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하며 가르치라

Rev yiyoungje TSeanmóir MP3 Éisteacht

Na focail Íosa(7. 행하며 가르치라) / Téacs : Matthew 5:18-19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1971년 이탈리아 영화제작자 피에르 파올로 파솔로니(Pier Paolo Pasolini) 때문에 영화계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 사람은 동성연애자요 막시스트로 공공연하게 알려진 인물인데 그가 감독한 “마태복음”(The 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 때문입니다. 개봉되기 전까지는 화면에 예수님이 나온다는 정도로만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기존 그 어떤 영화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파솔리는 영화가 완성되자 이 영화를 교황 요한 23세에게 헌정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황이 이 영화를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탈리아 플로렌스 지방에 여행할 때 교황이 행차하자 엄청난 교통체증이 발행했습니다. 그 여파로 오도 가도 못하게된 파솔로니는 호텔 방에 갇혀 무료함을 달래느라, 탁자 옆에 비치된 신약성경을 집어들고 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마태복음을 읽어가던 그는 뭔가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른 대본 없이 마태복음을 유일하게 대본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파솔로니는 이 영화를 이탈리아 남부에서 빠듯한 예산으로 예수님이 살았던 팔레스타인과 같은 지역에서 먼지가 풀풀 날리며 잿빛 풍경들을 연출하며 찍었습니다. 파솔리니의 이 영화는 평화와 사랑의 정신이 담긴 영화로 예수님을 다시 보게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따르던지 따르지 않던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반대한다고 뒤집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습니다. 선택권은 내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파솔리니가 성경을 자세히 보게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깨닫습니다. 자기가 이전에 알고 있던 그런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Leat! 성경을 다시 봅시다. 자세히 봅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행함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엄청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에서는 영적으로만 계시던 하나님이 신약에서 육체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육체의 모습을 입고오신 것은 행함으로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거침없이 합니다. 욥기 10:4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욥이 살던 구약시대까지만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처럼 육체를 입고 사람처럼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대답할말을 찾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기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을 입고 오셨을 뿐만 아니라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시험이 있습니다.

욥의 이런 기도는 예수님이 시험 당하실 때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볼 때 예수님은 분명 보통 사람하고는 달랐습니다. 그분은 분명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능력이 있다는 것 또한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사단이 그런 시험은 안 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얼마 있다가 오병이어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것을 이미 사단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단의 시험은 한마디로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의 모습으로 능력을 일으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단의 시험에 응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 시험으로 사단의 모습은 드러났고 예수님의 모습은 감춰졌습니다. 예수님이 완벽하게 승리하신 것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십자가 없이도 면류관을 주겠다는 제의였습니다. 거짓 복음서가 있는데 위경 복음서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교회로부터 거짓문서로 판단을 받은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이런 황당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린 예수가 진흙으로 참새를 만들어 숨을 쉬어 생명을 부여하고, 말라비틀어진 물고기를 물에 던져 넣어 기적적으로 헤엄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어린 친구들을 염소로 둔갑시키기도 합니다. 만화책에나 나올만한 그런 “슈퍼소년”으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들도 때로는 그런 예수님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따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십자가에 무참히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은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굳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천사나 보내고 구약시대처럼 직접 능력을 일으키시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예수그리스도 그 자체로 좋아하셔야 합니다. 부모님이 멀리 여행 갔다고 돌아오시는데 자식이 반갑게 뛰어나옵니다. 처음에 부모님은 나를 만나려고 저처럼 기쁘게 뛰어오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품에 안길 줄 알고 팔을 넓게 벌리려는데 자식은 부모님 손에 있는 선물꾸러미를 낚아채어 가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 손에 있는 선물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와 같으면 안됩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같은 시험은 안 하지만 비슷한 시험을 합니다. “왜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가느냐?, “집에서 얼마든지 혼자도 신앙생활 할 수 있지 않느냐?, “바쁜데 오늘은 쉬어라?, “너 쓸것도 모자라는데 네가 아니어도 교회에 부자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감사헌금은 안 해도 된다“ 등 수 없는 유혹을 오늘도 해옵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내 욕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유혹도 그렇습니다. 아담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나라도 자신만을 위해서 땅 투기, 집 투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라 망합니다.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14)

행하며 가르치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가르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염려가 있다면 그것은 가르치지 않아 당신을 명령을 잊어버릴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Deotranaimí 4: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받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천국에서도 등급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행함은 천국에서 상급이 있습니다. 자신이 실천하면서 했는지 아니면 입으로만 했는지에 따라서 등급이 구분됩니다. 우리모두는 천국에 안가 보았으니까 이 등급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와 “크다”라는 말이 대조를 이룹니다. 이 차이는 상당한 것입니다. 진짜 상급에 욕심이 있다면 천국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이 땅에서 자신의 욕심을 버려야 가능합니다.

저는 “과연 이 시대에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이 있다면 누구일까? 그런 분을 찾으려면 신앙영웅에 관한 책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흔히 축복을 받아 잘 산다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병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입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에 제일 큰 부자들 중에는 예수 안 믿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일 오래 사는 사람들 역시 예수 안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누구일까?”를 찾다가 선교사에게 눈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이 영웅시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아는 여 선교사님 중에는 남편을 잃고 선교지로 가신 분, 선교지에서 남편을 잃고 자식들과 함께 선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낮선 환경으로 한때는 고국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름한철 몇 일 덥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일년365일 30도를 넘는 선교지역이 태반입니다. 아니면 극동 시베리아에서 추위와 싸우며 지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통해서 “미션매거진”이라는 매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선교사가 왜 다릅니까? 이분들은 자기만 잘 살겠다고 가신 분들이 아닙니다. 때로는 노 부모님을 한국에 그냥 두고 가신 분, 자식들은 아무 것도 모르지만 부모를 따라 아프리카로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선교사님들이 주님의 말씀을 행하며 가르치는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내 욕심을 가진 분들은 선교 못합니다. 자기 욕심이 있는 분들은 해서도 안됩니다. 오직 우리에게 한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비록 다 선교지에 가있지는 않지만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방법을 선택하셨는데 그것은 포기와 유사한 것입니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방법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다 압니다. 상대방이 거절하면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의 말처럼 “하나님은 나치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지를 통해서 스스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부름에 아멘으로 화답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러한 길을 스스로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기 이틀 전까지 본회퍼의 설교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독일 국민들에게 경고했습니다.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결국 지도자는 그릇된 모습으로 바뀌어갈 것입니다.” 그의 설교를 내보냈던 방송사는 히틀러의 세력으로부터 폐쇄 당했습니다. 본회퍼는 인쇄물을 이용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군중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강제로 중단되었습니다. 본회퍼의 저서들은 모두 이 시기에 출간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진정한 사도가 되라(The Cost of Discipledhip)』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버리고 살아야 된다고 부르짖었습니다.
1939년 본회퍼가 뉴욕을 방문했을 때 그의 친구들은 그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렸습니다. 그러나 본회퍼는 “만약 이 순간의 시련을 독일 국민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전쟁이 끝난 후에 그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고 독일로 직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히틀러의 잘못된 점을 늘 지적하며 다녔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수감자들로부터 설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사야서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 설교를 마지막으로 교수대에 올라 처형되었습니다.

일본 기독교사에 보면 1552년부터 1616년까지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이 기간에 예수를 믿은 사람이 놀랍게도 20,000여명이나 되었습니다. 점점 기독교가 왕성해가자 일본 왕을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며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622년에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하여 기독교인들은 지오미오 섬에 있는 시니아바라 도시로 피난 가 마지막 순간까지 방어하며 싸우다 결국 3개월을 버티다 일본군에 의해 20,000여명이 대학살 당했습니다.
이 모든 순교자들이 행하며 가르친 분들이라고 믿습니다.

존 번연이 읽고 『천로역정』을 썼다는 『기독교 순교사화』(Martyrs) “세상이 감당치 못한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의 책 뒤에 보면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았으나 세상을 넘어선 사람들,
부귀영화보다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 사람들,
그래서 세상이 감당치 못했던 사람들!

고문도, 옥에 갇힘도, 배고픔도, 단두대도, 화형도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빼앗지는 못했다.

기독교의 역사는 그들의 땀과 눈물과 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에 새겨져
우리로 주님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게 한다!

갈라디아서 6장 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귀히 보시는 주님

Rev yiyoungje TSeanmóir MP3 Éisteacht

Na focail Íosa(6. 귀히 보시는 주님) / Téacs : Mark 12:41-44

“41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코카콜라하면 전 세계인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계제일의 브랜드입니다. 국제적으로 미국의 외교관은 없어도 코카콜라는 들어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코카콜라의 본사는 미국 애틀랜타에 있습니다. 코카콜라가 이렇게 전세계 198개국 이상에 들어간 것은 이 회사의 사장 때문입니다. 그는 완전히 코카콜라에 미친 사람입니다. 사장은 늘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른다.” 그리하여 하루에 8억 병씩 팔리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회사로 성장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몸 속에는 예수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뜨거운 피가 흘러야 합니다. 불타 올라야 합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49)Tá sé ag iarraidh orainn. 이 세상의 욕심의 피가 흘러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물질의 피가 흘러서는 안됩니다. 생명의 복음의 피가 흘러야 합니다. 오늘도 생명의 주님의 피가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진정한 가치

가난한 과부를 말하는 원문의 프토코스(ptwcov”)는 단순히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극빈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말씀하신 부자와 반대되는 말입니다. ‘두 렙돈’은 ‘작은 것’이라는 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틴에서 사용되는 가장 작은 유대의 동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128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지금 노동자의 하루 임금을 5만원으로 계산해서 1/128로 나누면 390원이 조금 넘습니다. 그러니까 400원이 안 되는 돈을 헌금함에 넣은 것입니다. 이 돈은 부자가 바친 돈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만큼 적은 금액입니다.
예수님이 이 광경을 목격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불러 모이게 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진실로”는 원어에서 ‘아멘’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지금 가르침이 신실성과 권위로 인준할 만큼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산술적 가치로 말하면 비교도 안 되는 헌금이지만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신앙적 가치에 있어서는 역전된 것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산술적 가치를 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신앙적, 질적 가치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것 같지만 평범하지 않은 분입니다. 반대로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지만 보통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진짜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도 여실히 그런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청년에게는 과격하게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나누어주라고 하셨으면서 정작 과부가 내는 ‘두 렙돈’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강퍅함에 실망하셨고,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모습에 격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한 믿음에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모든 사람보다 많이 한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본문 44절 함께 읽습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더 이상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자기의 생활비 전부입니다. 이제 그는 돌아가면 아무도 자신을 반갑게 맞이해 주는 식구도 없을 것입니다. 저녁밥을 해 놓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돈으로 빵 하나라도 사서 먹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 과부의 헌금은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부’를 드렸다는 것은 생명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시한부 인생에게는 시간이 소중합니다. 흘러가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내게 있는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된 사람과 되지 않은 사람을 우리는 금방 구분할 수 있습니다. 된 사람은 작은 것을 소홀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되지 못한 사람은 작은 것을 소홀히 여깁니다.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1원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제일 작은 가치로 여겨지는 것을 제일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께 있어서는 결코 작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Matthew 10: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기억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3)Glaodh. 그래서 주님은 제자의 이름으로 작은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도 결코 잊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에 비유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욕심이 없는 인간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이 세상에 내려왔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시험하기 위해 조그마한 돌멩이를 금으로 변하게 한 다음 물었습니다.
“이것 갖고 싶지?” 그러자 그 남자는 눈빛이 변하면서 말했습니다.
“네, 그런데 이왕이면 더 큰걸 주세요.”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좀더 큰돌을 금으로 변하게 한 다음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이것 갖고 싶지 않니?” 그러자 그 사람 역시 더 큰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째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돌을 금 덩어리로 만든 다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욕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이것 갖고 싶지 않니?
그 청년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돌을 금으로 만든 다음 물었습니다. “이것 갖고싶지 않니?”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욕심이 없는 사람을 만났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 순간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저 하나님, 돌을 금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현재에 만족할 줄 아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비전과 소망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재 만족하지 않는 사람은, 기쁨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주어도 없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내게 주신 작은 것 소중히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싱거는 오랫동안 가난과 병으로 누워서 투병 생활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가족의 생계는 물론이고 집안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 가정을 잘 꾸려 나갔습니다. 그의 부인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삯바느질을 했습니다. 싱거는 아내의 사랑과 정성에 여러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싱거는 병상에 누워있으면서 어떻게 고생하는 아내를 도와줄 수 없을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바느질하는 아내를 도울 방법을 찾았습니다. 쉽게 바느질하는 방법을 생각한 끝에 재봉틀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이 재봉틀의 이름을 아래를 위해 만든 싱거라고 붙였습니다. 그는 물론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귀합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실 때 사단은 천하만국을 보여주며 예수님을 뀌었습니다(T 4:8). 그러나 주님은 그것에 가치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천하만국이 하나님 아버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에 가치를 두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에 가치를 두셨습니다. Matthew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만큼은 물질이 아닙니다. 예수님 만큼은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교회도 최고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한 생명입니다.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것은 결코 돈으로 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하만국을 다 주어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생명, 이 영생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과 적지 않은 격론을 벌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안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 역시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서 만든 것이지 사람보다 안식일이 먼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안식에 웅덩이에 빠진 양의 비유를 들어서 ‘너희들은 양이 안식일에 구덩에 빠지면 꺼내주지 않겠느냐?’ 하시면서 마태복음 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것이 옳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누가복음 12: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모릅니다. 당신의 아들을 주셨고 우리를 구원해 내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소중한 자녀입니까?

흑인 지도자 말콤엑스는 흑인으로 백인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백인을 미워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백인인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부를 희게 하려고 크림을 바르고 머리를 염색하고 백인이 되려고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백인이 되지 못하자 더욱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절대로 백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백인이 되지 말고 흑인이 되자. 흑인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검은색은 아름답다.” 이때부터 “흙색은 아름답다”라는 말이 흑인 사회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친구들이 찾아와 비아냥거립니다. 네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고있다고 합니다. 욥은 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23:12)Glaodh. 그가 부자일 때, 행복하게 살 때에도 밥을 먹는 일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John 12:26)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116:15)
아름답게 빛나는 스카프를 본적이 있으시겠죠? 좋아하시는 분은 몇 장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스카프의 미의 절정은 오색찬란한 그 색채에 있습니다. 그런데 스카프에 채색시키는 염료는 연지벌레로 만든다고 합니다. 이 벌레는 아주 작습니다. 선인장 잎사귀 밑에서 눈에 띄지 않게 양분을 섭취하며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자랍니다. 이 작은 벌레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빛을 내는 스카프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것, 작지만 소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가장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해방과 진리

Rev yiyoungje TSeanmóir MP3 Éisteacht

Na focail Íosa(5. 해방과 진리) / Téacs : John 8:31-36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어느 가정에 아내가 며칠간 친정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아내는 혼자 있을 남편이 걱정이 되어 반찬도 마련해놓고, 자기가 없는 동안 옷은 어떻게 입고 나가고, 양말은 어디 있고 등등 여러 가지를 남편을 위해 챙겨주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못내 미안한 마음으로 ‘가능하면 빨리 올게요’하면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부인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남편의 표정을 보니, 부인이 없기에 쓸쓸한 표정일 것으로 예상했는데, 부인이 없는 집에 들어선 순간 남편은 땅을 치면서 좋아하더랍니다. “나는 자유인이다. 나는 해방이다!” 마치 8.15 광복절을 만난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더랍니다.

내일은 우리 나라가 일제치하에서 해방 된지 60주년 되는 날입니다. 이제 일제의 만행과 광복을 체험한 세대가 거의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때의 아담과 하와의 죄로 우리가 지금까지 죄의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많은 곳에 남아있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한번 엎지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역사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교훈 삼아 지금 정신을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일제의 만행으로 고통 당하는 분들이 있습니다(사진/위안소에서 도망치다 잡혀 온몸에 문신을 당한 정옥순 할머니.) 저는 이 사진과 이야기가 너무 끔찍해서 주일예배에 전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 전해야 되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성경은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 않으며 모두 거짓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라마다 전쟁기념관을 만들어서 역사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자료제시 설명).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던 1945년의 국민생활 수준을 통계청에서 발표하였는데 당시 평균수명 44세, 유아 사망 율은 1000명당 102명, 인도 다음 2위로 높았으며, 문맹자 77%이었습니다. 그리고 60년이 지난 현재 평균수명 남자 73.4, 여자 80.4세로 평균 77세입니다. 그리고 문맹률은 2%정도로 세계 최하위에 속합니다. 우리경제는 IMF을 경험했지만 교만하지 않고 다시 정신을 차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런 민족적 해방을 귀히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아직까지 자유가 속박되어있는 북한이 여전히 있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루 속히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사람은 속박 당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속박 당하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으려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1.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본문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모르면 자유 함이 없습니다.
Eiseamal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십니다. ‘진리’라는 말은 ‘참’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참이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의 진짜 거짓말은 ‘나는 절대 거짓말은 안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이시며 진리이십니다.

정부의 정책이 발표되어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통령이 심각한 얼굴로 담화문을 발표해도 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이미 사회와 정부, 국가의 신뢰도는 백성들에게 깨어져 버렸습니다. 백성들이 정부와 국가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리어 이런 나라, 이런 정부가 싫다고 조국을 떠나는 젊은 엘리트 가정들이 늘어나고만 있습니다. 사회 생활하면서 누구를 만나든 그 말을 그대로 믿으려 하지 않는 세상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에그, 순진하기도 하지’라고 동정을 살 정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의가 사라졌습니다.

미국 LA 영락 교회에서 목회 하던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몇 해 전, 평양에 가족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오래 전에 서울에서 목회 할 때, 남대문 시장에 바지를 하나 사러 가셨습니다. 바지 사러 가시는 목사님께 권사님 한 분이 코치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무조건 절반을 깎으세요” 그래서 바지 하나를 고르고, 얼마요 했더니 주인이 7천원 이라고 합니다. 무조건 절반 깎으라는 코치가 있었기에, 심호흡을 하고 짐짓 잘 아는 체 하며 ‘아니 왜 그렇게 비싸요? 3천 5백원만 합시다’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풀이 죽는 표정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옳거니 기 싸움에서 내가 이겼구나’했는데, 그 주인이 풀 죽은 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목사님, 그거 원가가 6천원이에요.” 자기를 보고 목사라고 부르는 소리에, 게다가 그 가게 주인이 자기 교인이란 말에 목사님은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고 합니다.

Eiseamal 57:3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이제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영으로서가 아니라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주님은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John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습니다.
John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John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스스로를 선언하실 때 분명히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2. 진리를 변명으로 거부합니다.

31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니고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변명합니다.
33절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했습니다. 이 말은 여러분 아시겠지만 거짓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남의 종 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출애굽을 할 때 왜 애굽에서 탈출해 나왔습니까? 노예 살다가 나온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조 들이 출애굽기에 그리고 구약성경 전체에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종이 된 덕이 없다니요! 우리는 이럴 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게 낫다’ 이런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합니다. 그리고 바벨론 때도 70년간이나 했습니다. 지금도 로마 통치하에 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게 민족적으로 지금도 자유가 있습니까?
그러면 정말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런 것을 모르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치적인 예속상태에 있었던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압제 속에서도 종교적인 자유를 빼앗겨본 적이 없다는 일종의 자부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면 거짓인 것이 금방 들어 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들이 우상을 섬기고 거짓을 계속해서 행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그 보계대로 계수되고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대상 9:1)
Leat! 예수님의 말씀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거부하면 안됩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거부한다는 그 자체가 그 어떤 죄보다 더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민족적 자부심도 좋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항하면 안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을 보면 이런저런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무슨 무슨 가문의 몇 대손 이라고 하는 자부심 때문에, 내가 그래도 어떤 학교를 나왔는데 등등 많습니다.
빨리 손들고 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영원한 것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은 일의 활력이 되지만 자만심은 망하게 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2)

3. 죄의 종

34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민족적인 노예나 지금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종교적으로 자신들이 잘 지켜왔다는 자부심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극명히 들어 납니다. 그것은 유대 민족적인 해방이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입니다. 지금은 민족적으로 해방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로부터 해방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Leat! 민족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민족이 타민족에게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못 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민족은 지배당하고 있을지라도 천국 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민족이 해방되어 있어도 지옥 갈 사람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죄의 문제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육체가 노예가 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또한 죄에게 지배받으면 안됩니다.
목회하기 힘들다고 할 때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런 분 만나면 괴롭습니다. 다른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세례를 받지 않았으면서 세례증명서를 떼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앞으로 받을 거니까요. 그러면서 떼어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세례 받을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떼어주겠어요 안 떼어주겠어요. 안 떼어줍니다. 이 목사님도 안 떼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나가서 하는 말이 “목사가 융통성이 없니, 목사가 사랑이 없어, 너무 꽉 막혔어!”하고 다니더랍니다.

4. 아들이 자유를 줍니다.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뒤에 나오는 “자유하리라”는 해방을 받으리라는 말입니다. 아들은 예수그리스도이시며 진리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사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과감하게 종의 멍에를 버립시다. 오랜 관행이라고 하면서 대충하지 맙시다. 정직하게 삽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해방은 죄에서 해방을 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6:22)

일제 만행의 증거 정옥순 할머니

정옥순(鄭玉順)씨의 기억은 매우 또렷했다. 그는 함경남도 풍산군 파발리(豊山郡 把撥里)에서 1920년 12월28일 태어났다. 1933년 6월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을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세게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 눈이 차츰 안 보이게 됐다.

그 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그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Rev yiyoungje TSeanmóir MP3 Éisteacht

Na focail Íosa(4.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 Téacs : Matthew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미국교회에 ‘거북이 교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행동이 느린 것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거북이는 500일 동안 음식을 안 먹어도 죽지 않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보통 새는 열흘정도 굶으면 죽고, 개는 20일정도 굶으면 죽는답니다. 사람도 보름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면 죽습니다. 금식할 때 물먹으면서 하면 40일 정도는 견디지만 그 이상은 어렵습니다. 거북이처럼 500일을 아무 것도 안 먹었는데 살아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거북이 교인’이라고 한 것이지 이런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3:1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한 사데교회 교인들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8:11)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에 사단에게 시험받으실 때, 사단을 물리치신 말씀입니다. 사단은 ‘떡’만을 강조하며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예수님도 인간이 육체에 메여있다는 것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떡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떡으로만”이라고 하십니다. 육체에 갇혀있는 사람은 떡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영혼’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갇혀있는 인간은 영혼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를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가 죽을 때까지도 모릅니다.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떡으로만”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럼 무엇을 삽니까? 기록된 말씀으로 삽니다.

1. 기록된 말씀

예수님은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냥 서술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사단의 시험에 대해서도 7절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셨고, 세 번째 천하만국을 준다고 시험할 때도 10절에서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기록되었으되(Gevgraptai:게그라프타이)는 ‘새기다’로 기록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4:12)Glaodh.
예수님은 자신의 경험이나 힘으로, 지혜로 사단을 물리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십니다. 왜 기록된 말씀에 의지하십니까? 이 말씀은 지금도 생명력이 있고 사단을 능히 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시험을 늘 당하며 살아갑니다. 이 때마다 우리는 세상의 돈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지식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보다 먼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십니다. 시험에서 이기게 하십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6:17)

세계최대의 백화점을 운영하고 나중에 체신부 장관까지 역임한 존 워너메이커(1838-1922)는 말년에 사업가로서 6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한 낡은 성경책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저의 출생일인 1838년 7월 11일부터 오늘까지 무려 30,026일을 살아왔습니다. 저는 인생에서 투자한 것마다 많은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저의 투자 중 가장 성공한 것은 열두 살 때 2달러 50센트를 주고 빨간 가죽 성경을 산 것입니다. 바로 이 낡은 성경이 제가 한 가장 위대한 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존 워너메이커는 벤자민 헤리슨 대통령이 그에게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워너메이커는 지금 교회에서 주일학교 봉사를 하고 있는데 주일날 교회에 가야하기 때문에 이것을 허락해 주면 장관직을 수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장관직을 사양하겠다고 했습니다.

2. 모든 말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말씀도 생명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한 말씀도 능력이 없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아직 이루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마지막 때의 심판뿐입니다. 이것 또한 이루어질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음을 받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역사가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T 5:18)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중시하고 계십니다. 하찮은 하나님의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떤 말씀이라도 능력이 있습니다. 그대로 됩니다. 저주의 말씀도 축복의 말씀도 모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1732-1799)은 ‘하나님과 성경을 모르고 바른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 취임식 때 자신의 성경을 가지고 올라가 그 성경 위에 손을 얹고 선서했습니다. 이것이 미국 대통령 취임식 때 공식 순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영국과 싸워 미국을 독립시키고 국민들의 전적인 지지로 연임했습니다. 그리고 3선을 사양하고 고향 버넌 농장으로 돌아감으로써 대통령제의 소중한 모델을 만들어 주고 민주주의 밑바탕을 만들었습니다.
워싱턴은 전쟁에서 미국은 구한 건국의 아버지이지만 사실 그도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17, 22, 29세 때 말라리아에 걸려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19세 때는 천연두에 걸렸고 20세 때 늑막염에 걸려 청년 때에 병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급성 이질과 치아가 빠지는 고생을 했습니다. 그가 이런 고통을 이겨낸 것은 어머니의 성경교육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어머님이 가르쳐 준대로 늘 성경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고별연설에서 “국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없이는 지탱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에서만 이 나라는 든든한 나라로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워싱턴을 기념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수도를 워싱턴으로 지었습니다.

3.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말씀은 그냥 보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1:3)Fuarthas amach go. 말씀은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주님도 우리를 지키십니다.
“말씀으로 살 것이라”의 본문은 신명기 8:3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생활 가운데서 만나를 먹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은 것입니다.
이 말씀을 먼저 예수님이 지키셨습니다.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John 6:38-39)Fuarthas amach go. 주님은 자신의 뜻대로 사신 분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사시고 그 말씀에 순종한 분입니다.
“말씀으로 살 것이라”에는 먼저 주님이 말씀대로 사시겠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말씀으로 살아야 된다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과학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상식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너무나 초보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재 과학자 뉴튼과 아인슈타인 박사는 “인체의 신비, 자연의 신비, 우주의 신비를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미친 사람이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고 했습니다. 전세계 과학자 중에 90%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4. 과학으로 증명되는 말씀

마취제를 발견한 심프슨은 성경 읽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늘 ‘수술 환자들이 수술을 받을 때 고통 없이 받을 수는 없을까?’를 늘 고민했습니다. 이 당시에는 아직 마취제가 개발되지 않아 수술환자들이 큰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심프슨은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놀라운 말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Fuinneog 2:22) 그는 이 말씀을 읽는 순간 무릎을 치며 환호했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고통 없이 환자를 수술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아담을 잠들게 하고 그의 몸 속에서 갈빗대를 빼내는 수술을 하셨는데도 아담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고 마친 것을 보면 분명히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는 그는 ‘무엇인가 예비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했고 드디어 1847년 마취제인 클로로포름(Chloroform)을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해양학의 선조로 불리는 매슈 폰테인 모리(1800년대 후반)는 몸이 불편하여 큰아들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큰아들은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Eiseamal 8:8)를 읽었습니다. 이 때 모리는 그 구절을 다시 읽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는 ‘바다의 길’이라는 구절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지상 도로에 대한 지도는 있었지만 ‘바닷길’에 대한 지도는 없을 때였습니다. 그는 흥분해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다에 길이 있다고 하셨으니 틀림없이 깊은 바다에도 길이 있을 것이다. Carachtar, 나하고 찾으러 가자!
그가 바다의 길을 찾아 떠난다고 할 때 주위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느냐며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으니 분명히 있다고 확신하고 바닷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결국 그는 바닷길을 발견했고 인류 최초로 ‘해양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세계최초로 1837년 전신기를 발명한 모스는 워싱턴에서 볼티모어까지 시험 전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전신기를 타고 간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John 3:16)An bhfuil.
모스가 전신기를 발명한 후에 급속도로 라디오, 전화, TV등 전자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스가 전신기를 발명할 수 있었던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랭클린은 연을 이용해서 번개의 비밀을 알게되면서 전파를 통해서 의사 교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된 것입니다. 그는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욥기 38:35)말씀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욥기 26:7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구가 공중에 떠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었습니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바다 끝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낭떨어지가 있어서 떨어질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욥기 38:16 “네가 바다에 들어갔었느냐”, 잠언 8:28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바닷물 깊은 곳에 샘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발견한 것은 1960년대에 해저 탐사 기관(S.N.R)에 의해서 간접적으로 확인되었고 1973년 연구용 잠수함에 의해서 깊은 바다 물 속에 샘물이 있다는 것을 사진으로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대기에 압력이 있다는 사실은 17세기 이탈리아 과학자 토리첼리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오래 전에 욥기 28:25 “바람의 경중을 정하시며 물이 되어 그 분량을 정하시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과학적 접근으로 깨달은 말씀은 없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하는 일과 관련되어서 힘을 주었던 말씀은 에베소서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입니다. 저는 “오는 여러 세대”라는 말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초대교회 때 로마황제의 핍박은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종말적인 상황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오는 여러 세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준비했습니다. 그는 13권의 성경과 87장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저는 미래를 보고 일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바램은 하늘나라에 가 있을 때, 그 때 그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선교할 수 있고 잘 믿을 수 있다는 고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다음세대를 위해서 준비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조금 고생해도 우리 다음세대에게 복음을 전 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을 택하십시다. 그것이 최선의 삶인 줄 믿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성경을 꾸준히 읽으십시다. 그 속에 살아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도우시는 손길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