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rahams hlýðni(Fyrsta bók Móse 7)
Rev yiyoungje MP3 Messa Hlustun
“1 Drottinn sagði við Abram, þú og ættingja og heimili föður heiman, birti ég þú ferð í landið 2 Ég mun blessa þig og þín mynda stærsta þjóðerni með nafni þínu, skalt þú vera blessaður doeljira changdae 3 Ég blessa þá sem blessa þig, niður til þeirra sem bölva þér ég bölva þér blessað með öllum þjóðum jarðarinnar, sem vilja fá milta 4 Þetta samkvæmt orði Drottins tók Abram og Lot fór með honum þegar Abram fór Haran seyeotdeora sjötíu og fimm”(Gluggi 12:1-4)
25 blöð af 12 köflum Genesis, Abraham er kynning á lífi. Abraham, a gríðarstór 13 kaflar kynnt beint. 13 köflum Genesis, kafla 50 er 1 / 5 er stærra en. Í Biblíunni lífi td manneskja á það ekki fram í smáatriðum. Eftir að hafa verið kynnt að því marki sem David er aðeins lengri tíma.
Nói, Abraham, lést árið 2006, var fæddur árið 2008.. Goose Ham, sonur Nimrod eftir flóðið var hugsuð er manneskja sem öðlast Tower of Babel. Ættfræði Sems, sonur kjallari sem Arpaksad er staða. 3 kynslóðir af Nóa., Eru mikill-barnabarn Nóa. Eftir Tower of Babel, Guð, sem er einnig raunin var einu sinni bitur vonbrigði. Síðan þá næstum 400 árum eftir dauða Nóa, Abraham, fæddist tveimur árum síðar.
아버지 데라가 2083년에 죽고 아브라함 나이 75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100년을 동행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의 이미지가 나빠졌습니다. 사람하고 거리가 있습니다. 무서운 분이라고만 인식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 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율법이 생기기 430년 전에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법 없이도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은 1절에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을 시작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수 없이 검증하십니다. 나중에는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말씀을 따라가면 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만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성경에 다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와 비슷한 명령을 내리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고 전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노아에게만 아마 방주를 만들라고 하시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순종한 사람이 노아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니므롯 바벨탑 사건 이후에 약 400년이 지났으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말이 같은 사람끼리 모여 살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에 낮선 땅에 간다는 것은 기존의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고향, 친척, 아버지 집”이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기존의 보금자리를 완전히 버리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어떤 식으로 들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듣고 무조건 떠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4Kafli “Þetta samkvæmt orði Drottins tók Abram og Lot fór með honum þegar Abram fór Haran seyeotdeora sjötíu og fimm”Hefur hár. 이후에 아브라함은 제가 아는 한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거나 반항한 적이 없습니다.
나중에 후세는 그를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고 했는데 오직 한가지 이유였습니다. 그는 순종의 대명사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곧 순종입니다. 오늘날에는 너무 많이 하나님께 따집니다. 짧은 지식을 가지고 따지기 전에 공부하세요. 알아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옳고 맡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한 일은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 12:8)Var kallaður. 그 이후에 아브라함을 따라다니던 롯이 헤어지는 장면이 13장에 나옵니다. 한마디로 이유는 살만해 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 아브라함의 마음의 넉넉함을 읽을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땅을 의지하고 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롯은 살기가 좋은 소돔으로 갔습니다. 소돔은 물이 있고 초목이 우거졌으며 양치기가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간 곳은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수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재단을 쌓았더라”(Gluggi 13:18)Hefur hár. 좋은 곳을 다 롯에게 내어주고 자기는 황무한 땅에 와서 재단을 쌓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먼저 재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 축복 받는 사람은 내가 살기가 좋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기 좋은 곳을 택합니다. 이것이 축복의 비결입니다.
롯이 간 소돔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미 좋은 곳은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눈독을 드리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14장에 보세요. “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창 14:1-3) 그 중에 그돌라오멜이 왕이 되어 일종의 연합통치를 하다가 12년 동안 잘 살다가 그돌라오멜이 힘이 더 센 주변의 다른 왕들을 끌어들여 초토화시키고 다 빼앗아 갔습니다. Þá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창 14:12).
Þinn! 살기 좋은 땅은 전쟁이 끊임이 없는 겁니다. 주변에서 시시탐탐 노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살기 좋습니다. 일본보다 얼마나 살기가 좋습니까? 일본은 언제 지진이 나서 죽을지 알지 못합니다. 지난번 지진으로 해외 기업들이 아시아에 일본에 지점을 두었는데 직원들이 안 갈려고 한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쪽으로 많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세 가지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물질관계, 인간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것을 시험합니다. 아브라함은 언제나 물질보다는 인간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더 소중하게 하나님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러 318명을 거느리고 단과 호바까지 쫓아가서 재물과 롯과 식구들을 다 찾아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도 능숙합니다. 그런데 이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단결입니다. 아브라함이 식솔들에게 신뢰를 주니까 죽자하고 싸우는 겁니다. 그들은 목축업을 주로 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말을 잘 탑니다. 창만 들면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정신력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가족들을 위해 죽고자 싸우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러한 믿음을 식솔들에게 얻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을 키운 사람입니다.
기업하시는 분들이요, 처음에는 자기가 잘나서 잘되는 줄 압니다. Já. 자기만 잘 하면 기본은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성장하다가 누구든지 위험이 오기 마련인데 그 때 무엇이 중요하냐, 신용입니다. 신용이 없는 회사는 그 때 다 망합니다. 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신용을 쌓으며 살아가세요. 그것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작은 교회를 하면서 저도 사실 힘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한 선교사님이 오셔서 저 때문에 신학을 하고 선교사 한다는 겁니다. 그 선교사님 이야기가 자기가 아는 사람만 제 영향으로 신학하고 선교하는 사람의 주위에 10여명은 넘는다는 겁니다. 10여 년 전에 서울에서 매주 50여명씩 PC통신 회원들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때 저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지난번에 어떤 목사님이 “PC통신 시절 목사님 영향 안 받은 분이 거의 없을 겁니다”Komist að því að. 어렵고 힘들지만 자기 길을 가면 됩니다. 남들이 보기 좋은 화려한 길만이 아니라 누군가 해야할 일을 하면 됩니다. 이번 주에도 스마트폰에서 설교 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롯과 그의 처자와 함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살렘 왕이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Gluggi 14:19)라고 축복합니다. 그 때에 1/10의 재산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더 유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과 자신을 축복하는 사람에게 재산을 나누어줍니다.
Þinn! 벌어서 나누어 쓰세요. 저도 좀 주시고요. 나누어주는 사람에게 축복이 임합니다. 아브라함 보세요. 하는 일이 축복 받게 생겼잖아요.
하나님 말씀 따라가지요. 가는 곳마다 재단을 쌓지요. 자기 것을 아낌없이 주지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당연히 이런 사람이 복을 받아야지요.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Gluggi 15:1).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으로 꾸준히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하고 자기 기술로만 하고 자기 의지로만 하면 하기는 하는데 기쁨이 없고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어려워도 고난이 와도 영적인 은혜가 충만해 집니다. 그래서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응답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Gluggi 15:6)Er kallað.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사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한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내 사래의 고민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래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있을 수가 없어 애굽 종 하갈에게서라도 후손을 이을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 이야기가 16장에 나오는데 바로 17장에 가서 진짜 아브라함과 중요한 언약을 세우십니다. 창 17장 1-8절입니다. 이건 다 읽어야 합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완전하라(타밈)이라고 말하십니다. 17장을 읽으면서 이미 하나님은 아브람과 사래의 자녀 문제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언약부터 세우십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중에 중심의 장이 바로 17장입니다. 특히 그의 이름이 바뀌는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 17:5)Er. 예전에는 아브람(큰 아버지)으로 살았고 이제는 아브라함(열국의 아버지)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와 새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혼자 의로웠습니다. 그것이 큰 아버지 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을 대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열국의 아버지입니다. 자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내가 의롭게 사는 것, 내가 의인이 되는 것이 사람으로는 장하지만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18-19장에서 소돔 성의 사건이 일어나고 21장에서 사라가 그렇게 바라던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마칠 때 즈음에 청천병력같은 말씀이 22장에 아브라함에게 떨어집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Gluggi 22:1-4)
차라리 드라마라면 크라이막스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드라마가 아닙니다. 충직한 종처럼 하나님이 말씀이 떨어지자 즉시 대답합니다. 그냥 여기서는 못 들은 척 하는 것이 나을 뻔하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마치 말씀만 하옵소서. 그런 자세로 명령을 대기하고 있는 군사와 같습니다. 어떤 명령이라도 수행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런 표현이 안 어울리지만 제가 적당한 표현이 없어서 “참 하나님도 짓궂으시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십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자식보다 나를 더 사랑 하는냐?” 그런 뜻입니다.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은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Gluggi 22:3) 저는 여기서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뭐가 그렇게 급합니까? 자식 바치러 가는 길이요.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데 지체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 외에는 없습니다. 좋은 믿음이란 순종입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브라함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친근한 하나님, 가까이하시려는 하나님, 복 주시려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