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구하느냐
Rev yiyoungje TSeanmóir MP3 Éisteacht
Na focail Íosa(13. 무엇을 구하느냐) / Téacs : John 1:35-42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십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오늘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발표한 559주년 되는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또 한글을 사랑하여 발전시켜 왔습니다. 우리 한민족이 정말 자랑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한글입니다. 한글은 다른 나라 글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창작이면서 목구멍의 모양에 따라 자음의 모양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글을 사랑하여 한글 기계화에 앞장선 사람이 있습니다.
1949년 우리 나라 최초로 “실용적인 타자기”개발에 성공한 공병우 박사입니다. 이분은 우리 나라 최초로 안과를 개업한 의사(1906.-1995. 3. 7.)이며, 70살이 넘어서 사진을 배워서 사진 작가가 되신 분입니다.
남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답게 그의 유언은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 장례식 같은 건 하지 말 것, 장기는 기증하고 시신은 해부학 교실에 기증할 것, 위와 같이 할 수 없을 때는 24시간 이내에 수장 또는 화장할 것, 부고는 죽은 지 1개월 후에 할 것……”입니다.
그는 창씨개명을 요구하는 일제를 향하여 ‘금일 공병우 사망’ 이라고 외치며 항거했던 것처럼 옮은 것에 대해서는 굽힐 줄 몰랐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료로 수술을 해주며 베푸는 삶을 살았기에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풀려나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6.25사변 때의 일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볼 때 공병우 박사는 소위 부르주아(가진 자)이었기 때문에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총살을 당하게 되었다. 그 순간 인민들 속에서 “저 분은 우리의 적이 아니니, 살려야 한다”는 증언이 나온 것입니다. 다행히도 그 증언자는 공 박사로부터 무료시술을 받았던 가난한 환자였습니다.
또한 공병우 박사는 평소 하는 일이 많은 만큼 시간을 아껴 쓰기 위해 갖가지 묘안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5분 안에 머리를 깎는 이발소가 아니면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혼인식을 낮에 하는 곳에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과 궤짝을 포개서 만든 침대에서 잠을 잤고, 그 자신이 게을러지는 것을 늘 경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글 기계화 운동을 위하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PC통신(하이텔)에 글을 쓰다가, 1995년 3월 7일 마지막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구약성경에 보면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 우리는 아무공로 없지만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으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잘 하고자 하는 사람을 외면하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세례요한의 소개로 그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이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구하느냐”고 질문하십니다. 본문을 직역하면 “누구를 찾느냐”입니다. 누군가, 무엇인가 찾고있었던 것입니다.
찾으십시오.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은 생동감이 넘칩니다. 그러나 할 것이 없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할 것이 있는 사람은 아침이 빨리 밝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할 일이 없는 사람은 아침이 밝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경험한 일일 겁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가는 날이 되면 비가 올까봐 밤새 걱정하며 잠을 못 이루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선교하고 싶어서 잠을 못 자는 날이 많습니다.
Eiseamal 77: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고 하셨습니다.
T 7:7-8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찾으십시오. 끊임없이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시며 만나주십니다.
무엇을 찾아야 합니까?
대상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입니다. 대상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가족이 없으면 돈을 버는 목적도 집을 사는 목적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대상이 찾아져야 그 때부터 그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기를 36절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어린 양은 희생제물입니다. 속죄제를 위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양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예수님을 가리켜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Tá ard-. 두 제자들이 찾는 것은 메시야 였습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신 “무엇을 찾느냐”는 “메시야를 찾느냐”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메시야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12제자들을 말할 때 예수님께서 모두 불러서 예수님의 권한으로 선택된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제자가 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메시야를 찾고 있다가 만난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 세례요한을 따라다녔던 것은 혹 그가 메시야가 아닌가 해서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메시야를 발견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했을 때 세례요한의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것은 아닙니다. 두 제자만 따라왔습니다. 이들은 확실히 메시야를 찾았던 것입니다.
TV에 프로그램 중에서 오래 전에 한국에서 입양되어간 아이들이 부모를 찾는 프로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 사진과 함께 간략하게 소개되는 것은 “저는 종로에서 발견되어 불광동 천사 고아원에 있다가 지금은 네덜란드로 입양되어 살고있습니다.” 이런 소개가 여러 명 이어집니다. 그리고 서툰 한국말로 “엄마~~”를 말 할 때는 눈시울이 적셔집니다.
제가 인터넷에 칼럼을 올린 것이 있습니다. 제일 추천수가 많은 글은 “강아지를 찾습니다.”였습니다.
“저희 집에서 제가 7년간을 함께 지낸 강아지입니다.
가족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지금은 사진보다 털이 더 자랐을 것입니다.
이 개를 보신 분이나 가져가신 분은 연락을 주시면
20만원을 사례하겠습니다.“
이런 벽보가 아파트 집을 나섰을 때 신호등 앞에 붙어 있었다.
함께 살던 강아지가 집을 나가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찾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만드신 사람이며 그분의 자녀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를 안타깝게 찾고 계십니다.
아직 하나님의 집에 가지 않은 분들은 속히 돌아오십시오.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성도님이 아니라 진짜 당신을 찾는 분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길을 열어놓으신 예수님 입니다.
돌아오시면 20만원을 사례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의 유업을 이를 상속자가 되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십니다.
고아원에 맡겨진 어떤 여자아이가 있었답니다. 그 아이는 자기를 고아원에 버린 부모를 무척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고아원에 찾아왔습니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의 모습을 본 순간 소녀는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얼굴은 온통 화상을 입어 흉측했습니다.
처음 만난 아버지를 반갑게 맞이하기보다는, 자기를 고아원에 버렸기 때문에 벌을 받아 흉측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 소녀가 자란 다음 어느 날, 혼자 어렵게 살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토록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해왔던 터라, 별로 가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낳아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 어쩔 수 없어 막상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돈이 없어 막막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화장을 시켰으나 안치할 곳도 없어 화장하고 난 가루를 그냥 산에다 뿌렸답니다.
그런데 장례가 끝난 후 누군가가 생전에 아버지가 보관해 오던 물건들(유류품)을 전해줘서 받아보니 아버지가 남긴 글이 있었습니다.
내용인즉, 그 아이가 갓난아기 때 밤중이었는데 집에 불이 나서 아버지가 엉겁결에 집밖으로 도망쳐 나왔는데, 아기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불길이 치솟는 위험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갓난아기를 안고 나왔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아기를 데리고 나와서 보니, 부인은 아직 빠져 나오지 못해 훨훨 타는 불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젠 불길이 너무 거세져 구하러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타서 죽고 말았답니다.
불 속에서 딸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 아버지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부인마저 세상을 떠난지라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딸아이를 고아원에 맡겼던 것입니다.
그제야 아버지의 흉측한 얼굴이 소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소녀는 통곡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런 기막힌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허구한 날 원망하고 미워했던 자신이 더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나를 찾지만 나도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괜한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이지만 이 사람 저 사람 말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댄 브라운이라는 사람은 다빈치 코드라는 책을 써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해박한 지식은 그의 상상과 더불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성경도 거침없이 변경하며 예수님의 일생도 변경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책과 말들에 정신 팔 틈이 없습니다. 댄 브라운은 소설작가입니다. 성경은 사실이고 다빈치 코드는 소설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방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따라갑시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를 함께 일어봅시다.
(골 2:20)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골 2:21)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골 2:22){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골 2:23)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골 3: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골 3: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