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Culto AM
Rev yiyoungje Sermón MP3 Escoitar 오후예배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몬 1:10)
오늘 빌레몬서에는 참담한 삶을 살던 한 남자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이었습니다. 당시 노예는 그 생명이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자기의 신분을 벗어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예들은 자주 주인에게서 탈출을 합니다. 바로 오네시모도 주인이었던 빌레몬의 집에서 탈출하여 지금 바울과 함께 있습니다.
빌레몬의 입장에서 보면 당시 자기 집의 한 노예가 그것도 물건을 가지고 허락도 없이 집을 뛰쳐나갔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보통 집 주인처럼 만일 잡히면 완전히 물고문을 내든지, 죽여버리든지, 팔아버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이러한 집주인 빌레몬과 노예였던 오네시모와 오네시모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청하는 바울과 이 세 사람의 관계가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의 13세 권의 서신중에 제일 짧지만 이런 점에서 제일 인간적인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 사람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 봅시다.
이 이야기를 할 때 분명히 염두 해 두어야 하는 것은 여기에 나오는 세 사람 모두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레몬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의 태도와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Paul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9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11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12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13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의 자유의지를 바울은 설명합니다.
복음은 어느 때나 강제적이어서는 안됩니다. 한 때는 잘 돼 보이나 나중은 안됩니다. 어린 자녀들이 부모님께 도전하는 시기는 부모님보다 힘이 세질 때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자립하고 더 힘이 세지만 아주 모른 척 합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강제적으로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실 예수님이 강제로 하신 것이 없습니다.
그냥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 그 말이 바울이 무너졌습니다.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예수님이 바울를 전도했다면 이렇게 죽도록 선교여행하고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네시모
16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노예신분의 오네시모가 어떻게 이런 대우를 받을 수 있습니까?
기독교는 신분을 뛰어넘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저는 가끔 선교사임들이 올리시는 사진을 보면서 제 어릴 때 기억을 하곤 합니다.
코를 질질 흘리면서 교회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교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늘 그렇게 있었습니다.
목사님 자녀들하고 장로님 자냐들은 교회가 주인인 듯 생활했지만 나에게는 감히 올려다 볼 수 없는 상류층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오늘날 목사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마리의 사랑하는 마음이 제게도 찾아왔습니다. 죽어야 되는 노예의 신분이지만 바울의 간절한 편지는 오네시모를 자신처럼 대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습니다.
빌레몬
자신이 당시의 법대로만 처리한다면 오네시모는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리스도인이 먼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법은 초등학문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위에 법이 있습니다. 하늘의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성경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다양한 말씀들 주셨습니다. 빚진 자의 비유에서 가진 주인이 탕감해 줄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죄 사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무엇이든 누구이든 다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인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은 개
건강한 어떤 사람이 집에서 키우던 개를 끌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복날이 가까워서 키우던 개를 잡으려고 산으로 끌고 간 개를 두들겨 팼습니다.
한참이나 두들겨 맞던 개는 주인의 손을 벗어나 도망을 쳤습니다.
산 속에서 여기저기 도망간 개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고 투덜투덜 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까 산에서 주인에게 개폐 듯 두들겨 맞던 개가 반갑게 맞이하는 것 아닙니까!
꼬리를 흔들고 주인의 손을 핥고, 바로 한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감동을 먹은 주인은 한참 동안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앞으로 내가 개를 잡아먹으면 나는 개새끼다!’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바울과 같은 위치라면 용서의 청원을 해야합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빚진 것도 값아 주겠다고 하는 책임지는 용서를 해야 합니다.
내가 오네시모의 입장이 되었다면 이제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감사와 충성을 다해야합니다. 용서해 주시는 주님을 위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빌레몬 이라면 바울의 그러한 간청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 아래에 굴복하고 한 형제 자매로서 인격적으로 대우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참 우리는 아름다운 광경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