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복

Rev yiyoungje MP3 Messa Hlustun

The Life Jesú(22. 또 하나의 복) / T 11: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지난번에 마태복음 5장 1-12절의 예수님의 산상보훈을 아홉 가지 복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T 5: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리고 11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했습니다. 주님 때문에 실족하지 않아야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상에서 전하신 복의 개념과 지금 복의 개념이 연관성이 있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데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실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이때 로마의 섭정하에 유대 땅을 다스리던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 헤롯왕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자기 동생을 로마로 보내고 나서 그 동생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취해 버렸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은 마음의 괴로움과 분노를 느꼈지만 누구도 감히 입을 열어 충고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의감으로 불붙은 세레요한은 이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헤롯의 궁전에 들어가 “동생의 아내를 뺏은 죄는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크게 외치며 책망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감옥은 사방이 돌로 쌓인 아주 좁은 지하실이었다고 합니다. 그리나 세례요한에게 희망은 있었습니다. 자신이 메시야로 믿고 세례를 주었던 예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구해줄 생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자신이 하시던 일, 병든자를 고치시고 가난한 자에게 오직 복음을 전하시는데 힘을 쏟고 계셨습니다. 이에 세례요한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분은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나를 버렸나?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맞는가?” 이런 생각가운데서 자신의 제자를 예수님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질문하기를 마 11:3절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해 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이 답변하신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상당히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족지 않으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어 놓으신 주님
예수님이 오시기전의 사람들은 많은 것이 부정적이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과 같이 하나님의 금지법 즉 “을 하지 말라”는 것에서 영향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십계명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부정적이고 하기 싫은 사람은 뭐 그렇게 안 되는 것이 많은 지요? 정부도 하기 싫으면 다 안됩니다. 예를 들어 공장을 새우려고 하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주어야 합니다. 나라나 회사가 잘 되려면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하고 서비스해야 됩니다. 그런데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허락을 기다리는데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이유만을 열거하면서 해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해주려고 합니다. 그러면 나라 나 회사의 발전이 안됩니다.
5.16 군사 정권이 5공화국 시작할때 우리 나라 GNP가 850$정도였답니다. 박정히 대통령은 아프리카가 1000$이 넘는 것을 보고 아프리카보다 더 못사는 이 나라를 평가하기를 아무 것도 없는 껍데기만 남아있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고 위치며 긍정적인 희망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군사정권이 실수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추진할 때 이 나라를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의 일도 그렇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은 어떻겠습니까? 인류에게 희망이 있다는 긍정을 심어주신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어느 기자 회견에서 “이 세대는 간절한 소망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자기의 생명을 회복하게 된다면 소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회견장에 참석했던 기자 중의 한 사람이 “그 마지막 말은 지나친 비약이 아닙니까?”라고 힐난하자. 토인비는 옆에 있던 손자를 가리키면서 “그러면 내가 저 철없는 어린아이에게 이 세상은 소망이 없다라고 말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하더랍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다면 그것이 어찌 사는 것이겠습니까? 기대하고 바라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부정의 뜻을 가진 것까지 긍정으로 바꾸어 놓으신 분입니다. Matthew 19:24절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했습니다. 보통 이것을 말하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우니라”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는 자는 지옥에 간다”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실족하지 않기를 바라시고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절망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 문제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앙교회에 부정적인 생각, 표현들을 주님처럼 모두 긍정으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같은 시대에 사신 분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궁에 들어가 왕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히고 결국은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 자체를 잘못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당시의 선지자로서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법하고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정치적인 면에 관여한 것입니다. 사회의 죄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일대일 전도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자기 탓에서부터 시작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자기가 짊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십계명을 다 지키고 산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도 제일 좋아하는 다윗이 십계명을 다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습니까? Ekki.
그가 왕이지만 얼마나 잘못된 행동을 했습니까? 자신의 군졸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습니다. 일년이 지나서 그 일이 아이가 잉태되어 발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의 적으로 우리아를 왕궁으로 끌어들이고 술 취하게 하고, 아침에 우리아를 통해서 편지를 요압장군에게 보냅니다. 자신이 죽을 내용을 자신이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Samuel 11:15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그대로 되어서 우리아는 죽었습니다. 그 아내 밧세바는 슬픔에 빠져 호곡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불러 왕궁에서 살게 했습니다. 왕으로서 치졸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습니다. 정말이지만 다윗 같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이 행동은 삼하 11:27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윗 왕의 죄는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4개의 계명을 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나단이 말하기를 “어느 성에 부자가 있는데 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고 한 사람은 작은 암양 새끼 하나만 있어서 집안에서 같이 살아 이 암양은 한 식구처럼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자기 소와 양은 아껴 잡지 않고 가난한 집 암양 새끼를 잡아 행인에게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 왕은 세상에 그런 나쁜 놈은 죽어 마땅하다고 흥분을 했습니다. 여호와께 맹세까지 했습니다. 나단은 바로 그 인간이 당신 다윗이라고 했습니다(Samuel 12:7).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죄를 자복한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솔직했습니다. 그리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장점입니다. ‘정직’입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은 왕상 3:6절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고 했습니다. 계명을 어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뒤에 어떻게 행동하느냐 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범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온 간음한 여인도 예수님은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윗도 왕이었고 헤롯도 왕이었습니다. 헤롯에게는 세례요한이 죄를 지적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나단 선지자가 죄를 지적했습니다. 헤롯은 세례요한을 감옥에 잡아넣고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죄를 지적한 나단은 삼하 12:15절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한 사람은 목잘라 죽임을 당하고 하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물론 죄를 짓는 실수를 했지만 그의 근본은 헤롯과는 물론 비교할 수 없습니다. Þinn! 모태신앙이 “못해” 신앙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역시 모태신앙은 다른 겁니다.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면 반드시 그 자녀는 바르게 삽니다. 한 때 실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자신만을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의 결국은 정직으로 돌아옵니다. 회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한 때 실수를 한 일이 있을지라도 주님 앞에 돌아온 다윗 왕과 같기를 바랍니다.

어느 유치원 선생님이 자모님들을 초청하여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주고 설문을 냈습니다. “지금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당신의 이 어린 자녀가 자라나서 장차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나누어 드린 종이에 그것을 써 주십시오.” 그랬더니, 이를테면 기술자, 학자, 의사, 판검사 등등으로, 자모님들은 모두가 한 가지씩 바라는 인물상을 밝혀 주었다. 그런데 한 어머니는 좀 색다른 대답을 했더라고 한다. ‘미안합니다, 제 잘못입니다 하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 생각에는 이 어머니가 가장 큰 인물을 소원한 것 같습니다. 큰 사람이라야 그런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안하다든가 내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실족할 것이 있으면 빼내야 합니다.
‘실족하다’ skandalisqh’/(스칸달리스데)로 ‘길가는 도중에 만나게 된 것에 걸려 넘어지다. 함정에 빠지다’라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길에 빛이 된 것이 아니라 함정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초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실족치 말아야 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십니다. 실족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가는 길의 낙오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T 5:29-30절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실족할 모든 요소를 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고전 8:13절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먹는 문제를 가지고 시험에 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실족한다면 영원토록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군 대장이 신병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누라 말 잘 듣는 사람 앞으로 나와.” 모두 나오는데 딱 한사람만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군 대장은 그 신병에게 “너는 왜! 마누라 말을 듣지 않는 거야!”라고 물으니 신병이 하는 말이 “예! 우리 마누라가 이런 때는 절대 앞으로 나서지 말라고 했습니다!” 라고 했답니다. 아니 마누라 말도 이렇게 잘 듣는 남자들이 왜 예수님 말은 안 들으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누라 말 잘 들으니 마누라가 전도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부인들 명령을 다시 내리세요. “예수님 말씀부터 듣고 그리고 내말 들어!

T 18:6-7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저는 목회 하면서 두려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통해서 실족하는 영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로 기도합니다. 여러분도 기도해 주세요. 주앙교회를 통해서 절대로 실족하는 분이 없도록 이요.
우리의 행동은 말할 것도 없고 부정적인 말 한마디가 자녀를 형제를 실족케 할 수 있습니다. 주님처럼 모두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꿉시다.

젓 소를 키우는 분이 그 주에 제일 많이 젓을 내는 소에게 꽃다발을 만들어 목에 걸어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소가 저녁에 들에서 돌아올 때 다른 소에 비해서 어깨에 힘이 있어 보이더랍니다. 그리고 다른 소들도 서로 젓을 많이 내려고 노력을 했는지 예전보다 더 많은 젓을 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실족하지 않으려면
실족하지 않는 방법을 요 11:9-1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고로 실족하느니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밤에 다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도둑입니다. 빛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른길로 인도하는 빛이 없으니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빛은 누구입니까? John 12:46에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없으면 실족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벧후 1:10-1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메리 리드라는 여 선교사는 인도에서 문둥병 환자의 불쌍한 운명을 잊을 수가 없어서 매일 슬픔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문둥병 환자를 구제하는 방도는 무엇하나 실시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리드 자신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고원 주둔소의 병원에서 치료하였으나 효과가 없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여전히 병명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손가락 하나가 감각을 잃고 얼굴에 반점 하나가 생겼을 때에 그의 병명은 밝혀졌습니다. 그 자신이 문둥병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본인에게 알려졌습니다. 그 때 리드선교사는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을 문둥병 환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을 아프게 생각해 왔던 문둥병 환자들과 이제야말로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녀는 인도로 다시 돌아와 과거에 그들에게 줄 수 없었던 희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아퍼하며, 슬퍼하면서 하나님께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 때문에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굳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