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평안은 당신의 것입니다.

Rev yiyoungje Predikimi MP3 Dëgjimi

Jeta e Jezusit(26. 하나님의 평안은 당신의 것입니다.) / Luke 7: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우리 격언에 “때린 사람은 오므리고 자도 맞은 사람은 다리 뻗고 잔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보다 마음의 평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이 평안해야 살지 불안하면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속담에 “먹는 개도 안 때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먹을 때만큼은 편안하게 먹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불안하게 먹으면 소화불량생깁니다.

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은 평안이 없습니다.
Juaj! 혹 집이 없어 고생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저는 어려운 집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저희 집은 길가에 길게 일자로 지어져 있었는데 어려서는 겨울이 되면 춥기는 했지만 그렇게 불편한지는 몰랐습니다. 조금 성장을 하면서 청소년기가 되니까 다 쓰러져 가는 듯한 저희 집이 길가에 그것도 길게 늘어져 있는 것이 창피했습니다. 앞마당이 길이 되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사람 많이 다니는 곳에 집이 있어야 한다고 동네 가운데다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길이 된 것입니다. 방문을 열면 바로 앞이 길입니다. 그나마 이 집의 땅도 남의 땅이라 길가의 초라한 집만이 저희의 보금자리인 샘입니다. 그래도 이 집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편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남의 집 대문간 옆 작은 방 하나 얹어 가지고 산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그리고 한 방에 모든 식구가 다 자는 것입니다. 지금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그렇게 사는 사람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집이 아니라 거할 땅이 없는 민족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제일 슬픈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자기 땅이 없는 민족입니다. 그래서 어느 민족이든 자기 땅만큼은 지키고자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외국에 사시는 분들이 제일 서러움을 받는 것은 자기 국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땅이 있고 우리 민족이 여기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보존하려고 목숨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누가 이 땅을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뜻으로, 그리고 우리 땅에 함부로 손을 대면 안 된다는 경고 성으로 ‘삼천리반도’라고 노래를 만들어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찬송에 넣어 부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이렇게 자유롭게 믿을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미국의 민간 인권기구인 프리덤 하우스가 지난 20일 연례보고서인 `2005년 세계의 자유’에서 한국은 정치적 자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며 시민 자유는 차상위 수준으로 평가하였습니다. 이것은 1위 그룹인 프랑스, Angli, 미국, 캐나다에 이어 그리스, 일본과 같은 수준입니다. 프리덤 하우스가 192개 국가를 대상으로 지난 2003년 12월1일부터 올해 11월말까지 1년간 일어난 사건들을 통해 각국의 자유 수준을 점검한 이 보고서는 한국의 정치자유를 1점, 시민 자유를 2점, 전체 평점은 1.5(최고점수 1, 최저점수 7로 평가했습니다. 북한은 최저 수준으로 평가되었으며 공산국가와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이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사사기 18장 1절부터 보면 단 지파는 땅이 없어 헤매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다른 지파들은 다 땅을 차지했는데 단지파만 아직 땅을 얻지 못했습니다. 단 지파에게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 자손은 자기들의 지파에서 제일 강한 사람 다섯 사람을 뽑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땅을 얻기 위한 특명을 주어 파견합니다. 단 지파대표 다섯 사람은 땅을 구하기 위해서 에브라임에 이르러 미가선지자의 집에서 지내게 됩니다. 이 집에는 미가 선지자가 아주 젊은 제사장을 삼아 가지고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 젊은 사람은 레위인이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젊은 제사장도 사정이 많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자초지정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고 삿 18:4 “여차여차히” 라고 만 말합니다. 어쨌든 미가선지자는 이 젊은 레위인을 잘 대접해 주고 자기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습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이 젊은 제사장에게 하나님께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기도하고 응답을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땅을 얻어야할 단 지파 5인 대표에게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5절 “우리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Juaj! 우리에게도 걱정은 있습니다. 하지만 단 지파를 위해서 땅을 얻어야 할 5인의 대표보다는 가벼운 짐입니다. 우리의 짐은 그래도 나의 가정 아닙니까? 예전에 중국에서 남자가 된다는 것은 한자의 뜻에서 남()자를 보면 압니다. 입구 자 안에 ‘열 십자’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아래는 ‘힘 력’자가 있습니다. 남자가 되려면 열 명의 입은 먹여 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결혼정보업체(듀오:www.duonet,com)에 따르면 미혼남자 41%가 처가살이도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처도 자식이므로 부모를 모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34.3%로 가장 많았는데 속셈은 다른 곳에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표면상으로는 아내의 편의를 위해 22.2%이지만 자녀 양육부담감소 15.5%, 생활비절감 15%나 됩니다. 정말 처가 집 식구도 한 식구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보리쌀 닷 대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는 생각에는 처갓집이 싫어서라기보다는 남자의 책임을 자해야 한다는 뜻이 더 베어 있다고 봅니다. 요즘 너무 남자들이 책임의식이 없어지는 것 아닌가 생각할 때 걱정이 됩니다.
단 지파의 다섯 명의 대표는 어깨가 무거웠을 것입니다. 단 지파의 운명이 자신들의 어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많은 염려가운데 있는 단 지파의 대표에게 레위 젊은 제사장은 말하기를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Gjyqtarët 18:6)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주앙교회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John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셨습니다. Juaj! 이 세상의 고난은 잠시입니다. 힘들고 어려움이 있지만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영원한 처소를 생각하면서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면 평안이 없습니다.
사람이 꼭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닙니다. 사무엘상 처음 시작은 그런 여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 이름은 한나입니다. 그 남편의 이름은 엘가나인데 첩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브닌나입니다.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없었습니다. 남편은 하나를 더 사랑하지만 브닌나는 자식이 있어 늘 한나를 괴롭혔습니다. 이 당시 사회는 자식이 있어야 아내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Samuel 1:6, 7에 브닌나가 하나를 “격동시키므로”라고 나옵니다. 단순한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한나가 이 일로 괴로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년에 한 차례씩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찾아갔는데 이 때에도 브닌나가 한나를 괴롭게 했습니다. 너무 속상한 한나는 울기만 하고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성전에 가서 통곡하며 “아들을 주시면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평생에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너무 오래 동안 기도하는 것을 엘리제사장이 보았습니다. 가만히 입을 보니까 분명히 입술은 움직이는데 소리가 안 나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생각하기를 포도주를 너무 먹어서 취한 여인이 중얼거리는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오래 동안 기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술을 마신 것이 아니요 마음이 괴로워 그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Samuel 1:17)Ka të lartë.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렇게 태어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고 초대 왕을 세웁니다.
우리도 많은 한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시고 가실 때는 “평안히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애창하는 찬송가 470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의 작사자는 미국 시카고 무디교회의 회계집사이자 법리학 교수이며 변호사였던 스페훠드였습니다. 시카고 대 화재로 미시간 호수변에 투자했다가 부동산을 다 잃은 그는 병을 얻은 아내를 요양시키기 위해 유럽 여행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인과 네 명의 아이를 먼저 보내고 화재 뒤처리로 나중에 출발하기로 한 그는 가족을 태운 배가 영국의 철선과 정면 충돌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웨일스에 도착한 아내는 그에게 전문을 띄웠습니다. ‘혼자만 살아 남았음.’
그는 네 자녀를 모두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아내를 데리러 가는 그는 자녀들이 목숨을 잃은 해상을 배로 통과하며 이 찬송가의 가사를 작사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그 참을 수 없는 슬픔 앞에 이러한 고백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
John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평안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진정한 평안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눅 7:36절에서부터 보면 본문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 한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진실로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관심을 끄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도 목사님을 모시려고 하는 분들 중에는 이러한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야 불러주지 않아서 못 가지만 큰 교회 목사님의 심방을 받으려면 힘듭니다. 교회 또한 그러한 마음에서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야 그런 분이 있을 수 없어 다행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초청만 했지 손님 대접하는 기본이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니까 대접을 해야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손님을 초청하면 발 씻을 물을 떠다 주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씻을 물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때 어디선가 갑자가 여자 하나가 뛰어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준비한 비싼 향유 병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립니다. 무엇인가 마음속에 쌓여 있었던 마음이 폭발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여자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죄를 속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기다리고 사랑함으로 그리고 오늘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께 알렸을 때 눅 7:48절 “네 좌사함을 얻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50절 “구원하였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완료형으로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 구원받은 상태로 남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에 대해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에게 오늘 본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아멘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를 유대식으로 말하면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당신의 것입니다. 가지고(믿고) 가시기 바랍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하여 역사를 바꾼 왕입니다. 그는 정치적인 갈등으로 아들 크리스파스를 죽인 후 죄책감으로 고민에 빠졌습니다. 신전에 사죄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신관은 로마 신전에서는 사죄의 길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플라톤 철학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사죄의 길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골도바의 감독 호레야스를 통하여 십자가의 무한의 은혜를 듣고 제자가 되고 비로소 평안을 얻었습니다.
사죄는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인데 죄를 사함 받는 길은 은혜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평안이란 구원의 결과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확신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안을 원합니다. 평안은 십자가의 사죄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병 고침을 받았을 때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눅 8:48, Vetëm 5:34) 또한 70인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도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눅 10:5)Ai gjeti.
저는 주님의 이 말씀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이지만 주앙교회를 시작하고 한 분 한 분 주앙교회에 오실 때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Juaj!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A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