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나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Fuinneog 1:27-28)
1997년 12월 7일에 인도 뭄바이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한 10시쯤 되었나요, 뭄바이 뒷골목을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오토바이 하나가 넘어져 있었습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배달하는 아이가 넘어졌습니다. 오토바이에서 넘어져 자신의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는데 나뒹구는 그릇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자기 몸의 상태보다 깨진 그릇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 일로 주인에게 눈 밖에 나면 식당에서 쫓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릇을 부둥켜안고 이지 저리 뛰는 그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인도는 사람이 넘쳐나기 때문에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도사회는 엄격한 카스트사회로 카스트는 ‘출생’을 뜻하는 ‘자티’말로 혼인집단을 말하며 이런 집단은 3,000개가 넘습니다. 단순히 신분은 정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집단으로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즉 한 집단에 속한 사람이 다른 직업이나 다른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카스트는 모든 계층과 직업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신이 카스트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기원전 1000년경(다윗과 솔로몬의 시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옮길 때가 B.C 1003년)에 만들어진 힌두경전《리그베다》에 보면 인간의 계급이 정해진 것이 나옵니다. 태초에 우주의 본질을 상징하는 거대한 신 푸루샤가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창조했는데 푸루샤의 입은 사제인 브라만이 되었고 팔은 군인계층 크샤트리아가 되었고, 허벅지는 상인 계급 바이샤가, 두 발에서는 노예인 수드라로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계급으로 색깔이라는 의미의 바르나 제도 곧 사성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에 들지 못하는 ‘아웃카스트’가 수드라보다 못한 불가촉천민입니다.
이것을 석가모니(B.C 563년-483년)가 없애려고 시도했습니다. 석가모니(싯다르타 고타마(성씨))라 칭할 때, 석가( 迦)는 북 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Sakya)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牟尼)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muni)의 음사입니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 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입니다. 석 가족의 왕국인 카필라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궁 밖에서 늙고 병들고 죽는 인간의 생애가 고통으로 이뤄져 있으며 이것을 벗어나는 것을 추구하여 왕위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힌두교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840만 번 환생해야 윤회의 사슬에서 해방된다고 합니다. 사실상 거의 불가능 한 경지이고 결국 힌두교는 윤회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이것을 부정하고 바로 열반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성제라는 것을 신분의 계급이 아닌 도를 닦으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불교는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인도에서 번창하기 시작했습니다. B.C 4세기부터 A.D 6세기까지 중국과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넓혀갔습니다. 하지만 7세기 경에 인도에서는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세기 경에 이슬람이 출현하여 불교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그 바람에 카스트 제도 역시 존속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는 힌두교의 윤회사상을 부정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분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었다고는 하나 석가모니는 왕자로 최상위 계급에 속했고 힌두교의 그런 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힌두교의 악습을 버리려고 시도했으나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부처가 된 그의 우상 앞에서 절하고 빈다고 해서 그 뜻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슬람의 창건자 모하메드는 A.D. 571년 경 메카(Mecca)에서 시들어 가는 명문가의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 성경을 왜곡하여 꾸란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슬람이 인도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인도의 불교도 입장에서는 카스트를 무너뜨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슬람이 방해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8세기 이슬람계의 옴미아드 왕조가 인도에 침입했고, 10세기 가즈니 조는 핀자브를 장악하고 갠지스 유역을 침략하여 힌두 문화를 파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즈니 조를 이은 고르조가 12세기 갠지스 유역을 점령하자, 지도자 아이바크가 독립하여 인도 최초의 이슬람 국가인 노예 왕조를 세웠습니다. 이 왕조는 델리를 중심으로 북 인도를 지배하였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약해졌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영국이 동인도 회사를 앞세우고 인도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인도는 이슬람에 의해서 기독교를 왜곡되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나중에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통한 기독교 전래 또한 서양의 지배 하에 시도되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간디가 카스제도에 도전했지만 그 역시 뜻을 완전히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인도는 1950년 1월 26일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불가촉천민의 폐지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상대의 이름만으로 그들의 카스트를 금방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도 베이커 성은 조상들이 빵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맥아더와 맥도날드는 스코틀랜드계입니다. 아일랜드 사람의 상당수 성은 오(O)로 시작합니다. 오브라이언(O’Brian)이니 오닐(O’Neil), 오라일리(O’Reilly)라는 성들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인 스칼렛 오하라(O’hara)도 아일랜드 성입니다. 아일랜드의 위스키(Whiskey)성도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문지기 집안이 아닌가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그래픽 방식의 OS만들어 놓고 윈도우(창문)를 만들어 놓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출생지입니다. 이런 인도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슬람국가나 북한, 중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요 우리나라에도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돈이 신분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입니다. 그 모든 것이 사람을 위하여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5일 동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6일째 되는 날에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T 16:26) 우리는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이 누구를 닮아야 됩니까 하나님입니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면 사탄이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아와야 됩니다. 그런데 죄 없는 인간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신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John 12:45) Fuarthas amach go.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눅 10: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John 4:34) Fuarthas amach go.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은 인격적이며 지적인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가진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도덕적 진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을 근본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거북이는 해변 육지에서 알을 낳지만 새끼들은 알에서 부화하자마자 바다로 기어가야 산다는 것을 압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바다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압니다. 그리고 그리로 가야 산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야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과 도덕적 진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돌을 던지면 어리석은 개는 그 돌을 쫓아가지만 호랑이는 그 돌을 던진 사람을 쫓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만드셨습니다. 자연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쫓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본문 28절을 통해서 세 가지로 말씀해 주십니다.
첫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
둘째, “땅을 정복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정복하라’는 것은 ‘차지하라’는 말입니다. 또한 ‘관장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탄이 차지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차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연을 파괴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이 자연을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셨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만들어낸 음식보다 자연 그대로가 더 좋은 것입니다. 자연에서 자란 삼이 산삼이고 자연에 사람이 파종한 것이 장뇌삼이고 사람이 재배한 것이 인삼입니다. 아시겠지만 산삼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텔레비전을 24시간 들여다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24초 동안 바라보는 것이 더 유익한 것입니다. 자연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자연계시’라고 합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Tá ard-.
셋째,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창조자의 손을 떠날 때는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나빠졌다.”(Rousseau)Tá ard-. 모든 생물을 잘 다스리라는 것이지 다 잡아 먹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주신 자연도 잘 가꾸어야 합니다. 호주 시드니에 간 적이 있습니다. 도심 한 가운데 몇 백년 돼 보이는 고목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도로를 보니까 꾸불꾸불 한 거예요. 나무를 피해서 길을 내다보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울시내에서 고목 나무를 볼 수 없습니다. 길 내고 도시 건축하느라 다 비어버린 것입니다. -호주 YWAM 건물 건축의 예-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또한 자연을 귀하게 여깁니다. 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을 귀하게 여깁니다.
Leat! 성경만큼 사람의 가치를, 나의 가치를 고귀하게 주장하는 사상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다름 아닌 아버지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알려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라고요. 나를 그렇게 생각해주실 분은 바로 아버지 외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다른 피조물들에게 자신의 형상(image)을 반영시키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 아버지와 교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자녀로서 맞이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과 참 사람의 형상(image)을 보게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노예로 만드시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시지 않고 우리에게 일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전도할 수 있도록 우리의 입술에 할 말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을 주십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십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