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나라를 위하여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33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요 18:33-38)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 인줄 알고 ‘호산나’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들의 이 소리는 일주일도 못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소리로 변한다는 것을이요. ‘호산나’ 소리를 들으시면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사람의 소리, 군중의 소리, 산헤드린 공의회의 어떤 결정이 사람을 구원시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사람을 보고 사람을 믿으면 실망과 좌절뿐입니다. 상처만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안에서 사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믿을 것도 사랑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과 부활 주일을 앞에 놓고 십자가에 관한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많이 듣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 한 구절만 가지고는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읽은 요한복음 18장 28절 이하에서 ‘주셨다’는 말의 의미를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죽이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단호한 뜻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23절에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다른 죽음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의 죽음일까요?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가장 잔혹하다는 그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을까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만큼 이것에 대해 선명한 답을 주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사실 십자가는 로마에 의해서 갑자기 생겨난 형틀은 아닙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나무에 잘 매달아 죽였습니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십자가는 한마디로 저주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했던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저주의 죽음을 죽어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율법의 저주 아래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율법의 요구요 명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나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언제나 나 자신만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시대라고 하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가시면 뭐가 좀 달라진다면 십자가가 아니라도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녀가셔도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구약 사람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가끔 신약 이후의 시대에 산다고 아브라함 보다 모세보다 최소한 아론보다는 좀 나은 구석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바울이 말한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은 참 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자기 편한 대로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왜 ‘사랑’이십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사랑이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순종’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순종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에 너무 오래 걸리니까 광야에 있던 백성들은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참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금송아지를 만들어 냅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런 조급증에 걸리면 결국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 얻을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막 13:13, 마 24:13)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 이유를 민 12:3에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해서 살인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광야에서 60여 년 간 있으면서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까? ‘온유’해 지세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 복 가운데도 들어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여 사는 사람은 결국은 실패와 좌절뿐입니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시 33:17)고 했습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47)고 했습니다. 사람의 잘남이 아닙니다. 인생의 결국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주를 의지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라고 했습니다. 모세도 바울도 처음에는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보니까 자신들이 얼마나 낮은지를 알게되었고 온유해 졌습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요 18:33-38)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34절에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고 다시 묻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나에게 물어보는 것이냐 아니면 빌라도 네가 그렇게 나에게 질문하는 것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35절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였기에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인 내 친족들이 너를 나에게 넘겼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논쟁이 ‘나라’의 개념입니다.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니까 빌라도가 다시 37절에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라고 하셨습니다. 빌라도 입장에서 보면 갈수록 모를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생각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빌라도는 땅의 나라에 대하여만 생각하기 때문에, 알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라고 말씀하시니까 38절에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라고 묻습니다. 사실 더 이상 대화가 계속된다고 해도 빌라도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왜 나왔습니까? 아름다운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지식을 배우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런 요소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은 아닙니다.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것이 ‘진리’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진리’(ajlhqeiva/:알레데이아)는 ‘참된 것, 진짜’ 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진짜를 모르는 겁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참되신 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영원한 나라, 불변의 나라, 변하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 증거하시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원문의 이 단어가 제일 처음에 나타나는 것은 마 22:16에서 바리세인들이 예수를 책잡고자 할 때 비아냥거리면서 한 말입니다.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비록 다 깨닫지는 못했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참되시고 하나님의 도, 나라를 증거하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타난 것은“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입니다.
세 번째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자 그러면 무엇입니까? ‘진리’(ajlhqeiva/:알레데이아)만 알면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리를 아는 것도 진리에 있고, 가는 것도 진리에 있고, 오늘날 교회의 문제도 다 이 진리에 있는 것입니다.
원문의 ‘진리’(ajlhqeiva/:알레데이아)는 ‘ajlhqhv”:알레데스’에서 나왔습니다. 이 뜻은 ‘참된, 진실한’이라는 뜻인데 문법이 재미있습니다. 불변사입니다. 이 알레데스는 어디서 나왔느냐 헬라어 첫 문자인 ‘알파’ 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변하시지 않는, 첫 근원과 같은 존재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크리스찬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로 시작해서 예수로 마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육신에 속한 사람은 이 진리를 모릅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왜 성령 성령 하느냐?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알 수 없는 것 그것이 ‘진리’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 맘대로 나와 앉아 있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 없고, 병 고침 받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아멘.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