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찬송
Rev yiyoungje MP3 Messa Hlustun
The Life Jesú(24. 천사들의 찬송) / Luke 2:8-14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6.25때 있었던 일입니다. 1.4후퇴 때 강아지를 가지고 피난 가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이 강아지는 기차의 출발 소리에 놀라서 그만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습니다. 젊은이는 따라 내려 강아지를 가까스로 잡아 다시 출발하는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사람들은 이 난리 통에 그깟 강아지를 가지고 다니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강아지를 꼭 껴안고 가는 것입니다.
6.25가 나고 바로 피난 갈 때 처음에는 이 강아지를 집에다 두고 갔었습니다. 그 때 꼬리를 치며 따라오는 강아지에게 “집 잘 지켜야 한다. 그리고 꼭 너를 데리러 올께…”하면서 쓰다듬고 얼마의 먹을 것과 함께 놓고 갔습니다. 드디어 서울이 수복되었고 피난에서 돌아온 이 젊은이는 난리 통에 강아지가 살아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하고 집에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강아지를 찾았습니다. 강아지는 주인이 신던 군화 위에 납작하게 널 푸러져 있었습니다. 주인의 냄새가 배어있는 군화 위에 올라가서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젊은이는 튓마루로가서 예전에 강아지를 부르던 데로 휘파람을 ‘휙 ~“불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강아지가 꿈틀거리면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겠다고… 그리고 지금 기차를 함께 타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과 강아지의 사이도 이러한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대로 우리 죄를 속하고자 이 세상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재림하신다는 말씀대로 오실 것입니다. 아멘.
목자에게 나타난 천사
요셉은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이리저리 아기 예수를 해산할 방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천사들은 목자들을 찾아갔습니다. 이 때는 이미 초저녁을 넘어 밤이 깊어가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자기의 양떼를 돌보면서 밤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사방에 비추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불 꽃 놀이나 헬리콥터가 나타나서 빛을 비추이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당시는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전기 불에 익숙해 있는데 옛날 사람들은 큰 불빛이라고 해봐야 모닥불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두루 비취매” 놀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라고 했는데 원문에는 두 단어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경악하는 두려움’(ejfobhvqhsan:프호베데산)이고 하나는 ‘공포’(fovbon:프로보스)로 무서워서 떠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오줌쌌을 겁니다. 발이 안 떨어지고 입이 굳어져서 그저 멍하니 서서 달달 떨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는 나타날 때마다 하는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무서워 말라!”입니다. 천사가 나타날 때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빛만 비추인 것이 아니라 사람은 없는데 말소리까지 들리니 사실은 더 놀랐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율법사들을 찾아갈 수도 있었는데 왜 목자들을 찾아간 것일까요? 목자들은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깨어있었습니다. 당시의 목자들은 천시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피곤한 직업입니다. 밤새도록 깨어있으면서 이리나 맹수로부터 목숨을 걸고 양떼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피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직업입니다. 천사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이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7:6절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기뻐할 만한 사람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목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에도 예수님의 탄생 소식에 기뻐할 사람이 있습니다. 편안한 자리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통 중에 있으며, 질병 중에 있으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 주앙교회 성도여러분은 모두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천사로부터 먼저 전해들었던 목자 같은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천사들의 찬송
구약에서 두 사람 이상이면 증인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탄생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왔습니다. 아마도 동원될 수 있는 모든 천사가 나타난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 이 자리가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겠습니까? 그런데 이 천사들이 한 목소리로 찬송을 합니다. 이 땅에서 울려 퍼진 최고의 찬송입니다. 지금같이 녹음기가 있으면 녹음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최고의 음악가들은 바로 이 장면을 연상하면서 곡을 쓴 답니다.
제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들렸을 때 아주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맨 안 쪽에 가면 성가대석이 있고 그 바로 맞은편에 좌석이 있는데 이곳은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귀빈석입니다. 영국의 국왕이나 국가 귀빈이 이곳에 초청되어 앉는 자리입니다. 다이애나 공주의 장례식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제가 양복 입으면 한 인물 나지 않습니까? 더운 여름에 남들은 반 팔을 입고 다니는데 양복을 입고 가니까 아마 어느 나라 귀빈으로 생각을 했는지, 착각을 했는지 바로 성가대 맞은편으로 안내를 받아 가서 앉았습니다. 이 성당은 지금까지 천년이 넘도록 한번도 예배를 드리지 않은 적이 없는 성당입니다. 세계 제 1차대전이 일어나고 있던 그 때에도 예배는 계속된 것입니다. 그런 생각으로 하면서 앉아있는 그 자체가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위쪽에서 나는 소리인데 파이프 오르간이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이것은 세계최고의 파이프 오르간일 것입니다. 교회의 실내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이 소리는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입니다. 저는 음악적 감각이 별로 없어서 잘은 모릅니다만 성가대에서 은은하면서도 힘차게 부르는 그 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어보지 못한 찬양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 사람이 부르는 것 같이 음이 조금도 튀어나오는 사람 없이 고운 음으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천사들의 찬송 소리는 어떠했을 까요? 정말 들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하늘나라가면 만날 사람도 많고 질문도 많지만, 그 중에 하나가 천사들보고 그 때 그 찬송을 좀 해보라고 할겁니다. 다행인 것은 그 소리는 알 수 없지만 내용은 알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부른 찬송의 내용은 바로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노래했습니다.
①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 14:9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John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고 하셨습니다.
미개한 아라비아인들이 프랑스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호텔의 목욕탕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살던 사람들이라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다는 것은 황홀함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프랑스의 문화나 관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호텔에 들어가 목욕만 하면 좋은 것입니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날이 되어 출발 시간이 되었는데도 호텔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안내원들은 또 목욕을 하고 있겠지 생각하고 갔는데 수도꼭지를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쏟고있는 것입니다. 안내원들은 어리둥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도대체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들은 이구 동성으로 “이걸 가져가 사막에서 목욕을 하려고요.” 단순히 수도꼭지 때문에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닌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지기 때문에 그 능력은 한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②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르쳐 주시기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T 6:13)하라고 가르치셨으며 눅 5:26절에 “중풍병자를 고치셨을 때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을 치라고 하신 뒤에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고 하셨습니다.
앨런 가디너 선교사는 선교하면서 수많은 역경과 육신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주시는 동안에는, 내게 겁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1851년 남아메리카의 남단에 있는 픽톤 섬에서 선교하다 57세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 그 옆에는 가디너 선교사가 기록한 선교일지가 있었는데 그가 경험한 베고픔과 목마름, 상처, 외로움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쓴 한 줄의 글은 떨리는 손이었지만 똑똑히 쓰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고 합니다.
“나는 우리 하나님이 어찌나 좋으신 분인지 감격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간 가디너 선교사의 떨리는 손으로 쓴 마지막 글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입니다.
③ 그리스도가 구속사역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 사람들이 눅 19:38절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라고 천사들과 같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고 눅 23:47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했습니다.
Second,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중재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막혔던 담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Eph.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라고 했으며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Þinn! 우리에게 평안이 없었던 것은 불안했었기 때문입니다. 왜 불안했습니까? 죄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죄가 제거되면 평안이 옵니다. 죽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주님의 나라에 가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가 제거되지 않은 사람은 불안합니다. 죽을 때 무섭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의 문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지키는 크리스마스는 정해서 드리는 것으로 성경에는 그 시기나 날짜가 없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목자를 찾아간 때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알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을 방목하며 끌고 다니는 것은 보통 4월부터 11월까지입니다. 그러나 12월 달이나 겨울에도 춥지 않을 때는 가끔 끌고 나오기도 한답니다. 누가는 이 때를 기록하지 않고 다만 11절에 “오늘날”이라고만 했습니다.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태어나고 계신 것입니다.
성화 중에 홀맨 헌트라는 화가가 그린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 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성화입니다. 그 그림에는 한 사람이 등불을 들고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것으로 보이는 문 밖에 서 있습니다. 그 문 주변에는 덩굴이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어서 그 문이 오랫동안 닫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문은 바깥에서 잡을 수 있는 손잡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집에 등불을 들고 들어가려 하지만 손잡이가 없어서 안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평화의 왕으로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평안합니다. 우리가 혼자서 걱정하고 염려하던 것 주님이 아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주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던 예수님은 다시 우리를 데리러 이 땅에 오십니다. 이 때 주님의 품에 안기는 주앙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그 때 그 노래 한번 불러달라고 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