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세번째 교회
Rev yiyoungje MP3 Messa Hlustun
Jesús sagði:(92. 결단-세번째 교회) / Texti : Samtals 3:14-22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지난 목요일에 서울에 갔다 오는데 지하철 2호선에서 부자 자매를 만났습니다. 사람이 굉장히 많은데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순간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어떻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확률적으로 그렇게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제가 서울을 매일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한 달에 많아야 서너 번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만난 것입니다. “하물며”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T 7:11) 하나님은 사람이 많다고, 교회가 많다고 우리는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주앙교회에 하나님의 관심이 계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곳에 하나님이 우리 옆에 계시다는 것을 믿고 정신차리고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란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의 불만과 욕망을 충족시켰을 때의 권태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한다”Hefur hár. 그래서 지혜로운 선현들은 완전한 충족, 완전한 행복, 절대적인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이 좋고, 조금 부족한 것이 오히려 좋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독일의 극작가요 철학자인 렛싱은 말하기를 “만약 전능한 자가 그의 오른 손에는 완전한 진리를 들고 왼손에는 진리의 추구를 들고 나를 행하여 ‘택하라’고 하신다면 나는 겸손히 꿇어 엎드려 ‘완전한 진리는 오직 당신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하면서 그의 왼손을 택하겠다.”Hefur hár.
인간은 절대적이고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것이며 오직 진리(Jesus)를 추구하며 따라갈 뿐입니다. 이것을 무시할 때 부작용이 생깁니다. 다시 말하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때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7절에 보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현재 상태를 말해줍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만족이 주어진 교회가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쳐야 되는데 하나님은 이들의 신앙을 가리켜 15절에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자기 만족(The self -complacement)에 빠져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Laodicea) 교회는 에베소에서 수리아로 통하는 대로에 있는 교회로 당시 금융과 재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지역에서 금도 생산되었습니다. 로마의 씨세로가 소아시아를 여행하는 중에 어음을 현금으로 빠꾼 곳은 라오디게아뿐이었을 만큼 세계에서도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주후 61년에 지진으로 온 거리가 파괴되었을 때도 라오디게아 시민들은 로마정부의 원조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힘으로 재건했습니다. 또한 이곳은 의류의 생산지였습니다. 양털 중에도 검은 양털의 명산지입니다. 의학의 중심지로 부르기안 안약이 생산되었고 의과대학이 있어 유명한 의사들이 있었으며 멘 이라는 의학 신전도 있습니다. 교통의 이점을 최대한 살린 금융의 중심지이자 상공업이 발달한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큰소리친 것입니다.
오늘 한국도 거의 모든 지역이 도시화되었습니다. 4천 7백만 인구 중에 시에 사는 사람이 3천 800만이며 시골에 사시는 분은 겨우 870만 명입니다. 40년 전에는 서울의 강남도 다 촌에 해당했습니다. 강남의 개포동은 예전에 개도 포기한 동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개도 포동포동 살찌는 동네로 바뀌었습니다. 충신교회가 있는 동부이촌동은 “이 촌놈의 동네”Er kallað. 우리 산본을 지나면 안산이 나옵니다. 여기서는 안 살겠다고 해서 안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안 살기는 왜 안 삽니까? 얼마나 좋은데요. 우리가 있는 현재의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와 닮았습니다. 그들이 큰 소리 친 것은 부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부에서 큰소리 칩니다. 그런데 이들은 영원한 부는 물질적인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님을 몰랐습니다(벧전 1:7). 물질적인 풍요가 영적인 활력에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께서는 이 교회를 향해 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네 가지 영적 사실을 몰랐습니다.
1. 곤고한 것 = 전쟁으로 모든 것을 약탈되고 파괴당한 것을 묘사한 말(City 137:8, Rom. 7:24)
2. 가련한 것 = 어떤 것도 도움이 될만한 것이 없는 상태
3. 가난한 것 = 금융업의 발달로 물질적 부를 축적한 것과 달리 영적인 가난한 상태
3. 눈먼 것 = 라오디게아에 특수한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던 것과 달리 영적으로 눈먼 상태
운전을 할 때 갈 길을 알면 여유 있게 천천히 갈 수 있는데 갈 길을 모르면 불안하고 쉴 수가 없습니다. 또한 먼 곳과 가까운 곳을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대응 운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멀리 보면 잘 못 가던 길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 또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코앞만 보고가면 지금 가는 길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
4. 벌거벗은 것 = 라오디게아의 검정색 양모가 유명했던 것과 달리 영적으로는 벗은 모습
이들은 현재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위기의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Var kallaður. 라오디게아는 교퉁이 중심지이고 상업적인 도시로 성장하게 된 데는 물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L.A가 사막에 물을 끌어와 건설된 도시이지만 이미 2000년 전에 라오디게아는 이러한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차다’라는 말이 나온 것은 15km 떨어진 골로새로부터 냉수 공급을 받았습니다. ‘더웁다’라는 것은 라오디게아 북쪽 10km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생각한 것입니다. 찬물과 더운물의 공급을 따로 따로 받고 있었는데 이 물이 라오디게아까지 오다보면 더운물은 식고, 차가운 물은 더워져서 두 물이 모두 미지근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더운물과 차가운 물 가운데서 하나를 택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두 물이 모두 미지근하게 된 것 같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미지근한 물을 먹으면 금방 토해냈습니다. 먹을 수가 없게, 아무 맛도 없이 미지근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미지근한 물을 토해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토해내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미온적인 우리 신앙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해서 본문 18절에서 세 가지를 제시하십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 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1:7) 베드로는 여기서 더 나아가 금보다 더 귀한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러나 금융의 요충지였던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금으로써 믿음의 주이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2.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 라오디게아의 검은 광택나는 양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옷은 흰옷입니다.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세마포 옷입니다.
3.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 눈이 아프면 안약을 사서 발랐던 것처럼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눈을 위해 안약을 사서 발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악에 어둔 우리의 눈을 밝히십니다. 하나님을 바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나옵니다. 위의 세 가지 모두 사라는 것입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흰옷을 사서, 안약을 사서”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돈으로 해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라는 것은 공짜가 없으며 값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장사꾼의 아들이라 잘 압니다. 물건을 살 때는 잘 사야 합니다. 그냥 덮어놓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물건 사는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좋은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먼저 뛰어야 합니다. 남보다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정보를 동원해야 합니다. 사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 사면 잘 팔 수 있습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이런 상업적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 교회의 여전도 회장으로 있는 그 이름도 유명한 “땅 사랑 집사”가 있었으니 부동산 투기가 한창 기승을 부릴 즈음, 한몫 잡으려는 땅 집사는 이번 주일에 여전도회 헌신예배가 있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일주일 내내 열심히 아파트와 땅을 보러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다 이윽고 문제의 주일, 여전도회 헌신 예배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땅 집사는 급하게 찬송가를 찾아 사회 석에 올랐습니다. 무사히 틀리지 않고 신앙고백을 한 후 찬송을 부를 시간, 거룩하고 자신 있게 한마디! “우리 모두 찬송가 109동(!)을 부르겠습니다!”
교회의 영적 문제, 내 가정의 문제, 나의 문제 모두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도 행위의 종교냐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서 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의 가치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아무 가치도 느끼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믿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을 자식처럼 아끼며 보살피는 어진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틈만 나면 평민 복장을 하고 궁 밖으로 나가 백성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어울려 지냈습니다. 어느 날 왕은 대중목욕탕을 찾아갔습니다. 사람들은 뜨거울 물에 몸을 담그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즐기고 있었는데 그 목욕물은 지하에 설치된 화로에 의해서 데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화부를 만나기 위해 지하실로 내려갔습니다. 지하실은 어둡고 지저분했으며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일하기가 쉽지 않겠구려. 내가 잠시 있다가 가도 방해가 되지 않겠소?”
왕의 말에 화부는 ‘어쩌다 들른 사람이겠지. 얼마나 버티나 지켜보자’ 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왕의 지하실 방문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은 화부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화부는 왕에게 “편안한 궁궐을 놔두시고 저를 만나기 위해 이처럼 뜨겁고 더러운 곳을 방문하시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폐하께서 거친 음식도 저와 함께 잡수시면서 제게 진정으로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전 이미 너무나 훌륭한 선물을 폐하로부터 받았습니다. 폐하 자신을 제게 주셨으니, 제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왕은 화부에게 “선물은 오히려 내가 받았네”했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 22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하신 말씀이 내게서 역사 해야 합니다.
본문 20절에 나타난 ‘서서’(헤스테카)는 현재 완료형이며, ‘두드리노니’(크루오)는 현재형입니다.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은 오래 전에 준비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두드리심은 현재적이요 계속적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들 앞에서 계속해서 노트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가 두드려야 하는데(T 7:7, Luke 11:9) 오히려 주님이 두드리시는 것입니다. 지금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Líkama vers 20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