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생님이신 예수님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예수님은 누구 신가?(45. 나의 선생님이신 예수님) / 요13:12-15
“12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2-15)
한 소년이 담임선생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있었습니다. 미술시간에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교사는 충혈 된 눈으로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냐?”며 다그쳤습니다. 소년은 어려운 가정형편을 차마 말할 수 없었습니다. 침묵하는 소년을 향해 교사는 머리를 쥐어박으며 고함을 질렀습니다.
“다음부터는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와”
그로부터 17년 후 이 소년은 법정에 서 있었습니다. 지존파의 대부 김기환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최후진술은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선생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선생이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최후의 만찬이 있었고 그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산헤드린 공의회나 율법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오합지졸의 사람들이 모여 다녔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제자의 절반 가량은 갈릴리 어부 출신이고, 나머지는 마태(세리)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따라 다니는 말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선생 될 자격이 있는 분이냐 하면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 또한 선생(랍비)될 자격이 없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랍비가 되려면 전통 있는 학문의 가문에서 배운 적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런 학문적 가문에서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 40세가 되어야 랍비가 되는데 예수님의 현재 나이는 33세 이십니다. 유대인(세속적)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의 제자나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던 세 부류가 있습니다.
1. 대적 자들이 예수님께 부른 선생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마 12:38)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마 22:36)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눅 19:39)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 10:25)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요 8:4)
이 모두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진짜 예수님을 존경하고 부른 것은 아닙니다. 한마디로 비꼬아서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그저 어떤 기적이나 요구합니다. 아직 믿음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배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따져 불으려고만 합니다. 때로는 목사도 표적이 됩니다. 자신이 어디서 하나 알고 온 것을 가지고 질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질문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곤란한 질문들 그리고 “당신 목사니까 한번 해봐”라는 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변화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가 어렵습니다.
2. 관심 있는 자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마 8:19)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막 9:17)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 관심은 있었으나 자신들의 요구을 위해서 나아왔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답을 주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대로 따르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기에게 손해가 안 난다면 하겠지만 작은 어떤 희생이나 노력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주는 대로만 먹고 말겠다는 이기적인 사람들입니다.
3. 제자들이 부른 선생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요 1: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막 4:38)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 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막 10:35)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도 일반적인 선생이나 주가 아니라 본문에는 ‘호 디다스 칼로스’(@O didavskalo”)로 부릅니다. 그리고 ‘주’라고 부를 때도 ‘호 퀴리오스’라고 불렀습니다. 헬라의 호격에는 관사가 붙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관사인 ‘호’가 붙은 것은 주격으로 부르고 잇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선생, 유일하신 선생님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많은 선생님중의 한 분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빌립에 예수님을 찾아왔을 땐 ‘퀴리에’라는 호격을 사용하여 여러 일반적인 선생 중에 뛰어난 선생으로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유일하고도 참된 선생님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경탄
어느 초등학생의 답안지(실화)
‘슬기로운 생활’ 문제 : 옆집 아주머니께서 사과를 주었습니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할까요?
답 : 뭐 이런걸 다
문제 : 부모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실 까요?
답 : 그러게 말입니다.
문제 : 만류인력의 법칙을 발견해낸 사람은?
답 : 죽었다. / 요즘 아이들의 시험답안을 보면서 경탄을 합니다. 예전에 나올 수 없었던 답도 나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마 7:28)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9)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마 13:54)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마 22:33)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막 1:27)
한 마디로 아주 특별한 교육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무리들은 예수께서 특별히 어느 가문에서 배운 것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놀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것을 배웠단 말입니까? 그에 대한 해답을 니고데모가 말합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3:11절에 “본 것을 증거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와 같은 선생이 되라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선생되지 말아야 합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선생이란 세속적인 선생, 즉 잘난 체만 하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는 그런 선생을 말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여기서 자신이 선생 되심을 스스로 밝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과 같은 선생이, 제자가 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이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계셨습니다. 이 행동은 상당히 의도된 행동이십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러 가야하는 예수님의 입장에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잃지 못할 교육을 시키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사막이 많아 먼지가 많고 이들은 센달을 신고 다니기 때문에 발이 항상 더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교육의 본으로 삼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어린 영국 군인이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군목은 군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유언을 물었습니다.
“제 어머니에게 전해주십시오. 아들은 고통 없이 기쁘게 죽었다구요.”
어린 군인은 짤막하게 말했습니다. 잠시 후 어린 군인은 무슨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 숨을 헐떡이면서 간곡하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학교 선생님께 이 말을 전해주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구요. 그리스도인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군목은 어린 군인의 유언에 따라 교회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마지막 유언을 들려주었습니다. 여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한참동안 눈물을 흘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지금 교회학교 교사가 아닙니다. 교회학교 교사라는 직분이 대단치 않게 생각돼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유언을 들으며 결심했어요. 다음 주일부터 다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일관되게 가르치신 것 하나가 있습니다.
. 대접을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 높아지지 말고 스스로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 그리고 행동으로 이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있기 전에 앞서서 예수님은(요 12:14) 예루살렘에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조롱 말이나 타고 가셔서 솔직히 어디 왕 같아 보이십니까? 큰 군말을 타고 가셔야 되지요. 그런데 스스로 작은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겸손, 낮아짐, 섬김”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같은 선생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