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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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50. 6.25를 기억하라) / Texto : Marca 8:15-18

“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16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오늘은 6월 25일입니다. 56년 전인 1950년 6월 25일 새벽3시 바로 오늘 주일날 새벽에 야음을 틈타 3.8선을 넘어 이북의 공산당이 소련제 탱크 500여대와 항공기 200대 보병 20만 명으로 전면 남침을 하였습니다. 남쪽에서는 전혀 전쟁을 막을 만한 무기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무참히 당했습니다. 소총으로 탱크를 막아야 했습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수류탄을 몸에 묶고 돌진하는 탱크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56년 전 이 민족이 겪어야 했던 놀람과 쓰라린 아픔을 생각하면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안됩니다. 이런 민족적 아픔을 생각지도 않고 오늘날 소위 대학 교수라는 어떤 분이 누가 침략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막심하였습니다.
대략 300만명이 살상되었고 그 중에 전투원의 전사가 21만명, 외국군 전사자가 22만명, 인민재판 등으로 인하여 학살당한 양민은 13만명, 치납 8만5천명, 행방불명 30만명, 남편 잃은 미망인이 29만명, 고아 4만명, 교역자(목사)가 535명이 학살되고, 교회가 2,122개소가 파괴되었습니다. Vostede! 교회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피와 살과 같은 교회입니다.
실로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전쟁이었습니다. 6.25 56돌을 맞아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오늘 성경 본문 말씀과 함께 우리 민족의 수난을 더듬어 생각해 보는 가운데 이와 같은 민족적 수난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6.25 전쟁 당시 충남에서 강경 침례교회를 담임하셨던 이종덕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조용하던 강경 지방에 어느 날 공산당이 들이닥치자 마을 사람들은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음날부터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모두들 공산주의자가 된 듯이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던 사람들도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목사님은 후배인 김장배 목사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하며 두껍고 큰 종이를 가져왔습니다. “목사님, 이 두꺼운 종이로 무엇을 하려고 그러십니까?”
내 명함을 만들려고 하네.” “명함이요? 생전 명함 한 장 안 지니시다가 갑자기 명함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종덕 목사님은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후배 목사에게 큰 종이를 명함 크기로 자르도록 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그 명함종이에 ‘강경 침례교회 목사 이종덕’이라고 쓰도록 했습니다. 후배 김장배 목사는 시키는 대로 쓰면서 다시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이 명함을 어디에 쓰시려고 하십니까?”
이 명함을 가지고 다니면서 경찰이고 공산당원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나눠주려고 하네.
아이고 목사님, 다른 사람들은 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봉변이라도 당하시면 어떡하려구요.” “아니 이 사람이! 자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운가? 내가 복음을 전하는 목사라는 사실을 숨겨야 할 이유가 어디 있나?” 목사님은 그 명함을 뿌리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공산당의 총탄에 맞고 순교하셨습니다.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삼상 17:47). 이 민족의 죄악을 심판하고 경고하시기 위해서 6.25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첫째로, 이 민족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습니다. 평양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할만큼 교회가 부흥했던 도시였습니다. 1907년 1월 16일 한국 교회 최초의 성령강림이 있었던 곳이 평양장대현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일제 시대 때 한국 교회는 신사참배를 하고, 성도들에게 이를 권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교회의 종을 떼어서 일본의 전쟁무기를 만드는 데 헌납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주의 종들을 파면했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집어넣어서 온갖 고문을 당하여 죽게 했습니다.
둘째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상숭배의 죄도 모자라서 해방을 전후로 치열한 교권 싸움과 교회 분열이 한국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5만 1천여 교회, 10만 주의 종, 1,000만 신자를 가지게 되었다고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천년 동안 정교회 국가였던 러시아에서 제일 먼저 공산주의가 일어났고, 종교개혁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나타났습니다. 교황청이 있는 이태리에서 독재자 뭇솔리니가 나타났으며,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평양에서 공산주의가 일어나서 남한을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개인, Igrexa, 국가 모두에게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임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다시 전쟁의 징계를 받지 않도록 이 나라의 빛과 소금이 되며, 민족의 파숫군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 33:6-7)라고 경고하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므로,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야 합니다( 6:12). 그럴 때 이 민족이 변화되고, 이 땅에서 전쟁이 사라지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하나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본문 15절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예수께서는 비록 당신이 목숨을 내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그 시점이 되어서는 스스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사역하시는 동안에는 당신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들로부터 경계했습니다. 경계로 번역된 원문은 diastevllomai(디아스텔로마이)로 “따로 떼어놓다”입니다. 악한 것은 우리가 잠시 방심하는 사이에 들어옵니다. 사단은 그것을 노립니다. 전방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군인들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어느새 적군이 내 목을 베어갈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예수님 때의 경계의 대상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헤롯당은 예수님 탄생 때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무고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인 집안입니다. 바리새인은 어떻게든 예수님의 흠을 잡아죽이려고 하는 무리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 믿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에도 바리새인과 헤롯당원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공산주의가 그렇습니다. 미국은 모든 정치의 자유는 허락하되 공산당은 헌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산주의가 하나님을 대항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공산주의는 정교회를 핍박하고 가두었습니다. 지금도 복음을 자유롭게 전하지 못하게 방해를 합니다. 중국의 공산당은 더 핍박이 심합니다. 베트남의 공산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공산국가가 하나님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나라가 한나라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이며 인간 최악의 정치집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철이 없어도 공산주의를 옹호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곳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사람의 생명을 쉽게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목적으로 위해서 사람의 생명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사람의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공산주의 사상이 들어오는 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과 같은 것입니다.

6.25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안타까운 심정의 표현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본문 18절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왜 기억을 하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많은 절기를 지킬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절기의 목적은 모두가 하나입니다.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 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10:10)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때 하나님이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5:15) 이스라엘민족에게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그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을 광야생활 가운데서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6.25노래에도 “아! Ah!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이라고 노래합니다. 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자신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치스러운 역사나 불행했던 과거는 빨리 잊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과거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40년 광야 생활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6.25를 통해서 역사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이나 중국처럼 공산화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화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북한이 침공했을 때, 유엔 파병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소련 대표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로 오던 중 이유 없이 차의 시동이 꺼지는 바람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여 유엔군의 한국파병이 결정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를 사랑하시고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6.25는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회초리입니다. 성경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 7:14)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6․25를 맞이할 때마다 자녀들에게 지난 잘못을 이야기해 주고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가르쳐야 합니다.

다시 6.25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6.25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입니다. 이 지구상에 오직 우리민족만 분단된 채로 남아있습니다. 통일을 빨리 앞당기고 이 민족이 하나되는 길을 오늘 본문 17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떡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그분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나라로 일어서는 것은, 6.25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이 나라에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6.25전쟁 이후 육체적, 영적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이 민족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과 기독교 신앙 때문입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하는 긍정적인 신앙과,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적극적인 신앙이 심겨졌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눈에 아무 증거 안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풍성한 축복을 받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Peter 1:21).

이제 조금 살만해 졌다고 하나님을 버리면 망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배가 불러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과 같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T 5:9) 말씀처럼 사단은 다툼으로, 전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 힘을 쏟습니다. 성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예수님은 성령님은 우리에게 화평을 주러 오셨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 화평을 이룹니다.

최근 미국 기독교 언론보도에 의하면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성인의 비율은 선진국 중에서 미국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시간 대학이 최근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매주 드려지는 예배나 종교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미국인의 비율은 전체성인 미국인 인구의 44%인 것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이는 전 인구의 38%인 캐나다와, 27%인 영국 그리고 21%인 프랑스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며, 이밖에 독일은 14%, 러시아는 25%인 것을 각각 조사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민족이 축복을 받습니다. 미국은 세계제일의 선진국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제일 많은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제일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내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Catro 54:10)
 

진정한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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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49. 진정한 축제) / Texto : Lucas 5:27-32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지난 6월 13일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우리 나라와 토고경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군포시 산본에 사는데 저녁에 사람들이 어디론가 몰려가는 것입니다. 3단지 뒤에 운동장이 있는데 그곳에 대형스크린을 설치해서 함께 응원하는가 봅니다. 한번 가봤더니 사람들은 붉은 악마의 티를 입고 또 요즘은 머리에 불 들어오는 뿔 하나씩 달고 응원 열기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도 문제가 되지만 사람들이 너무나 공허하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것이니 우리도 뒤질세라 함께 응원하며 애국심을 키워 나가는 것이라면 뭐라 할 것은 없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축제을 벌여야 하는 것은 축구경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중풍병자 집에서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병자를 고치신 후의 일입니다. 중풍병자가 얼마나 사람이 많았는지 지붕을 뚫고 그의 친구들이 지붕을 뚫고 내렸습니다. 본문 27절 “그 후에 나가사”는 바로 이 중풍병자를 고치신 그 집에서 나가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 집에서 나가시기는 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예수님 주위에 가득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말씀과 축복을 받기 위해서 따라 다니는 사람, 자기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무리를 뚫고 들어오려는 사람들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흠과 티를 잡으려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대제사장의 명령을 받고 예수님을 늘 감시하며 책잡으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이런 무리를 뒤로하고 잡시 밖으로 나간 예수님께 보인 것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설명을 해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나를 좇으라” 이 한마디가 레위의 인생을 결정지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의 마음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에게도 예수님의 이 음성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당시 이 지역은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도급제도가 시행 중에 있었습니다. 이 지역의 세금은 로마가 세입을 배당한 ‘헤롯 안디바’에게 바쳐졌습니다. 레위가 걷은 세금은 인두세(人頭稅)라기 보다는 통행세나 일종의 관세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는 헬라와 로마까지 넓게 퍼져있었습니다. 저도 가끔 외국에 가는데 어느 나라를 가든지 입국심사대와 세관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짐이 많으면 늘 세관 통과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런 세관은 상인들에게는 늘 문제입니다. 이 당시에는 무슨 정확한 법적 근거에 의해서 세금을 받았기보다는 세관의 마음대로 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로마가 걷어 가는 세금이야말로 착취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반민족주의자요, 부정직한 집단으로 심한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탈무드(Talmud)는 세리를 강도들로 규정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인 이 레위인을 부름으로 자신에게 쏟아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책잡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은 반대 세력의 눈치를 살피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으로 취급당하는 이 레위를 향해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레위
예수님의 부름에 28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이제 더 이상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를 감쌌습니다.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기회는 일생 일대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입니다. 더 지체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부자를 한번 더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청년은 자신의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T 19:22).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누가 제일 부자였을 것 같습니까? 당시의 세리가 누렸을 사회적, 직업적 위치를 생각하면 레위만한 제자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레위의 조용한 이 선택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물론 자기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어부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다가도 유사시에는 다시 아무 어려움 없이 본업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부활하신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은 방황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먼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John 21:3) 했습니다. 이 때 베드로와 행동을 함께 한 제자들은 6-7명인데 분명히 여기서 마태는 빠졌을 것입니다. 그는 고기 잡는 일을 해 본적이 없고, 고기 잡을 생각도 없었을 것입니다.
레위가 세리직을 버렸다는 것은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번 세리직을 버린 사람은 다시 고용될 수 없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최후의 결단입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비유을 하시면서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T 13:46)Descubriu que. 레위는 이 진주를 산 것입니다.

예수를 위한 잔치(축제)
29절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같은 본문이 레위(마태) 자신이 쓴 마태복음 9:10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라고 나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상당히 축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잔치가 “큰 잔치”였다고 말합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지만 레위는 냉혹한 체념의 심정이 아니라 깃발을 휘날리며 자신의 생의 전환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버린 세관직업, 그리고 그곳에서 얻게되는 수입 등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레위의 잔치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신 예수님이 이 축제의 주인공이십니다.
둘째,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을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 선언을 한 것입니다. 결혼식 올리는 것이 불편하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잔치를 하고 사는 것하고 그냥 사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비록 이것이 형식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태는 이제 전혀 예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처럼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마태 역시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을 각오를 다진 것입니다.
셋째,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이 자리에는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는 세리들도 물론 있었습니다만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마태가 초청한 자신의 동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켜주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예수님이 세리 레위의 집에 간 이 행동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사건인지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압니다. 어느 날 베드로에게 환상이 보였습니다. 큰 보자기에 쌓인 것이 베드로 앞으로 내려왔습니다. 열어보았더니 그 안에는 짐승, 기는 곤충,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야 잡아 먹으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먹을 수는 없나이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일이 있은 후 베드로는 이방 군인이었던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 그 집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사도행전 10장).
베드로가 이런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을 보면 당시에 죄인의 집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레위가 마련한 이 초청에 기꺼이 응하셨습니다. 오늘도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들 속에 주님은 오십니다.

병든 자들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남이야 누구와 밥을 먹든 무슨 상관입니까? 사실 예수님이 자신들과 상관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아닙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자신들의 주로 받아들인다면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왜 비방해야 되는지요.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행동이라기 보다는 사단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질문은 예수께 하지 않고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할 때 레위 같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완전한 수용을 의미했습니다. 질문을 받은 것은 제자들이었으나 대답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대답하셨습니다. 31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오심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Rom.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하신 것처럼 이 땅의 의인이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병든 사람들입니다. 죄지은 육체가 병들어 죽게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 또한 병들었습니다. 이것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단지 두 가지 죄인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또 하나는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입니다. 둘 다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소설 “주홍 글씨”가 생각납니다. 여기 나오는 여인은 죄인의 표시로 가슴과 등에다가 빨간 글씨[A]자를 붙이고 다닙니다. [나는 죄인이오]라는 표시입니다. 이 여인은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죄를 짓게 한 남자는 법복을 입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 남자의 고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되어서의 일입니다. 길을 지나는데 앞쪽에서 나병 환자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복음도 전하면서 기도해주고 싶은데 왠지 더러운 생각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아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주앙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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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48. 주앙교회는) / Texto : T 17:1-8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작곡은 프랑스인이 하고, 연주는 독일인이 하고, 노래는 이탈리아인이 부르고, 감상은 영국인이 하고, 표는 유태인이 팔고, 돈은 미국인이 지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국민성을 음악에 비유하여 풍자한 말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독창력에 있어서는 탁월합니다. 모든 유행을 프랑스가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인의 국민성엔 실천력이 있어서 매사에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열성적으로 카루소식으로 노래를 부를 때, 신사의 나라 영국 사람들은 감상을 합니다. 이 때 유태인들은 상술에 뛰어나기 때문에 돈벌이를 하고, 부자나라 미국 사람들은 대체로 바가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은 어느 부류에 해당할까요? 우리 속담에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는걸 보면 공짜 초대권은 한국사람이 가지고 들어올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한국사람이, 공짜만 좋아하고 원조를 받던 나라가 변했습니다. 예수 믿고 완전히 변한 것입니다. 현재 전세계에 제일 많아 나가있는 사람은 중국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일 많은 국가로 나가있는 나라 사람은 대한민국입니다. 중국 사람은 돈이 되는 곳이면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은 선교할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습니다. 중국사람 세 사람 모이면 중국집이 생기고 한국사람 세 사람 모이면 교회가 세워진다는 말도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떠나지 않는 민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주앙교회도 이제 심기 시작했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이 있어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터 위에 세우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의 터 위에 새롭게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주앙교회는 주님만을 바라보는 교회입니다. 주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에서도 빛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형되신 예수님을 세 제자가 보았습니다. 나무나 황홀한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기서 그냥 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께서 원하시면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4Sección)Ten alta. 베드로가 “주께서 원하시면”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답을 하셔야 하는데 응답은 하늘에서 내려졌습니다. 성자 예수께서 하실 말씀을 대신해서 아버지 성부이신 하나님이 대답해 주셨습니다. 5절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희 말을 들으라”는 것은 모세, 엘리야 또 다른 사람이 있을 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모든 중심이 예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원문에는 kai; ijdou;(카이 이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있던 제자들은 떨었습니다.

9() 오후 200여명의 승객을 싣고 제주도를 떠나 김포에 착륙할 예정이던 아시아나 항공기 OZ 8942편이 비행 도중 낙뢰에 맞아 조종석 앞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기체 일부분이 심하게 파손되는 ‘아찔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고 비행기는 에어버스 321기종으로 경기 안양시 인근 1천피트(약 300m) 상공에서 낙뢰와 우박을 맞았습니다. 이 충격으로 조종석 앞부분(노즈 레이덤)이 떨어져 나가고 엔진 커버 부분에 구멍이 났으며 조종실 앞 창유리가 심하게 깨졌습니다.
조종사는 즉각 김포공항 관제탑에 비상 착륙을 요청했고 랜딩기어(항공기 바퀴) 이상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재 이륙을 시도하며 김포공항 상공을 1회 선회하고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승객들은 숨을 죽이고 떨었을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돌아오다가 김포공항에 착륙하던 비행기가 활주로를 잘못 찾았나 봅니다. 그래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때 잘못하면 그대로 땅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답니다. 그런데 무사히 하늘로 올라가고 다시 재 착륙을 시도해 무사히 내려앉았습니다. 그 때 승객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기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늘에서 나는 우뢰와 같은 하나님의 소리에 떨고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6절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7절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나서 눈을 떴습니다. 8절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눈을 뜨는 순간 그 앞에는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인다는 것은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늘 보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여러 사람이 보였을 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구약의 인물들과 함께 같은 선상에서 보고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외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아들로 보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것이 주앙교회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따라가기 위해서 주앙교회는 4가지의 표어 “① 말씀으로 은혜가 가득한 교회 ② 기도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 ③ 선교로 기쁨이 넘치는 교회 ④ 봉사로 사랑을 나누는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이 주앙교회가 추구하는 목표요 목적입니다.

말씀으로 은혜가 가득한 교회
한눈이 실명해서 가짜 눈을 시술 받아 다닌 영철이가 있었습니다. 요즘 가짜는 진짜와 거의 구분이 안될 정도로 보인답니다. 그리고 영철이는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인이 영철이 한 눈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왜 결혼하기 전에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졌습니다. 싸움이 커져서 사네 안 사네 하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영철이가 당신이 결혼하기 전에 내 한눈이 가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그런 적이 없다고 우깁니다. 영철이는 그 증거가 있다고 하면서 예전에 보냈던 연애편지를 꺼냈습니다. 편지에 여러 이야기가 써 있었지만 영철이가 읽은 대목은 이것입니다. “한눈에 반했어요” 그러니 당신이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큰일납니다.
교인들 중에는 “후딱신자”가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성경한번 안 보다가 책상이나 구석에 방치되어 먼지가 쌓여있는 성경을 꺼내어 입으로 “후…!”불고 손바닥으로 “딱!”쳐서 먼지를 털어 버리고 오는 분들을 “후딱신자”신자라고 합니다. 또한 교인은 창세기와 마태복음 부분만 새까만데 나머지 성경은 깨끗한 분들입니다. “작심삼일형”입니다. “후딱신자”보다는 조금 나은 편이지만 결심하고 계속하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마태복음 1장을 읽어나가다가 신경질이 납니다. 계속해서 “누구를 낳고, 낳고, 낳고”라는 구절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이 “쓸데없이 많이 나았구먼” 그럽니다. 그러나 조금만 인내하면서 더 읽어보면 “이것이 예수님의 족보이구나” 그리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그리고 여인도 들어갔구나 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이 족보에 들어갈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백은, 흑인, 황색인 할 것 없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누구나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당신이 계신 곳으로 인도하는 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
성경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도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으며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버리고 기도하는 사람은 선택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하셨으니”( 20:17) 모세는 출애굽 할 때 “모세가 바로를 떠나 나와서 여호와께 기도하니”(Prensa 8:30) 그리고 타락한 백성을 위해서 불뱀을 매달아 놓고 민수기 21:7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Deuteronomio 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를 가까이 하십니다. 한나의 기도로 사무엘이 태어납니다. 사무엘상 2:1절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 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기도로 나은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됩니다. 늘 하나님과 대화하듯 기도한 다윗은 새벽을 좋아했습니다. 시 5편 3절에서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례미야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Jer. 29:12)라고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T 6:9)
기도를 안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마치 물고기가 물을 버려 두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려고 합니다. 그 삶의 길은 기도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8절에 보면 어린양이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는데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귀중하게 보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들도 여기에 있기를 바랍니다.

주앙교회 표어 중에 “① 말씀으로 은혜가 가득한 교회 ② 기도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면 나머지 “③ 선교로 기쁨이 넘치는 교회 ④ 봉사로 사랑을 나누는 교회”는 저절로 됩니다. 말씀과 기도가 충만하면 그 다음에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선교하고 봉사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제대로 심겨지고 기도하게 되면 변화됩니다.
‘2006세계선교대회’가 열리는데 선교사님과 선교전략가들만이 모여서 하는 대회가 “선교전략회의(NCOWE IV)”에 다녀왔습니다. 여기서 어떤 분이 진짜 미전도 종족은 “한국에 있는 목회자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현재 한국교회가 선교에 15%밖에 참여하지 않는데서 나온 조크입니다. 왜 선교하지 안습니까? 성경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부탁 그것은 선교였습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 그것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증거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우리에게 참 빛이 없으며 길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시 73편에 보면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된다” 그랬습니다. 음녀가 이리저리 헤매면서 돈 한푼 얻기 위하여 그저 웃으며 옷을 갈아입고 많은 사람의 품안에 안기우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축복입니다. 우리 인간의 가장 귀한 길은 한길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아멘.

내 마음의 눈에 예수님만 보인다면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왜 교회에 모입니까? 어떤 분은 “집에서 예수 잘 믿으면 되지 왜 교회에 가느냐”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은 자신이 예수 믿고 천국은 가고 싶으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명령은 실천하지 않으려는 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인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며 선교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목사로 세워주신 목회자와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버려진 고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오늘날에는 목사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주님께 안전하게 인도할 책임이 있습니다. 주앙교회 성도여러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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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46.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Texto : Marca 9:14-29

“21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시고 변화된 모습이 보였을 때, 산 아래에서는 제자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아있는 제자들 앞에 벙어리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치려고 제자들은 그 동안 사용했던 여러 방법을 사용해 가며 고쳐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똑 같았습니다.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는 똑똑한 서기관들이 질문 공세를 퍼붓습니다. 난감해 하고 있을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 남아있던 백성들이 한 행동이 출애굽기 32장 나옵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아론이 주동자가 되어서 자신들을 위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듭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보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십계명을 던져 깨뜨렸습니다. 모세의 인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하고 한 행동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래도 구약의 이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병은 고치지 못했지만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려고 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포기한 사람입니다. 지금 공부를 못하지만 공부를 하려고 하는 학생은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아이의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개입하시게 된 것입니다.
Vostede! 처음부터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있으면 주님이 도와줄 기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되십시오.
본문 19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예수님께 말하기를 22절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그랬습니다. 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모든 것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열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늘 문을 열면 그곳에 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면 다 되는 것입니다. 그 열쇠가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고백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것을 알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고 너는 복이 있다고 하시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Descubriu que.
예수님은 재자들의 믿음이 없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에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Só 16:14) 여기서는 믿음이 없는 것과 완악한 것이 함께 나타납니다. 바꾸어 말하면 완악한 자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온유한 마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T 5:5)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T 11:29) 온유함은 믿음을 얻는 좋은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의심합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예수님을 확인했습니다(John 20:27). 믿음이 없다는 것, 마음이 완악한 증거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 안에 거하십시오.
영어에 인과 아웃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인은 모든 게임에서 사는 것이고 아웃은 죽은 것입니다. 원문에 영어에서 말하는 인과 같은 단어가 있습니다. (ejn)이라는 전치사 단어입니다. 이 뜻은 “안에.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나오는 모든 곳은 좋은 성구가 있습니다. 믿음과 연결된 단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몇 개의 성구만 찾아보겠습니다.
Rom.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Timothy 1: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모든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ejn), 안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만 생명이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만 소망도 사랑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간곡히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Sección), 이 아버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소리를 지르며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믿음을 달라고 간구 할 생각은 안하고 시험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아버지의 태도는 적극적이었습니다. “소리질러”(kravxa”:크라크사스)는 마치 반항의 고함처럼 크고도 계속적으로 소리를 지른 것을 말합니다. 후기의 사본 중에는 ‘눈물로’라는 말이 첨가된 것이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간절했습니다. 아마 이 아이의 문제로 가정이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이 아버지의 소원이라면 아들이 이 귀신들림에서 벗어나는 것일 겁니다.
이 때 적극적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까? 아니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입니까? 믿음을 간구한 것도 귀신들인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가 제일 이 아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Vostede! 부모님이 자식을 위해서 제일 간절한 사람입니다. 부모님 되시는 분들은 특히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자녀를 위해서 부르짖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아버지와 같이 주님께 간구하세요.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기도 외에는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려다 땀만 흘린 제자들은 조용할 때 예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28Sección)Descubriu que.
제자들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준 일이 있습니다. 지금 이 아이가 처음이 아닙니다. Só 3:14-15에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 여행으로 파송하시면서 이미 병 고칠 수 있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한마디로 잘 되던 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당황한 것입니다. 은사는 지속적으로 기도함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도 지킬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Jer. 33:3)Ten alta. 한국교회가 이렇게 부흥한 비결에 대해서 말할 때 새벽기도와 무릎꿇고 기도한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기도가 식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Vostede! 우리가 할 일 중에 제일 귀한 것 중의 하나가 기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리석은 사람, 약한 사람, 멸시받는 사람 등, ‘부정적 자질의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모세가 부름을 받았을 때는 80세의 늙은 목자였습니다. 다윗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양치는 어린 소년이었고, 요셉은 노예였으며, 다니엘은 포로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요한 인물들을 부르실 때는 부정적인 측면까지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결코 못할 일도 없습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성장시켜주는 기도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1738년 5월 24일, 갑자기 자신의 어린 시절에 화재의 불길로부터 구조되었던 경험을 회상하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급격히 세속화되어 가는 영국 교회에 ‘개혁’이라는 소명을 위해 주께서 자기를 살리신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산본지역 뿐만이 아니라 선교지의 한 나라들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다. 가슴이 불타오르는 믿음과 열정적인 기도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요일 5: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무디(D.L. Moody)는 “믿음은 최대의 것을 얻게 하며, 사랑은 최대의 역사를 이루게 하고, 겸손은 가장 많은 것을 보존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웁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공산주의는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서로 감시하고 고자질합니다. 이런 사회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마세요. 믿음을 가지세요.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잘 살 수 있습니다. 결코 우리의 시간은 헛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간은 가치가 있습니다. 보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상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나 자신 뿐만이 아니라 교회가 가정이 세워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다시 기도할 것은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겸손히 주님께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As palabras de Xesús(47. 예수님을 따라) / Texto : Mateo 4: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T 4:19, Só 1:17)

Vostede!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도 안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합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CIS선교사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러시아 노보시비리스크로 떠났습니다. 비행기가 직항이 없기 때문에 다른 도시를 경유해서 가야합니다.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하루를 먼저 블라디보스톡으로가서 기다렸다가 가야하는데 비행기 표를 구할 때 비행기 회사에서 다 알아서 먹여주고 호텔 잡아 준다는 겁니다. 미심쩍어서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만 믿고 가는데 느낌이 이상한 것을 인천 공항에서 집 붙이고 그 쪽 공항사정을 알 수 없어 질문을 했습니다. 짐을 찾을 때, 그리고 어떻게 갈아타는지 등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타고 승무원에게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비행기를 탔습니다. 걱정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있는데 어떤 분이 다가오시더니 “컴퓨터 선교회 이영제 목사님이시죠”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저는 노보시비리스크 김선종 선교사입니다.” 하시는 겁니다. 순간 모든 걱정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거기서 선교활동 하시다 들어오셨다 다시 가시는 이분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예수님만 따라가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1)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T 16:24, Só 8:34, Lucas 9:23)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어떻게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자기 자랑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1:30절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Rom. 4:2절에서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같은 본문이 누가복음에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Lucas 9:23) “날마다”가 더 있습니다. 십자가는 지고 싶을 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계없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했습니다.

3)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John 8:15) 영적인 분별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를 따라” 즉 외모로 판단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넘어트리려고 자기 제자들을 보냈습니다.“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T 22:16)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것을 바리새인도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만 외모로서 사람을 판단하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려고 들면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납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들이 하도 싸우니까 이런 말이 다 있습니다. 술집에서 사람들이 술 먹다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싸우고 있는데 주인이 하는 말이 “여기가 교회인줄 알아!”그랬다는 겁니다. 저는 치아가 좋지 않아 지난번 기둥을 세우고 해 넣을 때 이런 생각이 나는 겁니다.

4)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John 10:4)Foi chamado. Vostede! 만일 예수님의 음성으로 알고 갔는데 만일 그것이 사람의 음성이었다면 모든 것이 잘못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9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찌어다”
이번에 갔던 선교대회 장소는 노보시비리스크인데 그 시에서 한 1시간 정도 들어가면 ‘시비락’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서 선교대회를 했습니다. 말이 러시아를 갔다 왔지 그곳에 갇혀서 진짜 러시아를 다녀왔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아주 외딴 곳으로 주변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숲 속에는 벼룩 같은 벌래(시크락?)가 있는데 사람 몸에 붙으면 거머리처럼 살을 파고 들어간답니다. 실제로 이 벌레에 물린 선교사님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멋있다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도 한번 못 걸어 다녔습니다.

제가 선교대회에 참석하면 네 가지 정도의 유익이 있습니다.
① 선교사님들을 만나 교재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고생하면서 갔다해도 저는 별 것 아니었습니다. 모스크바, 빼째르부르그에서 만났던 분 그리고 이 노보시비리스크에 제가 두 번째 가는데 10년만에 만난 분, 그리고 기태 형제 먼저 신앙 생활하던 교회에서 보낸 선교사님이 이번 대회 총무를 맡아 일하고 있었고 이분도 우리 사무실을 다녀간 분입니다. 그리고 저희 집사람이 전돌이 성경여행을 주었는데 지금 얼마나 아이들이 열심히 보는지 고맙다고 전달해 달라는 분, 몽골에서, 우즈벡에서, 하바롭스크에서 오신 분들하고 교재를 나누고 이분들을 저를 그곳에 꼭 모시겠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교재가 있었습니다.
② 영적 충전을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만 하지 예배 드리는 자로 있기가 쉽지 않은데 예배를 드리며 함께 충전하며 지낸다는 것입니다.
③ 세계를 볼 수 있는 시야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④ 또 하나는 유명 강사님들을 한자리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 대회가 보통 대회입니까? 아무나 안 부릅니다. 고신의대 양리학 교수님이셨다가 한 달 전에 은퇴하신 강 교수님이 계십니다. 장로님이신 데 같은 방을 사용하면서 정말 많은 교재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과 대화 나눌 때 저를 “이 어르신이”그렇게 부르시는 겁니다. 장로님의 고백가운데 “지금도 이런 목사님이 계시네” 저에게 그러시는 겁니다. 제가 다른 이야기 안 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대로 예수님만 보고 따라가려고 설교도, 성경도 그렇게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Vostede!
성령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이유는 길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님께 오라고 인도하시는 영을 보내주신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T 4:19)고 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사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CIS선교사 대회에 오신 분 중에 미국 국제제자훈련원 사역을 하는 김홍장 장로님이 계십니다. 여기서 하는 사역이 ‘릭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을 가지고 성경공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이 책이 인기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처럼 목적이 분명한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책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것을 가지고 교육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유행 따라가 가는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혹 남들은 무슨훈련을 하는데 우리 주앙교회는 아무 것도 안 한다고 우리의 신앙이, 우리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Vostede! 예수님을 따라가세요.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우리의 목표입니다.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Peter 2:21)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Vostede!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그릇일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사람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우리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러시아 동남쪽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과 가까운 곳에 ‘날칙’이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이 도시에 처음으로 선교사로 간 사람은 고려인이었습니다. 이 고려인 전도사는 한국선교사님이 훈련시켜서 보냈는데 파송한 선교사님에게 6개월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고려인 선교사님에게 한 달에 2백불 정도를 지원해 드리는데 이 돈을 노리고 이 선교사님을 죽였습니다. 선교사님이 4일이 넘어서 도착해서 보니까 시체가 그냥 천으로 덮여져있는데, 확인하기 위해서 천을 열었을 때는 시체에 구데기가 득실거렸습니다. 그런데 이 고려인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흐르는 ‘날칙’에 실버 선교사님 한 분이 1년 전부터 사역하고 계십니다. 이분은 4박 5일을 걸려서 기차를 타고 선교대회에 도착하셨습니다. 여성 선교사님 한 분은 100만 명이 있는 도시에서 혼자 사역하고 계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에게 계속 선교사님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Vostede! 우리가 다 나갈 수 없지만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분들이 정말 많습니다. 우리도 죽음을 무릎 쓰고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