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알고 계세요.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2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27:22-26)

한 미국인 부부가 독일의 오베라머가우에서 유명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관한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에 그들은 예수 역을 한 배우를 만나려고 부부는 무대 뒤로 달려갔습니다. 그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남편은 배우가 극중에서 지고 갔던 십자가를 발견했습니다.
사업가인 그 남편은 부인에게 카메라를 건네주며 말했습니다. “여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찍어줘요.그는 등을 구부리고는 커다란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려 했으나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에 땀을 흘리며 낙담하여 그는 배우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속이 빈 것인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무겁죠?” 배우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만일 무거움을 느끼지 않았다면 나는 예수님의 역을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 사회와 교회에서 자꾸만 사라지고 있는 십자가, 누가 이 십자가 속에 숨겨진 비밀을 확실하게 알고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십자가를 알고 계시는지요?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에서그렇게 안 살아봐서요?” 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가 십자가를 진정으로 안다면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좀더 최선을 다해야지. 좀더 교회 일에 힘을 써야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야고보와 요한처럼 나는 그리스도의 잔은 마시지 못하면서 주님 옆에 앉게 해 달라고 바라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들까지도 미국인 남편처럼 자기 자신이 지고 가는 십자가는 속이 빈 십자가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배우가 신앙 고백했던 그 고백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우려 봅니다. “내가 만일 십자가의 무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예수님의 역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저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지고 있는 내 십자가가 가벼운 십자가이기만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르겠는지요? “십자가의 잔을 마실 수 있는지요? 오늘 내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십자가는 죽음입니다(22).
십자가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사람들을 죽이는 사형 틀입니다. 그 사형 틀에 주님이 매달리셨고 그 사형 틀인 십자가에서 주님은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죽음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에 애착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사람이 얼마나 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였습니다.
인생을 나그네, 마라톤, 낙엽, 연극, 도박, 전쟁, 바람 등에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빌 1: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이 말씀은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을 때에 새로운 삶이 찾아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갈 2:20절에서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미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 같지는 못할지라도 우리 자신도 예수님 앞에서 죽어야 합니다.

. 나의 혈기가 죽어야 합니다.
. 나의 욕심이 죽어야 합니다.
. 나의 시기, 질투,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박히면 천하없는 장사라도 두 손목에 못 박고 두 발목에 못을 박아 매달면 꼼짝도 하지 못합니다. 움직이면 통증이 심해지고 못 박힌 곳이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 꼼 짝을 못합니다. 입도, 손도 발도, 내 맘대로 못 움직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면 내 맘대로 할말도 못 하고, 가고픈 곳도 못 가고, 먹고 싶은 것도 맘대로 먹지 못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 가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둘째는 십자가는 희생입니다( 12:24).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 알이 되어 죽으므로 인해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형벌로부터 우리들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함으로 우리가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희생하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르밧에 갑니다. 성문에 도착해서 나무를 줍고 있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는 그 여인을 불러 물을 가져오게 한 후에 그 여인에게 먹을 떡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떡은 없고 가루 한 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박에 없습니다.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려고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그 여인에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내 말대로 해라 먼저 나를 위하여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사르밧 과부가 생각할 때는참 염치도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선지자이기 때문에 그에게 다 내어놓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한끼 더 먹고 죽는 것이나 그것을 드리는 것이나 사실 다를 바 없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때의 일어난 일입니다. ‘프레데릭스버그 대전투’에서 남과 북은 많은 부상자를 낸 채 서로 치열하게 싸우다가 다시 싸우기 위해서 후퇴를 했습니다. 그때 남 군의 한 병사가 물통을 들고 부상자에게 달려갔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북 군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였으나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가 부상자들에게 물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북군의 장교가 사격중지 명령을 내리고 잠시 휴전을 제의, 부상자들을 치료하자고 했습니다. 휴전 때 장교는 남 군의 용감한 병사에게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내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내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셋째는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1:12).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의 3대 원칙을 알고 계시는지요? 용서의 3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셋째,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여러 작품 속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순교자 스데반에서는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신을 그렸고,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치던 유대인 패거리의 한 사람으로 그렸습니다. ‘돌아온 탕자라는 작품에는 자신의 얼굴을 탕자의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림 속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그는 아버지를 등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의 심정으로, 그리고 복음을 부정하던 살인자의 부끄러움으로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런 죄인의 심정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 역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용서로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흔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6:17절을 보면 바울은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했습니다.
흔적은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고대사회에서 주인이 노예가 자기 소유임을 확인하기 위해 노예의 몸에 낙인을 찍었는데 그것을 스티그마라고 했습니다. 흔적이 찍힌 노예는 그 소유권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미국 태생으로 193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S.벅(1892-1973)은 1960년 한국을 방문하여 2년여 동안 한국을 체험하며, 한국을 소재로 한 ‘살아있는 갈대’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이 작품은 미국에서 처음 출판되자마자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뉴욕타임스 등 미국과 영국의 유수한 언론에서 ‘대지’이후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펄벅은 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한국을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같은 나라라고 극찬하는 등 소설의 행간 곳곳에서 한국과 한민족에 대한 극진한 애정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일제의 잔악성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은 미국이나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가지지 못한 고유한 심성과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일본인이나 중국인인척 해도 한국 사람의 특성을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펄벅이 예찬했던 것처럼 보석 같은 자랑거리를 더욱 빛나게 해야 하고 한국인의 긍지를 전 세계에 알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구원받은 사람다운 행실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스티그마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내 소유권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가 나의 주인입니다.
예수가 나의 소유권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뭔가 달라야 합니다. 생각도 말도 행동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스티그마를 가진 사람입니다. 내 맘대로 내 멋대로 살면 안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 자랑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