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길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사 35: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계 4:8)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구별된 단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아멘, 할렐루야”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가지 더 배웁니다. ‘거룩’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도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된 말입니다. 우리말의 ‘거룩’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 단어를 원문의 코데쉬(vd,qo)를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코데쉬는 성소입니다. ‘거룩’이라는 말과 ‘성소’는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하나의 의미이며 같은 뜻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내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서 있던 시내산의 땅이 금잔디를 깔아놓은 땅이 아닙니다. 그곳 역시 다른 땅과 다르지 않습니다. 돌이 있고, 바람에 날리는 먼지 같은 흙이 덮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돌과 흙이 있는 땅 때문이 아닙니다. 그곳이 시내산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선 곳”, 하나님이 이 땅을 밟고 서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서 사람을 만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곳, 그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그곳이 성소입니다.
사무엘상 5-6장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 블레셋 에벤에셀 이라는 곳으로 가져갑니다. 그리고 어찌해야 모르니까 자기들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별 짓을 다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이 별 짓 다해야 안됩니다. 하나님의 것을 빼앗아가서 될 일이 없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삼상 6:19)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한탄합니다. 무식한 블레셋 사람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무서움을 안 것입니다.
구약도 잘 보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법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법궤 없는 예루살렘은 하나님 없는 예루살렘입니다.
거룩한 길이란 성전으로 가는 길이요,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모든 길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길보다 좋을 순 없습니다. 그 길이 대로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길에 융단을 깔아 놓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길만이 거룩한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길은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 여기에 보면 우리의 힘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이 아닙니다. 주의 힘이 아니면 우리가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거기에 대로가 있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대로(마슬룰)에 있어서 다음 두 가지를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첫째는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시기적인 문제입니다. 이 대로가 언제 있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본분 다음에 나오는 9-10절에 보면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본문의 장은 택한 백성이 누릴 구원의 축복에 대해서, 또 장차 임할 메시야의 구원에 대한 예언적 성격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오라 하실 때, 우리의 수고가 끝날 때, 이러한 길을 예비하신 다는 것입니다.
둘째, ‘대로(마슬룰)은 일종의 공공도로를 말합니다. 나라에서 닦아놓은 도로를 국도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닦아 놓으신 길입니다. 7절에 보면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뜨거운 사막이었습니다.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여우나 늑대가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길이 될 수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 길을 내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길을 가리켜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히 10:20) 라고 합니다.
역사상 미국 교계에서 이적과 기적을 제일 많이 체험하고 주님과 함께 사역한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캐드린 쿨만(Kathryn Kuhlman)입니다. 복음이 한 나라에 들어가면 반드시 이런 기적을 하나님은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부흥과 기적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캐드린 쿨만은 여자입니다. 평신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그냥 여사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캐나다 벤쿠버 집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4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 경기장에서 열렸는데 캐나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경기장에는 휠체어를 타고온 환자, 들것에 실려온 환자, 목발을 집고 온 사람들로 가득 찼고 기적적으로 신유의 은사를 체험하고 병 나은 사람들이 단 위로 올라와 쿨만 여사에게 안수 받고 간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쿨만 여사에게 허리를 굽실거리며 “쿨만 여사님 감사합니다. 나의 이 병을 고쳐주시니 어찌 감사해야할지… 당신은 나의 은인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쿨만 여사는 펄쩍 뛰다 못해 화까지 버럭 내면서, “뭐라구요? 내가 당신 병을 고쳐 주었다고요?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집종에 불과합니다. 당신의 병은 내가 고쳐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의 중보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감사한다고 합니까? 큰일 날 소리입니다. 모든 영광을 주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예배할 장소에 대해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요 4:21)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 오랜 갈등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심산에 따로 제단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배의 장소가 그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곳이 거룩한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곳이 성전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 성전정화사건이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성전정화사건이 예수님이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마치고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나타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2장에 이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과 달리 사역초기에 성전정화사건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놓고 학자들간에 의견이 많습니다. 하나의 사건인데 요한이 사역초기에 기록해 놓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전 정화사건이 두 번 있었다고 보는 겁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역 초기부터 이렇게 부담스러운 일을 행하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저는 두 번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더 중요한 것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요 2:15),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행패부리는 것쯤으로 보았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럼 너는 무엇을, 무슨 표적을 보여줄 수 있느냐?(요 2:18)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예수님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20),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이 되셨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이제 예배의 장소는 사라졌습니다. 이 땅위에 거룩한 장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심산도 예루살렘도 메카도 아닙니다. 이 땅에 거룩한 장소란 없습니다.
이 땅에 성전이 있었던 시대에는 그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는 길이 거룩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땅에 거룩한 성전이 없으니 ‘거룩한 길이’ 어떤 길이겠습니까? 하나는 찾았습니다.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정리합시다. ‘거룩한 길’이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면 다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디 가서 만납니까?
대통령을 만나려면 청와대로 가야합니다. 그래서 청와대 주변을 어슬렁거립니다.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대통령을 만나려는 것입니다. 청와대 담 너머로 고개를 쳐든 채 뛰어봅니다. 어쩌다 대통령이 나오면 손이라도 흔들어 줄까 기대해 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나를 수상하게 여긴 경비가 쫓아옵니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냥 무서워서 도망을 갑니다. 청와대 경비에게 잡혔습니다. 내 사정을 이야기하고 대통을 만나려 했지만 그분은 너무 바빠서 나 같은 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대통령을 어떻게 만납니까? 비서실에 대통령면담신청을 하세요?” 그러면서 경비는 어깨를 으쓱해 보입니다. “그리고요?”, “기다리세요?”, “언제까지요?”, “연락이 갈 때까지요?”, “연락이 안 오면이요?” “그럼 만날 수 없습니다.” 초청장이 없으면 대통령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루를 소비했지만 대통령을 만날 수 없다는 말만 듣고 돌아옵니다. 대통령 쪽에서 나를 먼저 불러주지 않는 한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청와대 담이 가로막혀 대통령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는 그보다 더 높은 더 두꺼운 담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부수고 들어갈 수도 넘어갈 수도 없는 장벽입니다.
아담은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땅을 갈면서, 추위와 더위에 떨면서 고통스러울 때마다 에덴동산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그 때마다 그곳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어떤 때는 그 주위를 서성거리며 들어갈 수 없나 엿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동산을 천사들로 하여금 불과 화염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잘못하면 타죽게 생겼습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깨끗하지 못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사탄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동산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나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담이 무너졌습니다. 사막이 강이 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변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라고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대통령의 식구들은 청와대 들어가는데 초청장도 필요 없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십자가 위에서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아는 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거룩한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힘이 듭니다. 땀이 납니다. 때로는 피도 납니다. 그래도 갑시다. 그 길은 하나님이 닦아 놓으신 공의의 도로입니다. 내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길, 이 거룩한 길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