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모세)을 준비시키는 하나님(출애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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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오후예배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6)
출애굽기 개요
1. 하나님의 사람준비(1:1-6:30)
2. 하나님의 자기 계시(7:1-11:10)
3. 유월절과 애굽 탈출(12:1-18:27)
4. 시내 산에서 언약 맺음(19:1-25)
5. 십계명 공포(20:1-26)
6. 시행세칙과 교훈(21:1-24:18)
7. 성막 건축지시(25:1-40:38)
서양속담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이 좋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 창세기를 마치면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욥기도 창세기의 한 부분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을 배웁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해야될 일은 출애굽기 개요를 보면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사역해야되는지 하나의 로드맵입니다. 출애굽기가 하나님의 매뉴얼입니다. 우리도 그대로 하면 됩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준비된 사람이 제일 중요합니다.
예수님 때 금식기도와 십일조 잘 드렸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인 행위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은 독사의 새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고 십일조 잘 내고, 금식기도 다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줄을 알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형식적인 신앙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출애굽기’는 ‘애굽 탈출 이야기’ 또는 ‘이집트 탈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이름은 쉐모트 ‘이름들’입니다. 이는 가나안 땅에서 야곱과 함께 내려온 사람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엑소도스’ 그냥 ‘탈출’이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탈출하느냐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간지 약 400년 사이에 유대인들의 수가 많아 졌습니다. 애굽에 위협이 되는 수준에 이른 겁니다.
히브리 어머니들은 언어를 대개 5개 국어 정도 하면서 자녀교육을 합니다.
아버지는 성경, 탈무드 교육만합니다. 보이지 않는 교육만 합니다.
오전에는 성경교육, 탈무드만 교육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교육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논하니까 보이는 세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교육 방법은 완전 토론식입니다.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답을 찾아 나가고 랍비는 방향만 잡아주고 토론하는 분위기만 만들어 줍니다.
애굽에 있는 히브리 백성들은 애굽의 건축 보조공(일본말 시다바리)으로 나일강에서 라암셋에 이르는 원만한 경사로를 만들어 돌을 굴려오도록 만들도록 합니다. 그런데 흙이 진흙이면 뭉쳐지는데 뭉쳐지지 않는 흙을 뭉치라는 겁니다. 흙을 뭉치려면 짚과 진흙을 섞어야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을 이렇게 학대하면 아이를 못날 줄 알았는데 근육질이 되니까 더 많이 납니다.
하나님의 큰 계획이 이 때 실행되는데 자연계시로만 하나님을 아는데 사람이 계속 타락해서 하나님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특별계시로 이루게 하십니다.
그 방법으로 하나님은 성경을 기록하게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보고계십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은 사람이 또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직접 하시는 일이 있고, 천사를 시켜서 하는 일이 있고, 사람을 통해서 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람하고 하는 일은 사람이 순종을 안 하면 하나님도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게을러서, 천사가 일을 안 해서 문제될 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로도 무엇을 하실 수 있다 합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의 보좌를 깨운다고 흔드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습니다. 마른 막대기가 없어서 일을 못 하시는 게 아닙니다. 모세의 마른 막대기가 일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고 가리키도록 만 하신 것이지 막대기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쓰임 받기를 원해야지 막대기 이야기만 하면 안됩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준비된 사람이 만들어지면 되는 것입니다.
일본기독교는 일본 밑에 있어서 기독교가 일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일본국기를 보면 가운데 빨간색 원하나 있는데 이것이 화하사상, 일화사상입니다. 이 가운데 들어오면 다 일본화 되는 것입니다.
서양의 기독교가 그랬고 일본이 그랬습니다. ‘나라가 있어야 교회가 있지’ 하면서 가르치는데 ‘아닙니다.’ 나라는 없어도 교회는 존재해야 됩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선입니다. 그 다음이 세상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 노예만 해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레위 자손 중에 하나를 뽑았는데 애굽인들이 히브리인의 아이들을 죽이니까 산파가 아들을 나아서 나일강에 던졌는데 모세(구출)가 죽지 않고 살아나서 바로 궁에서 교육받게 하고 나이 들어서 40세에 혈기로 일해보려고 하는데 안됩니다. 결국 살인자로 미디안 광야에서 80세가 되도록 다듬어집니다. 결국 이 땅의 사람들보다 온유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습니다. 이 기간이 무려 80년이 걸렸습니다. 모세를 만드는 기간이 80년이 걸린 것입니다.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간 여호수아가 25년 일했는데 별로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나타나기까지 무려 360년이 지나갑니다. 모세부터 하면 약 400년의 기간이 흘러갑니다. 이 시대에 사람이 없으니까 360년 동안 종교암흑시대를 살아갑니다. 사람이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붙잡고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위해 준비되는 사람, 이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통해서 기도해서 아들을 낳게 합니다(삼상 1:1, 10:20). 밤에 잘 때에 여호와가 사무엘을 세 번이나 불러 ‘그와 같이 하시겠다’(삼상 3:)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의 뜻은 “하나님이 지명하심 혹은 하나님께 구함”입니다. 그 사무엘을 통해서 잠깐 일하셨지만 그 자식들 때문에 얼마 못 갑니다. 이 자식들이 법대출신입니다.
나이 많아 브엘세바에서 사사의 직분을 두 아들에게 물려 줬는데 그들은 부친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뇌물을 취하며 판결을 굽게 했다. 요엘과 아비야가 속썩입니다. 브엘세바에서 첫 재판에서 뇌물 받고 난리가 납니다. 이 두 아들 때문에 하나님도 권좌에서 물러나십니다. 한국 어머니들이 이런 아들 기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백성들을 올바로 통치할 수 있는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합니다. 사무엘은 개인적으로 신정정체(神政政體)를 왕정정체로 바꾸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무릎 꿇고 기도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사무엘에게 명령합니다(삼상 8장).
여러분! 데모라는 것이 무섭습니다. 하나님도 물러나시게 합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지시를 좇아 이스라엘을 다스릴 제1대 왕으로 사울을 선발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울을 한 나라의 왕으로 공인하기 위해 미스바로 백성들을 소집해서 성대한 즉위식을 거행했습니다(삼상 10장). 그러나 그에 대한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바와 같습니다. 다윗 하나 미워하다가 나라망치고 자기도 죽습니다. 미워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 이후 다윗도 솔로몬도 그렇게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반쪽 승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엘리야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받아서 한일이 없습니다. B.C. 931년 남북왕조가 나누어지고 B.C 722년 북왕국이 멸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B.C 586년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완전히 망합니다. 이후 바벨론 포로 70년 갔다가 돌아와서 에스라, 느헤미야, 스룹바벨이 유대인들을 데리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시 정신차린 것 같았지만 잠깐 하다가 그만둡니다. 이후 세례요한이 준비되기까지 400년 동안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직접 오셔서 33년을 지내시고 복음전한지 3년 만에 십자가에 달려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도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악합니다. 자기들의 이익과 기득권에 빠져있어서 그럽니다. 버리지 아니하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12명인데 한 명은 죽고 11명 남겨 놓으셨는데 이들이 33년부터 복음을 전합니다.
33년부터 제자들은 목숨 내 걸고, 무서워하지 않고 복음전합니다.
31년 정도 사역하다가
64년-68년까지 네로의 대 박해가 3년 반 동안 계속됩니다. 이 기간에 거의 다 죽습니다.
90년-96년까지 또 7년 대 박해가 시작됩니다. 이 때 반모섬에서 유배된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합니다(네로, 티베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4-235년), 고르디아누스(-238년), 데키우스(249년-251년), 고르디아누스 3세(238년-244년), 디오클레티아누스(284년-305년) 등
311년부터 14대까지 250년 동안 대 박해가 계속됩니다.
이 때는 기독교인이다 그러면 모두 죽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카타콤과 같은 동굴로 무덤 속에 굴을 파서 살았습니다.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회심하고 로마제국의 기독교를 공인합니다(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밀라노 회동에서 결정).
기독교가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자 동굴마다 다른 말을 하는 겁니다.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틴노플, 로마가 다 다른 말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 큰일이다 하고
325년 니키아 비주니아주에서 최초의 기독교 종교회의가 열립니다. 이 때 두 가지 문제가 주제입니다. 첫째 부활절 날이 어떻게 되느냐하고, 둘째 그리스도의 정체(신이냐 사람이냐)가 뭐냐 하는 겁니다. 325년 만에 정체성 논란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하고 똑같다고 한 아다나시우스가 정통이 되고 하나님하고 비슷하다고 한 아리우스를 정죄합니다.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는 마리아가 누구냐?(하나님의 어머니냐(데오토코스), 그리스도의 어머니냐(크리스토코스))냐 하는 겁니다. 데오도코스를 마리아로 호칭하기로 합니다.
당시 이단으로 내 몰린 네스토리우스가 예수님의 어머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통으로 인정된 로마교구가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서방로마교구가 마리아 종교로 전략합니다. 에베소에 가면 지금도 이 회의가 열렸던 장소가 있습니다.
590년 그레고리1세가 황제의 왕관을 쓰고 나옵니다. 자기가 황제라는 겁니다. 이 사람들의 황제의 개념은 이 땅의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황제니까 자기가 예수님이고 하나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517년 마틴루터가 종교개혁 할 때까지 천년을 중세로마 카톨릭이 부패합니다. 이 기간에 전 세계가 유럽의 식민지화됩니다.
1517년 이후 마틴루터, 쯔빙글리, 칼빈 같은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니까 천년이 그냥 가는 겁니다. 그리고 1세기를 개신교하고 투쟁합니다. 지금도 로마카톨릭은 우리를 이단으로 정죄 하고 만나면 죽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아직도 안 고치고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죽이지만 않았지만 죽여야될 대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상당히 고상한척하고 평화를 외치지만 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지내다보니 유럽 사람들이 질린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추기경부터 물러가고 로마 카톨릭이 망해야 하는데 계속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성인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고전으로 돌아가자, 인간으로 돌아가자 이른바 인문주의, 르네상스입니다. 중세 카톨릭이 하는 것을 천년을 지켜보았는데 거기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그리스 로마로 돌아가자 이것이 인본주의, 휴메니즘입니다. 이후 유럽은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북 유럽, 독일, 러시아 등에 일부 남아있는 기독교인들이 종교개혁으로 가고 한쪽은 종교를 포기하고 르네상스로 간 겁니다. 그러나 이미 기독교의 힘은 미미하고 세상으로 간힘은 강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신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갑니다. 특히 2차 대전 이후 물질주의가 왕성해 집니다.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나니까 ‘힘이 있어야 산다’ 이러면서 이데올로기 시대가 끝나고 물질주의 시대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역사가 거룩한 쪽으로 가는 것 갔습니까 타락한 쪽으로 갑니까?
‘긍정의 힘’ 이런 말하면서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는 것은 일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 무슨 우리끼리 아무리 긍정의 힘을 외쳐 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긍정의 힘을 외쳐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처소는 둘이니 하나는 하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온순하고 감사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계신 곳은 어디나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시골교회에서 교회 다니다 서울에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헌신예배’라는 것이 있는데 얼마나 헌신하는 예배를 어떻게 드리냐 하면 헌금순서한번 더 있고, 찬양한번 더합니다. 이것이 헌신예배입니다. 서울에 오니까 다른 교회들도 비슷합니다. 제가 그래서 우리교회 에서는 헌신예배 안 합니다. 그런 헌신은 소용없습니다. 괜히 헌금 부담만 주는 그런 헌신은 우리도, 하나님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할 필요 없잖아요? 여러분! 형식을 버립시다. 형식은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주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최고입니다.
설교 : 주앙교회 이영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