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의 강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As palabras de Xesús(59. 생수의 강) / Texto : John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본문 38절의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의 ‘강이’라고 번역된 단어 potamov”(포타모스)는 복수입니다. 그래서 원문에 제일 가까운 번역으로 알려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표현을 좀더 현대적인 방법으로 잘해보려고 현대어로 번역된 영어성경 가운데는 ‘계속적으로’라는 말을 첨가시켰습니다. 우리는 다 먹으면 더 이상 나오지않는 고인물을 퍼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강으로 안되기 때문에 복수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충만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차서 넘치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배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 주앙교회 안에서 이와같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입니까?
이 생명의 물을 먹는데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아닙니다. 특정한 사람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집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있는 엄마, 사무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는 아가씨, 병원복도를 오고가는 간호사 의사선생님, 병상에 있는 환자, 책상 앞에서 고심하는 학생들, 집에서 놀고있는 아이들, 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 건설현장에서 땀흘리는 분들, 모두가 대상입니다.
우리는 성경 66권에 하나를 더 만들어 놓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복음’입니다. 내가복음안에는 나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에 축복의 말씀만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복음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명령형으로 기록된 말씀은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이해가 안되는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말씀 또한 나를 위한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든 말씀을 받아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실 때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아무 조건도 없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제외 시키고 있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주님이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외 당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음 세가지 부류의 사람입니다.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첫째는 “목마르거든”인데, 목마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있다면 갈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갈증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는 물이 너무 많아 짜증을 부리기도 합니다. 비 또는 홍수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 갈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 아파트 고지서 7월 달 것을 보니까 수도세가 3,650원 이었습니다. 보통 커피한잔 값도 안됩니다. 우리나라 수도 물 값은 정말 쌉니다. 우리 주위에는 물통만 들고가면 먹을 물을 떠 올수 있는 곳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는 절대 물이 부족한 나라와 지역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Vostede! 물이 생명입니다. 이스라엘은 1년 평균 강우량이 약 300m입니다. 우리나라 여름 장마철에 하룻밤에도 내릴수 있는 양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 배고파 죽겠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실제로 죽어갈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Vostede!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욕구의 강도가 어느정도입니까?
목사가 제일 실망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성도분이 기도해 달라고 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서 물어봅니다. “지난번 그 기도의 내용은 응답받으셨나요?” 그러면 그분이 하시는 말이 “어떤 기도요?”합니다. 참 맥이 다 풀립니다.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냥 한번 해 본 것입니다.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말고!”이런 식입니다. Vostede! 이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 정작 필요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도 외면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초반에 구로공단 지역에서 전도사 생활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공순히, 공돌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분들이 저희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이분들 중에 결혼해서 살고있는 분이 있었는데 결혼한지 7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없는겁니다. 그 문제로 교회에 나오시는 겁니다. 자매가 먼저 나왔습니다. 전도사님 아이를 가지려고 교회 나옵니다. 노골적으로 밖히는 겁니다. 그러세요. 그랬습니다. 한 6개월 나왔나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식으로 교회 나오니까 안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다 참석하셔야죠. 그래서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까지 Eu fixen.. 그리고 또 한참을 지났습니다. 안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새벽기도는 안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오셔야죠. 그랬습니다. 정말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입니다. 걸어서 2k는 되는데 겨울에 눈이 온 골목길에 혼자 오는 겁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났습니다. 또 안 생겼습니다. 더 이상 뭐라 핑계될것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남자가 안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는 혼자 갖습니까? 그랬습니다. 아저씨도 함께나오셔야 됩니다. 그랬더니 정말 아저씨까지 새벽에도 함께 니왔습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믿음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 큰일났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그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저는 아이가 없는데 지금도 이 부부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부만큼 간절한 적이 있었는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Vostede! 요즘 ‘주몽’연속극을 보십니까? 검이라고 다 같은 검이 아닙니다. 강철검이 따로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강도가 다릅니다.
주님은 기도를 우리의 욕구와 연결시키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주님은 기도를 강도와 연결시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처럼 강한 강도가 어디있겠습니까? 아직까지 주님앞에 나오지 않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주님 없이도 살만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어도 살만한 사람입니다.

둘째 “내게로 와서 마시라”입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사중고를 말했습니다. (1)사는 것이 고생이고 (2)늙는 것도 고생이고 (3)병든 것이 고생이고 (4)죽는 것도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시지프의 신화)에서 네 가지 인간의 짐을 말했습니다.
(1) 경제적인 짐실직, 빈곤, 굶주림, 헐벗음 등을 말합니다.
(2) 정신적인 짐불안, 초조, 고독, 절망 등입니다.
(3) 생 자체에 일어나는 짐질병, 모순, 죄로 인한 죽음, 신음, 괴로움, 비명 등의 짐입니다.
(4) 종교적인 짐율법적인 행위의 강요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 Jaspers)의 철학적 명제 중에 한계상황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 고통, , 우연한 염려, 투쟁과 전쟁, 죽음 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성현이나 철학자들은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는 밝히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무거운 짐이 무엇이든 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거운 짐 진 자’입니다. 그러나 이 짐을 다른곳에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나올때만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행동이 필요합니다. 일어나세요. 주님 앞으로 나오세요.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나를 믿는 자는”입니다.
주님앞에 나오는 것은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나왔던 병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고쳐 주실것을 확신했습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자락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T 9:22)
Lucas 17:19절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돌아갔으나 한 명만이 나와 감사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Lucas 18:42절에는 소경이 예수님께 보기를 청했습니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 하시매”하니 그 즉시로 그는 보았습니다. 모두가 믿음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열두 명을 기억하십니까? 높은 산, 낮은은 골짜기, 그리고 거인과 같은 아낙자손들, 그들 앞에서 마치 자신들은 매뚜기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10명의 정탐군은 부정적은 보고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래바람을 맞으며 온 광야길의 보람도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은 우리의 땅이 될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을 보고서도 가능성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성격이 원래부터 낙천적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허풍쟁이며 책임질수도 없는 말을 떠들어 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보다 더 크신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이 땅의 상황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조상때부터 약속하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세대의 사람은 이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T 28:20) 이 말씀이 나에게 임함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태국 북쪽에 트라이앵글로 알려진 미얀마, 라오스 국경지대인 치랑라이에 13년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산족의 한 원주민 마을에 간 일이 있습니다. 작은 초가집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여자들은 밤낯으로 물을 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기 때 웅덩이를 파서 물을 고여놓았다가 그것을 퍼다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기가 되면 그 물들이 다 말라버립니다. 그리고 모퉁이 구석진 곳에서 작은 샘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거의 말라 찔끔 찔끔 한방울씩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물을 여인들은 물 항아리를 가져다 밤낯으로 길어옵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흘릴까봐 대기하고 있다 다른 항아리로 옮겨 담습니다. 이곳에 다녀온 이후에 함께간 목사님들과 이 마을에 우물파주기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땅을 파서 우물이 나오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물을 고이게 더 넓고 깊게 파 놓는 작업을 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에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일대가 우기때 물이 넘치고 고여서 넓은 호수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주변으로 산족들이 물 때문에 모여들어 지금은 그곳지역을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주시는 생명수는 이정도가 아닙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은 성령을 부어주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은 찔끔 찔끔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넘치도록 부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물입니다. 생수입니다. 강이예요. 큰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의 풍요로움과 넓고 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는 거예요. 잠이 잘 오는 분은 강같은 은혜예요. 교회를 떠나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생수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정경한 맘 영원하도록 주의 거쳐 되겠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나의 생명 소생케 됨은 성령 임하심이라 모든 의심 슬픔 사라져 주의 평강 넘치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하늘에서 단비 내리고 햇빛 찬란함 같이 우리 맘에 성령 임하니 주님 보내심이라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생수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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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59. 생수의 강) / Texto : John 7:37-39

“37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본문 38절의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의 ‘강이’라고 번역된 단어 potamov”(포타모스)는 복수입니다. 그래서 원문에 제일 가까운 번역으로 알려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생수의 강들이 흐르리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표현을 좀더 현대적인 방법으로 잘해보려고 현대어로 번역된 영어성경 가운데는 ‘계속적으로’라는 말을 첨가시켰습니다. 우리는 다 먹으면 더 이상 나오지않는 고인물을 퍼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강으로 안되기 때문에 복수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충만한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차서 넘치는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배에서, 우리 가정 안에서, 우리 주앙교회 안에서 이와같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얼마나 매력적인 제안입니까?
이 생명의 물을 먹는데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아닙니다. 특정한 사람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집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있는 엄마, 사무실에서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리는 아가씨, 병원복도를 오고가는 간호사 의사선생님, 병상에 있는 환자, 책상 앞에서 고심하는 학생들, 집에서 놀고있는 아이들, 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학자, 건설현장에서 땀흘리는 분들, 모두가 대상입니다.
우리는 성경 66권에 하나를 더 만들어 놓고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복음’입니다. 내가복음안에는 나에게 명령하시는 모든 말씀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대신에 축복의 말씀만 가득차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복음입니다. ‘무엇을 하라’는 명령형으로 기록된 말씀은 나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렵고 이해가 안되는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말씀 또한 나를 위한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가감없이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모든 말씀을 받아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님은 말씀하실 때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어떤 사람들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아무 조건도 없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을 제외 시키고 있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주님이 제외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외 당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음 세가지 부류의 사람입니다.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첫째는 “목마르거든”인데, 목마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있다면 갈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갈증을 별로 느끼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는 물이 너무 많아 짜증을 부리기도 합니다. 비 또는 홍수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정 갈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릅니다. 우리 아파트 고지서 7월 달 것을 보니까 수도세가 3,650원 이었습니다. 보통 커피한잔 값도 안됩니다. 우리나라 수도 물 값은 정말 쌉니다. 우리 주위에는 물통만 들고가면 먹을 물을 떠 올수 있는 곳이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는 절대 물이 부족한 나라와 지역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Vostede! 물이 생명입니다. 이스라엘은 1년 평균 강우량이 약 300m입니다. 우리나라 여름 장마철에 하룻밤에도 내릴수 있는 양입니다.
우리는 가끔 ‘아, 배고파 죽겠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실제로 죽어갈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Vostede! 내가 그리스도를 닮으려는 욕구의 강도가 어느정도입니까?
목사가 제일 실망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성도분이 기도해 달라고 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나서 물어봅니다. “지난번 그 기도의 내용은 응답받으셨나요?” 그러면 그분이 하시는 말이 “어떤 기도요?”합니다. 참 맥이 다 풀립니다. 할 말을 잊어버립니다. 그냥 한번 해 본 것입니다. “되면 다행이고 안되면 말고!”이런 식입니다. Vostede! 이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런식으로 기도하기 시작하면 정작 필요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도 외면하실 수 있습니다.
제가 80년대 초반에 구로공단 지역에서 전도사 생활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용서하고 들으세요) 공순히, 공돌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분들이 저희 교회에 나오셨습니다. 이분들 중에 결혼해서 살고있는 분이 있었는데 결혼한지 7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없는겁니다. 그 문제로 교회에 나오시는 겁니다. 자매가 먼저 나왔습니다. 전도사님 아이를 가지려고 교회 나옵니다. 노골적으로 밖히는 겁니다. 그러세요. 그랬습니다. 한 6개월 나왔나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지 않는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식으로 교회 나오니까 안되는 겁니다. 예배시간에 다 참석하셔야죠. 그래서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까지 Eu fixen.. 그리고 또 한참을 지났습니다. 안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새벽기도는 안나오더라구요. 그래서 새벽기도에 나오셔야죠. 그랬습니다. 정말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입니다. 걸어서 2k는 되는데 겨울에 눈이 온 골목길에 혼자 오는 겁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났습니다. 또 안 생겼습니다. 더 이상 뭐라 핑계될것이 없더라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남자가 안오는 겁니다. 그래서 아기는 혼자 갖습니까? 그랬습니다. 아저씨도 함께나오셔야 됩니다. 그랬더니 정말 아저씨까지 새벽에도 함께 니왔습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서 믿음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 큰일났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되어 그 부부에게 아이가 생겼습니다.
저는 아이가 없는데 지금도 이 부부를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부만큼 간절한 적이 있었는가? 없었던것 같습니다. Vostede! 요즘 ‘주몽’연속극을 보십니까? 검이라고 다 같은 검이 아닙니다. 강철검이 따로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강도가 다릅니다.
주님은 기도를 우리의 욕구와 연결시키셨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주님은 기도를 강도와 연결시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처럼 강한 강도가 어디있겠습니까? 아직까지 주님앞에 나오지 않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주님 없이도 살만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없어도 살만한 사람입니다.

둘째 “내게로 와서 마시라”입니다.
석가모니는 인생의 사중고를 말했습니다. (1)사는 것이 고생이고 (2)늙는 것도 고생이고 (3)병든 것이 고생이고 (4)죽는 것도 고생이라고 했습니다.
알베르 카뮈는(시지프의 신화)에서 네 가지 인간의 짐을 말했습니다.
(1) 경제적인 짐실직, 빈곤, 굶주림, 헐벗음 등을 말합니다.
(2) 정신적인 짐불안, 초조, 고독, 절망 등입니다.
(3) 생 자체에 일어나는 짐질병, 모순, 죄로 인한 죽음, 신음, 괴로움, 비명 등의 짐입니다.
(4) 종교적인 짐율법적인 행위의 강요라고 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 Jaspers)의 철학적 명제 중에 한계상황이 있습니다. 죄와 허물, 고통, , 우연한 염려, 투쟁과 전쟁, 죽음 등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성현이나 철학자들은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는 밝히지만, 그들에게 어떻게 해주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하십니다. 무거운 짐이 무엇이든 쉼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거운 짐 진 자’입니다. 그러나 이 짐을 다른곳에 내려놓을 수 없습니다. 해결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 나올때만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행동이 필요합니다. 일어나세요. 주님 앞으로 나오세요. 주님 앞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나를 믿는 자는”입니다.
주님앞에 나오는 것은 믿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나왔던 병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고쳐 주실것을 확신했습니다.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옷자락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T 9:22)
Lucas 17:19절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돌아갔으나 한 명만이 나와 감사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Lucas 18:42절에는 소경이 예수님께 보기를 청했습니다.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느니라 하시매”하니 그 즉시로 그는 보았습니다. 모두가 믿음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던 열두 명을 기억하십니까? 높은 산, 낮은은 골짜기, 그리고 거인과 같은 아낙자손들, 그들 앞에서 마치 자신들은 매뚜기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10명의 정탐군은 부정적은 보고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보래바람을 맞으며 온 광야길의 보람도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은 우리의 땅이 될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은 불가능한 상황을 보고서도 가능성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성격이 원래부터 낙천적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들이 허풍쟁이며 책임질수도 없는 말을 떠들어 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이 처한 환경보다 더 크신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이 땅의 상황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조상때부터 약속하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세대의 사람은 이 두 사람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T 28:20) 이 말씀이 나에게 임함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태국 북쪽에 트라이앵글로 알려진 미얀마, 라오스 국경지대인 치랑라이에 13년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 산족의 한 원주민 마을에 간 일이 있습니다. 작은 초가집의 교회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여자들은 밤낯으로 물을 기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기 때 웅덩이를 파서 물을 고여놓았다가 그것을 퍼다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건기가 되면 그 물들이 다 말라버립니다. 그리고 모퉁이 구석진 곳에서 작은 샘 구멍이 하나 있는데 그것도 거의 말라 찔끔 찔끔 한방울씩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물을 여인들은 물 항아리를 가져다 밤낯으로 길어옵니다. 한 방울의 물이라도 흘릴까봐 대기하고 있다 다른 항아리로 옮겨 담습니다. 이곳에 다녀온 이후에 함께간 목사님들과 이 마을에 우물파주기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땅을 파서 우물이 나오는 곳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물을 고이게 더 넓고 깊게 파 놓는 작업을 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에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일대가 우기때 물이 넘치고 고여서 넓은 호수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 주변으로 산족들이 물 때문에 모여들어 지금은 그곳지역을 중심으로 교회가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주시는 생명수는 이정도가 아닙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은 성령을 부어주심을 말씀해 주십니다. 성령은 찔끔 찔끔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넘치도록 부으시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는 물입니다. 생수입니다. 강이예요. 큰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의 풍요로움과 넓고 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는 거예요. 잠이 잘 오는 분은 강같은 은혜예요. 교회를 떠나면 안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생수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함이라 정경한 맘 영원하도록 주의 거쳐 되겠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나의 생명 소생케 됨은 성령 임하심이라 모든 의심 슬픔 사라져 주의 평강 넘치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하늘에서 단비 내리고 햇빛 찬란함 같이 우리 맘에 성령 임하니 주님 보내심이라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되도다
 

열광하는 무리가 아닌 제자를 원하신 주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As palabras de Xesús(58. 열광하는 무리가 아닌 제자를 원하신 주) / Texto : T 28:18-20

“18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인도북부에 라자스탄주(Rajputana)가 있습니다. 1965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복음의 황무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몇 백년 동안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이 이 지역에서 교육과 의료사역을 했으나 진정한 교회 토착화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서양선교사들이 중심을 이룬 중부지방 뱅갈로르와 함께 인도가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열왕의 땅”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은 인도 시골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소박한 어머니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이분의 이름은 ‘아치아마’입니다. 어느 날 아치아마는 부엌에서 일을 하다 눈물을 계속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화덕의 연기나 매운 양념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치아마는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여섯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섯 아들 중에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될 기미가 보이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치아마는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제 아들 중 하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그리고 이 때부터 매주 금요일이 되면 비밀리에 금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한지 3년 반이 지났습니다. 기도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이 어리고 병약한 막내아들(K.P. 요하난)만 빼놓고 아들들은 남인도 케랄라 니라남 부근에서 평범하게 사는데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막내는 수줍음을 잘 타는 소심한 아이여서, 교실에서 책 읽을 순서가 되면 항상 떨었습니다. 그는 마을에서 혼자 놀았습니다. 구석진 곳이나 집안에 있는 곳이 더 편했습니다. 운동이나 학교활동은 회피하는 소심한 아이였습니다. 막내가 남들 앞에서 지도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 때까지만 해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 요하난이 16세가 되던 해에 아치아마의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OM선교회 전도팀이 이 지역 교회를 방문해서 멀리 있는 인도 북부에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요하난은 40kg밖에 안 되는 작은 몸은 전도팀이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복음전도의 필요성을 말할 때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하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인도 북부(라자스탄, 비하르)에서 복음을 전하다 구타당하고 돌에 맞았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인도에서 오래된 종교 중의 하나라는 것도 말해주었습니다. 인도는 페르시아만과의 해상무역 덕택에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주후 52년에 크라나고어(Cranagore) 근처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곳에는 도마보다 200년 먼저 살고있던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인도의 60만개 마을에 복음이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생생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있던 요하난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좇으라”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해 여름 단기선교 여행팀에 자원한 것입니다. 어머니는 교통비를 넉넉히 주며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해 수련회에는 참석했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련회에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집안에 홀로 있었지만 홀로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온 몸을 적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는 침대옆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나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제 일생을 바치겠나이다.”기도했습니다.
K.P. 요하난은 영국인 아내 기젤라(Gisela)라와 결혼하고, 현재 아시아복음선교회(Gospel for Asia) 설립하여 10,000명 이상의 인도내 자국인 선교사를 돕고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누군가 해야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나의 자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Vostede! 아치아마처럼 나의 자녀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앙교회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멀리서 온 분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던지 아니면 우리들의 자녀가 가야합니다. 바로 기도하지 않으면 선교는 못합니다.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지옥불의 경험을 단 1분만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열정적일 것입니다. 일단 멀리 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미 우리가 정해놓은 예배와 기도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입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김상호라고 하는 공군 중령의 자기간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일하시다가 실수로 인하여 하반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여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꼼짝 도 못한 채 누워있고 조금만 움직이면 상처가 침대 천에 닿아서 쓰리고 아팠습니다.
의사나 간호사의 말대로 제일 아픈 고통이 화상으로 인한 아픔이라고 합니다. 이 가죽이 다 벗겨지고 이 말초신경이 전부 드러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아픈 고통이 화상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이렇게 괴로워하는 어머니를 아들은 지켜보면서 귀에다 대고 조용히 물었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아프세요?” 어머니는 대답합니다. “천번 죽고 천번 사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이렇게 아픔이 있다는 걸 몰랐다.”
아들은 이 말을 듣고 이 아픔을 같이 나누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괴로워했습니다. 하루는 이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합니다. “얘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 드리고 있다. 너희들의 아픔을 모두 내게 주십사고, 너희들의 고통을 다 내가 걸머지고 그리고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너희들에게는 이런 고통이 없기를.” 이것이 어머니의 심정입니다.

그렇다면 지옥 불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자녀를 사랑하신다면 반드시 복음을 전하십시오.
바울은 로마서 10:9-15절에 보면 그리스도를 전해야할 긴박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 영국의 작가이며 기독교 변증에 강했던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교리에서 제일 없애고 싶은 것은 지옥의 개념이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해도 거짓이 아니라면 나는 어떠한 대가라도 치르겠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며 우리의 힘으로 변경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지옥의 개념을 잘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아 영원토록 고통을 당한다는 말이 사실 쉽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사단의 소리를 듣게됩니다. “사실 예수 믿고 죽어도 지옥가지는 않아! 그리고 길이 있어” 그러나 성경은 그런 생각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Hebreos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ohn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는 현대교회를 향해서 토저(Tozer)라는 신학자는 예언자적인 말을 했습니다. “비참하게도 기독교는 신약성경이 요구하는 수준 이하에 머물고 있다. 우리 생활에서 세속화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교회의 분위기는 영적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이다.”
교회의 지도력이 주 예수로부터 멀어질수록 이 세상 방법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는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구세군을 창설할 때 품었던 비전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는 잃은 영혼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는 일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 운동을 시작하며 가진 이상은 “한 영혼을 위해서라면 극한 상황까지라도 가자” 구호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날 우리 주앙교회에 “주앙교회 성도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말씀해 주실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진노하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는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았다.”는 책망을 들으면 큰일입니다.
1983년 인도에서 그리스도인의 마을인줄 알았던 40개 마을이 힌두교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궁금하실 겁니다. 누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을을 기독교로 이끌기 위해 물질을 사용했습니다. 표면상 그리스도인처럼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거나 그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돌아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선교용어로 “쌀 그리스도인”(rice Christian)이라고 말합니다. 먹고 살 수 있는 쌀 때문에 그들은 종교를 바꿉니다. 이런 일이 인도에서만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유럽교회가 텅텅 비었다는 사실은 유럽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있습니다. 쌀 교인이 다 나간 것입니다. 그나마 명목상 그리스도인까지 합해서 유럽은 17.84%만이 개신교인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한 아프리카는 24.90%입니다. 이런 일은 인도나 유럽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도 1995년도에 19.6%이었는데 2005년에는 18.3%로 줄었습니다. 쌀 교인이 나간 것입니다.
예수님께 떡과 고기를 얻어먹은 사람들이 5000명이 넘게 있었습니다(John 6:1-13). 이들은 몇 날이 못되어 그 입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외쳐대었습니다. 아무도 목숨을 내걸고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현장에 없었고 나중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빌라도에게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고 장사지낸 아리마대에 사는 요셉입니다. “이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임으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Só 16: 42-43, 46).
그러나 예수님의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서 한가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을 끌기 위해서 먼저 먹이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먼저 전하고 나중에 먹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John 6:26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본 것은 다 잊어버리고 자신의 배만 생각한 것입니다. 그릇된 동기에서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무리들이 영적인 면을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께서는 그들로부터 멀리 떠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열광하는 무리가 아니라 진정한 제자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Vostede!
우리 주앙교회 성도는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모두는 하나님께 파송받은 선교사입니다. 자 옆 사람하고 인사합시다.
“선교사님 안녕하세요.”
“선교사님 지난주에 뭐하셨나요?” 선교사가 되어서 기도하지 않고 선교할 수 있나요?
요하난이 8살 된 북인도 소년에게 예수를 전할 때 했던 질문입니다.
“너 학교 다니니?"
“네 다니고 있어요.”
“학교에는 왜 다니지?"
“공부하러요.”
“공부는 왜 하니?"
“똑똑해지려고요.”
“똑똑해져서 뭐하려고?"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잖아요.”
“왜 좋은 직업을 얻으려고 하니?"
“그래야 돈을 잘 벌지요.”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지?"
“먹을 것을 사려면 돈이 있어야지요.”
“왜 먹을 것을 사니?"
“살려고요.”
“너는 왜 사니?"
그 질문에 어린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며 머뭇거리더니, “아저씨, 내가 왜 살지요?”하고 되물었다. 그런 후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기 위해서 사는 것 같아요!"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명예인가? 아니면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채우는 것인가? 아니면 그럭저럭 살다가 예수 믿고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던지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나의 제자가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땅에 육체적으로 계시지는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어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그분의 입술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눈은 그분의 눈이, 우리의 손은 그분의 손이, 우리의 소망은 그분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아내와 자녀들도 예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나의 돈과 재능, 교육 등 모두 그분께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 받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오늘본문 19절부터 함께 읽습니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가와 누가도 예수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끝이 납니다.
(Só 16:15)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Lucas 24:47)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Lucas 24:48)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요한복음은 전체가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일체를 설명한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연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또한 제자를 삼을 수 있습니다. 제자를 삼았으면 해야될 일이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세례를 주고”입니다. “세례”란 이전 사람은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옛 사람은 벗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엔 나를 위해 살았으나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입니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천국 복음)”입니다(Só 1:15, 16:15, T 4:23).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기록된 계시로 나타난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영생)을 얻게 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John 5:39, 20:31).
이 두 가지 명령을 받들기 위해서 우리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Hebreos 10:20)

 

예수님의 중보 기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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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palabras de Xesús(57. 예수님의 중보 기도(1)) / Texto : John 17:1-3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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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끝이 났습니다. 1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는 요한복음 16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한 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고 나면 핍박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위쪽을 바라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러한 자세와 행동을 면밀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눈을 돌리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바라볼 곳은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처럼 예수님 역시 “아버지여”하시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셨던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하나님을 부르십니다. 잠시나마 함께 하셨던 이 세상의 추억을 안고 하나님께 가셔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예수님의 나이는 너무 젊습니다. 이제 한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나이에 죽음의 길을 가야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때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생각하고 계셨던 때는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였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하실 일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변화되었습니다. 때가 왔다는 것을 이미 세 번을 언급하셨습니다.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것이 처음으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점점 강도가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진 엄마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해산을 인해서 근심을 하지만 아이를 낳게되면 기쁨이 있어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림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을 통해서 그 고통스러운 날들이 기억되기보다는 부활을 인하여 더 큰 기쁨이 다가올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요 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John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임의로 행동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말씀을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기도를 가리켜 어떤 신학자는(L. Morris)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볼 때 저주의 십자가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여가면서 아버지인 자신이 영광을 바란다면 정말 그분이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비판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와 같이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만을 아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이신 성부의 영광에 고정되어있습니다(John 12:28). 정말 철저하도록 자신의 삶 자체가 없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이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성자이셨던 것입니다. 크게 말하면 예수님 또한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와 같은 육체의 생명을 마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 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를 입고 온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죽음이요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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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는 당시의 열 두 제자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입니다(요 6:35, 37, 44, 65). 우리도 “아들에게 주신 자”입니다. 우리가 정말 아들에게 주신 자가 뫘다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처럼 형성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Por que! 제가 이 어려운 설교를 여러분에게 합니까? 예수님에 대해서만 증거하기를 원합니까? 바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처럼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원해서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산타크로스의 선물 보따리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원문으로 직역하면 pavshsarkov”(파세스 사르코스) ‘모든 육체’를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요 5:27).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은 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영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3Sección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며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As palabras de Xesús(57.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며) / Texto : John 17:1-3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1Sección
Vostede!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할 때 어떻게 합니까? 저는 오늘도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 할 때는 마음이 떨립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가끔은 언 듯 이해가 안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에 논리를 지나치게 따지려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Vostede! 사랑에 논리가 있습니까? 머리로 다 이해가 됩니까? 사랑은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마음에 새겨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끝이 났습니다. 1절에서 “이 말씀을 하시고”는 요한복음 16장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한 것은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고 나면 핍박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과 더불어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위쪽을 바라보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러한 자세와 행동을 면밀히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눈을 돌리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바라볼 곳은 하늘입니다. 그 하늘에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기도처럼 예수님 역시 “아버지여”하시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하셨던 일은 바로 기도입니다.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하나님을 부르십니다. 잠시나마 함께 하셨던 이 세상의 추억을 안고 하나님께 가셔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에서는 예수님의 나이는 너무 젊습니다. 이제 한참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그런 나이에 죽음의 길을 가야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때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이 생각하고 계셨던 때는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30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 궤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였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예수님은 하실 일이 더 남아있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 감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변화되었습니다. 때가 왔다는 것을 이미 세 번을 언급하셨습니다.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것이 처음으로 언급하신 말씀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6: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점점 강도가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진 엄마가 아이를 낳기 전에는 해산을 인해서 근심을 하지만 아이를 낳게되면 기쁨이 있어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림과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을 통해서 그 고통스러운 날들이 기억되기보다는 부활을 인하여 더 큰 기쁨이 다가올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요 8:50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John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임의로 행동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말씀을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하십니다. 이 기도를 가리켜 어떤 신학자는(L. Morris) “차라리 성부 하나님을 위한 기도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영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볼 때 저주의 십자가였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죽여가면서 아버지인 자신이 영광을 바란다면 정말 그분이 아버지가 맞는지 의심을 하게됩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비판하시는 분들 중에는 이와 같이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나치게 이기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만을 아시는 분이라면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이신 성부의 영광에 고정되어있습니다(John 12:28). 정말 철저하도록 자신의 삶 자체가 없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이 곧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 성자이셨던 것입니다. 크게 말하면 예수님 또한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우리와 같은 육체의 생명을 마치시면서 아버지 하나님께 간구 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이 죽음은 육체를 입고 온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죽음이요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훌륭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죠셉 하이든이 또다시 심혈을 기울여 그 유명한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곡이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선을 보이던 날, 그는 몸이 너무도 아파서 도저히 지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지휘를 하도록 하고 자신은 2층 발코니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연주는 그 자신도 놀랄 만큼 대 성공이었습니다. 이 곡은 구약성경 창세기와 존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에 근거해서 만든 곡인데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지휘자에게 대단한 환호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휘자는 그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이 영광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바로 저 발코니에 앉아있는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곡을 작곡했답니다”라고 말하며 하이든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몸을 돌려 하이든을 향해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이내 박수를 중단시키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이 영광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저도 아닙니다. 제가 이 곡을 작곡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오직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아름다운 곡에 대한 영감을 어디서 얻습니까?"
그러자 하이든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작곡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감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요. 나는 나의 모든 곡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

2Sección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는 당시의 열 두 제자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 6:39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미 창세 전부터 미리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생명의 떡에 초대된 자들입니다(요 6:35, 37, 44, 65). 우리도 “아들에게 주신 자”입니다. 우리가 정말 아들에게 주신 자가 뫘다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관계처럼 형성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우리는 예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Por que! 제가 이 어려운 설교를 여러분에게 합니까? 예수님에 대해서만 증거하기를 원합니까? 바로 예수님과 아버지 하나님의 관계처럼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원해서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그냥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산타크로스의 선물 보따리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원문으로 직역하면 pavshsarkov”(파세스 사르코스) ‘모든 육체’를 말합니다. 모든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들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날에 인류를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요 5:27).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미 십자가의 죽음은 패한 것이 아니라 승리와 영광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영광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호주 가까이 있는 뉴 헤불리지스 제도에 있는 30개 섬의 이야기입니다. 백인이 들어가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던 이 지역에 영국선교사이며 학자인 죤 월리암즈가 1839년11월 20일에 처음으로 상륙했습니다. 그러나 상륙한 즉시 해변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두 번 째로 해리스 목사가 들어갔습니다. 그도 3일이 안되어 학살되었습니다.
셋째로 죤 골든 내외가 들어가 원주민과 사귀는데 겨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오래 견디지 못하고 백인을 증오하는 토인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후 맥네어 선교사가 도전했습니다. 그도 결국 1년도 못되어 암살되었습니다. 다섯 번째로 상륙한 사람은 수년 전에 순교한 죤 골든의 동생이었습니다. 골든 목사는 가까스로 받아들여져 현지의 언어를 연구하고 신약성경 번역을 착수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괴한이 그의 서재에 침입했습니다. 그는 도끼로 처참하게 타살되었습니다. 그의 피가 마침 번역하고있던 사도행전 7장, 즉 스데반이 순교한 장면의 원고를 적셨다고 합니다. 그후 일곱째 선교사인 로버트슨 목사가 상륙했습니다. 비로소 로버트슨 목사에 의해서 30개 섬에 있는 전 주민이 기독교인이 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계속해서 실패하는 선교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리 그 결과를 내다보시고 계속해서 수확이 이루어지도록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은 놀랍습니다. 철저히 헌신된 사람들을 보내시고 그들로 하여금 복음의 수확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죽기를 작정한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John 12:25). 십자가의 죽음은 끝아 아니라 시작이었습니다.

3Sección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십자가의 죽음 뒤에는 부활과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영생은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중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부르짖기를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 6:3)고 했습니다. Ten alta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Jer. 9:24)고 했습니다. Vostede! 하나님을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면 영생이 없습니다. “아는 것이니이다”의 ‘안다’는 ginwvskw(기노스코)라는 말로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다른 지식은 체험을 통해서 알게된다는 것은 이해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에 어떻게 체험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을 받아 알게되는 것을 말합니다. John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은 요 3:5절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성령으로 나자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아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본 절은 완벽한 삼위일체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동시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수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이 동일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두 분 중에 한 분만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전세계의 종교 중에 하나님만을 믿는 종교는 유대교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구약의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이슬람은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가 믿는 야훼 하나님과는 거리가 있음을 느낍니다. 또한 이들도 예수님은 믿지 않고 마호멧을 믿고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모릅니다.
우리를 위해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영생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하나님께 기도한 예수님의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하라②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As palabras de Xesús(56. 이렇게 기도하라②) / Texto : Mateo 6:11-13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지난주에 주기도문의 전반부에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둘째는 나라이 임하옵시며 셋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기도를 마치고 나면 나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해야합니다. 오늘은 그 세 가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Sección)
저는 40일 금식기도 하셨다는 분들 보면 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한끼만 안 먹으면 현기증이 납니다. 요즘은 더워서 그런지 배가 더 자주 고파옵니다. 자다가도 배가고프면 일어나 무엇을 먹고 자야합니다. 저는 먹는 것만큼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한 때 서울에 올라와서 혼자 지낼 때 반찬이 없어서 소금물에 밥을 말아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금이 맛을 내는 것이지만 제가 소금물에 밥을 말아 먹어보고는 정말 못 먹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행기타고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커피에 소금을 설탕인줄 알고 탔습니다. 그냥 눈 딱 감고 먹어보려고 했는데 정말 못먹겠더라구요. 저는 어려서 감자, 옥수수를 얼마나 많이 먹고 자랐는지 지금도 몇 가지 이해를 못합니다. 돈주고 감자, 옥수수 사먹는 것하고 물 사먹는 것은 이해를 못합니다. 그만큼 이것만 질리도록 먹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성장하면서 우리 집이 못살기 때문에 그렇게 먹고산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집 하얀 쌀밥만 먹는 것이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 못하는 우리 집사람은 쌀에다 영양 밥을 한다나요 하면서 잡곡을 섞습니다. 저는 이것을 먹기 싫은데 우리 집사람은 저에게 뭐라고 합니다. 신경 써서 잘해 주었더니 배부른 소리한다고만 합니다. 제가 성장해서 선교지 여행하면서 알게된 것인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사나 보았더니 별 것 안 먹더라고요. 서양사람들도 옥수수 감자 먹으며 살고 있더라구요.
주님은 우리를 위한 첫 번째 기도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오늘 먹을 하루 양식을 말합니다. 미리 싸둘 양식을 위하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호주에 가면 집세를 보통 월세로 내지 않고 주세로 냅니다. 그러니까 한 주만 쉬고 일 안 하면 금방 집세가 밀리는 겁니다.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에게 하루 양식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만큼 잘 살게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실 이 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못 먹고 못살았습니까? 우리말에 사람보고 하는 말이 “그놈 참 짜네”, “싱거운 놈 다 봤네” 그럽니다. 오죽하면 사람의 특징을 말할 때도 먹는 맛에 비유하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시계가 안가면 밥 줘야 한다고 그럽니다. 시계도 밥을 줘야 하는데 사람이 오죽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고백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매월 책 사본다고 10만원씩 도서 비로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 책 사는 것이 아니라 뼈다귀 많이 사먹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언젠가 한번 이동휘 목사님과 선교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이 제일 먼저 선교지로 생각하시는 나라나 지역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제가 여쭈었습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사람이 먹을 곳이 있는 곳은 괜찮은 곳이지요. 사람이 굶어죽어 가는 지역이 제일먼저 선교할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 선교회는 나른 지역도 많이 하지만 아프리카지역과 아시아에서도 아프가니스탄 같은 지역을 우선 선교지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겪은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10년 전 아프리카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선교사 집에 며칠간 머문 일이 있었는데, 그 때 들은 한 현지인 가정부의 서글픈 이야기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그 가정부는 점심밥을 선교사 집에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밥을 얼마나 많이 먹는지 배가 터질 정도였습니다. 선교사가 “왜 그렇게 많이 먹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동네와 집에서는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지낸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가정부는 선교사 집에서 점심과 배고픔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입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밤 10시에 밥을 먹는데, 그 이유는 잠자기 직전에 먹어야 밥이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오래 전 우리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손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장난치고 뛰어 다니면, 할머니들이 “뛰어 다니지 마라. 밥 쉽게 꺼진다”며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나무랐습니다.

인도에 갔을 때 본 일입니다. 오토바이를 탄 아이가 음식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다리에서는 피가 나오는데 다리가 얼마큼 다쳤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자기의 다리는 안중에 없고 깨뜨린 그릇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주어 모으고 있었습니다. 주인에게 쫓겨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장애인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를 선교사에게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먹고살기가 하도 어려웠던 그는 캄캄한 밤에 철로에다 한쪽 발을 얹어 놓았습니다. 결국 지나가는 기차가 다리를 절단했고, 불구자가 된 그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구걸하게 되니 굶지 않고 살아갈 수는 있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하루에 6만 여명, 연간 2,000여만 명이 굶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전 세계 60억 인구 중 7명당 1명인 8억 4천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영양실조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남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남쪽에 살고 있습니다. 굶주림은 생명을 위협할 뿐 아니라 시력 약화, 무력증, 성장저해를 초래하며 질병에 대한 저항력 약화시킵니다. 전 세계 15세 미만 어린이는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매년 1억 4천만 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고 있는데, 그 중 4/5 이상이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슬프게도 개발도상국의 어린이 가운데 약 10%는 만 5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매일 24,000명의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매년 1천여 만 명의 어린이들이 안타깝게도 영양실조와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고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는 하루 평균 1만 2천여 톤, 8톤 트럭 1,400여대 분이나 된다고 합니다. 1년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는 약 410만여 톤으로 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15조원에 달합니다. 이제 우리는 나 자신의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돕고 있는 남아공의 김형주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남아프리카의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돈 있는 백인들은 천국생활을 돈 없는 흑인들은 지옥생활을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 나온 흑인들이나 구걸해서라도 끼니를 채울 수 있지만 흑인 밀집지역 사는 노약자들은 이들이 구걸해온 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기들의 거주지에서 실시하는 구제사역을 통한 복음전파는 많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남아프리카 포체스트룸은 아주 조용한 학교 도시입니다. 반면에 인근에 대단위 흑인 밀집지역들인 잉까겡 등 큰 시골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헌금을 보내지는 않지만 월 10만원씩 보내는 이곳 잉까겡 지역의 흑인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배고픈 사람 사정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주앙교회는 배고픈 이들과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12Sección)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은 용서입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의 죄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죄”로 번역된 이 단어는 ojfeilevta(오페이레마타)로 빚(debt) 또는 부채(loans)를 말합니다. 이 죄를 용서해 주는데는 십자가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면 그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용서를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자신이 범죄한 사실이 하나님께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남의 죄가 작게 나타나며 반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끼친 죄가 크게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범한 잘못은 작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신앙의 자세는 내 자신에 대해선 엄격하되 타인에 대해선 너그러워야 합니다. 이것이 반대로 되면 교만과 독선으로 치닫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다 옳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다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축복하신 것은 이 말씀을 잘 따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사람은 선천적으로 풀지 않으면 못삽니다. 얽어매어서 되는 민족이 아니라 풀어주어야 되는 민족입니다. 싸움을 하면 으레 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따지지 말고 풀어버려?”라고 말합니다. 화가 나면 ‘화풀이’를 하고, 슬픈 일이 있으면 ‘시름풀이’를 합니다. 원한도 풀고 회포도 풉니다. 심심한 것은 이미 풀어진 상태인데도 또 풉니다. 그것을 심심해서 푸는 것 ‘심심풀이’라고 합니다. 푸는 것이 심리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몸도 풉니다. 임산부가 아기를 낳으면 몸을 푼다고 합니다. 코가 답답하면 코도 풉니다. 다리가 아프면 다리도 풉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도 풀어야 합니다. 이런 민족성이 있는 우리민족이 원한을 가지고 살아가겠습니까? 다 푸시기를 바랍니다.
T 18:24-35에 보면 일만 달란트를 빚졌던 자가 가까스로 자기 빚을 탕감 받고 길을 나서던 중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받은 탕감의 은혜를 잊고 자기가 입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액수를 빚진 채무자를 자기 옥에 가두었다가 후일 이 일이 발각되어 자신도 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마태는 35절로 이 비유를 정리하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소개합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형제의 그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베드로의 물음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관념상 7은 완전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는 것은 완전한 용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자기 이웃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용서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유럽 봉건시대 때 어느 성주가 다른 성주를 미워하여 기회만 있으면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한번은 자기 적이 자기의 영토를 지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주는 사람을 숨겨놓고 적이 지나갈 대 죽여버리라고 하였으나, 그 곳 주교가 이 사실을 알고 간절히 “성도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니 용서해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거절하자 주교는 예배는 드리고 가라고 하여 성주와 부하들을 모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의 마지막으로 주기도문을 드리는 것이었다. 주기도에는 “우리가 우리 죄를 용서하였사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하는 부분이 나온 것입니다. ”이제 주기도를 드릴 때에는 나를 따라서 한 마디씩 따라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희롱하거나 하나님 앞에 거짓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편 성주의 죄를 용서하고 이 기도를 하겠습니까? 용서해 주지 않고 이 기도도 하지 않겠습니까?” 성주는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죄를 용서해 주고 기도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3. 우리를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13Sección)
한글 개혁성경에서 사용된 ‘시험’(peirasmon:페이라스몬)이라는 말은 ‘유혹’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시험(test)하시지만 결코 우리를 유혹(temptation)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유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도 않으십니다.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유혹)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유혹)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유혹)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유혹’은 약 1:14-15절에 보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의 기도는 자신이 언제든지 유혹을 받을 수 있다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가롯유다가 이 유혹에 빠졌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가르쳐준 이 기도를 열심히 했더라면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다만:ajlla;(Alá)”은 “그러나, 도리어”라는 반의적인 접속사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두 가지의 경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만”이라는 단어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만 “굶어죽게 되더라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해서 다 용서하지 못했을 지라도”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내 영혼을 사단으로부터 지키는 것입니다. “다만”이라는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앞의 기도에 비해서”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다른 모든 기도의 제목보다는” 늘 우선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에베소서 6장 11-17절에 보면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했습니다. 나를 위한 최종적인 기도는 다만 악에서 구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구할 것입니다. Só 10:27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아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마칩니다. 이 부분은 주기도문 초두에 나오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라는 기도와 짝을 이루며 주기도문 전체를 감싸는 송영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오직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이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근원이요 역사의 주인이라는 확신에 찬 송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신 것은 세속적인 복에 대한 것을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인간을 위한 기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기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의 삶이 전제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T 6:33, 눅12:31)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가장 위대한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향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역대상 29:10-11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를 송축하여 가로되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심이니이다.”
기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나의 아버지로 믿는 일입니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시끄러운 공허한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 : 주기도문의 ‘대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