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성찰
Rev yiyoungje MP3 Messa Hlustun
Jesús sagði:(114. 자기 성찰) / Texti : Bara 7:15-16
“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16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오늘 제목을 보고 벌써 듣기(보기)싫어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남의 이야기하면 재미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성찰에서 멀어집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믿지 말아야 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Jer. 17:5)Hefur hár. 우리는 원래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신은 아무 흠이 없다거나 깨끗하다고 하면 그것이 곧 거짓말입니다. 우리나라 3대 거짓말은 나이 드신 분들이 ‘빨리 죽어야지’ 두 번째 처녀가 ‘시집 안 간다’ 세 번째는 ‘물건 밑지고 파는 거야’랍니다. 3대 거짓말 다음으로는 중국집에 전화하면 ‘방금 출발했어요~ ‘, 정치가들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교장선생님이 ‘마지막으로…’, 옷가게 주인이 ‘어머! 언니한테 딱이야~ ‘, 간호사가 ‘이 주사는 하나도 안 아파요’인데 제가 맞아봤는데 엄청 아픕니다. 그런데 진짜 거짓말은 자신은 거짓말 안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억력이나 이해력이 부족해서 총명하다고 하는 분들도 조금만 방심하면 곧 잃어버리고 맙니다. 우리는 너무 무지해서 자아 성찰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그로 인해 악행을 저지르기 쉽고, 자신을 변명하다가 더 나쁜 죄악으로 빠져들곤 합니다. 우리는 간혹 격정(激情)에서 비롯된 행동을, 열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면서도 자신의 큰 결함은 보지 못합니다(T 7;3). 몇 해전에 가톨릭에서 “네 탓입니다”라는 구호를 만들고 이것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자동차에다 붙이고 다니는 분들이 자동차 뒤편 유리에 붙이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봅니까? 뒤에 따라오는 차가 보지요. 그럼 누구 탓입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욕을 당하면 쉽게 알아차리고 깊게 생각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모욕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공정하고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게나 말하고 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1.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했을 때는 모는 것이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불평만 해대고 서로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은 혼란스러워 졌습니다. 세상을 다시 아름답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을 파멸시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이에 반대했습니다.
“구태여 인간을 파멸시키려고 노력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들을 떠나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는가?”
“최고로 높은 산으로 가면 어떨까요?” 신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모르고 있군.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인간들은 정복하고 말 것이네.”
그러자 다른 천사가 말했습니다. “달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간들은 좋은 머리를 이용해 달까지 쫓아올 것이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 천사가 입을 열었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 안에 숨어야 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밖에서 찾아 헤매지, 자신의 내면세계에는 무관심하여 결코 자신의 내면을 고요히 바라보는 일 따위는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를 찾아내는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나님은 그저 머리만 끄덕였습니다. 하나님은 돌멩이에도 풀잎에도 작은 세 속에도 깃들여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속에도 계십니다.
스가랴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Sakaría 12:1)Er kallað.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John 14:20)Komist að því að.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가 우리 안에 계십니다.
2. 율법으로 자신을 찾지 못한 종교지도자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행위의 정당성만을 예수께 강조했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3-21절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구약성경에서 정한 것 외에도 더 강화시켜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먹는 음식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거룩하게 구별된 민족으로 삼으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순히 음식을 구별하여 먹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뜻을 찾지 못하고 그 율법에 얽매이게 되어 원래 하나님의 취지대로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옷을 빨도록 한 규정을 통해서 사람의 내면이 얼마나 깨끗하게 되는가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옷만 빠는 것으로 다 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 율법의 취지를 벗어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T 23:25)Hann vill að við.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오용되는 음식 율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 15-16절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3. 이스라엘 민족 이동으로 본 자기성찰
이스라엘 민족은 두 번에 걸친 민족의 대 이동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다 탈출해 나온 것입니다. 이 때의 인도자는 모세였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제정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대가 망하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잡혀가 70년 간 종살이하다가 고레스가 B.C. 539년 10월에 바벨론을 정복하고 이듬해인 B.C. 538년에 유대인의 귀환을 허락하는 조서를 내립니다. 그리고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귀환이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 출애굽과정에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불평을 계속해서 쏟아냅니다. 물이 없다고 해서 물을 주십니다(민 20:13, 24). 출애굽 내내 만나를 주셨습니다(출 16:33). 만나만 먹다가 고기가 먹고싶다고 해서 메추라기를 주십니다(출 16:13). 낮에는 뜨거운 태양 빛을 가리기 위해서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민 14:14) 인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Numbers 14:1에 보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군들이 보고했을 때 백성들은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실망시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나를 믿지 않겠느냐(Fólk 14:10)고 하십니다.
두 번째 민족적 대 이동은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사왕 고레스는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로 유대인의 귀환을 공포했을 뿐만 아니라 조서도 내리면서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스 1:2)라고 하면서 빨리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2차로 에스라와 함께 귀환하는 사람들은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스 7:27)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에스라 8:21에는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Var kallaður.
출애굽 때 불평만 하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오히려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이들에게는 출애굽 때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을 뿐만 아니라 금식을 하면서 갔습니다. 출애굽때의 사람들은 먹을 것에 대한 많은 불만을 내었지만 에스라와 함께한 이들은 오히려 금식하며 갔습니다. 스 8:21Til að “스스로 겸비하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t/N['t]hil]:레히트아노트’인데 ‘괴로움을 당하다, 낮추다, 고통’의 뜻이 있는 ‘hn:[:아나’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을 스스로 쳐서 복종시킴같이 완전한 순종적 자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같은 길을 떠나는 사람들인데 처음 출애굽 때와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모습이 다릅니다.
이동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러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노랫말도 있습니다. “아침바람 찬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우리 선생 계신 곳에 엽서 한 장 써 주세요” 겨울이 되면 기러기는 V자 대형으로 남쪽으로 날아가는데 V자 대형으로 날아가면 앞에서 나는 새들이 날개를 저으면 뒤에서 따라오는 새를 위한 상승기류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전체 기러기 때는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퍼센트를 너 멀리 날수 있답니다. 또한 맨 앞에서 날아가는 기러기가 지치면 뒤쪽으로 물러나고 금방 뒤에 따르던 기러기가 앞장을 섭니다. 그러므로 기러기 떼는 대열의 앞장에 서려고 싸우는 법도 없고 꼴찌라고 하여 열등감을 갖는 일도 없습니다. 또한 기러기가 병에 걸리거나 다쳐서 대열에서 낙오되면 두 마리의 다른 기러기들이 그 기러기와 함께 대열에서 떨어져 그 기러기가 지상에 내려갈 때까지 도와주고 보호해 줍니다. 같이 간 기러기들은 다시 날 수 있을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함께 머문답니다. 또한 서로의 힘을 돕기 위해서 울음소리를 크게 냅니다. 자기 자신을 모르고서는 협력이 불가능합니다. 자신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21절에서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Hann vill að við.
이제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해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T 7:11)
중앙아메리카 서쪽으로 카리브 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카리브 제도는 서인도 제도(West Indies)로 부르기도 합니다. ‘서인도 제도’라는 이름은 크리스토퍼 콜롬부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인도에 도착했다고 오해한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인도는 알고 있었는데 새 대륙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본 것만을 생각하게 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노력이 계속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동시에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손에 들고 무엇을 찾는 사람보다 더 한심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안에 계신 성령의 존재를 모르는 것입니다.
좀더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오로지 하나님 한 분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위대하거나 고귀하거나 즐겁거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도록 하라.”고 토마스 아켐피스는 말합니다.
두 친구가 여행을 하던 도중에 커다란 곰을 만났습니다. 한 친구는 재빨리 옆에 있는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버렸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은 곰은 죽은 동물은 손을 안 댄다는 말이 생각나 얼은 엎드려 죽은 척 하였습니다. 곰이 다가와 엎으려 있는 사람의 귀를 핥으며 무슨 말인가 하고 가버렸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까 곰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위기에 처한 친구를 혼자 두고 도망치는 친구하고는 같이 다니지 말라 하더군”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Var kallaður. 또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Er kallað. 자기 자신을 믿지 안 되 자신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