급은 안되어 있지만 예수님이 쉬었다 가실 수 있는 편안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예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 다섯 제자를 부르셨던 곳입니다(마 4:13, 18-22 마 9:9). 그리고 백부장의 종, 베드로의 장모, 4인이 메고 온 반신불수 등의 병자를 고치신 곳이기도 합니다(마 8:5, 14, 9:1, John 6:55-59). 그래서 가버나움을 예수님의 제2 고향이라고도 부릅니다(마 4:13).
다메섹에서 지중해 방면으로 왕래하는 통로인고로 상업이 번창하여 예수 당시에 가장 번화하였던 곳으로 유대인의 회당(눅 7:5)과 로마 세관(Just a 2:14)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머물고 계시는 집은 베드로나 또 다른 제자의 집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에 왜 가셨을까요? 단순히 쉬시기 위해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의 행보는 예루살렘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 길을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에서도 오랫동안 머물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면 부활하시기 전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곳을 들려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싱가포르의 한 식물공원에 갔었는데 나이 드신 한국의 어르신들이 여행을 오셨습니다. 그분들은 그 식물들 하나 하나를 유심히 살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별로 그런 식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어르신들은 언제 또 이곳에 오나 하는 마음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노중에서”라고 했는데 이 노중이 왜 중요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길을 오면서 쟁론한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꾸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실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잠잠하니”라고 했는데 문법적으로는 미완료형 입니다. 지금 대답을 못하고 침묵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서열문제
지금 제자들이 노중에서 왜 이런 논쟁을 벌였습니까? 단순히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서열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가는 쟁론했다고 말합니다. 쟁론한 문제는 “서로 누가 크냐”는 문제입니다. 이 말은 메이죤(meivzwn)으로 누가 더 “위대하냐” 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변화산에 예수님과 함께 올라갔던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먼저 자신들이 다른 제자보다 서열상 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정황이 막 10:37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영광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서열 잘 따지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것에 목메는 사람들입니다. 중국사람과 한국사람이 다른 것이 있는데 중국사람은 명분에 치우치지 않고 실리를 챙긴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실리는 잃어버리고 명분을 앞세운답니다. 그래서 한국은 기술과 실력이 아니라 줄이라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집에서도 부모님은 자녀에게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질문을 합니다. 이런 것 하지 마세요. 어른들은 장난 삼아 하지만 아이들은 순간 고민합니다. “어느 편으로 붙어야 좋을까” 그리고 어린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힘의 서열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른 아이들은 하나 잘하는 것 있습니다. 눈치하나는 빠르지요? 이것은 진정한 교육이 아닙니다. 또한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심리적인 차별과 서열을 가르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이 잘 일어나는 집을 보면 자신들만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자꾸만 이웃과 친구와 비교합니다. 여러분 나는 나입니다. 나의 남편을 아내를 자녀를 자꾸만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버릇을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행복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서열을 왜 평소에 구분하려하는 것입니까? 서열을 정함으로 위와 아래, 첫째와 꽁지가 결정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차별입니다. 바로 차별하려고 서열을 나누는 것입니다.
남녀 차별이 심하던 시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첫 딸을 낳았다.
그럴법한 일이라 해서 의일 이라 이름지었다.
다음에 또 딸을 낳았다. 간혹 그럴 수도 있다해서 혹이라 이름지었다.
그런데 또 딸을 낳았다. 이건 너무 많다하여 과삼이라 이름지었는데
연거퍼 딸을 또 낳았다. 참 너무도 심하다해서 심사라 했다.
또 딸을 낳았다. 정말 분하다고 오분이라 이름 지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아들을 기다리는데 또 딸을 낳고는 화가 치밀어 육노라 이름지었다.
그런 후 또 딸을 낳아 고만 놀래서 칠경이라 이름을 짓고 말았다.
얼마 후에 또 딸을 낳고 보니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라. 팔탄이라 이름 짖고 한탄만 하고 지내는 데,
또 딸을 낳고 보니 기가 막혀 웃음이 나와 구소라 이름지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관심이 있는 “첫째가 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학생에게 제일 관심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일등을 하는 일입니다. 직장 생활하시는 분 관심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승진하는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지금 관심 있는 일은 누가 첫째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자녀가 “어떻게 하면 첫째가 될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부모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첫째 되는 방법의 말씀을 꺼냈을 때 제자들의 반응은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앉으려하고 귀를 세웠을 것입니다.
예수께선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35절) Fuarthas amach go. 이것은 예수님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T 23:8-12, 막10:31, 43, 눅22:24-27).
교회에서도 제자들과 같은 서열의식이 있거나 은연중에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의 서열은 없습니다. 오직 봉사의 직분과 직책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첫째가 되라는 의미에서의 직분이 아닙니다. 봉사하라는 직분입니다. 목사가 되어 가지고 목사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면 평신도 모다 못한 것입니다. 다른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교회에서 맨 앞자리에 장로님, 그리고 성가대원, 직분자들을 순서대로 의자에 붙여 놓았던 적이 있는데 처음 교회에 오신 분이 잘 모르고 맨 앞자리에 앉았다가 장로님이 “제 자리인데요!” 그래서 일어나고 또 그 뒤에 앉았는데 집사님이 오시더니 “제 자리인데요!”라고 해서 그냥 교회를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의자가 많이 있으니까 그런 분 있으면 모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36절)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때 보면 후보자들이 어린아이를 안고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대부분 이쁘고 잘 생긴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어린아이 하나를 안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으신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용으로 보아 그는 보잘것없는 아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마 제가 어렸을 때 코를 많이 흘렸는데 코도 흘리고 지저분한 그런 모습의 아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KCM홈페이지에 보면 눈이 둥그런 아이가 있습니다. 미나자매가 디자인을 잘 해서 이쁘게 보이지만 가만히 보면 보통 아이입니다. 그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보면서 어린아이를 안으신 예수님이 생각이나 홈페이지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유대나 헬라문화권에서는 어린아이는 여자와 마찬가지로 사람취급을 안 했습니다. 성경에 오병이어를 보시면 여자와 어린이를 뺀 숫자입니다. 수를 셀 때도 넣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덜 성숙한 미숙아로 취급하고 한 인간으로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도 분명히 한 인격체입니다. 그들의 생각과 입장도 존중해 주고 보호해 주어야 할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예수님의 비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37절)라고 하심으로 어린아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높은 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낮은 자와 비교하고 계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을 비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것도 친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25:31-46에 보면 “굶주리고 옥에 갇히고 헐벗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을 딤전 1:15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고 천하게 생각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당시의 권력을 누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사장들과 바리새인 등의 특권층을 위해서 오셨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죽여서 안달이었으며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죄인 괴수일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께 용서받아야될 대상일 뿐입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 하나님께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혹 의미가 있다면 그 재능을 주님을 위해서 선교를 위해서 사용할 때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나를 영접함이요
제일 낮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제일 높으신 분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제일 낮은 자와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이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땅의 권력 있는 자, 명예 있는 자, 물질 있는 자가 아니라 제일 낮은 자로부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만일 높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Leat! 이 세상에서 제일 초라하고 작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오히려 그 때가 나를 발견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만나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는 제일 작아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를 발견할 기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1999년 8월 2일. 아프리카 기니의 수도 코나크리를 출발한 비행기가 벨기에 브뤼셀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착륙장치 안에서 사람모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