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증인이 되라(사도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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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배경
4복음서가 먼저 나온 후에 역사적인 사도행전이 뒤따랐습니다. 이 책은 예수의 후계자인 사도들의 환상도, 이론도, 사색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들이 실제로 행동해서 이루어 놓은 행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시고, 성령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되었고, 그 교회들은 다시 선교하여 복음이 로마까지 번져나간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주요 인물은 베드로와 바울이며 대체로 살펴보면 바울의 사적이 6분지 3, 베드로의 사적이 6분지 2 그 밖의 사도들의 사적이 6분지 1에 해당합니다. 베드로의 활동이 먼저 1-12장까지, 나머지 바울의 활동이 1,2,3차 전도여행과 로마여행까지 28장까지의 기록입니다.
사도행전의 중심주제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님에 대한 언급이 30회 이상 나옵니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출발점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그 자리에까지 와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천하실 산에서 5절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고 하시면서 성령을 받는 것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절)고 하셨습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있고, 불안하여 도망 다니고 하지말고 한 자리에 모여서 기도하고 성령 받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어느 때에 임하느냐하면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구약부터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하나님도 어찌하실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최소한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무슨 역사가 일어나고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도 말씀에 순종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주시고 싶어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람들이 감람산으로 남자만 한 500명쯤 모였습니다. 이 정도 숫자면 위협적인 수입니다.
감람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해발 약800m 정도로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산 보다 90m높은 산입니다. 그리고 적선 거리로 보면 바로 내려다보이는 예루살렘이 한눈에 다 들어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행 1:12)
안식일에는 제한된 거리 2,000아마(약 1km 조금 안됨) 만을 걸을 수 있는 율법 규정을 통하여 예루살렘에서부터 승천하신 곳까지는 약 1km의 거리밖에 안됩니다.
이 감람산에 모인 제자들은 의기 양양했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모였겠다, 분위기가 고조되었고 이제 저 아래 보이는 예루살렘으로 그대로 진격해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의 대답은 제자들의 기대에 어긋났습니다.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7-8)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계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지금 로마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바로 예루살렘 성을 당신을 죽였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손에서 빼앗아 그 복수를 하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A.D. 70년에 예루살렘성은 패망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자기 소원이 너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기 소원이 너무 강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받기가 어렵습니다. 자기의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의 제자입니까?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ajlla; : 알라”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체험을 못하시거나 모르시는 분들은 “성령을 증명해봐라?”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분명히 계시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영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무슨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에게는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증명해 봐라”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하는 사람에게 갑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신약성경에서 유일한 역사서이다. 복음서 다음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기록한 살아있는 책이다. 그래서 주장보다는 실천이 강한 책이다.
(1) 예루살렘에서의 증거
사도들의 설교로 예루살렘 교회가 설립되었다.
베드로가 성령의 힘으로 설교할 때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하루에 3천 명이나 되었다(행2:41). 7집사 중 한사람인 스데반이 설교하다가 돌에 맞아 죽음으로서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서 예루살렘 모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유대 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
(2) 사마리아에서의 증거
그 때에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복음은 에디오피아의 내시와 로마 백부장 고넬료에게 증거되어 이방인 에게도 전파되 었다.
또한 복음은 멀리 다메섹에도 들어갔는데 이들을 체포하러 그곳에 가던 사울이 도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완전히 인격적으로 변하여 박해자 사울이 바울이 되어 순교자 바울이 되었다.
그 후 동역자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였는 데 이 때에 비로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행11:26).
(3) 땅끝 까지 이르러 증거
안디옥 교회에는 이방인을 위해서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 하였다.
최초의 선교사가 된 바울과 바나바는 제1차로 구브로 섬으로 떠났다.
거기서 지중해를 건너 비시디아 안디옥과 갈라디아 지방에서 전도하고 안디옥으로 돌아 왔다.
제2차 여행을 떠난 바울은 육로로 갈라디아를 순회하고 구라파 지경으로 들어섰다.
빌립보, 아덴, 고린도 등지에서 전도하고 에베소에 들렸다가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바울은 다시 육로로 제3차 여행을 떠났다.
에베소에서 약 3년 간 머물러 있다가 마게도냐 지방을 순회하고 돌아왔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 유대인들이 잡아죽이려고 하였다.
천부장에게 구출된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2년이나 미결수로 감금되어 있다가 로마 시민권을 발동하여 로마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가게 되었다.
로마에 도착 바울은 가이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셋방에서 자유롭게 서신을 기록 하여 밖으로 내어 보내고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행전의 신학적 특징은
첫째, 원시 기독교의 기독론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다. 이것이 기독론 형성의 결정적 요인이자 계기이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복음이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펴볼 때 기독론은 서서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폭발적으로 단번에 형성되고 처음부터 총체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원시 교회의 신학 형성에 있어서 헬라적 공헌이라는 것은 헬라 사상이 갖고 있는 계몽주의적이며 해방 적인 성격의 영향이라기보다는 헬라 말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열정을 보인 이방 선교의 관점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개념적으로 특별하게 표현했다기보다는 복음의 자유를 누구보다도 실감해서 넓은 세계에 눈을 돌리고 유대 율법의 엄격한 실천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깨닫고서 있는 그대로 전했을 뿐이다. 이러한 복음을, 즉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을 확립한 사람이 사도 바울이다. 때문에 바울이 잘 사용하는 <Kuvrio” jIhsou’” ; 큐리오스 예수스>는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해방적 의미를 말한 것이지 결단코 헬라적 혼합주의나 로마적 황제 예배의 감정을 토로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원교회와 마찬가지로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 마라나다의 주,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분, 역사의 통솔자로서의 그리스도를 통일된 모양으로 체득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며 결코 헬라의 사상으로 체계화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원시 교회의 여러 가지 그리스도 표현을 개념적으로 분석할 것이 아니라 총체적 인격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셋째, 원교회의 신학 형성과 헬레니스트와의 관계에서 필히 알아야 할 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토록 초창기부터 열렬했던 성령 신앙이 갈릴리 교회들에게서는 점점 사라져 갔다는 사실이다. 갈릴리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도’와 ‘가난함’과 예수 그리스도가 요구하시는 ‘좁은 문’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반면에 성령 충만함은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이며 헬라적인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교회와 서방의 교회들이 원교회의 성령 충만함을 계승한 것은 헬라 지방에 널려 있는 열광 주의적인 요소와 반 율법주의적 경향에 강하게 영향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성령을 의존한 신앙은 바울과 헬라 세계의 교회가 보존했다. 그것은 예수의 부활에서 나오는 물질적으로는 파악하지 못하는 불가사이의 사실이다. 이 부활의 체험은 종말 신앙과 성령 체험을 낳았다. 그것은 결코 사상으로나 언어로 개념화 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