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비유(1) 잃은 양, 은전, 아들
Wah yiyoungje Khutbah MP3 Mendengar
Isa berkata,(64. Metafora(5) – 구원비유(1) 잃은 양, 은전, 아들) / Teks : Lukas 15:1-32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복음서에는 비유가 짧은 것까지 분류하면 약 49개, 크게 구분하면 27개 정도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비유 4가지를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구원에 관한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의 비유와 함께 중요한 비유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은전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모여있기 때문입니다. 라일(J.C. Ryle)감독은 이 비유들에 대해서 “성경에서 본 장보다 더 인간의 영혼에 유익을 주는 장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라일 목사님의 말처럼 우리에게도 오늘 소중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비유의 배경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꼬투리를 잡았던 것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졌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아니꼬웠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리와 죄인들을 상대로 이야기를 하시고 그들과 함께 다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리는 당시에 돈과 권력은 있지만 인격적으로 존경받지 못하며 배신자처럼 취급받았던 사람입니다. 죄인들은 예수님이 가까이 했던 사마리아의 우물가의 여인이나, 간음죄로 잡혀온 여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잘 모르거나 바리새인들이 정해놓은 세밀한 율법 조항들을 지키기 않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깍아 내리는데 급급했지만 예수께서는 이 비유로서 죄인들을 위해서 오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성품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을 정당한 것이며 마땅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렸지만 잊으시지 않으신 하나님
세 비유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서는 양을 잃어버렸습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는 은전을 잃어버리고, 세 번째 비유에서는 아들을 잃어버립니다. 이 비유는 모두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비참함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잃어버렸다는 것은 버린 것하고는 다릅니다.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원래 소유했던 주인의 마음입니다. 제가 예전에 한달 동안 정말 열심히 일해서 야근 수당까지 받은 월급을 기숙사 가방 밑바닥에 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 없어진 것입니다. 잃어버리면 얼마나 허망하고 가슴이 아픈지 모릅니다. 그 돈을 찾아보려 했으나 찾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쯤은 무엇을 잃어버렸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잃어버렸지만 그 시간이 오래되면서 또한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렸다는 것은 그 가치에 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치가 없으면 하나님은 잊으셨을 것입니다.
세 비유속에서 나타난 것은 모두 잃어버린 것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소유자는 찾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에서 이 가치가 잘 나타납니다.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주인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은 겨우 1%인데 신경 쓰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잃은 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전 하나 때문에 신경쓰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자는 열심히 찾았습니다. 이 세 비유는 주인이 찾는다는데 있습니다. 윌리엄 테일러(William M. Taylor)는 이 하나만으로도 이 비유들이 지니고 있는 정념(pathos:파토스)을 잘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뉴욕에 가면요 인형 병원이라는 게 있답니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 이래저래 고장이 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속상해 합니다. 그러면 이걸 가지고 가서 수리를 합니다. 그 수리하는 공장을 인형 병원이라고 했어요. 아이들은 인형을 가지고 놀다 팔이 하나 떨어지면 “얼마나 아플까?” 그러고 이걸 붕대로 싸매고 수술실에다 놓고 왔다가 다음날 가서 찾아옵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은 인형 값보다 돈이 더 비싸집니다. 비싸도 그렇게 합니다. Mengapa? 아이가 인형을 사랑하니까요. 그 인형이 소중하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경제적 논리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고장 났으면 “내 버려”, 부러졌으면 ”까짓 거 던져버려라 또 사줄게.“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게 바로 인간을 얼마나 불행하게 만드는지 몰라요. 인형 하나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또 인형 하나가 나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도 있고 다시 행복할 수도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오늘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여기에 멀쩡하게 있지만은 이 목자는 그게 아니에요. 잃어버린 양, 아주 지극히 사랑하게 됩니다.
사실은 스스로 떠났던 것입니다.
먼저 두 비유에서는 찾는 주인의 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잃어버린 비유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잃어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지막 비유인 세 번째에서 드러납니다. 일명 ‘탕자의 비유’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분할 받아 가지고 집을 떠납니다. 그리고 허랑 방탕하여 다 탕진합니다. 인간의 처절한 배고픔과 고통 속에서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모습입니다.
양은 원래 본능적으로 먹이를 따라 이동합니다. 그래서 그냥 놔두면 눈앞의 풀만 뜯어먹으며 이동 하다가 자칫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이사야는 우리를 가리켜 다 양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Empat 53:6)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풀만 따라가다가 위험에 직면하게되는 양처럼, 육신의 정욕과 출세, 물질만 따라다니다가 어린양이 낭떠러지에 걸려있는 모습처럼 우리도 그런 자리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우리를 찾으시는 아버지
John 10:11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선언하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죽어 가는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Lukas 19:10절에서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주님은 우리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우리를 찾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 가지 비유들을 모아 하나로 보면 놀라운 모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슬퍼하시고, 찾아다니시고, 기뻐하시는 모습이 발견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찾아다녀지고 찾아내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지금은 은혜의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Empat 55:7)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11절부터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비유 하나에 타락한 우리 인간의 모습, 그러나 찾으시고 긍휼히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서 구원의 복음에 대해서 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복음서 속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왜곡된 자유의지를 보여줍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권위에 무조건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욕구는 어떤 면에서는 타당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욕과 아버지의 은총을 거부하고 혼자 잘 살아보겠다고 길을 떠났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에서 꼭 탕자가 이곳의 비유처럼 잘못되기만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마치 그렇게 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 아버지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홀로 설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실과를 따먹은 아담은 범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의지가 곧 죄인 것입니다.
둘 째로 자유 의지의 결과는 아주 비참한 경지에 이릅니다.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이야기를 그 실례로서 들려줍니다.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 2:6-14)
인간의 참된 축복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끝임 없이 강조하는 것이 하나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그것이 곧 저주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로 들어오면 그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셋 째로 모범적인 회개자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모습에서 말 그대로 탕자만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것은 모범적인 회개자의 모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타락과정이 일곱 단계로 묘사되고 다시 회복단계를 7단계로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타락해 가는 과정 ①자기 고집(13) ②이기심(13) ③분리(13) ④육욕(14) ⑤영적빈곤(15) ⑥비천함(16) ⑦굶주림(16)과 회복해 가는 과정 ①깨달음(17) ②결심(17) ③회개(18) ④돌아옴(19) ⑤화목(20) ⑥새 옷을 입음(20) ⑦즐거움(22)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해서 타락했는지도 말해주지만 어떻게 회복하는지도 보여줍니다. 그 동안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해서 타락 쪽에 무게를 두었다면 이제는 회복해 가는 과정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타락에 대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21절에서는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을 포기합니다. “알맞지 않다”는 “합당하지 않다”로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아버지의 아들로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품군의 하나”로 일시적인 고용을 하는 그런 품군처럼 아버지를 만납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자만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마땅히 구원받아야 활 상황이 아니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감사할 줄 앓아야 합니다. 주의 종으로서 만도 만족함을 얻어야 합니다.
아버지
오늘 비유가 가르치는 것은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누가복음 15:20절에 나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 오고 있는 아들을 알아봅니다. 매일 같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회개의 말을 듣기 이전이었습니다. 힘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측은히 여겼습니다. “측은히 여기다”의 원문의 뜻 splagcnivzomai(스프랑크니조마이)는 ‘도와주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맞이합니다. 입맞춤은 무조건 적인 용서를 뜻합니다(삼하 14:33).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 15:22)Dia memilih. 제일 좋은 옷을 입혔다는 것은 완전한 아들로 인정된 것입니다. Bukan hanya. 가락지를 끼워 주었습니다. 가락지는 인장을 말합니다. 인장을 아들에게 주었다는 것은 권한을 넘겨준 것을 말합니다. 신도 신기었습니다. 이 신은 이제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 우리를 보호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십니다. 아버지의 환대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3)Mempunyai tinggi. 원문에 재미있는 단어하나가 나타납니다. 살진 송아지라는 단어 앞에 ‘톤’(to;n)이 나옵니다. 이것은 송아지가 준비되어 있었음을 말합니다. 아들이 오면 잡아줄 송아지였습니다. 마치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바쳐질 때 하나님께서 이삭을 대신해서 준비시켜둔 어린양과 같은 것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Lukas 15:24) 아버지는 잃었다가 다시 만난 아들로 인하여 즐거워하십니다.
노란 손수건 이야기 아시죠.
미국 플로리다해변으로 향하는 버스안은 바캉스를 떠나는 젊은이들의 들뜬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 틈에 한 중년의 사나이가 몸을 잔뜩 움츠린채 앉아 있었다. 허술한 옷과 덥수룩한 수염과 굳게 닫힌 입술….한 소녀가 사나이에게 접근해 어렵게 대화를 시작했다. 사내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뉴욕 교도소에서 4년 동안 복역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오. 아내가 나를 맞아줄 것인지 불안하오. 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썼소. 오늘 출소할 것인데 나를 받아주겠다면 집 앞의 커다란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놓으라고 했소. 만약 노란 손수건이 보이지 않으면 내 인생은 끝나는 것이오”
승객들은 모두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버스가 마을에 이르자 승객들은 손에 땀을 쥐며 참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탄성을 질렀다. 수 백개의 노란 손수건이 환영의 깃발처럼 참나무에서 춤추고 있었다.
우리 나라 버전도 하나 있습니다.
저는 옛날 우리 부흥 목사님이 한 얘기인데, 우리 한국에 옛날 얘기겠죠. 그러나 가슴 촉촉한 감동이 오랜 세월이 지나간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아마 조선시대 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들 하나가 아버지한테, 오늘 본문에 나간 얘기 비슷하게, 나 아버지하고 살기 싫다고 나가겠다고, 그래서 떠나 가버렸어요. 가출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떠나갈 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애비는 너를 기다리겠다. 너가 외롭거든 말이야, 춥거든 그리고 집 생각이 나거든 너 마음에 아무 걱정 말고 돌아와. 아버지는 기다릴 꺼야. 그때가 가을 이였는데 집 앞에는 단풍나무가 있었습니다. 너 말이야 가을이 되면 이 단풍이 붉게 물들면 그때마다 나를 생각하길 바란다. 이 애비가 기다리고 있다고, 저 빨갛게 물들어 가는 단풍처럼 아빠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이 단풍잎은 말이야 너를 기다리는 애비의 마음이야. 그런데 뭐 떠나가는 아들이, 떠나가는 아들이 그런 아버지 말이 들어왔겠어요? 귀에, 귓전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가서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자, 다 재산 낭비해 버리고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떨어진 다음에, 달리는 살 방법이 없었을 때 아버지 말이 자꾸 생각나는 거죠. 그때서야, 아버지가 약속했는데, 가을이면 기다리겠다고, 단풍이 무르익으면 기다리겠다고, 그래서 가을철 단풍이 무르익으니까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애. 아버지는 나를 받아주실꺼야, 맞아, 그분이 하신 말씀도 있으니까, 동일한 시간에 아버지는 아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식이 이제는 돌아와야 하는데, 그런데 그 해 따라서 그 가을철 단풍잎이 너무 쉽게 떨어져 버렸어요. 자기 집 앞에 단풍나무의 단풍잎이 너무 쉽게 떨어진거에요. 혹시 이 자식이 돌아오다가 단풍이 떨어진거 보면은 애비의 마음이 변한 줄 알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해서 집안식구에게 이상한 일을 부탁했습니다. 홑이불 가지고 오라고, 다 집에서 홑이불 꺼내 가지고, 거기다 단풍잎 색깔로 홑이불 마다 물들였습니다. 그리고 일찍 떨어진 단풍나무에 그 홑이불을 걸어 놓았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 아버지는 아예 지붕을 이 단풍잎 홑이불로 지붕을 다 덮어버렸습니다. 그 해 가을, 돌아오든 이 아들, 멀리서 자기 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단풍나무를 먼저 찾았습니다. 그런데 단풍나무에 빨간 단풍 색갈든 홑이불이 걸려 있는 거에요. 지붕 위에도,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울먹이면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으로, 그는 집으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