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진실만을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행 3:15)
이번 주는 서은이가 다니는 어린이집이 방학하여 서은이하고 지낼 시간이 있어서 참 기뻤습니다. 화요일인가요 옥수수를 쪄서 먹고 “집에 가져갈래, 몇 개 줄까?”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언니 캠프에서 돌아오면 하나 주고 싶다.” 그리고 또 “아빠는 많이 먹는데…”그러는 거예요. 서은이가 한 이 말에는 한 점 거짓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진실을 원하십니다. 심지어는 생각나지도 않는 죄를 억지로 짜내서 회개하는 것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회개자체가 거짓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죄인인줄 아세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늘 자신을 위해서라만 책임지기보다는 거짓말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몇 일 전에 CGNTV에서 인터넷에 관한 녹화를 했습니다. 저에게 질문하기를 “컴퓨터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도 하나의 도구인데 예전 도구에 비해서 그 도구의 힘이 엄청나게 좋아진 것입니다. 칼도 보통 칼이 아닌 겁니다. 예전의 칼로는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컴퓨터는 잘 못 사용하면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랬더니 사회자가 “사람을 죽여요?” 그러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죽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쓰는 악성 댓 글 하나 때문에 자살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지만 악한 죄인들의 말은 사람을 죽입니다. 사실을 모른 채 남이 하니까 따라서 하는 것은 증인이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죄입니다.”
김포공항에 전화해서 비행기 폭파하겠다고 거짓말한 미성년자에게 그 피해액을 부담하라고 법원은 판결했습니다. 그 거짓말로 비행기가 제 시간에 이륙하지 못하고 검사하고 불안하게 하고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히는지 모릅니다. 거짓에 속아본 사람들은 정말 기분이 나쁠 뿐만 아니라 배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최근에 중국 다녀온 분이 장뇌삼이라고 해서 보기 좋은 놈으로 사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까 본드로 붙인 것이 물러서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증인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처음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선서입니다. “진실만을 말할 것을 재판관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선서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도 증인입니다. 우리도 서약합니다. 법정의 증인처럼 우리도 진실만을 말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판사석은 비어있고 판사는 보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를 지켜보는 배심원단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의 명령으로 증인으로 소환되었습니다(행 1:8).
우리는 모두 증인입니다. 법정의 증인처럼 우리도 증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말해야 합니다. 진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본분은 진실을 오도하거나 부풀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정인 증인과 그리스도인의 증인이 한가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법정의 증인은 결국은 증인 석에서 내려오지만 그리스도인의 증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주장이 언제나 심리 중이기 때문에 법정은 영원히 개회 상태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거짓이란 선택 가능한 대안이 아닙니다.
거짓이 없으신 예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놀라운 평가중의 하나는 그분에게는 거짓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다고 말합니다.(사 53:9)
그러나 우리는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오히려 제일 큰 거짓말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진실만을 말씀하셨고 거짓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부풀린 일이 한번도 없으십니다. 진실을 외면한 일도 없으시며, 그분의 입술에 속이는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시작하실 때 “아멘(진실)”으로 시작하셨습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계 1:5) 라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아들의 형상대로 빚으시는 것입니다(롬 8:28).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정직을 줄이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깨끗이 없애버리시기를 원하십니다.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시 101:7) 거짓을 말하고 행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집에서 살수도 없고 결국 하나님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윤리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주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사랑하시고 거짓을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전 6:9에서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진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백해 졌습니다. 불의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거짓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잠 12:22)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히 6:18) 하나님이 거짓말을 안하시겠다거나 안하기로 작정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디도서 1:2에도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라고 똑같이 증언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고 대적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담 이후에 죄와 곧 거짓 가운데 얼마나 노출되어 있고 거짓말속에서 살아가는지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질문하기 일수입니다.
“왜 하나님은 정직을 요구하시는가?” 이렇게 질문하는 인간이 얼마나 거짓에 익숙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 합니다. “왜 우리는 거짓을 용인하는가?” 예례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부정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굳이 연구 조사 없어도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하얀 거짓말”이 우리를 또 속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했다가 오히려 바보가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어떤 남자가 여행 중에 있는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우리나라 남자는 아닙니다). “내 고양이는 어때요?” 아내가 물었습니다. “죽었소.” 그랬더니 아내가 “여보. 그렇게까지 솔직할 것 없잖아요. 왜 좀더 시간을 두고 조금씩 알려주지 않았어요? 여행 잡쳤잖아요.”그럽니다. 남편이 “무슨 말이오.”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처음에 고양이가 지붕에만 있었다고 말했어도 되잖아요. 그러다 내가 파리에서 전화했을 때 고양이 몸놀림이 둔해졌다고 하고, 런던에서 전화했을 때 고양이가 아프다고 말하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 고양이가 병원 갔다고 하고, 그러다 내가 집에 도착하면 죽었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남편은 이런 원칙은 금시초문이었기도 하지만 아내의 말을 늘 귀담아 듣고 배울 생각이었습니다. “알았소. 다음 번에 잘 해보겠소.” 그리고 나서는 아내는 “그건 그렇고 우리 엄마는 어때요?” 아내가 물었습니다. 남편은 한참 생각한 후에 “음… 장모님은 지금 지붕에 계시다오.”그랬다는 겁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거짓에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진실이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있고 사탄에게 더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성도도 교회도 거짓일색이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신약시대는 구약시대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즉결심판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가라지 뽑다가 알곡 다칠까봐 이제는 추수 때까지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유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유예기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기간이 축복인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즉각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빨리 거짓에서 진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약시대에 하나님의 즉결 심판이 유일하게 나오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사도행전 5:1-10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땅 판 돈을 모두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돈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반을 감추고 반만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거짓에 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죽이셨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베드로는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행 5:11)고 증언합니다.
오래 전 음악과는 전혀 무관한 남자가 속임수를 써서 중국 황제의 악단에 들어갔습니다. 연습이나 연주가 있을 때마다 그는 피리를 입술에 대고 부는 시늉을 냈습니다. 물론 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랏돈을 먹으며 잘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가 연주가마다 돌아가며 독주를 청했습니다. 피리 부는 남자는 눈앞에 캄캄했습니다. 이제 와서 피리를 배울 시간은 없고, 꾀병도 내어 보았지만 궁중의사는 속지 않았습니다. 독주가 있던 날 이 거짓말쟁이는 독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이후에 이 사람의 자살을 설명하는 말이 “그 사람은 책임을 거부했다”로 굳어졌습니다. 거짓의 치료 책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책임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마세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처분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느니라” 하십니다. 주님께 진실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증인이 참 무섭습니다. 증인에 죽고, 증인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증죄 또한 큰 것입니다. “너는 거짓된 풍설을 퍼뜨리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증인이 타인에 대해서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됩니다. 사사기 11장에 보면 입다 사사가 나옵니다. 암몬하고 이스라엘하고 치열한 전쟁이 있을 때입니다. “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 11:30-31) 서원 했습니다. 하나님은 입다에게 승리를 안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이기고 돌아올 때 그의 무남독녀인 딸이 제일 처음에 마중을 나왔습니다(34). 입다는 옷을 찢으며 통곡했지만 그 일을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35). ‘입다’는 입을 다물었어야 하는데 함부로 입을 연 것이 잘못입니다.
욥이 증거 합니다.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욥16:19)
바울도 증거 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이 될 때 하나님은 나의 증인이 되어 주십니다.
“보이는 것이 진실만은 아니다 사진은 진실만을 전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동시에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곽윤섭)
음수에 대해서, 실제 보이지 않아 서양에서 17세기까지 불합리한 수로 여겼습니다. 데카르트(1595-1650) 이전의 서양 수학자들은 음수를 가공의 수, 불합리한 수, 가짜의 수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음수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는 자연수는 보이는데 음수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연수는 예를 들어 양이 세 마리, 사과가 3개 그러면 다 보입니다. 이것을 자연수라 합니다. 그러나 음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육안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안 계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할머님이 젊어서 남편이 먼저 돌아가셔서 혼자 되셨는데 결혼을 안하고 혼자 사셨습니다. 할머님에게 “왜 재혼하지 않고 혼자 사셨어요?” 묻는 말에 할머님은 “언젠가 기차를 타고 오는데 시골에서 서울 올 때까지 남편이 두 손을 꼭 잡아서 불편하고 창피해서 손놓으라고 했는데 그 말에도 남편은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어”하시는 겁니다. “예 그리고요.” 그랬더니 “그것 뿐이야!, 두 손을 꼭 잡았던 할아버지의 그 손이 지금도 나를 잡고있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에게 줄 수가 없었지?” 그러시는 겁니다. 주님은 무릎은 꿇은 자세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잡아주시고 씻어주신 발을 더럽히지 않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