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과 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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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41. 아멘과 영생) / Texto : John 5: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한번 부자청년과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떠났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T 19:16-22). 또한 “힘든 요구를 해서 미안하다. 너를 놀라게 하여 떠나게 할 생각은 없었단다. 관계 회복을 위해 저녁이나 같이 먹자. 너는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니?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팔 생각이 없다면, 좋다!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겠니?”라고도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은 토론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부한 것이 잘못입니까? 성경에는 부해지려는 욕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부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그의 삶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우상, 즉 그의 소유물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가 영생을 소유하고 싶거든, 영생이란 새로운 주인을 모시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영생은 소유물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인격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본질상, 온전한 주인으로 행하실 수 없는 자리에는 거하지 않으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질은 이미 부자 청년에게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그의 가치관과 모든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주인, 신이었습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신이 되어버린 소유물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세상과 내세의 영원한 운명이 바뀌어지고 엄청난 변화와 축복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까짓 물질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을 차츰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mh;n ajmh;n levgw uJmi’n o{ti)의 ‘진실로’로 번역된 아멘 입니다. ‘아멘’은 아무나 한 것이 아닙니다. 아멘은 오직 예수님만이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언어로 말한다면 아멘은 예수님의 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아멘’이라는 단어가 두절에 걸쳐 4번이나 나옵니다. 성경에서 오늘 본문을 빼고는 이렇게 된 곳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제일 많은 도장을 찍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우리는 본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아멘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단순히 많이 나올 뿐만 아니라 문장 앞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실 때 뒤에다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앞에 붙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을 다 그리고 도장을 찍습니다. 글을 다 쓰고 난 후에 사인을 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다르십니다. 말씀을 하시기 전에 아멘을 먼저 하셨습니다. 아멘을 먼저 사용한 이 말씀의 권위는 다시 수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수정할 수 없도록 미리 도장을 찍어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대할 때는 이와 같이 해야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잃어보고 마음에 들면 아멘하고 마음에 안 들면 노멘하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서약함과 같이 미리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받은 편지 중의 ‘아멘 동무’라는 제목으로 북한에서 보내온 것이 있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한 외국기독교인들이 부활절 일요일에 사전 협의 없이 교회를 방문했다가 문이 닫혀있어 예배를 드리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이분은 교회 위장을 위해 동원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외국인의 교회 방문을 앞두고 동원된 사람들에게 교육시키기를, 무엇을 물어보면 교인은 ‘아멘’을 잘 하니 ‘아멘’이라고 대답하라고 교육시켰습니다. 방문한 외국인들은 물어보기를 “칠골교회 는 교단이 어딥니까?” 물었더니 “아멘 이요” 그래서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성도님의 직분은 무엇입니까?” “아멘 이요”라고 대답하여 외국인들은 가짜 교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동원된 사람들도 들통이 났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그 때부터 이 사람은 ‘아멘 동무’라고 자기들끼리 놀려주곤 했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얼마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은 어느 탄광에 갔다는 소리만 들렸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아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사용하는 것은 위장된 성도와 같이 위장된 도장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짜가 아닌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멘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멘을 잘해야 합니다. 아무 말에나 아멘을 하는 것은 주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과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또는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에만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중요한 아멘을 연이어 하십니까?
24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바로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T 19:16)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청년은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은 사람들의 인위적 노력이나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믿음에 대한 보상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lovgon mou ajkouvwn kai; pisteuvwn)이라고 하셨습니다. ‘듣고’와 ‘믿고’를 한 어휘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원문에는 ‘듣고’와 ‘믿는’이라는 단어 사이에 카이(kai)이 만 들어있습니다. ‘카이’는 “그러므로, 마찬가지로”라는 접속사입니다. 본문의 뜻은 “믿음으로 듣는다”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원문에 영생을 얻고의 ‘얻다’(e[cw:에코)의 동사가 현재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할 때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한 것도 아니요, 그 동안 선하게 살아온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씀을 하시려고 “아멘 아멘”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메시야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John 3:16) “내 말을 듣고”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함께 믿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영생을 얻는데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제도나 형식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만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 말씀이 변경하지 못하도록 주님은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영생입니다.
바울도 솔직히 이 부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3:10-11 말하기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 땅에서 축복만 받고 생명의 부활을 얻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헛것입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옮겼느니라’로 번역된 (metabevbhken:메타바이노)는 장소를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상태의 전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원문의 시제가 현재 완료형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는 순간에 우리의 상태는 변환된 것입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미 마쳐진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25절은 24절의 추가 설명입니다.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죽은 자들”은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내려지는 형벌입니다( 3:19, Hebreos 9:27). 두 번째로는 영적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교재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 2:1). 세 번째로 영원한 죽음, 요한은 이 죽음을 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2:11, 20:6). 영원한 지옥형벌을 의미합니다(T 25:46, Só 9:43-48). 본문의 “때가 오나니”로 보아 두 번째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Vostede! 생명은 지금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죽어 있으면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나야 합니다. 지금 살아있어야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이 930세를 살고 죽었다(5:5)고 했고, 에노스는 912세에 게난은 905세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950세에 죽었고(9:29),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고(25:7-8), 야곱은 147세에 애굽에서 죽었습니다.(49:33) 모세는 120세에 모압평지에 있는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경우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가를 개인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가 바울이 언제 죽었는가 마태, 마가, 누가가 언제 죽었는가 요한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부활과 영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John 11:25-26)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형제와 자매과 있었는데, 결혼을 하지 못한 형제와 자매는 선을 보게 된 형제와 자매는 워낙에 말수가 적어서 애인이 없었던 두 사람은 멀뚱멀뚱 앉아서 커피를 시켰습니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제 이름은 [] 입니다.”
“철이요…"
“네. 성은 ‘전’이구요. 전철이 제 이름입니다.”
남자는 사뭇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뒤집어지는 게 아닙니까. 남자는 민망한 듯 물었습니다.
“아니, 뭐가 그리 우스우시죠?"
그러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사실, 전 ‘이호선’ 이거든요~” 이 남녀는 이름 때문에 짝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멘과 영생’은 짝을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아멘으로 화답할 때 영생은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하면 영생이 있습니다.

남북전쟁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한 노인이 백악관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군대에서 도주해 탈주병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의 구명을 위해 링컨 대통령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보초병들은 백악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소년이 노인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나를 따라 오세요.” 소년은 곧장 백악관으로 달려갔습니다. 노인은 소년을 따라 허겁지겁 백악관으로 들어섰습니다. 노인을 붙잡는 보초병에게 소년이 말했습니다. “이 분은 우리 할아버지예요” 보초병들은 더 이상 노인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노인은 링컨 대통령을 만나 딱한 사정을 하소연했고 아들은 사형을 면했습니다. 길을 안내한 이 소년은 링컨 대통령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만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영생의 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백악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노인처럼 자신의 혼자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그 때가서 아는 척 하려고 하면 주님은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 문에 도달했을 때 주님이 뛰어나오시면서 나를 반기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아마 주님은 너무 기뻐서 신발도 신지 않으신 체로 뛰어나오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아버지와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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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40. 부활하신 주님의 명령) / Texto : John 20:19-23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병원에서 환자를 치료할 때, 의사는 자기의 온 정성과 마음과 실력을 다해서 환자를 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골치 아프고 손을 떼고 싶거나 돕고 싶지 않은 환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가 치료하는 의사보다 더 많이 아는 척하는, 잔소리 많은 환자라고 합니다. “내 병은 내가 압니다”라고 말하는 환자지요. 진찰 결과라든가, 처방이라든가, 약이라든가, 의사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없습니다. 다 의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다 압니다. 이런 환자는 ‘차라리 당신이 의사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대하기 싫다고 합니다.
두 번째 환자는 미안한 말씀 입니다마는 학교 교사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어린아이를 가르쳐 만사를 따져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그러면 이렇게 된다, 또는 공식에 의해서 모든 것을 따지는 그런 체질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이렇게 저렇게 치료를 하면, 이것 먹으면 낫느냐, 이렇게 하면 꼭 낫느냐, 왜 그러느냐,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합니다. 치료라는 것이 1+1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살고 죽고가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따지니까 의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 참 골치 아픈 환자입니다.
세 번째 환자는 조급한 마음을 가진 환자입니다. 예를 들어 약을 투여하고 나서 적어도 몇 일이 지나서야 효과가 납니다. 그런데 약을 한 봉지 먹고는 왜 안낫느냐, 아침에 치료받고는 저녁에 왜 안낫느냐, 그리고 왜 이렇게 아프냐고 한답니다. 그래서 보따리 싸가지고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 만나면 아주 골치 아프고 ‘빨리 다른 데로 가라’하고 싶답니다.
우리의 교육도,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할 줄을 모르고, 믿음이 없고, 만사를 조급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구제불능입니다. 의사가 이런 사람을 만나면 아주 골치 아파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이런 사람 만나면 골치 아파하실 것 같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많은 증거를 대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해도 믿음 없이는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20세기 영적거장으로 알려진 영국의 C.S. 루이스 목사에게 예수님이 정말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느냐고 교회마다 돌아다니며 목사님께 질문하며 다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루이스 목사는 퉁명스럽게 “성경을 보세요.”라는 말만 했습니다. 오늘 주앙교회에 오신 여러분!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마시고 믿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은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사실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부활할 것을 예수님께 직접 들은 제자들인데도 십자가 사건 이후 한곳에 모여서 문을 굳게 닫고 떨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을 후회하는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잡히면 나도 십자가에 달릴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사람이 두려움이 들면 생각이 마비되고 도피심이 생겨 방문을 닫고 숨게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아무리 능력이 많은 사람이라도 힘을 쓰지 못하고 무력해 집니다.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부활은 오직 예수님만이 한 것입니다.

불교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버섯나물을 먹고 복통이 나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어느 날 80세의 석가모니가 숲 속에 있는 춘다라는 대장장이 집에 갔는데 그가 준 버섯나물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켜 죽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두 그루 나무 사이에서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가죽끈이 끊어지고 수레바퀴가 무너지는 도다. 모든 인생들이 가는 길을 나도 이제 마침내 가는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유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어느 날 제자인 계로가 공자에게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듣고 계로는 다시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살아 생전의 일도 아직 잘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 그리고 공자는 죽었습니다. 당연히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철학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대해 정의를 내리길 “철학은 죽는 연습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의 문제에 통달한 것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웃집에서 닭 한 마리 꾼 것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가면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의 무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묘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평강을 주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며 부활의 믿음을 심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평강을 얻기 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어디를 가나 참 평강과 안식이 없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와 관계를 끊는다고 마음에 평강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세상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인간에게 제일 두려운 것은 역시 죽음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2:15절은 말씀하십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만이 두려움 문제를 해결 받고 참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믿는 자에게 이사하는 날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음은 지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복된 순간이 되며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사실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이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파스칼은 “인생은 우주의 영광이 되든지 우주의 쓰레기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은 우주의 영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은 변했습니다. 더 이상 두려워 떠는 제자들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제자들에게 이제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믿음과 신앙은 단순히 나 자신의 평안을 얻은 것으로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21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의 다른 성인들과 다른 것은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이 세상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배워서, 또는 깨달아서, 아니면 도를 닦아서 흔히 세상이 말하는 성인이 되신 분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 이셨습니다. 메시야 이셨던 것입니다(John 3:34, 5:36, 6:57, 8:42, 17:3).
예수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어 세상을 구원코자 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아 세상에 나아가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번도 이스라엘을 떠난 적이 없는 연약한 제자들이 어떻게 온 세상에 나가 선교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22절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예수님의 이 모습은 인간을 처음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생령을 불어넣으신 장면과 같습니다( 1:27-28).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마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적이 심한 세상에서도 능력 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문자 적으로만 받아들이는 학자들은 없습니다. 죄 사할 권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Só 2:6, 10). 그러나 우리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인도하지 않으면 그 죄는 그대로 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죄 사함을 얻게 하기 때문에 죄를 사해주는 역할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다. 이 죄 사함을 받을 때 우리는 이 땅에서만 아니라 영원한 세상에 부활의 육체를 다시 입고 살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초, , 고등학생들에게 모스크바에 있는 무신론 박물관을 견학시켰습니다. 한 안내인이 한 무리의 학생들에게 종교의 해악을 증명하도록 고안된 전시품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 인간이 동물로 진화했나를 설명하는 그림들, 끔찍한 종교 재판 장면 등을 구경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안내인이 오래된 십자가를 보여주었습니다. “학생들, 옛날엔 사람들이 무식했어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어요. 사람들은 그가 사람들을 죄에서 구해주려고 하늘로부터 왔다고 생각했어요.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그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믿었어요. 우리 조상들은 아주 무식했던 거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함 받고 예수가 부활했던 것처럼 자기들도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해서 영원히 아름다운 삶을 누리게 되리라고 가르쳤답니다.
열두 살 된 소녀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동무, 제가 잘못한 일들 때문에 늘 마음이 늘 괴로웠어요. 우리 어머니는 저 때문에 우시곤 했구요. 전 아버지를 속이고, 학교에선 부정 행위를 했어요. 전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다 벗어날 수 있을까 적정하고 있었어요. 전 죽는 게 무서워요. 전 장례식을 볼 때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관속에 눕게 되고 모든 게 다 끝장 날거야’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러나 전 살고 싶어요.소녀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우리 조상들의 어리석은 믿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똑똑해서 죄에 짓눌려 살고, 천국을 놓치는 것 보단 어리석더라도 죄를 용서받고 부활하는 게 더 좋아요. , 선생님 동무가 제게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질께요.”(-하나님 구두는 누가 닦아 주나요? / 리차드 범브람트)라고 말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부활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서 완전한 승리를 했다고 믿어지십니까? 그 승리가 믿는 우리의 것이라는 것도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정말 승리자처럼 생활합니까? 아니면 아직도 노예처럼 생활합니까?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세요.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서 지게를 져 보았습니다. 가녀린 어깨에 지게를 지고, 고사리 같은 손에 지겟작대기를 들고 콩나물 같은 두 다리를 발발 떨면서 산길과 논둑을 걸어 다녔습니다. 힘들고 더워서 나무그늘 밑에 지게를 내려놓고 시원한 바람을 쐬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시원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수고와 짐은 지게의 짐과 달라서 쉽게 내려놓을 수도 없고 누가 대신 져줄 수도 없습니다. 모두 자신의 짐이 힘겨워 남의 짐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그 어떤 성인군자도 다른 인생의 짐을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주신 평안과 부활의 승리는 거져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를 대신해서 져 주신 십자가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도 죽음에서 승리했습니다. 정복자처럼 행동하십시오. 승리자처럼 행동하십시오. 제발 패배자처럼 죽을 인상쓰지 말고, 승리자처럼 당당하게 생활하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에게 돈으로, 지식으로, 건강으로, 자식의 성공으로, 무엇으로 도전해오더라도 웃고 넘기십시오. 우리는 그런 것과 싸울 시기는 지났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스파링 상대도 안됩니다.
올림픽 금메달 딴 사람은 동네 경기에는 참여하지 않습니다. 작은 경기에서 1등 2등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습다는 얘기죠. 우리는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예수님의 군사들입니다. 이 땅에서 돈 몇 푼 더 벌고 덜 벌고 그런 것에 얽매일 것 없습니다. 공부 좀 잘하고 못하는 것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물 좀 잘났고 못났고 그런 것에서 신경 접으세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의 명령 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를 받고 떠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에 우리가 기웃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나의 일이요, 나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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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39. 십자가의 사랑) / Texto : Marca 15:22-37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24) 자가에 못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25 때가 제 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 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28)없음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하고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33 제 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이들이 듣고 가로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36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고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미국 프로풋볼 슈퍼스타 한국계 미국인 하인스 워드의 방한으로 “혼혈인”에 대해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나라가 작아서 인지, 아니면 언론의 힘 덕분인지, 그도 아니면 민족성 때문인지 늘 우리 나라는 온 민족이 관심을 가지는 화두가 있습니다. 아마 또 그런 것을 만들어 내야 사는 재미를 느끼는 민족성이 있나 봅니다. 하인스 워드는 어머니와 조용한 한국의 정취를 느끼고 싶은가 본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니니까 곤란한가 봅니다. 우리는 너무 성공신화주의입니다. 하인스 워드로 인해 혼혈인에 대한 편견과 법적 제도를 개선해 보려는 것은 좋으나 하인스 워드가 없었으면 언제까지 사람 차별할 겁니까? 혼혈인 만 문제입니까? 아파트 담장 하나 놓고도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윌리엄 보더스는 ‘Handyman of the Lord(주님의 종)’이라는 책에서 가난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간 한 흑인 남자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는 남부에 있는 한 저택에 벨을 눌렀습니다. 그는 “뒷문 쪽으로 와 보라”는 말을 듣고 먹을 것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저택의 주인 남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선 식사 기도부터 하시오. 자 나를 따라 말해 보시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굶주린 흑인이 따라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집주인이 말합니다. “틀렸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러나 흑인은 완강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지친 나머지 주인이 물었습니다. ”어째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는데 당신은 계속해서 ‘당신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게요?“ 흑인 남자가 대답하기를 ”내가 만일 ‘우리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당신과 나는 형제가 되는 셈이지요. 그런데 빵 한 조각을 주겠다고 형제를 뒷문으로 오라고 하는 사람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와 동일한 분일 리가 없으니까요.“ 우리는 한 하나님, 한 분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가능해 진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그것을 대하는 심적 거리의 원근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십자가란 객관적인 이해에 의해서 보다도 체험적인 경험에 의해서 체득될 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멀리서 볼 때 십자가란 결코 흠모할 만한 것도 사랑할 만한 것도 못됩니다. 오히려 흉하고 부끄럽고 멸시와 조롱의 대상밖에 되지를 못합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사형하는 형틀이기에 아무도 그것을 정면으로 쳐다보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도 그런 흉측스런 죽음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찌그러진 초막집도 오래 살면 정이 들어 그곳을 떠날 때는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지만 그 훌륭한 양옥집도 형무소만은 두 번 쳐다보기 싫다는 것이 형무소생활을 마치고 나오는 분들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형무소 안의 사형장이나 형틀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도 현대의 사형은 그다지 잔인하지는 않습니다. 전기 의자나, 총살이나 교수형이라 할지라도 형장까지 끌려 갈 동안에만 심적 고통이 크지 막상 죽을 때의 육체적 고통은 순간적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산 사람을 못 박아서 세워놓고 몇 시간 동안 또는 며칠을 고통 가운데서 죽어가게 하는 참으로 잔인하고 참혹하기 짝이 없는 형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이런 흉악한 십자가를 좋아하고 정면으로 바라보려 하겠습니까?
십자가형은 도저히 살려 둘 수 없는 흉악범이나 반역자들만을 처형하는 극형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달리는 사람은 세상에 그 얼굴을 내놓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사람은 자기 자신 뿐 아니라 그의 가문을 더럽히는 사람이요 그의 자녀들까지도 감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부끄러운 대상이었습니다. 만일 자기 아버지나 또는 가까운 친척이 그 형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가장 큰 수치요 모욕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형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멀리서 그 사형수를 보고 멸시하면서 욕설을 퍼붙는 것이 상례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몹쓸 인간의 하나이기에 그렇게 모욕당하는 것이 마땅하며 멸시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를 모욕해서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했으며 제사장과 서기관들도 희롱하기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강도들도 예수를 향해 비웃어 말하기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면서 모욕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가까이 갈수록 영상이 달라집니다. 예수라고 하는 특정한 분이 거기에서 처형된 후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를 띠고 우리 앞에 다가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싹 그 밑에 가서 쳐다보면 그 십자가는 그렇게 보기 흉하고 부끄럽고 멸시와 조롱의 십자가가 아니라 대속의 십자가요, 사죄의 십자가요, 사랑과 화해의 십자가입니다.
못 박힌 손과 발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찌른 옆구리에서는 물과 피가 쏟아질 때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부르짖는 예수의 음성이 들립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의 극형은 자기의 죄 값을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기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지금 이처럼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절규하는 이 분은 누구이기에 하나님이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 분이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극형을 받기에 합당한 살인강도, 반역죄, 이적행위 등의 그 무서운 죄들을 언제 어디서 그가 지었단 말인가요? 그러한 죄를 지었다면 어찌 하나님을 향하여 그와 같은 당돌한 호소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의문은 필연적으로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는 어떤 분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그는 천상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고 그는 가난하고 짓눌리고 병든 마을 사람들을 돌보신 분, 그에게는 아무런 죄도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분이 살려 둘 수 없는 무서운 죄인이 되어 십자가의 극형을 받아야 했습니까?” 다시 질문은 계속됩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자로 간주되어졌습니다. 그의 형벌은 그의 죄 값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것이었습니다. 아무나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특수한 저주와 고통을 예수께 내리신 것입니다( 3:13). 그래서 그는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바 되어 그 고통스런 극형을 받아야만 했고 그 고통과 저주를 받아야 했습니까? 그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우리의 양심은 꿈틀거립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죄인은 바로 나 자신이라”고 양심은 나를 향해 외칩니다. 멀리서 바라보며 그 십자가가 흉하고 부끄럽고 멸시할 만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너무도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도 자신에 대하여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의 십자가 밑에 바싹 다가서서 쳐다보는 십자가 위의 예수는 내 죄의 심판을 대신 받고 저주와 고통을 그가 담당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 신실하고 예민한 양심은 부르짖습니다. “주여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무죄하신 예수가 내 대신 극형을 당하시고 심판을 받은 줄 알면서도 모른 체 하고 슬그머니 그 밑에서 빠져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매여 달려 죄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우리는 냉담했던 내 심령이 갈기갈기 찢기며 주와 함께 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히 “제가 죽어야 할 죄인입니다”라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이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용서의 은총을 경험한 바울은 로마서 8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범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의 대속적 죽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는 풀리고 무서운 죄가 용서를 받을 때 비로소 우리는 얼굴을 쳐들어 하나님의 자비하신 얼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단절의 벽이 무너지고 우리가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런 신분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두려움과 고통은 사라지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새로운 삶의 환희와 용기가 내 마음속에 타오릅니다. 입술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격의 찬송이 끝일 줄을 모르고 눈에서는 미워하고 저주하던 원수들마저 나의 사랑하는 형제로 보여지는 화해의 즐거운 눈물이 흐르게 되며 나의 손과 발은 가난하고 억울하며 고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수고의 봉사를 아끼지 않으려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구속된 성도들을 자기 도취의 자리에 남겨 두시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자기 폐쇄적, 자기 목적적 이용물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 명령에 누구도 항거할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사죄의 은총만 입고 도망해 갈 천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상 위에서 사죄를 받고 죽은 강도도 그 동료에게 예수를 증거하는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십자가를 몸소 지고 나서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 때 가장 가까이 우리 몸에 밀착됩니다. 나와 십자가와의 거리는 완전히 없어집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란 결코 안일한 일이 아닙니다.
내가 전에 멀리서 바라보며 모독하던 그 멸시를 나 자신이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이제 두렵지를 않습니다. 조그만 고통에 못 견디어 십자가를 벗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큰 감격이 나의 전체를 사로잡습니다. 이 때 십자가는 헌신과 승리와 영광의 십자가로 변합니다. 이미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쳐다보고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붙들며 예수와 함께 죄를 못박아 버린 후 과거의 자기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 사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2:20). 따라서 사죄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로마서 14장 7절 이하의 말씀처럼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높임을 받게 하려는 그것입니다.” 이제 나는 간 곳이 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우리를 어떤 박해나 어떤 시련도 넘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해서 무려 250년간이나 끊임없이 박해의 바람은 불었으나 십자가는 넘어지지 않았으며 도리어 십자가가 로마제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말았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나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총구를 들이대고 칼날을 번쩍이었으나 십자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패망의 웅덩이를 판 것은 저들 자신이었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십자가를 향한 바람은 불어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말은 “십자가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에 있어서 이기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삶이나 천사나 주관자들이나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의 수욕과 고통은 곧 승리를 통하여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그 모든 싸움이 그치고 하나님 나라에의 부름을 입는 날 우리는 주 예수와 함께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지고 매맞음과 옥에 갇힘과 굶주림과 헐벗음의 고난을 당했으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고 있으나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시적인 가벼운 환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큰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오기 때문입니다”(고후 4:16-17)
Ah! 이 얼마나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사람의 영광스런 소망입니까? Amado! 우리 중에 아직도 멀리서 십자가를 바라보고만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 대속의 십자가 밑으로 바싹 다가가서 사죄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몸소 지고서 이 세상 삶 속으로 뛰어들어 보십시오. 분명히 승리와 영광은 내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을 쓴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 때에 국가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영하 50도나 되는 추운 겨울날, 그는 사형 받기 위하여 기둥에 묶여 있었습니다. 사형집행 시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시계를 쳐다보니 사형집행까지는 정확히 5분이 남았습니다. 이 천금같은 5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그는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5분이라는 시간 가운데 2분은 자신을 찾아준 귀중한 친구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데에 쓰고, 2분은 자신이 살아온 28년 동안의 생을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쓰고, 마지막 남은 1분은 이 아름다운 세상, 이 대자연을 휘둘러보는 데에 쓰기로 합니다. 계획한대로 2분 동안 친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3분이 남았습니다. 이제 그는 지나온 생을 회고하려고 합니다. 그때 갑자기 그는 ‘나는 3분 후에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순간적으로 돌이켜보는 28년의 생이 모두 후회스럽고 뉘우쳐지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혼미해지고 아찔해집니다. 설상가상으로 형리가 총에 탄환을 장착하는 소리가 철커덕하고 들려옵니다. 불현듯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려오면서 온몸이 가눌 수 없게 떨립니다. 바로 그 순간, 난데없이 떠들썩한 소리가 나더니 한 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면서 형장으로 달려 들어왔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총살형 대신 시베리아 유형을 보내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시베리아로 가 유형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는 늘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5분간을 생각함으로 시간을 금쪽 같이 아끼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경험으로 훌륭한 작품도 많이 남길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빼째르부르그에 갔을 때에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무덤을 찾아보고 그 앞에서 시간의 소중함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았었습니다.
 

Non deixe de Xerusalé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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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38. Non deixe de Xerusalén,) / Texto : Actos 1:4-5

"Catro Apóstolos, nos ordenou, dicindo, como moyisa Non deixe Xerusalén, deuleunba me que o seu pai prometera que esperar 5 Xoán bautizou con auga, pero algún día vós seredes bautizados co Espírito Santo vos Within "

19248 º ano os Xogos Olímpicos foron realizados en París. Participou nos 100m olímpicos no Reino Unido era unha perspectiva mozo chamado Eric Lee de. 당시에는 에릭이 뛰면 금메달을 딸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뛰는 선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경기 일정이 잡힌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바로 주일날입니다. 에릭은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청년이었습니다. Entregou o xogo para saír. Cando o pobo británico foron animado que. Gran Bretaña foi acusado de traizoar. Semanas pasan e ollar en torno a un salto de 400m na ​​anget Vostedes ofrecen é totalmente. 400m porque os xogos son realizadas unha vez por semana para o día era, intentando saltar. El corre 100m a 100m do inicio, como cada un dos saltos líder. A xente está enganados pensando que o xogador bate a carreira de 100m que non é?. E "O que vos digo mentira jeoreoda" ten un son. Con todo, na medida en que a velocidade récord mundial salto de osos de ouro 400m vai sewoomyeo. Prema o botón "medalla de ouro no 100m 400m o xogador escolleu un negocio difícil de facer o ttwieotnya?"El estaba. Entón el respondeu:. "200m do bate no meu propio, 200m o poder de Deus vai. "
Pensas da igrexa, ata certo punto? Na miña vida Ten unha gravidade específica dalgúns por cento?

Non deixe de Xerusalén,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소동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소동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마21:10). Sexa crucificado en Xerusalén, en Xesús como o seu grito de guerra aínda está tendendo o son non vai diminuír. Herodes e os principais sacerdotes para continuar, incluíndo o home Bari-year-old é Xesús e os seus discípulos. Do punto de vista destas persoas pode desactivar a coitelo xa. Eles mataron Xesús, Xesús, como un león en furia ... e vai sobre a investigación e castigar os implicados será o. Xesús veu como un irmán de lei sikkeul altamente eotdaga agora é o momento en silencio paira sobre a.
É a casa dos discípulos do Galileo. Tras a crucifixión, foron a casa para a Galilea. Crucifixión de Xesús sobre esta historia de Galilea e reunir de novo en Galilea, e atopou(T 28:10, 16, Só 16:7). João 21 capítulos ollar os discípulos, Simón Pedro, e ven cunha serie de. 베드로는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면서 갈릴리 바다로 갑니다. 이것은 이제 예수님 따라다녔던 꿈같은 과거는 잊어버리고 갈릴리에서 고기나 잡으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밤새도록 고기를 잡는데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 이 때의 심정은 복잡했을 것입니다. 왜 무슨 일을 해도 손에 안 잡힌다는 말 있지 않습니까? 지금 제자들이 그런 마음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말을 따라서 고기를 잡았는데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주라고 밝혔습니다. 베드로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헤엄을 쳐서 예수님께 갔습니다. Neste punto os discípulos de Xesús, e que queimar a carne é comida. Durante a noite no Mar de Galilea e canso de preparar café da mañá para os seus discípulos é réplica exacta do gasto. Os discípulos de novo decidiu seguir a Xesús resucitou.
Xesús e os seus discípulos volverá a Xerusalén. 이것은 상당한 위험부담이 있는 행동입니다. 안전하기는 갈릴리가 예루살렘보다는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루살렘에 다시 모였겠습니까?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령이 꼭 예루살렘에서 내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제자들의 고향인, 예수님의 주 무대였던 갈릴리가 더 나은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은 이곳에만 나온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이미 누가복음 24:47-49절에 기록했습니다.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에서 기다려야 하고, 이곳에서 성령을 주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Por que! 예루살렘인가?

예루살렘(@Ierosoluvma)의 ‘살렘’은 평화라는 말이며 ‘예루’는 기초를 말합니다. ‘살렘의 기초’, ‘평화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 북쪽에 모리아 산이 있는데 이곳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던 곳입니다( 22:2). 바로 이 자리를 다윗이 성전 터로 지정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고 제사를 드렸습니다(삼하 6:12, 대하 3:1, 시 132:13). 그리고 노래하기를 “여호와의 지파들이 …Cidadespan class ="tr_" id="tr_719" data-token="7JiI66Oo7IK066CY7Jy866GcIOyYrOudvCDqsIDripTrj4Tri6TigJ0," data-source="">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는도다”(시 122:4),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시 46:5) Foi chamado.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따르지 못할 때는 강한 책망을 받은 장소 또한 예루살렘입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단 불(아리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1 슬프다 아리엘이여 아리엘이여 다윗의 진 친 성읍이여 연부년 절기가 돌아오려니와 2 내가 필경 너 아리엘을 괴롭게 하리니 네가 슬퍼하고 애곡하며 내게 아리엘과 같이 되리라”(Catro 29:1-2)Ten alta.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보며 슬퍼하셨습니다. 때로는 제사에 드릴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성전 세를 내기 위해서 환전을 해주는 사람들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성전을 지키고 기도해야할 사명이 있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향해서 강도의 굴혈을 만들어 놓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성전건물을 가리키며 자랑하던 제자에게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T 24:2)Descubriu que.
이사야는 노래하기를 “1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입을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니라 2 너는 티끌을 떨어버릴지어다 예루살렘이여 일어나 보좌에 앉을지어다 사로잡힌 딸 시온이여 네 목의 줄을 스스로 풀지어다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사 52:1-3)고 했습니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이 국가적으로 바벨론 포로로 있기 때문에 조속한 귀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래는 계속될 수록(사 52:13절-53장) 예루살렘의 칭의의 대한 것으로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상징적으로 예견하고 있습니다(사 54:5).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 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사 54:3)고 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복음이 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소에서 성령을 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외적인 성전은 인정하지 않으셨지만 예루살렘에서 새 성전을 세우신 것입니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John 2:19-22)
예루살렘의 사정은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하신 장소를 버리고 떠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마 장소적으로 좋은 곳을 찾아 떠나다보면 계속해서 이동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렸던 바로 그 장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역사 했던 법궤를 모신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죄인들이 다시 더럽혀 놓은 이 장소를 하나님은 다시 청결케 해 주십니다.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로 이 장소에서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중국과 북한 소식에 밝은 한 분을 알고 있는데 이분이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한경직 목사님께서 초청해서 방문했는데 목사님께서는 꼭 한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하시면서 입을 여셨다고 합니다. “6․25때 북한에 두고 온 자매가 있는데 그 자매를 찾아주게. 이 자매는 모든 성도들이 새벽에 모여서 피난하기로 했는데 나오지 않았어! 자매는 다리를 절어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는데 피난대열에 끼면 자기 때문에 늦어질 것을 염려한 것 같아”라고 말하시면서 꼭 찾아 소식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20세 정도 이었으니까 지금 살아 계신다고 해도 70세가 넘으신 할머님이 되어 계신 분입니다. 그래도 간곡한 목사님의 부탁이니 찾아 나서기로 하셨다고 합니다.
부탁을 받은 분은 중국에서 사람을 시켜 알아보았습니다.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믿을만한 분이 연결되었습니다. 이분은 북한으로 들어가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이리 저리 알아본 끝에 당시 평양에서 교회를 잘 다녔다는 집사를 소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을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듣기로 하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는 북한인지라 밤에 길을 나서기로 했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그 집에 도착했을 때는 밤 2시경이었다고 합니다. 밤에 도착한 일행은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갑자기 낯선 손님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비처럼 찾아와 놀란 이분은 좀처럼 남한에서 부탁을 받고 왔다는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부탁을 자세히 소개하고 난 후 한참 만에야 이 집사님은 입을 열었습니다. 자신은 당시에 신의주 제1교회를 다녔고, 한경직 목사님이 시무 하시던 교회는 신의주 제2교회로 자신은 그 교회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감추어 두었던 교회의 일지와 주보 등을 장롱 깊은 곳에서 꺼내어 보여주었습니다. 만일 이것이 알려지는 날에는 죽음을 면치 못했던 것입니다.
한 가닥 희망처럼 보였는데 이제는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교인들이 6․25 이후에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의 교인들은 대부분 처형을 당하고 일부의 교인들은 감옥과 탄광으로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사님은 남한 교회가 우리를 위해 가만히 있지 않고 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있는 일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이분들은 부탁을 받아 온 것뿐이라고 하자 다음에 올 때는 반드시 그것을 알아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서울 강북이 복잡해져서 많은 교회들이 강남으로 자리를 옮길 때였습니다. 당회에서 주차문제와 복잡한 환경으로 강남으로 이전해야 되지 않느냐는 교회이전 문제가 나왔습니다. 이 때 한경직 목사님은 다른 것은 다 당회의 의견을 존중하고 따랐지만 교회 이전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고 못 박으셨습니다.
영락교회 본당 입구에 김응락 장로님의 순교비가 서 있습니다. 1․4후퇴 때 교회를 비우고 또 피난을 가야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회의를 하고 목사님은 북한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교인들을 설득하고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김 장로님은 이제는 다시 안 떠난다고 하시면서 고집을 부렸습니다. 이제 죽어도 이곳에서 죽겠다고 하시면서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남아 지키시다가 공산당의 총에 맞아 교회에서 순교하셨다. 그 순교비를 보면서 한경직 목사님은 평생을 설교하러 들어가신 것입니다. 교만해 질 수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영락교회 부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인천구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 권사님이 서울 중구까지 매주 나오시는 것이 불편해 보여 조심스럽게 말하기를 “이제 가까운 교회에 다니셔도 됩니다”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그 때부터 기분이 언짢으셨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다닌 교회, 평양부터 따라온 교회, 교회가 좀 멀다고, 나이가 들었다고 본 교회를 떠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성령을 기다리는 장소입니다. 또한 마지막 재림할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모인 장소입니다. 처음에 주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지금은 성령과 함께 교회를 입고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런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한다.”
교회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성령을 예루살렘에서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예루살렘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에서 성령 받고 복음을 전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믿음 더욱 굳세라 http://blog.naver.com/rotisa/80022623245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
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노라
언제나 주님만을 찬양하며 따라가리니
시험을 당할때도 함께 계심을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주님의 뜻 하신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주님의 뜻 안에서 내가 있음을 믿노라
사랑의 말씀들이 나를 더욱 새롭게 하니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둔 밤에도 주의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

주의 뜻 이루어질 때까지 믿음 더욱 굳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