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주제입니다.
As palabras de Xesús(111. 믿음이 주제입니다.) / Texto : Só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저의 어머니는 학교 교육을 전혀 받아보지 못하신 분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저희 집에 오셔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셨습니다만 예수를 믿기 전에는 보통의 한국 여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분에게 놀라운 기억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당에게 가서 들은 이야기는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전부 기억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무당의 이야기를 전하는 어머님이나 듣는 저의 아버지의 모습은 진지함 그 자체입니다. 점술가가 점괘를 말할 때 허튼 짓하고 한 눈을 파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집중을 해서 무슨 말일까 하고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지만 무당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무당이 하는 말을 듣는 그 이상의 진지한 예배태도가 아니면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아주 진지합니다. 어떻게 하면 굿을 잘할까? 그 굿을 하기 위한 각종 절차, 준비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듣고 준비를 합니다. 또 부적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는지 모릅니다. 성경보다 훨씬 더 부적을 더 잘 간수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부적은 간수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끄집어내어 쓰다듬으면서 위로 받고 만지면서 위로 받습니다. 잘 때는 배게 밑에 넣고 잡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보다 그 사람들이 더 마음을 쏟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보고 신앙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미신을 좇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미신은 학문적으로 정의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주나 돈으로 신의 마음을 달래고 얼러서 자기 목적을 이루는 것.”É. 그러니까 자기는 변하지 않고 신을 달래고 얼러서 내게 좋도록 하는 게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미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이 좋아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귀신을 달래서 내게 좋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미신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국인의 무속적 믿음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찼습니다.
물은 차면 넘치게 마련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갈 4:4)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이후 구원의 계획을 마련하고 계셨습니다. 성경의 첫 권인 창세기가 마치기 전에 야곱을 통해서 예언하십니다. 창 49:8-10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10 홀이 유다를 떠나를 아니하며…”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을 삼으시고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십니다. 그리고 십계명과 말씀들을 주셨습니다. 이제 길은 보여진 것입니다.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Prensa 24:7)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6-7),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신 27:10)Descubriu que.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수아 이후에 더욱 타락의 길로 빠집니다. 하나님은 여러 제사장들과 사사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사사들이 먼저 죄에 빠지는 참담한 모습을 보게됩니다. 사무엘을 통해서 다윗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초대왕인 사울의 손을 피해 10년을 도피생활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유다지역에서 먼저 왕이 되어 7년 6개월을 지내다가 이스라엘과 통일되어 왕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11장에서 밧세바를 범합니다. 그리고 그의 남편 우리아도 죽입니다. 간통죄에 살인죄까지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급기야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삼하 12). 다윗은 회개했지만 이 죄의 대가로 그의 아들들의 죽음과 반역이 일어나서 모두 죽고 솔로몬만 살아남았습니다.
왕위는 솔로몬에게 넘어갔고 솔로몬은 1천 번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지혜를 구하여 그 어느 왕국보다 더 강력한 나라를 세웁니다. 그러나 그는 1000명의 이방 여인들 때문에 우상숭배로 죄에 빠집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남왕국(유다)과 북왕국(Israel)으로 나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죄로 10지파를 이스라엘로(왕상 11:31, 35) 한 지파만을 유다로 남겨두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왕상 11:36). 그리고 이후 이스라엘의 12왕과 20명의 유다왕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들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루는 왕은 없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다윗을 표준으로 제시하셨습니다.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왕상 11:4, 33, 15:3, 왕하 14:3)라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드디어 하나님은 오랫동안 품으셨던 속내를 드러내십니다. 이사야를 통해서 보내실 메시야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Catro 42:1-3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로서 오랜 바램이었던 유다지파의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T 1:1).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오셔서 믿음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세례가 당시 기존의 제사 입장을 뒤집는 일대 개혁이었다고 지난주 말씀에서 설명 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는 제물이 있어야 했는데 가난한 자들은 비둘기조차도 살 수 없어 제사를 드리기 곤란해 졌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런 제물이 필요 없는 세례를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물세례(침례:벱티스트)보다 더 강력한 세례를 주실 분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세례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베푸시는 것인데 아무나 받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단 한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회개입니다.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구약 시대는 자신들이 제물을 바쳐서 제사를 드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직접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우리는 구약과 같은 방법으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Hebreos 7:18)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Hebreos 10:9)
하나님께 가는 방법이 구약은 제사였다면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 지역에 가셨을 때의 일입니다(T 8:5-13). 로마 군인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뛰어나왔습니다. 순간 아마 제자들은 적지아니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루살렘에서는 서기관과 율법사들을 통해서 감시하고 있는데 이제 로마군까지? 군장과 계급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로 로마군인으로 수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백부장 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고쳐달라고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가서 고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자신의 수하도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는데 직접 가시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Ore contan só”Foi chamado.
이와는 비교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께 나아왔는데 이 여인은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던 마리아입니다. 병이 들어 있는 오빠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하고 있었으며 당연히 가셔서 고쳐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현재 있는 곳 요한이 처음 세례 주던 곳인 요단강 저편(요 10:40)에서 이틀이나 더 계셨습니다. 아마도 강을 건너 유대(베다니)로 가시면 다시 이곳에 오시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곳의 병자들과 하실 일들을 정리하시는데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 입장에서는 답답합니다. 길도 먼데 시간은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는 나사로는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 11:21, 32)Foi chamado.
이에 비해서 백부장은 “Ore contan só”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T 8:10) “기이히 여겨”의 원문 qaumavzw(다우마조)는 ‘놀라다, 감탄하다, 이상히 여기다’로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에 깜짝 놀라셨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마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서 쫓겨나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신 것으로 보아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이나 헬라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미안하며 예수님께 수고를 끼쳐 드리는 것도 죄송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 사건이 있습니다.
T 15:21-27절에 소개됩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일입니다. 두로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건축자제를 나르던 곳입니다(삼하 5:11, Reis 5:7). 시돈은 여기서 북쭉으로 40Km위치에 있는 두 곳 모두 유명한 항구도시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소리를 지르며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T 15:22)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는 막 7:26에서 ‘수로보니게’(Syrian Phoenicia)라고 하여 이 여인의 혈통이 시리아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 이었음을 말합니다. 당시 여자가 자기 딸이 미쳤다고 말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은 창피해서 숨겨놓고 지내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인지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시끄러워서 제자들이 듣다못해 예수님께 와서 말합니다.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그리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마 15:24) 여자는 오자마자 예수께 넙죽절을 하며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T라”고 하셨는데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7-28)
이 여자도 이방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큰 믿음을 가졌다고 칭찬을 들었습니다. 원문에는 ‘여자야’ 앞에 ‘오(!’W)’라는 호격의 감탄사가 있습니다. 그냥 ‘여자’라고 부른 것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의 놀라움과 감탄이 그대로 표현된 것입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만 받으며 자라나는 자녀는 부모님의 고마움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결손 가정이라고 말하는 가정의 아이들이 더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고마움을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이라도 무조건 구원받을 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Timothy 1:15)고 했습니다. 기독교 윤리에 대해서 언급하는 로마서 12장에서 제일 먼저 주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겸손한 생각을 품으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도 첫 부분은 교리편이고 다음 부분이 윤리편인데, 거기서도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라는 것입니다.
존 플레처(John Fletcher)란 사람은 그의 제자가 묻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기도 응답으로 꼭 한가지만 주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는데 당신은 어찌하렵니까 하니 “겸손을 구하지.” 한가지 더 주시다면? “또 겸손이지.” 한가지를 더 주신다면? “또 겸손을 구할 것이라”고 하였다.
믿음은 겸손으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최대의 적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제가 설교할 때 우리집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저희 집사람이 뭐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많이 하냐고 그럽니다. 그런데 성경의 저자들은 그보다 더한 것도 솔직히 말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당연히 될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된 사람입니다.
당연히 예수 믿어야 될 집안에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목사가 될 자가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구원받아야 할 자가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