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
이영제 목사 설교 MP3듣기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어느 날 윌 후톤 목사님은 설교 말씀에서 오직 정직한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고 믿음만이 우리 생의 원천이며, 믿음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느 교인이 설교가 끝난 후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그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믿음만이 중요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돈도 중요하고 건강도 중요하고 명예 등 그 외에도 중요한 것들이 많은데 믿음 하나만 중요하다는 그런 역설은 좀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목사님은 이렇게 반문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의 집에 불이 나서 누가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물론 불을 끄려고 백방으로 손을 쓰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다 거짓말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그 수고는 모두 헛된 것이 되겠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믿을 수 없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다 의미 없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께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 잘 믿기 위해서 고민해 보신 적 있으세요?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갈까 고민하신 적 있으세요? 제가 결혼하고 선교회 한다고 뛰어다닐 때, 이때가 결혼하고 신혼 초기인데요 돈을 하나도 안 벌어다 주었습니다. 이 때 한달 생활비가 3만원인가 되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제일 부러워 한 것이 다른 집에 가보면 화장대에서 100원짜리 몇 개가 굴러다닌다는 거예요. 그것이 제일 부러웠답니다. 저희가 세사는 주인집 꼬마 여자아이가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우리 방에 오는 거예요. 우리 집사람이 100원 가지고 콩나물 사러가야 하는데 이 아이가 따라오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스크림 사줘야 되잖아요. 그거 사줄 돈이 없어서 연립주택 몇 바퀴를 돌아서 아이를 떼어놓고 콩나물을 사왔습니다. 그런데 이 시절 구역예배 드리러 가야하는데 헌금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사 사모가 되어서 헌금 안하고 구역예배 참석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구역예배 돌아오는 것이 걱정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힘드시지요. 그래도 여러분! 이렇게 힘들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중히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라고 합니다. 8절에도 이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b/FAhm)마-토브 hm는 “어찌하여, 어떻게, 무엇으로” 이며 토브는 “좋은, 선한”입니다. 그리고 또 hm(마)가 나옵니다. (hw:hy]Ahm;W’) 마-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8절의 시작도 “어떻게(무엇으로) 선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무엇으로) 여호와께 나아갈까?” 라는 뜻입니다.
본문 기자는 세 가지를 먼저 제시했었습니다.
첫째,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일반적으로 제일 많이 사용하던 제물이었습니다(출 12:5, 레 9:2, 3).
둘째,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하나님의 관심을 얻고자 드리는 수많은 희생제사를 말합니다.
셋째, 내 맏아들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그랬습니다.
이는 가나안의 풍습이었으나 성경에도 간혹 이러한 기사가 나옵니다(왕하 3:27, 16:3, 사 57:5)
사실 이러한 제사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위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의식적인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드리는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9월 14일이면 추석이 돌아오는데요 제사지내시는 분들이요 저는 죽으신 분들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드리지 말고 그것으로 살아 계신 부모님에게 잘 해 드렸으면 합니다. 제사 뭐 하러 드립니까? 살아 계신 분에게 잘 하세요?
그렇다고 미가가 율법에 기록된 희생제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 없이 행하는 형식적인 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마음 없는 위의 세 가지 제사의 방법으로 안되지만 하나님께서 진짜 요구하시는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외형적 제사보다는 실천적 삶을 원하고 계십니다.
원문에 8절 맨 앞에 나오는 단어는 나가드(dyGIh)입니다. 나가드는 “정면에 두다. 입증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오직”이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다음 세 가지를 내 인생의 맨 앞에다 두고 살아야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내가 입증해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공의를 행하며
사람들은 흔히 종교적 삶과 일상의 삶을 별개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종교적 삶에는 거룩성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삶은 대충 살아갑니다. 교회는 열심히 나오는데 집에서는 덕이 안 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야 합니다.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너는 마땅히 공의만 좇으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신 16:20) 공의가 무너진 나라 죄가 가득한 나라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신 32:4)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처럼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분이니까 내가 공평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정직하신 분이니까 내가 정직해야 됩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하시니라”(요 7:24)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의 말을 생각해 봅니다.
○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다고 느낄 때 오는 고독감은 가난 중의 가난이다.
○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느 곳에 데려다 놓든, 그곳이 바로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고 있느냐이다.
원문의 사랑(ds,j,:헤세드)는 하나님이 사람관계에 세우신 언약적 단어입니다. 즉 헤세드의 사랑을 보이지 못할 경우 하나님은 언약을 어긴 것으로 간주합니다. 모세에게 내려준 인간에게 관계된 모든 계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다시 우리에게 정리해 주셨습니다.
마 22:37-40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셋째,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어머니의 기도로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대답하겠다.”
겸손이 하나님의 편이라면 교만은 사단의 편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그를 구원해 주십니다.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욥 22:29)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저희 마음을 예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시 10:17)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잠 3:34)
하나님과 동행하는 한가지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창 5:24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간단히 나옵니다. 그러나 에녹이 겸손 없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겸손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8)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공의를 행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대충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일년 된 송아지를 잡아드릴 마음으로, 천천의 수양과 강 같은 기름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내 자식을 죽여 바치는 마음으로 힘써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사도 대충 드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말씀도 대충 생각하면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앞의 제사에 대해서 미가선지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뒤의 것을 그만큼 잘 지켜야 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호주의 한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도 나왔습니다. 어려서 중병에 걸려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극도의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 이번에는 균이 두 팔에도 감염되어 부득이 두 팔도 절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뚱이만 남아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경우 “살 소망이 없는 것” 이 아니라 “살아야할 이유가 없어진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는 자르고 남은 팔 끝에 연필을 붙들어 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밤낮으로 글 쓰기 연습을 했습니다. 드디어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전에 앞면이 있었던 사람, 친구 소개받은 사람 가리지 않고 자신의 간증과 고백이 담긴 편지를 일년에 수백 통씩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의 편지를 받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노력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 마더 테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