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하는 아들

An Saol Íosa(3. 내 사랑하는 아들) / Matthew 3:13-17, Mark 1:9-11, Luke 3:21-23

“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제가 몇 일전 육군본부에 있는 군인교회를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계신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대한민국 군대에서 일년에 병사 2십만 정도에게 세례를 준답니다. 어마어마한 인원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군대에서 이렇게 세례를 베풀어 사회로 내 보내는데 지역교회에서는 왜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지 못하고 그렇게 전도를 못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군 제대한 병사들만 모아도 교회가 부흥하는 것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언 듯 이해하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안됩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진심으로 원해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회개를 말하는데 이들이 정말 회개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면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다른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분이 군에 있을 때에 연병장에 모이라고 해서 모였는데 갑자기 소방 호수로 물을 뿌리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 친구에게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어 보았더니 “응! 세례 주는 거야”하더랍니다. 극단적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경우까지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근래에 군대가서 세례주신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가끔 “저는 세례 받았는데요.”라고 고백하는 군인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잠시 쉬려고 세례 받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세례 주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반대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제일 기쁜 날일 있다면 그것은 세례를 받는 날입니다. 그러나 회개치 않고, 구원의 확신 없이 세례를 받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세례에 대해서 생각 할 때 예수님의 세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본문 13절에 “이 때에” 이 시간 접속사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Luke 3:23에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정확하게 때를 따라 계획적으로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이야기이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오셨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John 2:4에 어머니 마리아와의 대화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4:23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때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은 30세가 되어야 공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참고 민4:3). 요셉은 30세에 애굽에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Fuinneog 41:46).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삼하 5:4). 이제 예수님께도 때가 되었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는 30세이지만 창기부터 구원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실로 오래 동안 기다린 시간입니다. 예수님의 소년시절의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에는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에 대해서 잊혀져가고 메시야에 대해서 잊어갈 즈음에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된 것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원 하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셨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죄인의 몸을 입고 있는 요한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어떻게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14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는 말씀으로 보아 성경은 단순하게 기록되었지만 사실은 좀더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수 없다고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인 요한이 하나님인 예수님께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이 사실을 요한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바로 이분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교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인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경악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있을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분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인간의 교만을 통해서 눈을 멀게 합니다. 교만하면 앞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사단의 꾀임에 빠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앞에서 문자쓰는 것도 어려운데 어떻게 예수님께 세례를 준다는 말입니까? 우리교회에는 목사가 저 한 사람인데 원로 목사님 모시고 목회하는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설교가 하기가 부담스럽다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만 계셔도 젊은 목사는 교수님 앞에선 학생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부로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주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를 이루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5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의 설득에 요한은 순종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에게 나아와 세례주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제사장의 아들은 그가 광야로 나가서 하는 일을 구경거리로 삼고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어떤 빌미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할 때는 갑자기 일어나시더니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요 13장).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T 23:12)Fuarthas amach go. 예수님은 말로만 교훈하신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몸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단순한 ‘겸손’만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인 요한에게 자처하여 세례를 받으시려고 합니다. 정말 예수님의 본심이 무엇입니까? 그냥 사람들에게 “그분 참 겸손하시다.”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은 우리와 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는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같아지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습니까? 세례 역시 죄인 가운데 오셔서 죄인인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해야 살길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몸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심으로 세례요한의 세례가 끝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심 그것이 예수께서 받으셔야할 마지막 세례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자기의 신분을 높이려고 찾아가시는 분들도 있나 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 불만이 가득 차게 됩니다. 여러분 절대로 하면 안될 것이 교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오직 예수!” 예수님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작은 예수가 되어 존재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루시고 했던 “의”입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인간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면 우리가 의를 이루기 위해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기서 구분을 잘해야 합니다. 겸손과 사단에게 무릎꿇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교회의 화목과 화평을 위해서라면,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협력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그 무엇이든 겸손을 가지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아버지인 하나님과 성령님이 동시에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육체의 제한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의 한계를 가진 우리와 또 2000년 전에 육체를 입고 오셨던 예수님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은 예수님과 늘 동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보이는 형태로는 늘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나타나십니다.

하늘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과 성령님이 오시기 위해서 16절에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하늘이 열리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닫히면 암흑 세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 없이는 우리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늘은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하와가 쫓겨난 다음에 닫혀버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세상에서 살기가 힘들 때마다 몇 번을 이 동산 근처에 서성거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천사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 문을 연 사람은 없습니다. 모세와 말씀하신 하나님도 완전히 하늘 문을 여신 것은 아닙니다. 제한적인 의미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다른 선지자나 왕들에게도 하늘 문을 여신 적은 없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야 빛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이문은 종교 철학으로 여는 것이 아닙니다. 도를 닦아 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열 수 있습니다. 이제 그분을 통해서 이 길이 열린 것입니다. 바울은 히브리서 10:20에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허공에다 대고 말하는 미친 사람들이라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하늘 문을 여는 사람 이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이 교회가 축복을 받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습니다. 성령의 상징으로 보인 것입니다. 비둘기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비둘기 깨끗합니다. 겨울에 잡은 비둘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더러운 것도 먹습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한 것이 노아의 홍수 때입니다. 홍수 후 40일이 지났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처음 날려보낸 새가 무엇입니까? “까마귀”입니다. 까마귀는 방주에서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창 8:7). 땅이 마르기까지 왕래했다고 했습니다. 왜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Fuinneogpan class ="tr_" id="tr_172" data-token="66i57J2EIOqyg-ydtCDrp47snLzri4jquYwg64-M7JWE7Jik7KeAIOyViuydgCDqsoPsnoXri4jri6Q," data-source="">먹을 것이 많으니까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아마 각종 시체 썩은 것이 물위에 널려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다닌 것입니다. 그런데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다시 비둘기를 내 보냈습니다(창 8:8).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이고 10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12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 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Fuinneog 8:9-12)Tá ard-. 까마귀는 방주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는 더러운 것을 먹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방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더러운 것을 먹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방주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필요합니다.
둘째, 제사에 드려진 제물입니다.
날 짐승 중에 제일 깨끗한 것이 비둘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에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나타난 성령의 모습 속에 비친 비둘기를 보고 모여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비둘기는 깨끗한 동물이다.” 그러나 이 생각보다는 하나님께 드린 제물중의 하나라는 것이 더 연상되었을 것입니다. 부자들은 소, 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드러나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위로의 성령인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드려질 제물이라는 것도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도, 성경을 잃고도 무감각한 분은 병원에 가봐야 합니다. 저는 전율이 왔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대하면서 몸이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 합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소리를 들으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느낍니까?
흔히 자식을 두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또 비슷한말이 있는데 “눈에 밟힌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어느 대학에서 교수님이 학생에게 물어 보았는데 70%정도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했답니다. 어머님이 자식이나 손자를 보고 싶을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이런 말이 외국에도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정말 좋은 말입니다. 아무리 인터넷 시대이지만 지켜가야 할 우리말입니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전교생들이 초콜릿을 먹으면서 울고있는 것입니다. 내용인 즉은 식당에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아이들 식탁을 정성스레 준비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암에 걸려 얼마 더 살지 못한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하는 수 없이 식당 일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학교에서는 8월에 그만두어야 하는 이분에게 10월 달까지 계약하신 분이라 미리 월급을 당겨서 두 달치 더 지급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스스로 저금통을 모아 퇴직하시는 이분에게 고사리 같은 손으로 모금한 돈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아줌마는 학교를 다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백 만원을 내 놓으시면서 학생들 초콜릿을 사주라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절대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제가 이 땅에서 할 수 마지막 일인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을 하셔서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바로 이 아주머니의 돈으로 초콜릿을 먹으며 학생들은 고마운 마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Leat!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이 은혜, 이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는 오늘 힘차게 살 수 있으며, 선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사람

An Saol Íosa(2. 준비하는 사람) / Téacs : 마3:1-12, 막1:1-8, 눅3:1-18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어느 지방 신문사에 개를 잃은 여행자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자기 개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1만 달러의 현상금을 준다는 광고를 의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음날 그 여행자는 신문이 나오기를 고대했지만, 웬일인지 신문 발행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통 소식이 없고 신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행자는 기다리다 못해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신문이 왜 나오지 않습니까?” 나는 개를 찾아달라는 광고를 낸 사람인데요.“
그러자 신문사 측에서는 이렇게 답변하는 것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신문을 내는 것보다 당신의 잃어버린 개를 찾아주고 1만 달러를 받는 편이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에, 지금 사원들이 하루 쉬면서 당신의 개를 찾고있으니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신문사는 차라리 없어지는 편이 낫겠지요. 왜 신문을 만드는지 전혀 소명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돈을 더 벌고, 출세한다고 하면 그리로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이 사람은 그렇게 되는 데로 살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도 이만한 사람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 사람의 진심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요한”입니다.

성경의 이름 중, 그러니까 유대인의 이름 중에 제일 많이 사용하는 이름이 여자는 “마리아”이고 남자는 “요한”입니다. 오늘 본문의 인물 역시 “요한”입니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인물이 많다보니 구분하려고 우리는 “세례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이름의 뜻에서 이미 이 사람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사람, 유대인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사람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예비하는 사람
세례 요한의 탄생은 마가엘 천사에 의해서 사가랴에게 전해졌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에게 하나님의 역사로 세례요한이 태어났습니다(눅1장).
본문 2절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서 모두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마3:3, 막1:2-3, 눅3:4-5)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온 것은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전 680년경 이사야에 의해서 이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 40:3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세례요한을 가리켜 한 말씀입니다.
말라기 3:1에서도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만일 우리가 그 당시 요단강 가에서 외치던 세례요한의 때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의 신비와 능력이 어떤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해 줄 것입니다. “첫째, 그는 인간이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셋째, 그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해줄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삶에 대해서 본문 6절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고 했습니다. 이 한 절이 세례요한의 생활을 말해 줍니다.
세례요한이 말로만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려고 했다면 세례요한 역시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선지자적인 삶이었습니다. 당시 부패해 있던 로마의 관리들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먼저 도덕적인 검소한 삶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아버지가 제사장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당연히 성전에서 살아야 했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는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살았으며 제사장 복장이 아니라 야인의 복장인 약대털옷과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살았습니다.

자신의 좋은 조건과 문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선교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간 영국의 C.T. Studd가 있습니다. 영국의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크리켓 선수로 명성을 날리던 대학 시절, 선교의 소명을 받고 캠브리지 7인의 한 사람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후에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 복음화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리고 53세가 되던 1913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프리카 심장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기에령 콩고(옛 자이레공화국)로 갔습니다. 그리고 선교를 좀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심장 선교회(The Heart of Africa Mission)’을 설립하였습니다. 이것이 훗날 영국의 ‘WEC 국제선교회(1918)’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삶은 적어도 율법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이 어떤 삶을 말하는지 보여주는 삶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핵으로 하여 하나의 거대한 조직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수도는 국가라는 조직의 핵이 되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으며 지방 시골까지 조직망을 만들어서 살아갑니다. 세례요한은 가만히 있어도 유대사회를 구성하는 국가 조직에서 핵이 되는 인물로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광야로 나가서 야인으로 살았겠습니까?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랑삼아 입는 자주 빛의 부드럽고 화려한 예복을 거절하고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복장을 했습니다. 이것은 일반 서민에 비해서도 화려하지 않은 복장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서는 목사님은 치사하게 별 것 아닌 입는 것 가지고 너무 확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의식주란 제일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Agus beidh a.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예수님의 옷을 로마 군병들이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그렇게 화려했겠습니까? 그것을 떠난 십자가에 달려 사형을 당하는 사람의 옷을 가지고 싶었겠습니까? 물론 성경은 그것조차도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도 성경에는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고 또 그것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옷에 신경을 쓰고 제비를 뽑아 가져가야 할만큼 옷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먹는 것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얻은 음식입니다. 매일이야 이것만 먹었겠습니까? 혹 어떤 분이 또 오해하여 메뚜기 그것은 고급 요리인데 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요즘은 메뚜기요리는 일류 호텔에서도 먹기 힘든 요리랍니다. 또 거기에 석청()은 또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하지만 세례요한의 때에는 이것은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입니다. 요즘 어린아이들처럼 “아빠가 옛날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은 적이 있단다. 그러면 아빠는 라면 끊여먹지!”라고 하면 안됩니다. 오늘날에도 희생 없이는 선교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WEC선교회의 네 가지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희생(Sacrifice)과 믿음(Faith), Holiness(Holiness)과 교제(Fellowship)An bhfuil. 이중에서 희생에 대해서 보면

희생(Sacrifice)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기꺼이 감수한다.
희생을 제자 된 삶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을 개인적인 안락과 욕심, 경제적 안정, 현재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수준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희생의 정신은 다음을 포함한다.
◦ 공동생활의 참여 또는 검소한 생활 조건의 수용
◦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나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를 포기
◦ 복음을 위한 독신
◦ 팀 전체의 목표를 위해 잠시 개인적 목표나 사역을 뒤로하는 것
◦ 교통, 의료 혜택 등의 포기
◦ 복음을 위해 받을 수 있는 박해, 투옥, 자유의 제한, 죽음을 각오
이런 희생의 정신으로 선교한 결과 WEC 국제선교회는 복음주의적 국제 선교 단체가 되어 현재 50개국에서 모인 2,000여명의 선교사가 80여 개국에서 사역하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에게는 세상의 명예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그가 죽기 직전에 세례요한의 자제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예수님의 사역 초기이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확실히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의심을 가진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역초기에 당신이 메이야 임을 유대인에게는 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꾸만 빌미를 잡고 사역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이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마11:7)Tá ard-. 세례요한이 이 땅에 온 목적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인망을 얻고 인기를 얻으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하는데 세례요한의 소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있었지만 결코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2.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
세례요한은 사람이 없는 거친 들판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3절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오늘 우리들도 광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광야로 가십시오. 오늘날의 광야가 어디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지 않아도 세례요한처럼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에게 나온 무리들은 너무나 다급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들은 세례요한에게 모여들었습니다. 군인, 세리, 가난한 사람, 바리새인,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기심에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무리들에게 당시 유행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당신도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말을 들은 사람이구려”. 또한 세례요한의 말은 헬라 철학자들이 모여있는 아덴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출현하기까지 이스라엘은 약 4백년간 예언자가 없는 침묵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갈망 사상이 최고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혹시 이 사람이 메시야인가 하고 생각도 했습니다(눅3:15).
그는 하나의 사명을 위해서 이 땅에 왔고 그 사명을 위해서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명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상부 기관의 명령으로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조사하러 나가서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대답만 했습니다. 자신은 주를 위해 외치다 없어질 인물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사명은 외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라! 장차 올 진노에서 피하라”는 말 한마디 속에서 무서운 긴박성과 그의 열정과 애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외치는 한마디 그것은 결코 광야의 메아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 죄 사함을 얻으라!”이 소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약 3년의 공생애만을 보내시고도 그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세례요한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였습니다. “회개”는 가던 길을 돌이켜 새 길로가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는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Leat! 우리도 지금까지 세상을 향하여 갔다면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광야로 나갑시다. 결코 내가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려고 할 때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광야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그곳에 메뚜기와 석청이 있지 않았습니까?

미국에 한 유명한 교회에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공명심에 사로잡혀서 성직을 버리고 정계로 나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야심적인 활동을 펼쳐나갑니다. 본심은 아니었지만 신앙이 점점 박약해지고 교회와 멀어지게 됩니다. 친구들이 충심으로 충고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는가 하면 편지로 권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 물리치고 사회적 명성과 정치적 권력으로 큰 역사를 이루어보겠다고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마침내 불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만취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3살 난 귀여운 딸아이가 쪼르르 따라오더니 말합니다.
“아빠, 저 글 읽을 줄 알아요
“그래? 한번 읽어보려무나딸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그마한 성경책을 펴들고 읽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박또박 읽고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흐릅니다. 견디다못한 그는 딸을 물리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한참이나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비록 이 처지에 있지마는 진정 주를 사랑합니다.’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하는 사명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길을 완성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우리가 다른 것은 그는 예수님 앞서서 왔고 우리는 뒤에 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여 마지막 때의 사명을 완수하는 우리 주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가 차매

An Saol Íosa(1. 때가 차매) / Téacs : Luke 1:5-22, Galataigh 4:4-7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1:5-22)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4:4-7)

어느 나라를 가든지 자신의 나라의 중심지가 있습니다. 지리적인 중심지가 있는가 하면 경제, 정치의 중심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는 도시를 수도라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는 요즘 신 행정수도 충청권 이전으로 인해서 어수선합니다. 러시아의 수도는 모스크바입니다. 그러나 지리적인 중심은 러시아 가운에 위치한 ‘노보시베리스크’입니다. 이 도시는 스탈린이 러시의 중심이라고 해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과학도시로 계획해서 만든 도시입니다. 제가 이 도시에 가 본적이 있는데 지금도 하루에 두 차례씩 시 전체에 먼지가 나지 않도록 물 청소를 합니다.
그러나 한 나라가 아니라 지구의 중심지가 있다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모두 자기 중심적이어서 자신이 있는 곳이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선교지에 가면 모든 선교사님들이 하는 말은 자기가 있는 곳이 센터라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변방인데 선교사님은 여러 이유를 들며 그곳이 중심이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 자세는 매우 좋은 것입니다. 현재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 대한 열정과 관심은 어떤 일을 하든지 힘의 밑거름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있었던 자리에 성분묘교회(聖墳墓敎會)를 만들어 놓고 그곳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지리적인 관점에서도 과장만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 대륙을 연결하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세 대륙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대륙을 한 바퀴 돈다면 모두가 만나게 되는 곳이 팔레스타인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이 지리적으로도 최 적지였다면 예수님이 탄생하실 시기 역시 최 적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증거한 것처럼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메시야의 예언에 대해서 약 300여번 소개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어느 때 보내셔야 할까’에 대해서 생각해 오시다 제일 적절한 시기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운동경기인 축구나 야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적절한 시기에 선수를 교체해야 합니다. 이 때 시기가 중요합니다. 운동경기 한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도 때를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가 어디를 갈 때도 준비하고 상황이 되었을 때 떠납니다.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은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종교적인 제반 조건이 하나님 품에 계시던 독생자 그리스도가 탄생할 모든 조건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탄생하신 것입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우리는 인류 역사상 제일 암울했던 시기에, 제일 영광스런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말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예수님의 탄생을 “인간들의 사건에는 때(밀물)가 있는 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밀물을 받아들인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라는 찬송으로 전 유럽을 진동시켰고, 존 낙스는 “신앙의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으로 스콧틀랜드를 뒤흔들어 놓았고, 웨슬레는 영국을 성화로 불 붙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주기철 목사님 같은 분이 일제의 신사앞에 무릎꿇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지막 설교를 하고 스스로 감옥으로 찾아가 순교했습니다.

1. 정치적 준비
본문 5절에서 “유대 왕 헤롯 때에”라고 말합니다. 헤롯왕(Herod the Great, King) RC. 37년에 즉위하고 이어서 아켈라오(Archelaus)가 B.C. 4년에 즉위할 때까지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린 왕입니다. 이렇게 로마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왕은 로마 황제(아구스도:Augustus)가 임명한 것입니다.
이 시대의 로마는 대서양에서 카스피해까지, 영국에서 나일강까지, 하드리아 국경에서 유브라데에 이르는 모든 도로 및 지역에 로마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더 이상 작은 국가들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로마가 통일왕국을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 왕국은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준비한 것이 되었습니다. 통일 왕국은 세 가지 관점에서 좋은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첫째, 로마 주변 국가의 안정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한 세기나 반세기 전, 후쯤에 오셨다고 가정한다면, 주변 국가들은 각각 쇄국 정책으로 문호를 폐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둘째, 교통의 편의입니다.
복음이 더 빨리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마제국의 도로였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로마제국은 자신들이 점령한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로마로부터 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았습니다. 로마로부터 닿을 수 있는 곳이면 모두 도로를 건설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1,2,3차 여행 및 로마 여행을 한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시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 도로는 복음을 전하는 경로로 이용되었습니다.

셋째, 언어의 통일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좋은 외적인 환경이 도로라면 내적인 환경은 언어였습니다. 구 소련은 방대한 땅을 정복하고 제일 먼저 한 것이 언어통일 문제였습니다. 로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진정한 통일은 언어가 통일되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랜 지배가 계속되지 않으면 언어를 바꿀 수 없습니다. 당시의 헬라어는 표준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헬라어를 사용하면 갈라디아 거리에서나, 아덴의 모임에서나, 로마나 스페인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의 시대와 현재가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교통으로 말하면 로마 시대보다 훨씬 더 편리할 것입니다. 언어 문제도 세계가 하나 되고 있습니다(나만 빼고). 또한 로마 시대에는 없었던 인터넷도 있습니다. 진실로 복음을 전할 마지막 시대가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3:8)

2. 경제적 준비
로마의 찬란한 문화 뒤에는 사치와 낭비가 만연했습니다. 로마를 걸어가는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종이나 노예들이었습니다. 때로는 이 노예들이 사회에 적잖은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시인들은 지나가 버린 과거를 황금시대로 노래했습니다.
로마가 다스리던 전 지역이 것 모습과는 달리 황폐해 있었고 가이사가 다스리는 철의 통치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는 팔레스타인 지역 역시 다른 지역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전쟁의 여파와 과중한 세금은 사람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국민의 생활은 걱정과 근심으로 불안했고 내일의 행복이 보장되지 않은 체 세월은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세계는 일대 고민 투성이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토록 암담한 시대에 베들레헴에서 한 소망의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 그분이 이 땅에 오시는 일이었습니다. 동방의 한 지역에서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별을 연구하던 사람들이 따라왔습니다.
오늘날에도 경제 부흥을 분석해 볼 때 잘 살게되는 나라보다는 어렵게 사는 나라 사람들이 복음을 더 잘 받아들입니다. 일본은 우상이 많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합니다. 인간의 모든 재물이 다 없어지고, 밑천이 다 달아나 버린 것은 세계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기회를 준 것입니다.

3. 종교적, 도덕적인 준비
헬라와 로마는 자연 숭배와 제우스(Zeus)와 디오니구스(Diny us), 아프로다일(Aprodite)을 섬김으로 행복을 찾으려고 했는데 예수의 출현과 함께 그 모든 이교 적인 신앙이 무너졌습니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동양종교를 신비스럽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런던에 갔을 때 길 거리에서 동양종교를 소개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호기심에 찬 모습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은 더 이상 제우신이나 아프로다일 신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 싫증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들은 동양의 신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헬라의 오림프스산에서는 동양의 우글거리는 잡신을 다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에는 만신전(萬神殿)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로마 황제 자신이 신의 존재로 부각하여 모든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추종하도록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줄기 소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을 통해서 내려오는 메시야 사상입니다. 이제 메시야가 오실 때가 되었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계가 다시 질서를 잡을 것으로 믿는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나타났을 때 이 사람이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 정도로 사람들은 갈급해 있었고 유대인을 중심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4. 하나님의 준비
이제 메시야를 보내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때를 기다려 오셨던 것입니다. 그 첫 반응은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해 두신 대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사가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론의 지파 자손이고 현재 아비아조에 소속된 제사장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아내는 엘리사벳입니다.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며 계명과 규율도 잘 지켜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자녀가 없었습니다. 엘리사벳은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였고, 두 사람은 이제 나이가 많아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제비뽑아 차례가 되어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분향하는 중에 많은 사람들이 밖에서 모여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분향하는 중에 천사가 내려와 분향하는 오른쪽 제단에 서서 놀라 떨고 있는 사가랴에게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간구를 주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가랴는 이 일을 믿지 못했습니다. 천사는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 천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있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가 너무 오랫동안 성소에 머물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사가랴가 성소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못하고 손짓 발짓으로 있었던 일을 어렵게 설명했습니다. 사가랴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대로 임신을 했고, 다시 가브리엘 천사는 여섯 달 만 에 갈릴리 지방의 나사렛 동네로 가서 다윗 가문에 속한 요셉이라는 사람과 정혼하기로 약속한 처녀 마리아에게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사가랴 부부를 통해서 요셉과 마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다음에 세례요한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 말고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사가랴 부부를 통해서 아이를 전혀 낳을 수 없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낳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를 통해서, 여인의 몸에서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존 하워드 그리핀(John howard griffin)이라는 백인 미국 사람이 1959년에 흑인들이 받는 멸시와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는 것을 몸소 체험해 보기 위해 자신을 흑인처럼 만들어 흑인 행세를 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피부가 검어지는 약을 먹고 피부가 잘 타는 약을 바르고 햇빛에 피부를 태우고 검게 보이는 약품을 바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더니 승차 거부를 당하고 식당에서는 음식을 팔지 않고 호텔에서도 쫓겨나는 등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온갖 핍박과 천대를 받고 나서 “나 같은 흑인” 이라는 책을 써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기 위하여 선지자들은 통하여 말씀도 하시고 율법으로 다스려 보려고도 했으나, 인간이 돌이키지 아니하므로 창조주 되신 하나님이 친히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찾아 오셨습니다.

2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필리핀이 잠시 일본에 점령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그 유명한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을 떠나면서 “나는 꼭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고 약속했습니다. 2년 후,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의 레이투만 해안에 상륙하면서,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속대로 나는 다시 왔다.” 맥아더 장군이 자기 개인의 명예를 걸고, 그가 다시 온다는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들의 구세주이며 역사의 주인이신 그분이 약속을 안 지키시겠습니까? 틀림없이, 우리 주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반드시 오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처음에 오실 때는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는 심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처음오실 때는 시대적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영접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시기를 택하신 것입니다. 또한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지기 좋을 지리적인 위치와 시기를 택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준비하는 사람에게 오십니다. 갈망하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이 세상을 의지하고 믿는 사람들에게 오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주님만을 앙망하는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에게 주님이 찾아오실 것을 믿습니다.

나의 아멘이신 예수님

Rev yiyoungje TSeanmóir MP3 Éisteacht

예수님은 누구 신가?(52. 나의 아멘이신 예수님) / 3:14, 22:16-21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3:14)
“16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17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18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22:16-21)

오늘은 성도가 제일 많이 사용하는 “아멘”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깨어 정신을 차리고 들으셔야 합니다. 저를 믿어 주셔서 우리 목사님은 특히 주일 낮 예배는 예수님에 대해서만 설교하시기 때문에 안심하고 자도 된다고 생각하시고 주무시면 안됩니다. 오늘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설교를 지난 일년간 해 왔는데 그 마지막 번째이기도 합니다.

원문에서 아멘(ajmh;n)은 신약에서만 129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49개만 나타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다른 말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는 아멘의 뜻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바로 “진실로”라는 단어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복음서에 112번 나타납니다. 특히 원문 요한복음서에서는 “ajmh;n ajmh;n”으로 두 번씩 나옵니다. 그래서 번역성경에서도 “진실로 진실로”로 번역했습니다. 원래 헬라어에는 이 단어가 없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에서 온 것입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처음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은 민 5:22절에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로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로 떨어지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아멘의 시작(Daoine 5:11-22).
남편 모르게 아내가 바람을 피었습니다. 그러나 그 물증이 없는 것입니다. 심증은 가는데 증인도 없고 물증이 없습니다. 이 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러주신 방법입니다. 또한 아내가 바람을 피지 않았는데 남편이 의심이 생겼을 때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아내를 데리고 제사장에게로 갑니다. 제사장을 만날 때는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위해서 보리 가루를 예물로 드립니다. 이것을 “의심의 소제”라고 하고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제사장은 여인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제사장은 거룩한 물을 떠다가 성막 바닥의 티끌을 물어넣고 여자는 머리를 풀고 의심의 소제물(곡식제물)을 여자가 들고 있게 하고, 제사장은 저주를 내리는 쓴 물을 손에 들고서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맹세를 ‘어떤 남자와도 동침한 일이 없고, 남편을 배반하여 몸을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를 내리는 이 쓴 물이 네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 몰래 몸을 더럽혔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맹세를 시킵니다. 그리고 이 물을 먹게 합니다. 이 때 제사장은 맹세를 시킬 때 여자는 “아멘 아멘”하고 응답해야 합니다. 만일 거짓으로 맹세하면 배가 붓고 허벅지가 말라죽습니다.
만일 간통한 여인이라면 이 자리에서 아멘 할 수 있습니까? 아마 미리 도망갈 것입니다. 아멘 할 수 있는 여인은 남편 몰래 바람을 피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아멘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시키신 것입니다.

맹세에 사용된 언어입니다.
그 다음에 아멘은 신명기 27:15-26절까지 매 절 12번이 나옵니다.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27:15)
여기에 나온 아멘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속이거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는 자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든 백성이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하나님께 맹세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 언어입니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하매 모든 백성이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양하였더라”(대상 16:3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8:6)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41:13)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89:52)
다윗 시대 때부터 아멘의 사용은 다시 왕성해 졌습니다. 이 때도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멘 했습니다. 두 번째는 아멘 아멘 두 번씩 사용하는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분이 좋거나 확실하면 즉 거짓이 없으면 사람은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멘을 다른 말로 번역한다면 “정말, , 진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진짜 참 기름이냐?”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은 진짜 참 기름이냐는 말은 믿지 못하는 우리의 풍습에서 기인한 말입니다. 참기름이면 참기름인데 가짜 참기름이 있기 때문에 ‘진짜 참기름이냐’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믿지 못할 때 ‘정말 진짜 참기름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에서 아멘 아멘 한 것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맹세에 맹세를 하는 의미입니다. 즉 이 시대 사람들의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만 적용된 언어입니다.
아멘은 구약에서 하나님께 맹세할 때 사용한 언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 용어가 예수님께 적용되었습니다. 이 의미는 무슨 말입니까?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아멘 하시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아멘 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삼위일체이신 성자라는 뜻입니다.
개역한글판 성경에 아멘이라는 말이 무슨 말로 번역되었다고 했습니까? ‘진실’입니다. 이 말은 원문에는 ‘아멘’입니다.
이 말이 신약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실 때 “산상수훈” 팔복을 말씀하셨는데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오늘 본문말씀 “19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0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22:19-21)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같은 뜻입니다. 앞에 것은 마태가 처음 복음을 전하실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나중 것은 요한이 밧모섬에서 하나님께 보여 주신대로 기록한 요한계시록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한 하나님이 아니시면 이렇게 기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멘”을 언제 하셨습니까? 문장 맨 앞에서 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입니다. 번역성경에서 혹 앞에 오게된 것인가 살피기 위해서 헬라어 원문 성경을 보았습니다. 원문 성경에서도 말씀 앞에 이 단어가 놓여있습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약속을 할 때 상대방의 조건을 들어보기 전에 그 조건을 전재로 해서 약속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그 약속에 대해서 이행할 것을 다짐한 상태이고 내 조건을 들어달라는 약속입니다. 아멘의 경우고 구약에서 사용된 경우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사용된 경우가 다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맹세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멘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고 아멘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면 아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멘은 아주 잘 해야 됩니다. 아무 때나 아멘 하면 큰일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멘 자체가 맹세요,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은 최소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멘을 먼저 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실 말씀은 예수님이 알고 계신 것이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들어보고 자신의 입맛에 맞으면 아멘 할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미리 다짐을 받아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을 먼저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멘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못하면 아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전에 아멘하고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떤 조건을 말할지 모르는 사람하고 미리 약속할 수 있습니까? 조건을 들어보지 않고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님이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편이 무슨 조건을 말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라면 무슨 말씀하셔도 내가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처지를 아시는 부모님이 무리한 조건이나 부탁을 하시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 저녁을 먹을 때 여덟 살 된 아들이 음식 투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도 맛이 없고, 저것도 맛이 없고, 나 밥 먹기 싫어!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달랬습니다.
“애야, 아빠가 너처럼 어렸을 때는 밥 한 끼 먹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단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지금은 우리랑 사니까 훨씬 좋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런 것입니다. 그냥 웃어야지요.

Leat! 복음서를 다시 보세요. 진실로가 다 앞에 있잖아요. 저는 이것을 보면 은혜 받습니다. 내가 들어보고 아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면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는 미리 아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멘은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는 아멘을 하지 못합니다.

아멘은 삼위의 하나님 말씀에만 적용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T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와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두 말씀은 모두 말씀에 관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시카고에 있는 성도님과 한시간 반 가량 통화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오셔서 성경을 가르치는데 이분은 아까운 듯 조금씩 말씀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더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찾다가 제 성경공부 사이트을 찾아 연락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가르치는 방법이 성경에서 짝을 찾아야 한다. 비유를 모르면 안 된다 등이었습니다.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재림주가 한국 그것도 경상도에서 나온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그분은 문제가 있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보지 못하고 읽지 않다 보니 성경대로 살수도 없고 미혹하는 말에 쉽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조금 안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됩니다. 또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지 아는 척 하면 안됩니다.
어떤 초신자가 할렐루야라는 말의 의미를 잘 몰라서 어떤 집사님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집사님도 잘 몰라서 얼른 생각 나는 대로 대답하기를 남원에 가면 광한루가 있고 진주에 가면 촉석류가 있듯이 천국에 가면 할렐루가 있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는 그런 뜻이 아니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에 대해서 벧후 3:16에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말에 ‘참’과 ‘개’를 구별합니다. ‘참’은 진짜를 ‘개’는 사이비를 나타내는 접두어로 사용됩니다. 개는 한자 ‘가()…’의 준말이며 참은 순수한 우리말인데 한자로는 ‘진()’입니다. 때로는 참 대신에 한자를 사용해 ‘참달래’가 되어야 하는데 ‘진달래’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통 진짜를 나타낼 때는 ‘참’자를 쓰고 가짜를 나타낼 때는 ‘개’자를 사용합니다. 진짜 기름을 참기름이라고 하고 얼굴에 흐르는 쓸데없는 기름을 개기름이라고 합니다. 쓸모 있는 말을 참말이라고 하고 쓸데없는 말을 개소리라고 합니다. 나리꽃은 비슷하지만 산에 코고 아름답게 피는 것을 ‘나리’라고 하고 집 뜰에 나리처럼 흉내는 냈지만 작게 피는 꽃을 ‘개나리’라고 합니다. 나쁜 먹을 ‘개먹’이라고 하고 붓글씨를 쓸데 잘 못 쓴 글에 덧쓸 때 개칠한다고 합니다. 가짜 눈알을 개눈 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말대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만일 ‘개(소리)’말로 만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본문 계 22:19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앙교회 성도들은 오직 성 삼위이신 하나님의 참 말씀에만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이 아멘을 많이 하면 무식하다고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멘은 많이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아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장을 아무 데나 찍지 않지 않습니까? 그것과 같습니다. 아무 말에나 아멘 하면 도장을 남발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단 한번의 보증 도장을 찍어줌으로 평생을 고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멘을 잘못하면 이 보다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멘 하기 겁나시죠? 그렇다고 아멘을 안 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아멘을 많이 하면서도 문제없는 방법 하나 알려 드립니다. 성경을 그대로 읽을 때 미리 아멘 하셔도 됩니다.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할 때도 성경구절 잃고 그대로 설교하면 아멘 하시면 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John 8:51)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지키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