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까지 복②
Rev yiyoungje Predikimi MP3 Dëgjimi
Jeta e Jezusit(20. 아홉까지 복②) / T 5:1-12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①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②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③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④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⑤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⑥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⑦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⑧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⑨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어떤 군목이 최전방에서 군목 생활을 하면서 짬짬이 벌통을 쳐서 꿀을 땄습니다. 아주 좋은 꿀을 따서 부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광고를 하여 누구든지 빈 그릇을 가지고 와서 꿀을 가지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군인은 박카스병을 가지고 와서 꿀을 받아갔고 어떤 군인은 물통을 가지고 왔고, 어떤 이는 밥통을 가지고 왔습니다. 군목은 빈 병에다 꿀을 가득히 넣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항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공평하지 않게 나누어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군목이 대답하기를 “누가 박카스 병을 가지고 오라고 했나? 나는 빈 그릇을 가져오라고 했고 그 빈 그릇대로 채워줬을 뿐이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여러분들이 가져온 그릇만큼 담길 것입니다. 오늘 입을 크게 벌려 하나님 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구 복 가운데 오늘은 다섯 번째 복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⑤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은 70인 역에서는 ‘엘레오스’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사랑이라는 뜻의 ‘헤세드’와 ‘라하밈’의 ‘동정’이라는 뜻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 용어는 구약에서 종과 주인사이에, 또는 친지들 사이에서 사용된 말입니다. ‘라하밈’은 ‘렉헴(자궁)’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자기 태를 찢고 나온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정이 긍휼인 것입니다.
유명한 솔로몬 왕의 재판입니다. 한 어린 아기를 두고서 두 어머니가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솔로몬은 짐짓 칼을 가져오라고 분부합니다. 그 아이를 두 쪽으로 나누어 반쪽씩 가지라는 판결입니다. 이 명령을 듣고 진짜 아이의 어머니는 제 자식을 생각하여 “락하밈”이라고 했습니다. “락하밈”을 개역성경은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가슴이 메어지는 듯하여”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아이의 진짜 어머니는 왕에게 그 아이를 제 자식이라고 거짓으로 우기는 여인에게 주고 죽이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이 모정이 바로 긍휼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50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크리스천의 형제애로서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긍휼은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곧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이 세상에서 형제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습니다. Shtyp 33:19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편의 간구하는 기도문중에 ‘긍휼’은 40번으로 제일 많이 나타나는 단어입니다.
Qytet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난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Qytet 25: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면 우리는 갈대가 없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Juaj! 하나님의 긍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왔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형제에게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T 6:12)Gjetur se.
지난주에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 옷자락만 베고 간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다윗이 그와 같은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에 삼상 23:21절에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쫓아다녔던 사울이 다윗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⑥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있는 사람이 청결한 사람일 것입니다.
T 11:29절에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온유와 겸손’한 마음은 청결한 마음입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첫째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기를 “나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너 자신을 알라(Gnoti Se Auton)”는 지혜의 철학이 나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뉴턴은 말하기를 “내가 아는 모든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저 해변가의 모래 한줌과 같은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사람입니다. Për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TV드라마에 보면 간혹 가정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좋아하여 두 집 살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정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또 더 좋은 조건과 또 사랑이 생기면 떠날 것 아닙니까? E njëjta gjë është e vërtetë Perëndia.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
Hi 10:22절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아멘.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물론 영적인 뜻입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직접 본다는 뜻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Shtyp 19:21, 33:20, Gjyqtarët 6:22).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은 고후 1:22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성령을 받은 사람이 곧 하나님을 본 사람입니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⑦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하면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란 뜻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을 이루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f. 2:14-18에 그 뜻이 다 나타나 있습니다.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노벨(A.NOBEL)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하였습니다. 이 다이나마이트는 굉장한 파괴력을 가지고 인류에게 공헌할 줄 알았는데 많은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노벧은 이 무기의 두려움과 공포를 씻기 위하여 노벨상을 제정하여 인류 평화에 공헌한 사람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는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영어의 다이너마이트는 헬라어 ‘뒤나미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뜻은 ‘능력’입니다. 진짜 능력은 파괴하는 살상 무기가 아니라, 폭력이 아니라 ‘화평’입니다.
예수리스도가 화평(평화)의 왕(Katër 9:6-7, Luke 2:14, John 14:27)Është.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는 일이 없다’(Broadus)Ka të lartë. 세상을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10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⑧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자신의 문제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의”를 위해서 자신의 문제가 아니지만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은 어떻게 보면 쓸데없이 당하는 고통같이 보입니다. 구태여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국가적으로 민주주의를 얻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고통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분들을 잊으면 안됩니다. 미국에 건너가 현대적 국가를 이룬 영국의 청교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유로운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습니다. 이런 것이 다 의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고통 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을 거부해서 생기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70년대에 구로 공단에 일하러 올라온 시골 아가씨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80년대에 구로공단 지역의 한 교회에 전도사로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주일날 일하는 공장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달 내내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교회 다니려면 쉬는 직장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월급을 주일에 일하는 회사보다 절반밖에 받지 못하지만 직장을 옮겼던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 그것이 공의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축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주었던 복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사람이란 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부자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11-12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⑨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지막 아홉 번째의 복은 여덟 번째의 ‘의를 위하여’를 설명구로 보아 팔 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8번째의 복이 포괄적으로 ‘의’를 이야기했다면 9번째는 구체적으로 “나를 인하여”로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인 것을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고난을 말합니다. 저는 솔직히 말하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축복만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대할 때는 부끄럽습니다.
중국과 베트남에는 아직 자유롭지 못해서 교회를 함부로 세울 수 없습니다. 교회를 세우려면 먼저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세우는 것을 다양한 방법으로 억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승인 받지 못한 중국교회 지도자가 일년에 한번씩 공안부에 끌려가 다시는 하지 말라고 얻어맞고 나오는 것입니다. 어렵게 시작해서 30-40명 모이면 지도자가 끌려가 매맞고 나오니까 교회가 다시 해산되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몇 년 했는데 최근에 끌려갔다가 나왔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반신불수 상태가 되어 풀려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성도들은 이제는 흩어지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50여명이 모두 모여 예배를 강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절차가 없으면 교회 승인 받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본문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예수님 제자들 보다 먼저 있었던 구약의 선지자들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채찍을 맞았습니다(Jer. 20:2),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돌에 맞았습니다(Kronika 24:21),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가 통치하는 기간에 톱으로 켜 죽었다고 합니다(Alford). 우리 나라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순교당한 분들이 많습니다. 일제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한 분들도 있고, 공산당에 불복하여 순교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하나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쁨으로 순교하는 것을 자청하신 분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편안한 상태에서 믿는 것 같아 너무 행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영국의 천재 소설가 버나드 쇼의 외모는 추남으로 생겼지만 그의 천재성과 재치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정도로 탁월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탁월한 사람일수록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버나드 쇼에게 악취미가 있었는데 조금만 심장에 이상이 있으면 자기 주치의를 너무 자주 부른다는 것입니다. 사실 주치의가 와서 ‘이 정도 증상은 이렇게 하면 안정이 되니 저를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라고 일러주어도 계속 주치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 때문에 주치의도 자기 일할 시간을 많이 뺏겼답니다. 어느 날 주치의가 버나드 쇼에게 충격을 좀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연극을 꾸며 기절하니 침상에 누워있던 버나드 쇼가 벌떡 일어나서 의사를 깨우고 물수건으로 얼굴을 적시고 자기의 심장병 약을 가져와 먹이고 간호를 한다고 들락날락 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Juaj! 개구리 눈은 이상하리만큼 크고 높은 곳에 있습니다. 머리에 눈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 잘 보이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전자 속의 개구리’라는 말을 아십니까? 주전자에 개구리를 집어놓고 물을 끓이기 시작하면 개구리는 너무 따뜻해지는 물에 그만 잠을 살살 잡니다. 자신이 죽어 가는 줄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적이 오는 것을 보고 살길을 찾을 수 있는 개구리이지만 스스로 안주해서 죽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앙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깨어있기를 바랍니다.
지구촌의 온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깁시다. 지금도 우리의 도움을 호소하는 손길을 잊지 맙시다. 마음이 청결한 상태를 유지합시다. 두마음을 품지 말고 오직 일편단심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세상을 화평케 만드신 주님을 본받아 우리가 가는 곳에 화평을 만들어 갑시다. 그리고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아도 고난이 와도 그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잊지 맙시다. 주님을 위해서 받는 고난이 있다면 기쁨으로 이기십시오. 여러분에게 큰 상급이 있습니다. Am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