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처녀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7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8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9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10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12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13)
한중수교 전에 어느 대학교 총장님의 중국여행 경험담입니다. 어느 비행장에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또 다른 도시로 옮겨가려 하는데 갑자기 승객을 다 내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함께 타고 있던 모든 승객이 이유도 모르고 내렸습니다. 대합실에 불러놓고는 간부께서 이 비행기를 써야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타고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두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당 간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 비행기를 타겠느냐, 아니면 여기서 제일 가까운 역으로 걸어서 거기서 열차를 타고 가겠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당 간부가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으니까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까운 역에 어느 정도 걸어가야 되느냐고 하니까 열 시간을 걸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열차를 타는 게 낫겠다 싶어서 열차를 타러 걸어가 보니 열 시간이 걸리는 그 곳에 기차가 있더랍니다.
그는 중국여행기에서 이런 소감을 우리 앞에 전합니다. 제일 가까운 기차역이 열 시간이다, 기차를 타고 한 달을 가야 대륙을 횡단한다는 나라 사람들과 작은 땅 대한민국에 사는 나하고 도저히 생각하는 폭이 안 맞다는 것입니다. 거리 개념도 중국의 대륙적 사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들
본문은 열 처녀 이야기입니다. 열 처녀는 정확하게 반씩 나누어집니다.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가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다섯 처녀는 굉장한 거리가 있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와의 크기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하늘과 땅 만큼의 큰 가치관이 이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선 열 처녀를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결혼풍습을 알아야 됩니다. 유대인의 결혼식은 요즘은 많이 변했지만 주로 저녁에 많이 한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저녁에 결혼식을 많이 하는데 보통 한 주간 정도 잔치를 합니다. 본격적인 잔치는 신랑이 도착함으로서 시작되는데 그 앞에 예비 잔치가 많이 있고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오는 그 날 밤이 잔치의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를 데리러 오는 시간이 밤중인데 예고하지 않고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집에서는 신랑이 언제와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신랑은 한 사람입니다. 열 명의 처녀들은 모두가 신부가 아닙니다. 열 처녀가 열 명의 신부인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사람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신부 들러리입니다. 유대인 결혼식의 특징은 혼가에서 예식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고 신랑 신부의 친구들이 주도한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신부집에 올 때도 신랑 친구들이 신랑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신랑을 먼저 맞이하는 사람은 신부 친구들입니다. 신부의 친구들은 초저녁부터 신랑일행을 맞이하러 얼마쯤 길가로 나가서 기다립니다. 언제쯤 올까하고 기다립니다. 요즘이야 핸드폰으로 연락해서 어디쯤 오냐고 물어보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는 그런 것 없었습니다. 그냥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자정을 넘깁니다. 들고있던 불도 꺼져가고 한 두 명 피곤하여 지쳐서 길가에 앉아 좁니다.
본문의 신랑은 이날 밤에 신랑이 더디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열 명의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며 잤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신랑이로다.” 하는 소리를 듣고 깨어보니까 다섯 처녀가 들고 있는 등불이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해 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등불이 꺼져 가는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빌려달라 하니까 자기들의 기름도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빌려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사러 간 그 사이에 신랑이 와서 다섯 처녀들은 신랑을 놓친 것입니다. 그리고 부랴부랴 신부집으로 뛰어갔지만 이미 문이 잠겨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준비되어 있는 인생
집안에 들어가 있는 사람과 집밖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갈립니다. 아주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안에 들어간 처녀들은 그 날 잔치를 즐거워하겠지만 문밖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이 다섯 처녀들은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영적인 교훈을 새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다섯 처녀와 또 다른 다섯 처녀를 보면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모두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랑을 기다리다가 같이 졸았습니다. 다만 기름이 있느냐 없느냐는 차이입니다. 기름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한번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인간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전쟁일 것입니다. 전쟁을 만나면 인간은 비참해집니다.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비참합니다. 우리도 지난날 한국전쟁을 겪었지만 전쟁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질병도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 외에 갖가지 실패들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제일 비참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버림받았다는 것입니다. 붙잡고 있던 것이 복인 줄 알았는데 끝에 가 보니까 복이 아닌 것입니다. 초저녁까지는 당당히 신랑을 맞이할 줄로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이 등을 들고 똑같이 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 없는 상황을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서 보니 복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한 평생 붙잡고 있다가 끝에 가보니 복이 아니더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보다 비참한 인간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붙잡고 살아야 당당합니다.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끝에 가서 그것이 날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정신차려야 합니다.
여러분! 졸더라도 준비를 하고 졸면 애교가 됩니다. 시험을 보는 날에 피곤하여 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서 준비한 학생은 하나 하나 잘 써내려 갑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않은 학생은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준비하지도 않은 채 겁도 없이 함부로 졸며 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가면 기름준비가 없는 다섯 처녀의 비참한 종말이 바로 이 땅위에 태반 이상이 겪어야 될 인간의 운명을 예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짐승은 배만 부르면 된다. 그런데 인간은 배부른 후부터 문제다 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배만 부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에 가서 이것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비참해집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인간이 가장 비참하게 될 상황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훈에서 기름은 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기름은 내가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도 준비해 줄 수도 없으며 빌릴 수도 없습니다. 이 기름이 무엇입니까? 성경 해석 가들은 성령, 말씀, 믿음 이 세 가지로 말합니다. 성령이든 말씀이든 믿음이든 이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름은 예수께로부터 받아야 되는 것이지 다른데 가서 사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들은 기름이 예비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얻은 자와 잃은 자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랑이 다 왔을 때 깨달은 것입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이제 등불을 켜서 맞이하려고 하니까 불이 안 붙습니다. 이제 기름은 사러가려고 하니 늦었습니다.
여러분!, 복권도 그릇이 예비 되어 있는 사람이 당첨되어야 복입니다. 큰 돈 만질 그릇이 안되어 있는데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그 복권 때문에 인간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복은 복 자체가 복이 아닙니다. 어떤 자세로 복을 받아서 누리느냐에 따라서 복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똑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만 그 은혜를 받는 우리의 자세는 각각 다릅니다. 아무리 값진 은혜라도 그릇이 비뚤어져 있으면 그 은혜를 쏟아버립니다. 그릇이 문제입니다. 그릇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격이고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하는 태도가 바로 되어 있어야 은혜가 은혜되고 복이, 복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또한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신랑을 기다리는 태도가 잘못됐습니다. 이런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신랑을 맞이하러 나갔으면 당연히 다음날 동이 터 올 때까지 기름이 준비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신랑이 늦게 올지 모른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신랑이 빨리올 것으로만 믿었습니다. 그것이 잘못입니다. 너무 늦게 이 사실을 알았지만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늦게 깨닫는 분들은 무한한 은혜와 복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인간의 불행 중 또 하나는 내가 이미 받은 복을 복으로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결과에만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을 못 받은 게 아니라 못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기만 하면 결코 내가 받은 복도 작은 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하나의 메시지는 인생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기회는 내 소원대로 반복되지 않습니다. 신랑이 오는 것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기회는 한번 지나가면 오지 않습니다.
휴대전화 외판원에서 영국판 노래자랑인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우승하여 일약 주목받는 가수가 된 36살의 폴 포츠(Paul Potts)가 있습니다. 예선전에 출연한 그는 말투는 어눌하고, 치열은 고르지 못하며, 누구도 비 호감이라고 부를 만한 후줄그레한 옷차림, 짧은 팔에 배불뚝이, 쳐다보는 것이 미안한 심정이 들도록 얼굴엔 극히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오페라를 부를 겁니다.”라고 말하는 그를 미덥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비웃듯이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진지한 눈빛으로 그가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자 비웃음 섞인 시선을 보내던 심사위원들과 방청객의 표정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귀를 다시 씻게 만드는 음색과 풍성한 성량은 등을 젖히고 조롱하는 듯한 눈빛으로 앉아있던 방청객들의 자세를 바꾸게 했고, 볼펜을 입에 문 심사위원의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으며, 한 여성 심사위원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폴 포츠 신드롬’이 일고 있는 것은 감미로운 노래 뒤에 숨어 있는 그의 감동적인 휴먼 스토리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오페라 가수를 꿈꿨으나 어눌한 말투와 자신감 없는 외모 때문에 항상 ‘왕따’를 당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충수파열과 부신종양 등의 병으로 수술대에 올랐고, 2003년엔 오토바이사고로 쇄골이 부서져 큰 성량을 요구하는 오페라 곡을 부르기에는 몸이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휴대전화 외판원을 하면서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준비하고 있다가 결국 단 한 번 찾아온 기회(One Chance)를 놓치지 않고 그 꿈을 이뤘습니다. 그의 첫 앨범 타이틀도 ‘원 찬스’ 입니다. 그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입니다.
신앙은 나와 하나님 관계이다.
그리고 더 근원적으로 나아가서 신앙문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 등의 기름은 내가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할 때 시선을 바로 가져야 됩니다. 시선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께(신랑)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러 가지를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한 평생을 주님 앞에 충성 되이 살려면 신랑만 보고 살아야 됩니다. 신랑보다 옆 사람이 크게 보이고 신랑보다 세상 것이 크게 보이면 그의 신앙생활에는 중대한 갈등이 옵니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이 영의 시선이 확실할 때 세상으로부터 오는 시험, 사람으로부터 오는 실망을 이겨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어 갈수록 예수님을 바라보는 영의 시선이 더 좋아지고 강렬해 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히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미 2:11)
제가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니까 어떤 분이 제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눈 수술을 한번 받아 보세요. 요즘 시력을 회복하는 기술이 아주 좋아져서 목사님이 수술 받으면 분명히 좋아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수술하는데 돈을 대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겁이 많잖아요. 이빨 빼러 갈 때도 가서 기절하고 우리 집사람 손잡고 갔잖아요. 근데 제가 멀쩡한 눈 깍아 내겠습니까? 안경을 쓰고 말지요.
그런 이유도 있지만 또 한 가지는 시력이 좋아진다고 내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력이 더 좋아 질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육신은 쇠해 가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신령한 시력은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잃으면 세상의 엉뚱한 것들만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내 신앙생활에 장애가 됩니다. 어떤 사람의 말 한마디 때문에 속상해도 주님을 바라보는 시력이 확실하면 귀로 스치고 지나가면 됩니다. 기름준비하고 신랑을 정확하게 맞이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의 모습으로 우리가 주님을 맞이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