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As palabras de Xesús(93. 환경) / Texto : T 6:30-34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콩을 밭에다 심으로면 콩 나무가 되지만 방 안 시루에다 심으면 콩 나물이 됩니다. 같은 콩이지만 자라나는 환경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게 하는 요소를 ‘ 유전 환경 개성’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란 유전인자 속에서 태어나고 환경에서 자라서 자기의 독특한 개성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일생을 통해서 가장 깊이 영향을 끼치는 것은 환경입니다.
한 가정에 천사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습니다. 부모는 순진하고 애교 넘치는 딸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딸에게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얼굴은 사나워지고 말투는 표독스러워졌으며 행실은 나빠졌습니다.
부모는 딸이 갑자기 변한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뾰족한 해답을 찾지 못 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우연히 딸의 책가방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요괴인간이 잔뜩 그려진 책받침과 불량만화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딸은 공부할 때마다 책받침에 그려진 끔찍한 요괴를 바라보며 그 이미지를 마음 속에 키웠던 것입니다. 딸의 마음은 어느새 파괴적인 성격으로 변해 있었던 것입니다.
현명한 어머니는 딸에게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진 책받침과 위인들의 명상록을 선물했습니다. 이때부터 소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예전의 착한 딸로 변화되어 갔습니다. 좋은 환경이 좋은 사람을 만듭니다.
환경이란 둘러싸고 있는 것과 영향이 미치는 것으로서 자연환경, 인문환경, 물리적 환경, 정신적 환경 등이 있는데 이것들은 크게 사회적 환경(인간 환경)과 물리적 환경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환경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지만 그러나 아무도 이것이 왜 변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래도 살려면 이 변함을 무시할 수 없고 그 변하는 환경에 맞추어 가야 하는데 우리는 이 맞춤을 적응이라고 부릅니다.
생물학에서 보면 ‘적자생존’의 법칙이 있어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은 생존할 수 있지만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물은 생존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정신건강에 있어서 적응하는데 성공한다면 정신건강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좋은 인격을 형성하게 되지만 실패한다면 나약한 인격을 형성하게 되어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환경과 관련하여 우리가 늘 이야기하는 것은 맹자의 어머니가 교육을 위해 세 번씩이나 이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시장에서 살았는데 상인들의 장사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흉내내기 때문에 맹자의 어머니는 조용한 산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번에는 공동묘지 옆이라서 곡하고 사람 파묻고 하는 것을 흉내냈습니다. 그래서 또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학자들이 사는 마을에 살았더니 공부하는 모습을 흉내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최근 AP 조사에 의하면 조사대상 10개국 중 최고로 5명중 4명인 81%가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은 고사하고 인간의 눈으로 보아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환경을 극복하고 역경을 넘어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해결 받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믿음만을 이야기한다면 여러 믿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믿어 나만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요즘 펀드식 주식이라고 하나요. 내가 잘 모르니까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은행이 나의 재산을 알아서 관리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인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해서 나 자신이 관리하시고 나 자신이 고민하며 해결해 나가시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자신의 모든 일을 맡길 것을 권면하십니다. T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왕 맡겨드리는 것 다 맡기세요. 얼마나 편안합니까. 주님이 내 일을 다 알아서 관리해 주시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앞으로의 일을 다 아실 뿐만 아니라 설계해 나가십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염려한들 키를 한자도 키울 수가 없고 머리털 하나도 검고 희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긴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 삶을 맡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이 왜 나옵니까? 맡겼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맡기지 못한 사람은 순종할 것이 없습니다.
좋은 예를 우리는 창세기 37-50장에 걸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나이 17세에 형들이 미워해서 애굽상인에게 팔아버립니다. 그 후 애굽에서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누명을 쓰고 억울한 감옥 생활을 합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이쯤 되면 성격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릴 것입니다. 사회와 자신을 팔아먹은 형들에 대해서 원한과 증오가 싸일 것입니다. 그러나 총리에 오른 요셉의 고백은 창 45:5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창 50:20에는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Foi chamado.
팔릴 때, 모함을 당할 때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한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어진 그 환경에 적응하며 신실하게 살았을 뿐입니다. 제 신앙의 좌우명이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라”É. 하나님께 나의 일생을 맡기시고 순종하세요. 이것이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환경을 만들고 이끌어 가시는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방인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방인과 구별된다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필요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롬 12:1-2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Ten alta. 스토익 윤리(Stoic Ethics)에서는 욕망과 감정을 제어하는 것을 자기의지로 봅니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부한 사람은 가장 적은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스스로 만족(self-sufficient)하는 것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자족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만족입니다. 아마 불교의 철학도 스토아 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수용하고 자기가 거기에 적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정신 세계에서 실제는 없는데 있는 것으로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정신으로 속여 스스로 만족감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헛된 욕망에 빠져서 증오를 품고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해결책이 아닙니다. 마치 공산주의 사상처럼 인간을 스스로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골 1:18-19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Di. 기독교 말하는 ‘자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자족으로 스스로 속이는 정신적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성령의 충만한 만족입니다.
셋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환경의 적응을 넘어 우리는 하나님의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나라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그 품에서 삶의 과거, 현재, 미래를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본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Proverbios 27:8)Ten alta.
고향의 품에 가면 마음을 나눌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뜻함이 있습니다. 함께 나눌 눈물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은 이 품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에 젖어서 이 땅의 고향도 잃어버리고 있고, 영원한 본향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갈 영원한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Hebreos 11:16). 신앙은 새로운 고향, 즉 진정한 내 나라를 발견한 기쁨이자, 그곳을 향한 여정입니다. 그 길이 비록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지만, 아브라함처럼 말씀에 순종하여 지시하신 땅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평안과 영생이 약속되어 있습니다(T 7:13-14). 우리는 그 본향에 빈손으로 갈 것이 아니라, 조국 나라와 민족을 예수 사랑으로 섬겨서 풍성한 사랑과 섬김의 열매를 갖고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해야할 일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자들은 하도 율법이 많아 늘 연구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해야할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해야 할 일로 결론을 내린 것이 부모의 장래였습니다. 부모의 장래가 나면 율법을 강론하다가도 가야합니다. 한마디로 만사를 제쳐놓고 부모의 장래를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율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제일 먼저 해야할 우선 순위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우선 순위는 달랐습니다. Lucas 9:59-60에 보면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전파는 부모의 장사보다 더 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해야 되는 일이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에서 제자운동의 교육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 중에서 진정 제일 중요한 것을 복음전파에 놓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환경에 지배를 받고만 있지 않습니다. 환경의 인도자 되시고 운행자 되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34절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사람들은 때때로 환경과 팔자를 탓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행동으로 나타난 결과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우화를 전합니다. 어느 날 회색 털을 가진 늑대가 양 을 마구 잡아먹자 농부들이 늑대를 잡아 두들겨 팼습니다. 늑대는 소리쳤습니다.『나를 이렇게 때려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을거다. 내 털이 회색인 것은 내가 알 바 아냐.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지』그러자 사람들은 더 세게 두들기며 말했습니다.『네 놈의 털이 회색이니까 두들기는 것이 아니라 네 놈이 양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두들기는 것이다』
마음은 살 수도, 팔 수도 없지만 줄 수는 있습니다. 서로 나눌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가 환경에 적응할 뿐만 아니라 극복하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먼저 복음전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주위사람 다 무시하고 전해지는 것입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먼저 마음을 줄 때 상대편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먼저 여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은 “먼저”하라고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은 먼저 마음을 주는 것입니다. 철학자 …는 “당신이 평생에 한 사람의 이름만 기억하고 있어도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이 한사람이 되어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