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옷을 입으신 예수님
Rev yiyoungje MP3 Messa Hlustun
예수님은 누구 신가?(36. 아름다운 옷을 입으신 예수님) / Texti : Sakaría 3:1-5
“1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2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3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4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5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Sakaría 3:1-5)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미래에 있을 일을 요한에게 보여주신 것이며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약 520년 전에 스가랴를 통해서 미래에 있을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스가랴가 이 말을 할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의 힘겨운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직후여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성전건축이 힘겹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거기다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여 중단되었던 것을 다시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백성들이 쉽게 따라주지 않자 스가랴가 백성들을 독려하려고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스가랴를 통해서 560여 년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예언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스가랴가 본 네 번째 환상 부분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단이 여호수아를 고소하고 이에 대해서 여호와의 사자가 변호하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제사장 여호수아로 나타난 분은 대제사장직을 담당한 분으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어의 ‘여호수아’는 헬라어 발음 ‘예수’라는 말과 같은 말이며 구원자를 뜻합니다. 즉 오늘 본문 말씀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한 예언의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 3, 4절에서 옷에 대해서 나옵니다. 오늘 이 옷에 대해서 이해하면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됩니다.
우리는 흔히 “옷이 날개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사람은 옷 입은 것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냅니다.
Fyrsta bók Móse 37:23-24에 보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꿈꾼 것을 말하자 시기하여 채색 옷을 벗기고 죽이려고 구덩이에 집어넣은 것이 나옵니다. 이 때 요셉의 옷이 벗겨진 것입니다. 즉 그가 입었던 채색 옷은 그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조선시대 때의 양반 집 자식들은 색동옷을 입었습니다. 한국속담에 “옷은 시집 올 때처럼, 음식은 한가위처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제일 옷을 잘 입었을 때는 시집올 때라는 말입니다. 영국속담에는 “신사를 만드는 것은 옷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옷은 신분을 나타내지만 결코 교만하면 안됩니다.
옛날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그의 보좌 옆에 작은 궤 하나를 놓아두고 날마다 한번씩 그 궤를 열어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광경을 보고 왕이 그 궤 속에 보화를 감추어두고 날마다 그 보화를 확인하느라고 궤를 열어본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은 신하들을 불러다 놓고 그 궤를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그 속에는 양치기의 옷 한 벌이 있었습니다. 이 왕은 전에 가난한 양치기였었습니다. 왕이 된 다음에도 교만해 지지 않으려고 목동시절에 입었던 옷을 매일 한번씩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과거에 입었던 양치기 옷을 매일 한번 씩 보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9장에는 제사장의 옷에 대해서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사장의 옷을 어떻게 만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옷을 입은 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사하는 예식을 행할 때 입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LES 10:6)Var kallaður.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제사장의 옷을 찢는다는 것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되는 금지령이었습니다. 만일 찢는다면 당연히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옷은 깨끗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Press 19:10)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14절에서 “옷을 빨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 가운데 시내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구름과 빛을 본 그 날이 성결하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보는 사람들의 옷을 빨 것을 모세를 통하여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레위기 14,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각종 질병과 관련하여 옷을 빨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즉 청결한 상태를 유지하면 각종 전염병에서 깨끗케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민족과 유대인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유리 민족은 수시로 옷을 빨고 정결한 상태를 유지해 왔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전염병의 발병원인을 보면 한마디로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집 입구에 언제나 씻을 수 있는 물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씻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기 전에도 반드시 손을 씻습니다.
여러분 음식을 먹다가 흘리면 어떻게 합니까? 밥 먹을 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잘 흘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너는 턱이 빠졌냐?”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잘 넘어지기도 하지만 잘 흘리기도 하고 한마디로 집사람 표현대로 부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 압니다. 음식을 먹다 흘려서 옷을 더럽혀도 깨끗하게 씻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들의 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씻어야하지 않습니까? 음식물이 조금 옷에 묻어도 깨끗하게 씻는 우리들이 어찌 더러운 죄를 씻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희 누님은 초등학교 6학년 개근했습니다. 저와는 아주 달랐습니다. 저는 팔이 삐어 수시로 학교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님이 한번은 신발주머니에 흑이 묻었다고 버리고 온 것이었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1-2학년쯤 되었을 때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일로 어머니는 몹시 화를 내시고 당장 신발주머니를 찾아오라고 호통을 치셔서 누님은 울면서 학교로 신발주머니 찾으러갔습니다. 초등학생의 생각으론 신발주머니에 흙이 묻었으니 더럽다고 버린 것입니다.
Þinn! 어떤 의미에서 레위지파가 입고있는 제사장 옷이나 유다지파가 입고있는 갑옷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신분에 맞는 옷입니다. 문제는 신분의 의미보다는 우리 옷이 깨끗해야 합니다. 국회의원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사장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교회의 각종직분의 옷 입고 더러운 것보다는 그 옷을 입지 않고 깨끗한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제사장의 옷을 찢거나 더럽히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입은 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더렵혀져 있다면 빨리 씻어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였는데 사람들이 보지 않는데서 온갖 나쁜 일을 일삼고 다니는 못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독실한 신자 행세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은퇴하시고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 두 형제의 거짓된 마음을 꿰뚫어보았습니다. 또한 말씀을 아주 훌륭하게 전하셔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새 예배당을 짓기 위해 헌금을 모금하게 되었는데, 갑자기 형이 죽었습니다. 동생은 장례식 전날 목사님을 찾아와 새 건물을 짓는데 충분한 액수의 수표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목사님,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장례식 때 제 형이 훌륭한 성도였다고 이야기해주십시오.”
목사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수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장례식에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를 속이고 가족들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하지만 잠시 후 목사님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 동생에 비하면 훌륭한 성도였습니다“
Þinn! 혹시 내가 이러한 거짓 성도의 옷을 입었다면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혹 사람들과 목사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주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본문 3절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옷’은 수치와 비난 거리가 되는 심각한 죄인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Four 64:6)Var kallaður. 죄로 가득한 상태를 말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더러운’의 초임(!yai/x)은 가장 간악하고 혐오스러운 성격의 더러움을 말하는 히브리어 중에 가장 강력한 표현의 단어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더러운 옷을 입고 서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님의 이런 모습을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Four 53:3)Var kallaður. 이 예수님의 모습을 마 27:31에서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에서 봅니다.
우리 죄악의 옷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그 초라한 모습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이 과정이 없이는 저와 여러분들의 죄는 사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난 후 예수님의 옷은 어떻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T 27:35)Var kallaður. 로마 군병들에 의해서 제비 뽑혔고 군사들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실제의 보이는 예수님의 옷은 비참할 정도로 찢겨진 채 몸에서 벗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입고 계셨던 이 세상의 옷은 더러운 죄악세상에서 우리를 대신한 죄의 징표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죄악의 옷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입고계신 것입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
Matthew 28:3절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원래 모습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우리의 죄를 인한 옷을 입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활후의 예수님의 옷은 이 세상의 옷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이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어찌 보면 옷을 안 입으신 것입니다. 이 옷은 이 세상의 옷과는 다른 것임이 분명합니다. 이 옷이 바로 스가랴가 예언한 본문 4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새 옷을 입으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Samtals 7:14)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악의 옷을 어린양의 피에 씻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피에 씻어야 합니다.
“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Rom. 6:6-7)Hefur hár.
예수님이 비유로 들은 탕자이야기가 누가복음 15:11절부터 나옵니다. 아버지를 떠나 공생하다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Luke 15:22)Hefur hár. 돌아온 탕자가 입은 “제일 좋은 옷”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세상의 좋은 옷 색동옷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옷의 의미는 죄의 옷을 벗고 아버지가 입혀주는 의의 옷 사랑의 따뜻한 옷을 의미합니다.
몇 해 전, 미국의 한 조간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여기 나오는 사람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신문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어젯밤, 운명은 존 스미스에게 30초의 시간을 주고, 아내와 함께 죽느냐, 아니면 아내를 떠나서 혼자서 사느냐, 둘 중의 하나를 택하게 했다. 그런데 그는 죽음을 택했다.”
기사의 내용은 존 스미스 부부는 어둑어둑한 저녁에 산책을 나갔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일이다. “두 사람은 철로 길을 걷고 있었는데 기차를 다른 쪽으로 가게 하는 전철기(轉轍機, point) 근처에서 미끄러지면서, 한쪽 발이 두 레일사이에 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발을 빼려고 해도 발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도와 힘껏 잡아당겼으나 고통만 더할 뿐 발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 급행 열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몇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지만, 금방 닥쳐올 위기 앞에서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 기차는 벌써 50미터 앞까지 왔습니다. 존 스미스는 한 팔로 아내의 얼굴을 감싸안고 그리고 다른 한 팔로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차를 향해 섰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다가오는 십자가를 스스로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길이었습니다.
Þinn!
주님이 입혀주시는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옷은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Heb 1:11-12)Komist að því að. 바로 예수님이 입으셨던 눈과 같이 흰 그 옷입니다. 구원의 옷입니다. 이 세상의 더러운 죄의 옷을 벗고 십자가의 어린양을 통해서 입혀주시는 의의 옷으로 갈아입으시는 주앙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