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예수님의 생애(11. 사마리아) / 요 4:3-10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는 돼지를 잡아서 잔치를 합니다. 다른 짐승도 많은데 왜 돼지를 잡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주인이 소를 잡으려고 하니까 소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밭농사는 누가 합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럴 듯해서, 주인은 개에게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개가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집은 누가 지킵니까?” 그 말도 그럴듯해서 주인은 고양이에게 갑니다. 고양이가 하는 말이 “주인님, 내가 죽으면 쥐는 누가 잡지요?” 그 말도 그럴듯해서 주인은 돼지에게로 갔습니다. 돼지는 잠만 쿨쿨 자고 있었습니다. 결국 주인은 잔치를 위해서 사명이 없는 돼지를 잡게 된 것입니다.
1950년대 세계 선교의 영웅 짐 엘리어트가 정글에서 피를 흘려 죽은 후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답니다. “나의 사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또 하나의 발자국을 남기셨습니다. 바로 사마리아로 가신 것입니다.
사마리아로 가시는 예수님
“4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의 원문에는 e[dei(데이)가 있습니다. 이 말은 “반드시 ...을 해야한다” 또는 “틀림없이”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반드시 지나쳐 가시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길(사마리아)로 다니지 않았습니다. 남 유대에서 예루살렘이나, 갈릴리로 가려면 요단 동편으로 돌아서 가는 길은 대략 6일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로 지나가면 3일정도가 걸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택하신 것은 시간적인 단축의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유대인이 사마리아 땅으로 지나서 가지 않은 이유는
B.C. 722년전 앗수르에 의해서 북 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이 때 앗수르 사람들에 의해서 혈통과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왕하 17:24).
이로 인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깊은 반목이 생겼습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이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마리아인들 역시 그들의 통행을 막았습니다.
이런 깊은 반목과 역사성을 뒤로하시고 꼭 이 길을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동사하나가 나옵니다. “통행하여야”로 번역된 dievrcesqai(디엘마코이)는 “가다, 통과하다”의 뜻입니다. 본문 4절을 원문으로 다시 번역한다면 [사마리아로 반드시 통과하겠다]가 됩니다. 본문의 뜻으로 보아 예수님은 사사로이 고집을 부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로 가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에 순종하시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길로 가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인 것입니다.
역사의 책임을 함께져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을 보면서 유대인들의 이기적인 면을 볼 수 있습니다. B.C. 722년 전에는 하나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자신의 나라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살지 못해서 나라를 앗수르에게 빼앗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들이 앗수르의 혈통과 섞여있고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라고 상종치 않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중국 땅에 사는 조선족 약 200만 명과 러시아 46만 명이 있습니다. 대부분 주변국의 해외동포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희생양으로 버려진 것입니다. 러시아에는 초기 거의가 농업 이민이었으나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망명 이민이 이어졌습니다. 고려인들은 그 땅에 재대로 정착하기도전에 스탈린의 이른바 대숙청 당시 연해지방의 한인들은 유대인, 체첸인 등 소수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9월 9일부터 10월말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이들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는데,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 5000여 명으로, 이 가운데 1만 1000여 명이 도중에 숨졌습니다. 사실 이들이 없었다면 구 소련이 해체되고 선교사가 중앙아시아로 들어가서 빨리 정착하게 된 것은 고려인의 덕분이었습니다. 현재 중국선교도 비슷합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조선족이 없었다면 중국에 정착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을 미국에 사는 캐나다, 호주 등 서방에 사는 분들과 어떤 면에서는 차별하고 있습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서방으로 가신 분들은 잘살려고 이민을 가신 분들이고 고려인이나 조선족은 대부분 이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서 생겨난 분들입니다.
서울에 화양리가 있지요. 그 이름의 유래는
1970년 전까지 110번지 32호에 화양정이 있엇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고, 또 일설에는 회행리(回行里)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단종이 숙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이곳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송씨 부인과 이별하면서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하여 회행리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잘은 모르지만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속된말로 좀 노는 여자들을 “화냥년”이라고 했습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여자들을 보냈었는데 그들이 다시 돌아와 정착한 곳을 잡아준 곳이 서울 외곽의 강나루 아래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화냥년”이 사는 곳이라고 해서 “화양리”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사람들은 왕래하지 않고 멀리했습니다. 사실 이들은 민족의 희생양이었는데 말입니다. 일제 때는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해 정신대라고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던 분들도 있습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나라를 지키지 못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문제에 우리는 공동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바로 사마리아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수가에 도착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수가라는 야곱의 우물이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이 때의 시간은 6절 “때가 제 육시쯤”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은 로마식 계산으로 오후 6시를 말합니다. 유대인의 시간으로는 정오 12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때 물 길러 나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납니다. “7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대답하기를 “11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지금 물길을 그릇도 없다는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12년 혈루병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도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사람이 많은데 누가 예수님의 옷을 만졌는지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얻으시지도 못할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까?
이 여인하고 대화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여인은 곧바로 “9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 어떻게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건네냐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사마리아를 피해 다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과 상종치 않으려고 입니다. 즉 말하기 싫고 함께 있기 싫어서입니다. 유대인은 늘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죽여야 합니다. 베드로가 고기 많이 잡고, 주님을 알아보고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를 떠나소서”입니다.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떠나시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말을 건네오는 유대인인 이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유대인이라면 자기에게 말을 걸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상하기는 이 여인이나 예수님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더 그럴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대화하고 있다보니 예수님이 물 달라고 한 것은 순전히 대화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 사람이 고향을 묻고 나이를 묻고, 집안을 묻고, 학교를 묻는 것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다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분을 알고 상대를 카스트적인 개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잘못이지만 또 막상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면 대화가 안되지 않습니까? 어쩌면 대화를 시작하려고 사전 준비작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꼭 알 필요는 없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묻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이며 상대와 대화하려는 노력임에는 분명합니다. 아마 서양 사람에게 갑자기 그렇게 묻는다면 상당히 이상한 눈으로 처다 볼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말을 건넴으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이 물을 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우물은 깊고, 물길을 그릇, 두레박도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제6시(로마시간) 유대시간으로 12시인데 학자들 간에 이 시간 논란이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유대식 시간 정오 12시가 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의 일기로 볼 때 보통 물긷는 시간은 태양 빛이 강하지 않은 오후 시간을 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우물에 바가지가 없다는 것을 모르고 왔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매일 이 시간에 물을 길으러 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물을 길을 줄 알고 왔는데 낭패 아닙니까? 다시 바가지 가지러 동네로 들어가야 하니까 말입니다.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이 시간에 물 길러 왔던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예수님께 물도 드리지 못하고 자신도 물을 푸지 못하는 이 여인은 잠시나마 난감해 졌습니다. 이 때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어렵게 된 상황 속에서 물을 달라고 하신 이가 누구인지 알면, 그분이 생수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을 알아보면 문제가 있을 때 그분에게 구하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하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알아보셨으면 그분에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물이 떨어졌을 때, 우리가 난감 할 때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분은 무엇이든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제 대화가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적인 문제에서 영적인 문제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아주 무식한 여자는 아닙니다. 예수님을 몰라보는 이 여인은 예수님께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면서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바로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십니다. 지금 문제는 ‘물’, ‘생명수’의 문제입니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 어떤 물입니까? “샘물”입니다. 샘은 마르지 않습니다.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솟아나는 물의 샘]이 됩니다.
구약에서 시편기자들은 영혼의 갈증을 물로 비유했습니다. 이런 사상은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에서는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이 여인은 영원히 물을 해결해서 여기에 물길로 오지도 않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15절). 그런데 예수님은 난데없이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 4:16)고 하십니다.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하고, 예수님은 “18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19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분이 결혼하는 신부에게 축하 전보를 쳤습니다. 전보는 짧게 써야 하잔아요. 그래서 “요한일서 4:18”만 써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만 주례사가 요한복음 4:18로 잘못 알고 읽었습니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결혼식장은 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주례가 다시 보니 요한일서 4장 18절 이었습니다. “사랑안에서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였습니다.
우리의 갈급 한 심령에 영원히 물을 줄 수 있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주님에게서만 샘물이 나옵니다.
타이완에는 신을 사 가지고 와서 일년 동안 집에 모셔놓습니다. 그리고 별로 도움이 안되면 다시 사왔던 곳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충전을 시킵니다. 즉 큰 신 옆에다 두고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집에 가져와 다시 일년을 지내봅니다. 그래도 별 도움이 안되면 다시 가져가고 다른 신으로 바꿔옵니다.
우리도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조상신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 조선시대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유교’를 신봉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이해하는데 이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조상신이 생겨난 것입니다. 부모는 떠나도 언제나 자식을 위해서 돌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솔직히 이야기 해 봅시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 죽습니다. 어른이 되고 죽으면 무슨 능력이 생길 것 같습니까? 젊었을 때보다 더 힘이 없고 무능력해집니다. 그러다 죽는 것인데 죽어서 무슨 능력이 생기고 귀신이 됩니까? 치사하게 죽어서 자식들이 제사지내고 잘 대해주면 자식에게 잘해주고 안 해주면 자식 잘되는 것 해방 할 겁니까? 세상에 그런 부모는 없습니다. 죽어서 그럴 생각하지 말고 살아서 주님말씀하나라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능력이십니다. 그분만을 의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우리가 버린 곳입니다. 관심이 없어진 곳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 계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주님은 결코 사마리아를 버리지 않습니다. -아멘-
예배의 문제
(요 4:20)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 4:23)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 4:25)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요 4:26)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요 4:27)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니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요 4: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요 4:29)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요 4:30)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 4:31)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요 4:32)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요 4:33)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요 4: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 4:35)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 4:36)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4:37)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요 4:38)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요 4:39)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요 4:40)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요 4:41)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요 4:42)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