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하는 사람

A Vida de Xesús(2. 준비하는 사람) / Texto : 마3:1-12, 막1:1-8, 눅3:1-18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어느 지방 신문사에 개를 잃은 여행자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자기 개를 찾아주는 사람에게 1만 달러의 현상금을 준다는 광고를 의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음날 그 여행자는 신문이 나오기를 고대했지만, 웬일인지 신문 발행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통 소식이 없고 신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행자는 기다리다 못해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신문이 왜 나오지 않습니까?” 나는 개를 찾아달라는 광고를 낸 사람인데요.“
그러자 신문사 측에서는 이렇게 답변하는 것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신문을 내는 것보다 당신의 잃어버린 개를 찾아주고 1만 달러를 받는 편이 더 큰 이익이 되기 때문에, 지금 사원들이 하루 쉬면서 당신의 개를 찾고있으니 조만간 찾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신문사는 차라리 없어지는 편이 낫겠지요. 왜 신문을 만드는지 전혀 소명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도 이런 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돈을 더 벌고, 출세한다고 하면 그리로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이 사람은 그렇게 되는 데로 살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서도 이만한 사람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 사람의 진심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요한”입니다.

성경의 이름 중, 그러니까 유대인의 이름 중에 제일 많이 사용하는 이름이 여자는 “마리아”이고 남자는 “요한”입니다. 오늘 본문의 인물 역시 “요한”입니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입니다. 그런데 요한이라는 인물이 많다보니 구분하려고 우리는 “세례요한”이라고 부릅니다. 이름의 뜻에서 이미 이 사람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사람, 유대인에게 세례를 베푼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사람이 하나님이 보낸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예비하는 사람
세례 요한의 탄생은 마가엘 천사에 의해서 사가랴에게 전해졌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가랴, 엘리사벳 부부에게 하나님의 역사로 세례요한이 태어났습니다(눅1장).
본문 2절에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서 모두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마3:3, 막1:2-3, 눅3:4-5)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온 것은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오시기전 680년경 이사야에 의해서 이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이사야 40:3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세례요한을 가리켜 한 말씀입니다.
말라기 3:1에서도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
만일 우리가 그 당시 요단강 가에서 외치던 세례요한의 때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의 신비와 능력이 어떤 것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해 줄 것입니다. “첫째, 그는 인간이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셋째, 그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해줄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삶에 대해서 본문 6절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고 했습니다. 이 한 절이 세례요한의 생활을 말해 줍니다.
세례요한이 말로만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자신의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려고 했다면 세례요한 역시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선지자적인 삶이었습니다. 당시 부패해 있던 로마의 관리들이나 유대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먼저 도덕적인 검소한 삶이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아버지가 제사장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당연히 성전에서 살아야 했고 성전에서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는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살았으며 제사장 복장이 아니라 야인의 복장인 약대털옷과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살았습니다.

자신의 좋은 조건과 문화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선교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간 영국의 C.T. Studd가 있습니다. 영국의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크리켓 선수로 명성을 날리던 대학 시절, 선교의 소명을 받고 캠브리지 7인의 한 사람으로 중국으로 건너가, 후에 허드슨 테일러와 함께 중국 복음화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리고 53세가 되던 1913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프리카 심장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기에령 콩고(옛 자이레공화국)로 갔습니다. 그리고 선교를 좀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심장 선교회(The Heart of Africa Mission)’을 설립하였습니다. 이것이 훗날 영국의 ‘WEC 국제선교회(1918)’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삶은 적어도 율법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이 어떤 삶을 말하는지 보여주는 삶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핵으로 하여 하나의 거대한 조직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민족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의 수도는 국가라는 조직의 핵이 되는 사람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으며 지방 시골까지 조직망을 만들어서 살아갑니다. 세례요한은 가만히 있어도 유대사회를 구성하는 국가 조직에서 핵이 되는 인물로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이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광야로 나가서 야인으로 살았겠습니까?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자랑삼아 입는 자주 빛의 부드럽고 화려한 예복을 거절하고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복장을 했습니다. 이것은 일반 서민에 비해서도 화려하지 않은 복장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서는 목사님은 치사하게 별 것 아닌 입는 것 가지고 너무 확대해서 말씀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의식주란 제일 중요한 문제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Mateo 6:25)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예수님의 옷을 로마 군병들이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그렇게 화려했겠습니까? 그것을 떠난 십자가에 달려 사형을 당하는 사람의 옷을 가지고 싶었겠습니까? 물론 성경은 그것조차도 구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도 성경에는 정확하게 예언되어 있고 또 그것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옷에 신경을 쓰고 제비를 뽑아 가져가야 할만큼 옷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먹는 것은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얻은 음식입니다. 매일이야 이것만 먹었겠습니까? 혹 어떤 분이 또 오해하여 메뚜기 그것은 고급 요리인데 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요즘은 메뚜기요리는 일류 호텔에서도 먹기 힘든 요리랍니다. 또 거기에 석청()은 또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하지만 세례요한의 때에는 이것은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식입니다. 요즘 어린아이들처럼 “아빠가 옛날에 먹을 것이 없어서 굶은 적이 있단다. 그러면 아빠는 라면 끊여먹지!”라고 하면 안됩니다. 오늘날에도 희생 없이는 선교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WEC선교회의 네 가지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희생(Sacrifice)과 믿음(Faith), Santidade(Holiness)과 교제(Fellowship)É. 이중에서 희생에 대해서 보면

희생(Sacrifice)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기꺼이 감수한다.
희생을 제자 된 삶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뜻을 개인적인 안락과 욕심, 경제적 안정, 현재의 사고방식이나 생활 수준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희생의 정신은 다음을 포함한다.
◦ 공동생활의 참여 또는 검소한 생활 조건의 수용
◦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나 그리스도인과의 교제를 포기
◦ 복음을 위한 독신
◦ 팀 전체의 목표를 위해 잠시 개인적 목표나 사역을 뒤로하는 것
◦ 교통, 의료 혜택 등의 포기
◦ 복음을 위해 받을 수 있는 박해, 투옥, 자유의 제한, 죽음을 각오
이런 희생의 정신으로 선교한 결과 WEC 국제선교회는 복음주의적 국제 선교 단체가 되어 현재 50개국에서 모인 2,000여명의 선교사가 80여 개국에서 사역하는 단체가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에게는 세상의 명예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지막 그가 죽기 직전에 세례요한의 자제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예수님의 사역 초기이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확실히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의심을 가진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역초기에 당신이 메이야 임을 유대인에게는 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꾸만 빌미를 잡고 사역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이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마11:7)Ten alta. 세례요한이 이 땅에 온 목적은 사람들에게 단순히 인망을 얻고 인기를 얻으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하는데 세례요한의 소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있었지만 결코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2.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
세례요한은 사람이 없는 거친 들판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3절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오늘 우리들도 광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광야로 가십시오. 오늘날의 광야가 어디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가 보지 않아도 세례요한처럼 소명이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에게 나온 무리들은 너무나 다급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그들은 세례요한에게 모여들었습니다. 군인, 세리, 가난한 사람, 바리새인, 회의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기심에 나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무리들에게 당시 유행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당신도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말을 들은 사람이구려”. 또한 세례요한의 말은 헬라 철학자들이 모여있는 아덴에서도 들을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출현하기까지 이스라엘은 약 4백년간 예언자가 없는 침묵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갈망 사상이 최고조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혹시 이 사람이 메시야인가 하고 생각도 했습니다(눅3:15).
그는 하나의 사명을 위해서 이 땅에 왔고 그 사명을 위해서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명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상부 기관의 명령으로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조사하러 나가서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대답만 했습니다. 자신은 주를 위해 외치다 없어질 인물이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사명은 외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회개하라! 장차 올 진노에서 피하라”는 말 한마디 속에서 무서운 긴박성과 그의 열정과 애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외치는 한마디 그것은 결코 광야의 메아리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라!, 죄 사함을 얻으라!”이 소리는 예수님의 사역에 기초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약 3년의 공생애만을 보내시고도 그와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세례요한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회개였습니다. “회개”는 가던 길을 돌이켜 새 길로가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한 회개 없이는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Vostede! 우리도 지금까지 세상을 향하여 갔다면 돌이켜 하나님께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한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면 광야로 나갑시다. 결코 내가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려고 할 때 선교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광야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그곳에 메뚜기와 석청이 있지 않았습니까?

미국에 한 유명한 교회에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공명심에 사로잡혀서 성직을 버리고 정계로 나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야심적인 활동을 펼쳐나갑니다. 본심은 아니었지만 신앙이 점점 박약해지고 교회와 멀어지게 됩니다. 친구들이 충심으로 충고합니다. 만나서 대화하는가 하면 편지로 권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 물리치고 사회적 명성과 정치적 권력으로 큰 역사를 이루어보겠다고 세상으로 나간 것입니다. 마침내 불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만취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3살 난 귀여운 딸아이가 쪼르르 따라오더니 말합니다.
“아빠, 저 글 읽을 줄 알아요
“그래? 한번 읽어보려무나딸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그마한 성경책을 펴들고 읽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박또박 읽고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버지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흐릅니다. 견디다못한 그는 딸을 물리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한참이나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가 비록 이 처지에 있지마는 진정 주를 사랑합니다.’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하는 사명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 길을 완성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우리가 다른 것은 그는 예수님 앞서서 왔고 우리는 뒤에 살고 있다는 것 외에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여 마지막 때의 사명을 완수하는 우리 주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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