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놀라다.

1-1) 놀라다.
헬라어에 ‘놀라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약 10여가지가 나온다.
이중에 제일 강한 놀람을 표현한다고 보이는 어근 ‘엑시스테미’가 나오는 본문이다.
신약성경에 모두 6번 나오는데 
3번은 예수님께, 2번은 성령이 임할 때, 1번은 바울이 회개하고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의 반응에 사용되었다.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T 12:23)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Bara 6:51) 
갈릴리 바다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Luke 2:47) 
예수께서 12살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선생들(서기관,바리세인,제사장)과 함께 토론할 때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Lína 2:7)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Lína 2:12)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여 방언할 때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Lína 9:21)
바울이 다메섹에서 즉시 예수를 증거할 때

1-3) 놀라다

세 번째 ‘놀라다’에 해당하는 단어 헬라어 어근 탐베오(qambevw)이다. 탐베오는마비시키다, 놀라다, 경악케하다는 동사이다. 탑베오의 어근 탐보스(qavmbo”)는 말문이 막히다 와 유사한마비, 경악을 뜻하는 ‘남성형 명사’이다.
좀더 자세한 것은 from 2285; TDNT – 3:4,312 에서 확인하실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동사로 다음 두 곳에서 사용되었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Bara 10:24)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설명하실 때 제자들이 놀랐다.

Bara 10:30-31절에서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Bara 10:32) 예수께서 고난 당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놀랐다.

동일한 단어가 막 1:27절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누가는 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Luke 4:36) 모든 사람이 놀라고 탄복했음을 ‘탐보스’란 단어를 명사로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믿음과 의인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 
2:4 절은 멘 앞에 ‘보라!(히네)가 나온다. 이 단어를 ‘오직’으로 번역한 것이 아닌가 보인다. 그리고 맨 뒤에 어근 ‘하야살게 하다 동사가 이끌고 있다. 사는데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이다. ‘믿음’으로 번역된 ‘에무나토’는 ‘확고함, 안전, 신실성, Trú, 안정성, 진실, 참으로’로 번역할 수도 있는 여성형 명사이다. 
원문과 일치하는 단어가 구약 히브리어에 한번 더 사용되었다.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City 96:13)에서진실하심으로에 사용되었다. 이로 볼 때 ‘믿음’으로 번역된 ‘에무나토’는 ‘진실’로도 변역 될 수 있음을 알게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Rom. 1:17)
하박국의 ‘베에무나토’에 ‘오’라는 소유 대명사가 있다.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이를 따라(KJV, RSV, NIV 등) ‘나의 믿음으로’로 번역하였다. 칼빈을 이를 신앙의 성장 과정으로 해석한다. 
바울은 ‘베에무나토’를 ‘에크 피스테오스’로 본문을 번역했다고 보아도 좋다. 본문을 이용하여 이른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칭의’의 교리를 가르쳤다. 헬라어 역시 맨 뒤에 나오는 ‘살다’에 해당하는 어근 ‘자오’가 기본동사로 본문을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살기는 사는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합 2:4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바울은 그대로 신약에서 헬라어로 옮겨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오직으로 번역된 것으로 보이는 원문의 ‘호관사와 접속사 ‘데’가 기본 불변사로 나타난다.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임을 강조한 것이다. 

한편 ‘의인’으로 번역된 ‘디카이오스’(공정한, 흠 없는, 거룩한, 의로운)는 모두 19번 나타난다. 
T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Luke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Luke 23: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Luke 23: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Lína 10:22, 롬 1:17, Rom. 3:10, 3:11, Timothy 4:8, Heb 10:38, 11:4, 벧전 3:18, 4,18, 벧후 2:8, 요일 1:9, 2:29, 3:7, Samtals 16:5, 22:11)에 나타난다.
복음서 4번, 사도행전 1번, 바울서신 4번, 히브리서 2번, 베드로 3번 요한 5번 사용하였다.
이 단어는 헬라어에서 ‘믿음’의 중심 축을 이루는 단어이다. 반면 구약에서 사용한 ‘에무나토’(진실)은 신약에서 사용한 ‘믿음’의 개념하고는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울은 이 부분(진실)을 믿음과 연계시키고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절재된 성경해석

성경을 보고 바로 이해가 되면 별로 해석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도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해석이 필요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절제된 해석이 필요합니다. 확대해석, 과잉해석은 금물입니다. 

조금만 벗어나도 탈선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소설이 아니고, 또 저작자가 보이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능력이 많이 나타날 수록 위험요소가 많은 겁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 정치적인 판단, 이데올로기 등이 첨가되면 성경에서 통일교도 나오고 몰몬교도 나오고, 구원파도 나오고, 여호와의 증인 등 헤아릴 수 없는 이단이 나옵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카톨릭에서 성경을 보는 것을 금지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절대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염려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해석을 염려했던 것 아닐까요?

도스토예프스키의 변화

도스토예프스키는 16세 때 자신의 아버지가 농노들로부터 살해되는 것을 보았다.그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사형수들을 싣고 가는 열차가 간이역에 멈췄을 때 그는 어느 부인으로부터 작은 책 한 권을 받았다.그것은 신약성경이었다.

사형을 기다리면서 그는 감옥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작은 성경책 속에서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를 만났다.도스토예프스키는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다’라고 증명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나는 진리보다도 차라리 예수와 함께 있고 싶다”는 신앙고백을 했다.그는 사형 직전 기적적으로 사면돼 고향으로 돌아온 후 세계 최대의 문학가가 되었다.성경은 인간을 변화시킨다.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영혼의 눈을 뜨게 될 때 기적은 일어난다.

영웅, 신격화와 성경의 진실

흔히 나라를 세운 사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여 영웅시합니다. 영웅도 모자라 신격화시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조선의 첫 왕인 단군을 신격화 시켜 신으로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를 세운 사람은 밀양 박씨의 조상이 되는 박혁거세입니다. 박혁거세 역시 그를 신격화하기 위하여 그의 출생을 신비스럽게 미화시켰습니다. 하늘에서 백마가 내려와서 박 만한 큰 알 하나를 두고 갔는데 그 알에서 깨어난 인물이 신라의 첫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박처럼 큰 알에서 나왔다 하여 성은이라 하였고, 이름은 나라를 밝게 비추어 준다고 하여 ‘불구내’라고 하였습니다. 이름을 ‘혁거세’로 고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혁’은 빛난다는 뜻이며, ‘거세’는 세상에 있다는 뜻입니다. 혁거세는 13살이 되던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봉해졌다고 합니다. 

사울 왕이 기원전 1100년 전 사람이고 보니 신화적인 인물로 소개할 만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미화시키거나 신격화시키는 것은커녕 있는 모습 그대로 소박한 면을 가감 없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의 잘못된 행실에 대해서 숨김없이 소개해 줌으로 인해서 후세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