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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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20. 준비하는 믿음) / Texto : Mateo 25:1-13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철학자들과 성인이라고 말하는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사상가들은 저마다 인생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진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죽어갔고 정확하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통계에 보니까 교회에 나오는 분들 중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많더라 구요. 이것은 자신이 어느 길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같은 겁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어느 길인지 알아야 합니다. Vostede! 산에 등산을 하는데 어디로 가서 어디로 내려올 것인지를 알고 가야지 그냥 막 올라갑니까? 그렇게 한번 가보세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가면서도 어디쯤 왔는지? 또 어떻게 갈 것인지를 모른다고 해 보세요. 가면서도 답답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벌기 위한 길은 잘 아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이 없는 겁니다.

길을 먼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1) 악의 길이 있습니다(Proverbios 1:15, 16).
이 길은 굽은 길입니다(Proverbios 10:9).
어둠의 길입니다(Traballo 24:13).
죄의 길입니다( 2:6).
황폐케 되는 길입니다(Catro 59:7).
허무한 길입니다(Traballo 6:18).
사망의 길이 됩니다(Proverbios 14:12).

2) 의의 길이 있습니다(Cidade 23:3).
진리의 길입니다(Cidade 25:10).
평탄한 길입니다(Cidade 27:11).
정직한 길입니다(Proverbios 2:13).
생명의 길입니다(Proverbios 2:19).
평강의 길입니다(Proverbios 3:17).
구원의 길입니다(John 14:6).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막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경찰관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지는지 아세요? 소방관에게 집니다. 왜냐하면 물불을 안 가리니까 그렇습니다. 소방관도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 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요. 시각장애인은 남에게 돈을 빌려줘서 못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각장인도 다른 사람은 다 이겨도 노인은 못 이깁니다. 노인한테 집니다. 왜냐하면 노인은 다 살았으니까.
우리가 성령 받을수록 막 살면 안됩니다. 성령 받았다고 물불 안 가리면 안됩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경제의 논리만 있습니다. 이슬람 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논리만 있습니다. 오래 전에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선교사가 사러갔는데 유럽, 일본제품은 잘 나오는데 한국 것만 잘 안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그래도 한국사람이 한국상품 안 사주면 누가 사주나 하고 한국제품을 선택했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켜 보니까 잘 나오드레요. 그래서 다시 그 상점에 가보니까 점원들이 한국 것만 잘 안나오게 틀어놓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 것만 잘 나오게 하고 다른 것은 잘 안 나오게 하고 돌아왔답니다.

좁은 길로 가세요.

본문 14절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35:8에는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이 다른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가라고 한 길로 가는 사람이 대로를 걷는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대로를 가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들은 선교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지난번 양화진에 갔을 때 제일 가슴에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교사 자녀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고국에 있었으면 죽지 않아도 되는데 부모님이 선교하러간다고 해서 따라온 아이들입니다. 양화진에 순수한 선교사의 무덤은 111기인데 이중에 36기가 선교사 자녀들입니다.
이렇게 살다간 선교사님들과 자녀들은 ‘대로로 간 것입니까? 좁은 길로 간 것입니까?’ 개인적인 삶의 고난을 생각하면 좁은 길로 간 것이며, 남이 안가는 좁은 길로 간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로 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대로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좁은 길, 대로 모두 무슨 길입니까? ‘의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1676년 영국의 베드포드 감옥에 존 번연(John Bunyan)이라는 가난한 사색가가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영어로 쓰여진 가장 유명한 책 중의 하나인 천로역정(The Story of Pilgrim’s Progress)을 섰습니다. 이 책은 한 사나이가 ‘위험한 여행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여행길을 마치고 천국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오직 한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바울이 AD 65년경에 로마로 들어갔다가 이년이 안되어서 순교를 당합니다. 로마 황제 네로가 로마를 불바다로 만든 후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이지 못하고 칼로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지금도 그 현장이 로마에 남아 있습니다. 네로는 계속 방탕한 삶을 살다가 태후를 죽이고, 왕비를 죽이고, 스승인 세네카를 죽이고, 나중에는 방탕하여 14년만에 독약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바울은 대로로 간 사람임과 동시에 좁은 길로 간 사람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계획을 짜세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여행계획을 짤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을 동원해서 짤 수 있습니다. 돈으로 우리가 가는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이 참여하는 계획을 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선교대회 프로그램 짤 때 보니까 꼭 큰 교회목사님을 한 분모십니다. 이로 인한 폐단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게 짜지 않으면 경제적인 문제를 책임지는 사람이 없게됩니다. 그래서 꼭 한 분 정도는 예산을 책임질만한 분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여행계획을 짜면 누가 책임져 주십니까?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내 맘대로 짜고 내 맘대로 가면 주님은 관심이 없으십니다.

여행가서 제일 재미없는 것이 외로움입니다. 즐거우려고 갔는데 외로운 겁니다. 혼자가면 그렇습니다. 인간은 외로움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처음 창조 될 때 아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남녀가 함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자매들은 남편보고 ‘오빠’라고 하더라구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니 오빠하고 어떻게 같이 삽니까?
시편 기자는 “나는 광야의 올빼미와 같고 메마른 땅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누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마치 지붕 위의 외로운 새 한 마리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시102:6-7 의역)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그들 보호해 주십니다.
Cidade 121:7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아멘.

영국의 특급 열차가 빅토리아 여왕을 태우고 안개가 짙은 밤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기관사는 시간 내에 무사히 목적지까지 모시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한참 달리고 있는데 강력한 헤드램프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곧 교량이 가까워 오는 지점이라 기관사는 급정거를 하고 차장과 열차 승무원들이 밖에 나가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이상한 예감이 들어 몇 십 미터를 더 나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만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량 한 가운데가 급류에 휩쓸려 나갔던 것입니다. 만약 그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다면 여왕을 비롯한 수백 명이 기차와 함께 강물에 빠져 몰살당하는 사고가 났을 것입니다.
그 후 교량이 복구되고 그 열차가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으나 그 이상한 현상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기관사가 기관차 헤드라이트 아래쪽을 살펴보다가 큰 나방 하나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날개가 라이트 유리에 붙어서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관수가 차에 올라가 헤드라이트를 켜보니 바로 그 날개가 깃발을 흔드는 사람으로 보였음을 알아냈습니다. 여왕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자 여왕은,”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방법이었소.라는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외로움을 극복할 뿐 아니라 그 분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부터 노아 홍수이전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제일 오래 산 사람 므두셀라도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모두 다 ‘죽었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말이 8번나옵니다. 그러나 창 5: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고 다시 옮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여행하시고 하시고 주님 품으로 돌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집에 종이 한 사람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종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주인은 장난 삼아 그에게 지팡이 하나를 주면서

두 사람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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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19. 두 사람의 감사) / Texto : Lucas 18:10-14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우리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은 미국 교회가 만든 좋은 절기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각 나라에 전달될 때 생겨난 풍습과 같은 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상황 화되었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새벽기도입니다. 새벽기도를 교회가 정해놓고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에만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조상들이 제단을 쌓던 풍습을 교회가 기도하게 만든 것입니다. 심방 제도도 만찬가지입니다. 다른 나라는 심방을 정해놓고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가는 사람들이 점술가들은 정초에 찾아와 부적을 주며 일년축복을 빌어주는데 교회 목사가 안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찾아가 성경구절을 적어주고 축복해 주기 시작한데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크리스마스 역시 상황 화된 날짜를 만들어 지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독교의 풍습을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 좋게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한 절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좀더 상황 화되었다면 추수감사절은 추석에 함께 보내는 것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미국식으로 오늘 지내게 되었습니다. 요즘 어떤 교회들은 상황 화하여 좀 일찍 지내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것은 큰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어쨌든 1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추수감사절로 좀더 하나님의 축복에 감사하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어 또한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감사를 주님이 비교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가 무엇인지 살펴보고 은혜 받고자 합니다.

바리새인의 감사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오전 9시, 12Cidade, 오후 3시)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Liña 2:15, 3:1, 10:9). 그러나 바리새인의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문제가 있는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 습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기도를 보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기도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1)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감사
11절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자기의 기도를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감사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비교하면 안됩니다. “다른 사람의 죄보다 내 죄가 없어서 감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교만입니다.
“서서 따로 기도”했다는 것은 바리새주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처음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침해에 반대하여 경건성을 유지하려는 생각에서 구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제는 습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배타적 독선주의로 탈바꿈 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은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는 자신들은 하나의 더러움도 없이 깨끗하다고 하는 교만입니다. Mateo 19:20에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하는 청년과 같습니다. 248개의 무엇을 하라는 적극적 계명과 365개의 ‘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이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극치의 교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은 죄가 있다고 하는 고발성 기도입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교만을 하나님께 드러낸 것입니다.

2) 행위의 감사
12절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의 두 번째 잘못은 금식을 자랑하고 십일조 드리는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금식이, 십일조 드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행위를 자랑하고 강조하므로 그들이 이러한 행위를 하나님께 자랑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것을 가지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 즉 자신의 목숨도 주셨습니다. 어제 TV에 보니까 어떤 의사 분이 공항에서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는 분을 보고는 응급조치로 가슴을 누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만 이분이 죽은 것입니다. 유가족들은 이 의사 분을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의사가 이 때 응급조치를 잘못해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려 보겠다고 노력한 것에 대한 칭찬은 고사하고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달려드는 사람들 앞에서 이분은 말을 잃었습니다. 바리새인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이와 같았습니다.

세리의 감사
바리새인들과 달리 세리들은 죄인이라는 의식 속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시피 했습니다.

1) 겸손의 감사
13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기껏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 이방인의 뜰이었을 겁니다. 그저 죄인이라는 생각 속에 하늘을 우러러본다는 것조차가 죄스러웠을 것입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기도하는 바리새인들하고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어느 백인 교회학교에 흑인 아이 하나가 다니고 있었습니다. 사실 흑인이 백인교회에 다니려면 따가운 눈총이나 여러 가지 서러움을 당하게 되지만 이 철없는 어린아이는 늘 좋은 마음으로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그에게 “너는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저는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마음으로 옵니다” 라고 정말 예쁜 대답을 했습니다.

2) 죄인의 감사
다만 가슴을 치며” 이 모습은 죄인으로서 통회 자복하는 기도입니다(23:48, 마11:19). “가슴을 치며”의 ‘치다’ 동사 (e[tupten:에튀프테)는 ‘주먹으로 치다, 심하게 때리다’로 미 완료형입니다. 계속해서 때리고 때리는 반복적인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저 죄인으로 자기 가슴을 칠 뿐입니다.

3) 불쌍히 여기옵소서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불쌍히 여기옵소서”는 ‘전정 하옵소서, 분노하지 마옵소서’의 뜻으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관대한 처벌을 바라는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몇 년 전에 천주교에서 “내 탓입니다”라는 구호를 만들고 이것을 차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구호를 차 뒤쪽에 붙여 뒷사람에게 보이게 했습니다. 내 탓이면 내가 보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보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보아야 합니다. 다른 교회 잘못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교회 자랑하지 맙시다. 다른 사람 잘못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나 자신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맙시다. 진짜 문제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잘못이 없다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저는 고집이 있어서 내가 잘못한 것 같지 않으면 도망가지 않고 서서 어머니가 때리는 매를 다 맞았습니다. 제 동생은 그저 손바닥이 발바닥이 되도록 빌던지 아니면 도망갑니다. 저는 빌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교만이요, 부모님을 아프게 한 잘못한 것인지 압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생각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찬송가 356장성자의 귀한 몸을 지은 사람은 로버트 로우어 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이 찬송을 지은 것은 남북 전쟁으로 초토화 된 때였다고 합니다.
그가 전쟁에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집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고 합니다.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절망과 슬픔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에서 그가 힘을 얻은 것이 바로 성자의 귀한 몸이라는 찬송입니다. 4절에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만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만 위하여 늘 살겠네.”

시간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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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윈스턴 처칠이 어느 날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를 방송하기 위해 BBC 방송국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가 택시를 잡아타고 “BBC 방송국으로 갑시다 !” 했더니 이게 웬 일입니까 ? 운전기사가 승차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까닭인즉슨 이제 한 시간 뒤에 위대한 정치가 처칠 경이 중요한 방송을 할 터인데 자기가 BBC 까지 가다보면 그 방송을 듣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처칠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1파운드를 내놓으면서 “그러지 말고 좀 갑시다” 하고 짐짓 애원 조로 부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 기사 아저씨, “에라 모르겠다” 하더니 중얼거립니다. “타세요! 처칠인지 개떡인지 내가 알게 뭐람. 돈이나 벌어야지”.
우리도 이와 같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날 도적같이 소리 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실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세요. 그 분을 생각하면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은혜 받고자 합니다.

감추어진 마지막 날

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제일 관심이 있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제1순위가 마지막 날일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오늘 본문 말씀으로 대신해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실망입니다. 모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노아 때의 이야기를 하셨을 뿐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해서 가르치고자 했던 것 역시 천국과 마지막 때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뽑은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 49개입니다. 이 모든 비유가 마지막 때가 있기 때문에 그 때를 위해서 준비하고 깨어있으라는 내용입니다.
(등불 비유(마5:15-16), 씨뿌리는 비유(마13:3-23,막4:3-20), 곡식과 가라지 비유(마13:24-30), 겨자씨 비유(마13:31-19), 누룩 비유(마13:44), 감추어진 보화 비유(마13:44), 잃은 양 비유(마18:12-14,눅 15:3-7), 밤에 찾아온 친구 비유(눅11:5-8), 주인을 기다리는 종 비유(눅12:35-40), 지혜 있는 청지기 비유(눅12:42-44), 열매 없는 무화과 비유(눅13:6-9), 잃은 돈의 비유(눅15:11:32), 탕자 비유(눅15:11-32),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13), 관원에게 구하는 과부의 비유(눅18:10-14), 포도원 일군 비유(마20:1-16), 예복이 없는 손님 비유(마23:11-14), 열 처녀 비유(마25:1-13))

이런 많은 비유들로서 종말에 대한 질문을 대신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역시 비유 속에 끼어서 나온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0장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해서 그리고 본문 뒷장 25장은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종말 일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 더 큰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그 날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인기를 끌 목적으로 종말일을 말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에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 1992년 10월 28일 휴거를 공수표로 날려버리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들이 또 나타났습니다. 1992년 당시 먼저부터 불었던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32명의 집단 타살 사건과 사회적으로 걸프전과 맞물려 종말론은 꺼질 줄 모르고 급기야는 갈 데까지 가고야 말았다. 당시 이러한 현상은 선교지에서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공산권의 대표적인 나라 소련이 무너지자 너도나도 선교하러 간다고 들어갈 때 다미선교회의 이장림씨 역시 이곳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바와 같이 휴거는 오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한 불똥은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교회 인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주며 한국인 선교사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만큼 선교하는데 타격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암적 종말론이 근래에 또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 세력이 미약하나 언제 바람이 휘몰아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국제적으로 9.11 태러와 이라크전쟁 등을 통해서 고조되어왔습니다.
국내에서는 ‘7기약 영원한복음’(발행처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소재)의 소책자를 전국교회에 배포하고 영문교회(서울시 서초구 신원동 소재), 영문기도원(경상북도 함안군 군복면 소재)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나가고 있습니다.
Vostede! 주님이 모른다고 하셨으면 더 이상 알려고 하면 안됩니다. 아이들 말로 ‘다칩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그렇게 못 믿으십니까? 그 날을 안들 우리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부작용이 더 크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 아닙니까? 어린 자녀에게 부모님이 안 가르쳐 주는 것은 다 필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일을 미리 고하고 준비하는 일을 하는데 이 천사들 역시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위에 아무도 모르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할 일은 다했다.

38절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할 일은 다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일상을 말한 것입니다. 정죄하려는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관심있는 일은 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구원받는 사람들이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몰랐습니다. 자기들의 생활에 바빴습니다. 구원을 위한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

39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본문에서 강조되는 말이 있습니다. “다 멸하기까지”(kataklusmo;”:카타클뤼스모스)É. ‘홍수가 범람하여 씻어 버리듯 파멸하기까지’입니다. ‘쓰나미’때 해변에 있다가 당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전혀 준비를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닥치는 큰 파도에 덮쳐 쓸려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그와 같은 광경을 말합니다. 이것은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고집스럽고 어리석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우체국에 편지 부칠 일이 있어서 갔는데, 한 아주머니가 전보문을 쓰지 못하고 울며 손을 떨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습니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예, 내가 손이 떨려서 쓸 수가 없습니다. 좀 대신 써 주세요.” “왜 그러십니까?” “내 딸이 나와 의견이 충돌된다고 해서 집을 나갔습니다. 1년 동안 종적을 알 수 없었는데 이제야 딸이 있는 곳의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전보를 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뭐라고 쓸까요?” “딱 한 마디만 써주세요. 그냥 집으로 돌아오라, 어머니.” 그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돌아 오라,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깨어 예비하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깨어 예비할 것을 당부하시기 위함입니다.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저희 부부가 제일 둔감한 것이 있는데 세월 가는 것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없다보니 가끔 다른 아이들 크는 것보고 “참 세월이 많이 흘렀네”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혹 시한부 종말론 자들 때문에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시간은 흐릅니다. 종말을 행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종말이 아니어도 개인적인 종말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저는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어떤 종말이든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종말을 맞이합니다.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어느 청년이 진정으로 사역하고 싶은 교회를 발견하여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내일 새벽 3시까지 교회로 나오게’하고 가버리시는 것입니다. 혹독하게 추운 날씨지만 이튿날 새벽 3시에 정확하게 교회에 도착했지만 교회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동이 터 오고 목사님은 아침이 지나 10시쁨 어슬렁어슬렁 사무실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유년부 학생에게나 어울릴 만한 문제를 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몇 권인가?"
“66권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여섯째 날 무엇을 하셨나?"
“네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이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입니다”
“자 끝났네 자네는 합격일세. 그럼 내일 다시 교회로 오게 당회에 추천하겠네”하시는 것입니다. 어리둥절했지만 전도사는 합격이라는 말에 기뻤습니다.
다음날 당회에서 목사님은
“이 청년을 우리교회 전도사로 추천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이 청년을 테스트해본 결과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나는 이 청년에게 극기 시험을 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추운 날씨에도 먼 거리에서 새벽에 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정확성과 약속에 대한 테스트도 합격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내가 일곱 시간이나 지나서 왔는데도 참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인내 시험에서도 합격입니다. 마지막으로 신학대학을 졸업한 사람에게 너무 기초적인 성경 상식을 물었는데 기분 나쁜 표정하나 짓지 않고 겸손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이 청년을 우리교회 전도사로 추천합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당회원들은 만장 일치로 전도사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5:15)

여행 계획을 짜라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As palabras de Xesús(17. 여행 계획을 짜라) / Texto : Mateo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함께 공부하셨던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항상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단정하게 하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한의사에 가까울 정도로 의료에 관심이 많으시고 늘 육식보다는 채식을 즐겨 드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에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봄에 동기모임을 모였을 때 건강하셨는데요.
베드로는 인간의 삶을 나그네로 비유했습니다(Peter 1:17, 2:11). 성경에만 그런 표현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생행로(人生行路)', ‘인생여로(人生旅路)’와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인생은 어디론가 가는 것이며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그네나 여행이라는 것은 어디론가 간다는 것입니다. 기태가 영국에 있는데 유럽을 돌다가 12월중으로 온답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를 다닐 것이냐고 했더니 아프리카 여행하면서 알아둔 친구도 있고 해서 여행계획을 짠 모양입니다. 누구나 여행을 다닐 때는 돌아올 것을 계산하고 여행계획을 짭니다.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것이 여행이라면 반드시 계획을 짜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여행계획을 어떻게 짤 것인지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철학자들과 성인이라고 말하는 지도자들, 그리고 많은 사상가들은 저마다 인생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제시해 왔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진리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죽어갔고 정확하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통계에 보니까 교회에 나오는 분들 중에서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이 많더라 구요. 이것은 자신이 어느 길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같은 겁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어느 길인지 알아야 합니다. Vostede! 산에 등산을 하는데 어디로 가서 어디로 내려올 것인지를 알고 가야지 그냥 막 올라갑니까? 그렇게 한번 가보세요. 얼마나 답답합니까? 가면서도 어디쯤 왔는지? 또 어떻게 갈 것인지를 모른다고 해 보세요. 가면서도 답답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벌기 위한 길은 잘 아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진정으로 살리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관심이 없는 겁니다.

길을 먼저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1) 악의 길이 있습니다(Proverbios 1:15, 16).
이 길은 굽은 길입니다(Proverbios 10:9).
어둠의 길입니다(Traballo 24:13).
죄의 길입니다( 2:6).
황폐케 되는 길입니다(Catro 59:7).
허무한 길입니다(Traballo 6:18).
사망의 길이 됩니다(Proverbios 14:12).

2) 의의 길이 있습니다(Cidade 23:3).
진리의 길입니다(Cidade 25:10).
평탄한 길입니다(Cidade 27:11).
정직한 길입니다(Proverbios 2:13).
생명의 길입니다(Proverbios 2:19).
평강의 길입니다(Proverbios 3:17).
구원의 길입니다(John 14:6).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막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경찰관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지는지 아세요? 소방관에게 집니다. 왜냐하면 물불을 안 가리니까 그렇습니다. 소방관도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 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요. 시각장애인은 남에게 돈을 빌려줘서 못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시각장인도 다른 사람은 다 이겨도 노인은 못 이깁니다. 노인한테 집니다. 왜냐하면 노인은 다 살았으니까.
우리가 성령 받을수록 막 살면 안됩니다. 성령 받았다고 물불 안 가리면 안됩니다. 진리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오직 경제의 논리만 있습니다. 이슬람 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논리만 있습니다. 오래 전에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선교사가 사러갔는데 유럽, 일본제품은 잘 나오는데 한국 것만 잘 안나오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그래도 한국사람이 한국상품 안 사주면 누가 사주나 하고 한국제품을 선택했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켜 보니까 잘 나오드레요. 그래서 다시 그 상점에 가보니까 점원들이 한국 것만 잘 안나오게 틀어놓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 것만 잘 나오게 하고 다른 것은 잘 안 나오게 하고 돌아왔답니다.

좁은 길로 가세요.

본문 14절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35:8에는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이 다른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예수께서 가라고 한 길로 가는 사람이 대로를 걷는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가는 사람이 대로를 가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들은 선교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고난이 있습니다. 지난번 양화진에 갔을 때 제일 가슴에 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교사 자녀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고국에 있었으면 죽지 않아도 되는데 부모님이 선교하러간다고 해서 따라온 아이들입니다. 양화진에 순수한 선교사의 무덤은 111기인데 이중에 36기가 선교사 자녀들입니다.
이렇게 살다간 선교사님들과 자녀들은 ‘대로로 간 것입니까? 좁은 길로 간 것입니까?’ 개인적인 삶의 고난을 생각하면 좁은 길로 간 것이며, 남이 안가는 좁은 길로 간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로 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은 대로로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좁은 길, 대로 모두 무슨 길입니까? ‘의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1676년 영국의 베드포드 감옥에 존 번연(John Bunyan)이라는 가난한 사색가가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영어로 쓰여진 가장 유명한 책 중의 하나인 천로역정(The Story of Pilgrim’s Progress)을 섰습니다. 이 책은 한 사나이가 ‘위험한 여행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여행길을 마치고 천국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오직 한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바울이 AD 65년경에 로마로 들어갔다가 이년이 안되어서 순교를 당합니다. 로마 황제 네로가 로마를 불바다로 만든 후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죽이지 못하고 칼로 목을 쳐서 죽였습니다. 지금도 그 현장이 로마에 남아 있습니다. 네로는 계속 방탕한 삶을 살다가 태후를 죽이고, 왕비를 죽이고, 스승인 세네카를 죽이고, 나중에는 방탕하여 14년만에 독약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바울은 대로로 간 사람임과 동시에 좁은 길로 간 사람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계획을 짜세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여행계획을 짤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을 동원해서 짤 수 있습니다. 돈으로 우리가 가는 길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이 참여하는 계획을 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선교대회 프로그램 짤 때 보니까 꼭 큰 교회목사님을 한 분모십니다. 이로 인한 폐단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렇게 짜지 않으면 경제적인 문제를 책임지는 사람이 없게됩니다. 그래서 꼭 한 분 정도는 예산을 책임질만한 분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여행계획을 짜면 누가 책임져 주십니까?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내 맘대로 짜고 내 맘대로 가면 주님은 관심이 없으십니다.

여행가서 제일 재미없는 것이 외로움입니다. 즐거우려고 갔는데 외로운 겁니다. 혼자가면 그렇습니다. 인간은 외로움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처음 창조 될 때 아담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못하니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남녀가 함께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사는 가장 큰 이유는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자매들은 남편보고 ‘오빠’라고 하더라구요.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니 오빠하고 어떻게 같이 삽니까?
시편 기자는 “나는 광야의 올빼미와 같고 메마른 땅의 부엉이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누어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마치 지붕 위의 외로운 새 한 마리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시102:6-7 의역)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그들 보호해 주십니다.
Cidade 121:7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아멘.

영국의 특급 열차가 빅토리아 여왕을 태우고 안개가 짙은 밤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달리고 있었습니다. 기관사는 시간 내에 무사히 목적지까지 모시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한참 달리고 있는데 강력한 헤드램프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곧 교량이 가까워 오는 지점이라 기관사는 급정거를 하고 차장과 열차 승무원들이 밖에 나가보았으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짓궂은 장난을 치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으나 이상한 예감이 들어 몇 십 미터를 더 나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만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량 한 가운데가 급류에 휩쓸려 나갔던 것입니다. 만약 그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다면 여왕을 비롯한 수백 명이 기차와 함께 강물에 빠져 몰살당하는 사고가 났을 것입니다.
그 후 교량이 복구되고 그 열차가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으나 그 이상한 현상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기관사가 기관차 헤드라이트 아래쪽을 살펴보다가 큰 나방 하나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날개가 라이트 유리에 붙어서 흐느적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기관수가 차에 올라가 헤드라이트를 켜보니 바로 그 날개가 깃발을 흔드는 사람으로 보였음을 알아냈습니다. 여왕에게 이 사실이 보고되자 여왕은,”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시는 방법이었소.라는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외로움을 극복할 뿐 아니라 그 분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됩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부터 노아 홍수이전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제일 오래 산 사람 므두셀라도 나옵니다. 그러나 하나같이 모두 다 ‘죽었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말이 8번나옵니다. 그러나 창 5:24절에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고 다시 옮겼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과 함께 여행하시고 하시고 주님 품으로 돌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