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병이어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A Vida de Xesús(28. 우리의 오병이어) / Só 6:35-44
“35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저물어가니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37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41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 다 배불리 먹고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명이었더라”
[배경설명]
예수님은 몇 시부터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하셨는지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오랜 시간 설교를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과 청중들은 말씀을 듣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어느새 저녁때가 다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사람이 너무 많이 모여있습니다. 남자만 5,000명이 되니까 여자와 어린아이를 합하면 20,000명쯤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을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쯤 말씀전하는 것을 중단하고 해산해야 무리들이 저녁을 사먹든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고 건의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건의에 대해서 예수님은 의외의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모여있는 2만 여명에게 먹을 것을 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라고 했습니다. 200데나리온이면 당시 한사람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 이었으니까 한 사람이 약 8개월간 벌어야할 돈입니다. John 6:7에서 빌립은 200데나리온을 사용해도 청중들을 먹이기에는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 식으로 계산하면 5,000원짜리 도시락을 2만 명에게 준다고 하면 1억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주 똑똑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세관원출신인 마태가 있었고 회개를 맡은 가룟유다도 있어 샘에는 밝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러한 고민에 직접 참여하십니다.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확인된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전부였습니다. 이것도 어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던 도시락으로 서민이 먹던 보리떡과 물고기 몇 마리가 전부였습니다(John 6:9). 지금 먹어야할 사람의 양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마디로 누구 코에 붙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청중들도 가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모자라 꼭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가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무 것도 없어도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럼 왜 이 작은 것을 가져오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큰 것을 가진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십니다. 하나님은 많이 가진 사람들의 것은 관심이 없으십니다. 기드온을 택하실 때도 제일 작은 집안의 막내를 뽑으신 것입니다. 사람이 볼 때는 지도자가 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싸움에 나갈 만한 사람을 뽑으실 때도 너무 많아 줄이십니다. 결국은 300명으로 미디안의 수많은 군사를 상대해서 싸우게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적은 것이로되 생명이 있습니다.
베드로도 복음을 전하면서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에게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가 아무 물질도 주지 않고 말로만 한 것처럼 보입니까? 베드로는 그의 삶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한 때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그가 예수님께 고백한 것처럼 그 약속을 지키고 있습니다. T 26:35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오늘 우리 주앙교회도 우리에게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윤인수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윤인수가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이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윤인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윤인수는 열심히 일을 한 대가로 돈을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았습니다. 돈을 받아 든 어머니는 윤인수의 등을 두들겨 주며 “십일조를 먼저 떼자”고 말합니다.
윤인수는 버럭 화를 내며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인가,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느냐”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순종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하지 못할 상황으로 끌고 가십니다. 이제 파악이 되셨으면 “해산하라!” 명령을 하셔야 하는데 오히려 무리를 지어 앉게 하십니다. “3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떼로, 떼를지어”는 U자 형태로 앉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식사 대열입니다. 시골에서 초,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야외로 소풍가면 각 반마다 또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식사할 수 있는 상태로 자연스럽게 구성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 같은 상태로 앉은 것입니다.
“40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숫자는 신뢰하셔도 좋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공부는 몰라도 숫자 계산하나만큼은 잘했습니다. 누가 있어서요? 세리 출신 마태와 회개를 맡고있는 가룟유다가 있지 않습니까? 아마 베드로와 어부출신인 다른 제자들도 고기가 몇 마리 정도 잡혔는지는 세었으니까 숫자 계산은 아마 빨랐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100% 순종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왜! 해산하지 않고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십니까? 또 무엇을 하시려고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한 것을 행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지나치게 자신의 논리로 모든 문제에 접근합니다. 자기가 이해가 안되면 안 하는 겁니다. 그런 분은 순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순종이란 내가 이해되지 않지만 나의 주가 시키면 하는 것입니다.
멕시코에 있는 쿠이케텍 인디언과 체르탈 인디언의 방언에는 `믿는다’라는 말과 `순종한다’라는 말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단어에 두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안 초기 선교사들은 미개한 인종의 언어라서 언어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언어는 불완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들은 두 단어를 구별하려는 문명인들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들 언어의 불완전성은 문명인들에게 깊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두 말이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믿으면 순종하게 되지 않습니까? 순종한다는 것은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들의 생각은 옳은 것입니다. 오히려 문명인들이 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리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주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41 예수께서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가 예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냥 있으면 여전히 한 어린아이가 먹을 양뿐이 안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드려졌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그냥 100원이요, 10만원이요, 100만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드려지면 다릅니다. 예수님이 축복을 하시고 남자만 5,000명이 먹었습니다. 그것은 물질의 양과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고기가 다섯 마리였기 때문에 5,000마리로 늘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청중이 먹고 남았습니다.
“43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충분합니다. 남는 축복이 있습니다.
단순히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적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구원자시요, 생명의 떡으로 친히 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것도 주님께 드려지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주앙교회에서도 오병이어와 같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어려서부터 꼽추로 자라 굉장히 우울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나 같은 불구자를 과연 받아줄 것인가? 누가 나 같은 사람과 결혼해 주겠는가?”
그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사람 같은 느낌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뒤에서 “꼽추! 꼽추!” 하면서 그를 놀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어린 소년이 그를 세우더니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 등에 지고 가는 게 뭐예요?”
그는 생각했습니다.
“웬 꼬마가 나를 놀리고 있네. 왜 아이들까지 나를 괴롭히지?”
그러나 그는 무심코 “혹이란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사랑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저씨, 나는 그걸 믿을 수 없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세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혹 같은 것은 주지 않으세요. 아저씨 등에 있는 것은 천사의 날개가 들어 있는 상자예요. 아저씨가 죽을 때까지 겸손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고 다니면 어느 날엔가 그 상자가 열리고 날개가 펴져서 아저씨는 그 날개로 아름다운 하늘나라까지 날아오를 수 있을 거예요.”
그는 소년의 말을 듣고 그만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코 아름답고 많은 돈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이것이 우리의 오병이어입니다.
바울은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것, 약한 것, 부족한 것”이 무조건 이기거나 좋은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택하셨을 때, 그리고 순종하고 나왔을 때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