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20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21 무릇 서원한 것을 갚으려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든지 하여 소나 양으로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자는 열납되도록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레 22:20-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제물을 드리는데 있어서 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한 주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정신을 차리고 경외 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는 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반드시 그것이 어떤 종류의 제사이든지 제물이 있어야 했습니다. 제물 없이는 제사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수리산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으면서 이런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작품에 나는 단지 쎠터를 눌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제사에 우리는 다만 믿고 참여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예배드릴 때 좀더 바른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이 예배는 사람끼리 모여서 가지는 순서가 아니라, 온전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 제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찬송 부르는 마음의 자세가 어떠합니까? 엉뚱한 마음으로 기도를 반복한 일은 없습니까? 우리의 드리는 기도가 지극히 형식적인 방법으로 드리는 마치 중언부언하는 의미 없는 기도는 아닙니까? 틀에 박힌 생명 없는 전통적인 예배는 아닙니까? 우리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별 짓 다해도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서면 곳곳마다 피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피’ 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에 기분 좋은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소에는 마루나 휘장이나 모든 기물에 이르기까지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속죄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속죄함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제물은 아무거나 드릴 수가 없습니다. 제물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기르던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자기 소유물 중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돈주고 사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제일 소중한 것을 지금 만일 하나님이 내어놓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내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러한 명령이 믿음이 좋기로 소문난 아브라함에게 떨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는 것입니다. 오래 전 남의 이야기이니까 그냥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만일 오늘날, 내게 일어났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저는 그래서 저는 선교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물론 저는 아들이 없습니다만 여러분! 감사할 줄 아셔야 합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 자식 바치라고 하시지 않잖아요. 전도하고 선교하라는 것입니다. 좀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창 22: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고민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길떠날 준비를 합니다. 가기 싫었으면 저녁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한마디도 안 합니다. 물론 본문이 이삭에 대해서 함구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사이를 이야기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당사자인 이삭의 인권이 마치 유린된 것처럼 보입니다.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삭은 그저 순종할 뿐입니다. 제사들 드리러 가는데 양도 없습니다. 제물을 바치려고 나무를 벌려놓는데도 제물이 없습니다. 순간 아브라함은 칼을 빼들고 이삭을 겨냥합니다. 내리치려고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손을 잡았습니다. 하나님의 심부름을 받은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데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창 22:12)고 하셨습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이 번제물 어린양을 준비하셨다고 하여 “여호와 이레”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산이 훗날 예루살렘 성전의 터가 됩니다. 역대하 3장 1절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입다와 외 딸
이스라엘에 ‘입다’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지도자입니다. 우두머리였습니다. 18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암몬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용맹스런 사사입니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그는 길르앗에서 기생이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기생하고 관계하고 난 아들이 입다입니다(삿 11:1). 그래서 그는 이복형제들로부터 구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핍박을 견디다 못해 돕이라는 곳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돕이라는 곳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시골 변방입니다.
변두리입니다. 입다가 그곳에서 어울렸던 사람들을 가르쳐서 삿 11:3절 말씀에 잡류라고 말하는데, 잡류는 무가치한 사람들, 부랑배 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입다는 그러한 깡패들과 어울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암몬이 대대적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하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입다를 지도자로 세우고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한가지의 특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입다의 서원입니다. 그는 전쟁에 앞서서 하나님께 이렇게 서원합니다. “하나님, 만약에 전쟁에 이기게 하시면 가장 먼저 저를 환영하고 영접하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겠습니다.” 서원하고 전쟁에 나가서 승리합니다. 개선가를 울리면서 입성하는데, 자신을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무남독녀 외동딸이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노릇입니까?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입다는 옷을 찢으면서 괴로워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점은 왜 입다가 처음부터 사람을 제물로 드릴 생각을 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마도 개나 소가 마중 나올 것을 염두 해 두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생각은 이방종교에 널리 퍼져 있는 생각입니다.
이방종교에서는 사람을 드리는 제사가 가장 큰 제사이고 가장 큰 제물입니다.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님이 첫선교사로 갔는데, 그 선교영화에 보면은 이러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어느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밤이 늦었는데 어느 허름한 집에 불이 꺼지지 않고 여인네의 흐느끼는 울음이 밖으로 새어
나옵니다. 연유를 물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1년에 한차례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때묻지 않은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데, 그 차례가 바로 자기 딸이라는 것입니다. 날이 밝으면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밤새 울고 있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이 걱정 말라고 위로합니다.
드디어 날이 밝고 이 처녀를 꽁꽁 묶어서 들것에 실어서 커다란 동굴로 들어갑니다. 그 동굴 가운데, 제단 위에다 처녀를 눕혀 놓고는 재빠르게 다른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아무도 모르게 숨어 들어왔습니다, 바위 뒤에 숨어서 지켜보는데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 구렁이가 마을의 수호신이었던 것이죠, 혀를 낼름 거리면서 처녀에게 접근하여 한 입에 삼키려는 순간, 이기풍 목사님이 “멈춰라” 하시면서 구렁이와 한판 싸움을 붙었습니다. 구렁이가 목사님의 몸을 칭칭 감았습니다. 목사님은 뱀의 주둥이를 양손으로 잡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힘을 주옵소서 이 귀신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하나님이 힘을 주셨습니다. 뱀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처녀를 구해서 내려옵니다. 그 어머니가 제주도에서 첫 교인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이방종교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최상의 제사였습니다.
이방종교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드렸으나 하나님은 사람을 재물로 드리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자신의 실수로 말미암아 무남독녀 외동딸을 제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 딸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아버지의 실수로 죽임을 당한 딸, 그의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또 하나님은 왜 그 죽음을 막지 아니하셨을까요? “입다야, 중지해라”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처럼 말씀하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기에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희생제물”입니다. 입다는 남의 생명을 하찮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자기 딸이 아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생명은 없습니다. 생명은 다 소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사람이 제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딸의 희생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입다의 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죄가 없는 입다의 딸이 죽은 것처럼,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죽으셨습니다. 순전히 다른 사람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생제물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족합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씨랜드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23명의 어린이들이 새카만 숯으로 변했습니다. 기가막혀서 말이 안 나옵니다. 당시 어느 분이 PC통신에 이러한 글을 올려 놓았습니다 “사우나를 하다가 문득 죽은 어린이들이 떠올랐다. 땀 좀내는 것도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얼마나 뜨거운 고통을 당해야 죽을까? 그것도 어린 아가들이… 아이들이 얼마나 뜨거웠을까를 생각하니 사우나탕에서도 소름이 끼쳤다”는 것입니다.
사고현장에서 어느 부모는 한웅큼 뽑혀 있는 머리카락을 발견했습니다. 뜨거운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서 6살, 7살 먹은 아이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원인이 무엇입니까? 모기향불이 원인입니까? 술 먹고 있었던 직원들이 원인입니까? 원인은 우리들의 탐욕, 부정과 부패 돈만 되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는 우리들의 탐욕이 원인입니다. 천사 같은 아이들은 어른들의 탐욕 때문에 부정 때문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어른들 때문에 순진한 23명의 어린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PC통신에 이러한 짤막한 글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씨랜드에서 운명을 달리한 아기 천사님. 다음에 태어나실 때는 한국에 태어나지 마시구요 진실이 통하는 나라. 불법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꼭 태어나세요.” 그들은 우리의 죄, 탐욕에 대한 희생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상에서 부르짖는 예수님의 소리에 아브라함에게 “멈추어라!” 하는 지시를 천사들에게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하나님을 위해서요?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서 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희생제물이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희생제물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희생 제물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자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기 위해서 죽어간 선열들에게 빚졌습니다. 우리들의 탐욕과 죄 때문에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은 어린아이들에게 빚 졌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습니다. 이 빚을 갚을 길 없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기를 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중에서 소와 양, 비둘기는 있는데 물고기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물고기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지 않으셨을까? 좀 엉뚱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노아의 홍수 때 물고기는 죽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희생당하지 않았습니다.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암수 두 쌍씩 들어가서 살아 나와서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물고기는 산채로 성소까지 가져오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바울이 표현한 ‘산 제사’ 너무 멋있는 말입니다. 죽어서 드릴 생각을 하기 이전에 지금 살아서 주님의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