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멘과 영생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As palabras de Xesús(41. 아멘과 영생) / Texto : John 5:24-25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한번 부자청년과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띠고 떠났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T 19:16-22). 또한 “힘든 요구를 해서 미안하다. 너를 놀라게 하여 떠나게 할 생각은 없었단다. 관계 회복을 위해 저녁이나 같이 먹자. 너는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니?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팔 생각이 없다면, 좋다! 얼마만큼 포기할 수 있겠니?”라고도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은 토론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부한 것이 잘못입니까? 성경에는 부해지려는 욕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부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리석은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그의 삶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우상, 즉 그의 소유물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네가 영생을 소유하고 싶거든, 영생이란 새로운 주인을 모시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영생은 소유물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 인격은 하나님 자신의 인격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본질상, 온전한 주인으로 행하실 수 없는 자리에는 거하지 않으신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질은 이미 부자 청년에게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고 그의 가치관과 모든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주인, 신이었습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사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현재의 신이 되어버린 소유물을 내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게 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 세상과 내세의 영원한 운명이 바뀌어지고 엄청난 변화와 축복을 받게될 것입니다. 그까짓 물질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을 차츰 아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Amh;n ajmh;n levgw uJmi’n o{ti)의 ‘진실로’로 번역된 아멘 입니다. ‘아멘’은 아무나 한 것이 아닙니다. 아멘은 오직 예수님만이 사용했던 단어입니다. 언어로 말한다면 아멘은 예수님의 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아멘’이라는 단어가 두절에 걸쳐 4번이나 나옵니다. 성경에서 오늘 본문을 빼고는 이렇게 된 곳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제일 많은 도장을 찍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우리는 본문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인식해야 합니다.
또한 아멘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단순히 많이 나올 뿐만 아니라 문장 앞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아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실 때 뒤에다 사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모두가 앞에 붙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림을 다 그리고 도장을 찍습니다. 글을 다 쓰고 난 후에 사인을 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다르십니다. 말씀을 하시기 전에 아멘을 먼저 하셨습니다. 아멘을 먼저 사용한 이 말씀의 권위는 다시 수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수정할 수 없도록 미리 도장을 찍어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대할 때는 이와 같이 해야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잃어보고 마음에 들면 아멘하고 마음에 안 들면 노멘하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서약함과 같이 미리 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받은 편지 중의 ‘아멘 동무’라는 제목으로 북한에서 보내온 것이 있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한 외국기독교인들이 부활절 일요일에 사전 협의 없이 교회를 방문했다가 문이 닫혀있어 예배를 드리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이분은 교회 위장을 위해 동원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외국인의 교회 방문을 앞두고 동원된 사람들에게 교육시키기를, 무엇을 물어보면 교인은 ‘아멘’을 잘 하니 ‘아멘’이라고 대답하라고 교육시켰습니다. 방문한 외국인들은 물어보기를 “칠골교회 는 교단이 어딥니까?” 물었더니 “아멘 이요” 그래서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럼 성도님의 직분은 무엇입니까?” “아멘 이요”라고 대답하여 외국인들은 가짜 교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동원된 사람들도 들통이 났다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그 때부터 이 사람은 ‘아멘 동무’라고 자기들끼리 놀려주곤 했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얼마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리는 소문은 어느 탄광에 갔다는 소리만 들렸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아멘의 뜻을 전혀 모르고 사용하는 것은 위장된 성도와 같이 위장된 도장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짜가 아닌 가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 효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멘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멘을 잘해야 합니다. 아무 말에나 아멘을 하는 것은 주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아멘은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과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또는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에만 아멘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중요한 아멘을 연이어 하십니까?
24절 “…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절 “…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 바로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T 19:16)라고 질문했습니다. 이 청년은 무슨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은 사람들의 인위적 노력이나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믿음에 대한 보상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lovgon mou ajkouvwn kai; pisteuvwn)이라고 하셨습니다. ‘듣고’와 ‘믿고’를 한 어휘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원문에는 ‘듣고’와 ‘믿는’이라는 단어 사이에 카이(kai)이 만 들어있습니다. ‘카이’는 “그러므로, 마찬가지로”라는 접속사입니다. 본문의 뜻은 “믿음으로 듣는다”라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원문에 영생을 얻고의 ‘얻다’(e[cw:에코)의 동사가 현재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할 때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우리가 무슨 노력을 한 것도 아니요, 그 동안 선하게 살아온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됩니다. 이 말씀을 하시려고 “아멘 아멘”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메시야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John 3:16) “내 말을 듣고”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함께 믿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영생을 얻는데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날의 교회의 제도나 형식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만 믿으면 됩니다. 그러면 영생이 주어집니다. 이 말씀이 변경하지 못하도록 주님은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영생입니다.
바울도 솔직히 이 부분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빌립보서 3:10-11 말하기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 땅에서 축복만 받고 생명의 부활을 얻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헛것입니다.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옮겼느니라’로 번역된 (metabevbhken:메타바이노)는 장소를 옮기는 것뿐만 아니라 상태의 전환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원문의 시제가 현재 완료형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를 믿는 순간에 우리의 상태는 변환된 것입니다. 사망의 자리에서 영생의 자리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미 마쳐진 것을 말합니다.
본문의
25절은 24절의 추가 설명입니다.
25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자는 살아나리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죽은 자들”은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육체적 죽음입니다.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내려지는 형벌입니다(창 3:19, Hebreos 9:27). 두 번째로는 영적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교재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엡 2:1). 세 번째로 영원한 죽음, 요한은 이 죽음을 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했습니다(계 2:11, 20:6). 영원한 지옥형벌을 의미합니다(T 25:46, Só 9:43-48). 본문의 “때가 오나니”로 보아 두 번째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Vostede! 생명은 지금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죽어 있으면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나야 합니다. 지금 살아있어야 영원한 천국으로 옮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은 “진실로 진실로”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이 930세를 살고 죽었다(5:5)고 했고, 에노스는 912세에 게난은 905세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950세에 죽었고(9:29),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었고(25:7-8), 야곱은 147세에 애굽에서 죽었습니다.(49:33) 모세는 120세에 모압평지에 있는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경우 언제 태어났고 언제 죽었는가를 개인별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은 전혀 다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가 바울이 언제 죽었는가 마태, 마가, 누가가 언제 죽었는가 요한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부활과 영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고(John 11:25-26)말씀하셨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형제와 자매과 있었는데, 결혼을 하지 못한 형제와 자매는 선을 보게 된 형제와 자매는 워낙에 말수가 적어서 애인이 없었던 두 사람은 멀뚱멀뚱 앉아서 커피를 시켰습니다.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제 이름은 [철] 입니다.”
“철이요…"
“네. 성은 ‘전’이구요. 전철이 제 이름입니다.”
남자는 사뭇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뒤집어지는 게 아닙니까. 남자는 민망한 듯 물었습니다.
“아니, 뭐가 그리 우스우시죠?"
그러자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사실, 전 ‘이호선’ 이거든요~” 이 남녀는 이름 때문에 짝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아멘과 영생’은 짝을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아멘으로 화답할 때 영생은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하면 영생이 있습니다.
남북전쟁 때 있었던 일입니다. 한 노인이 백악관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군대에서 도주해 탈주병으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의 구명을 위해 링컨 대통령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보초병들은 백악관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소년이 노인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나를 따라 오세요.” 소년은 곧장 백악관으로 달려갔습니다. 노인은 소년을 따라 허겁지겁 백악관으로 들어섰습니다. 노인을 붙잡는 보초병에게 소년이 말했습니다. “이 분은 우리 할아버지예요” 보초병들은 더 이상 노인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노인은 링컨 대통령을 만나 딱한 사정을 하소연했고 아들은 사형을 면했습니다. 길을 안내한 이 소년은 링컨 대통령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만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 영생의 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백악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노인처럼 자신의 혼자 힘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그 때가서 아는 척 하려고 하면 주님은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 문에 도달했을 때 주님이 뛰어나오시면서 나를 반기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아마 주님은 너무 기뻐서 신발도 신지 않으신 체로 뛰어나오실 것입니다.
이 은혜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아버지와 그를 믿는 우리들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