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주목하라
Rev yiyoungje Predikimi MP3 Dëgjimi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Linjë 3:12)
열중셨 차렷,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주목’입니다. 열중셨 차렷이 왜 필요한 줄 아십니까 자세를 올바르게 하고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열중셨 차렷 다음에 반드시 ‘주목’ 하는 것입니다. 열중셨 차렷만 해놓고 ‘주목’을 안 하면 열중셨 차렷한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열중셨 차렷하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00에게 주목’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전체를 예수께 주목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비운 공허한 마음이 청결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아무것도 채워 넣지 않아 보세요 청결하여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비워져서 공허하고 인생이 허무해집니다. 마음을 비웠다고 기쁨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나친 욕심에서 해방되었다는 정도입니다. 어떤 사람은이요 세상 욕심이 잘못된 것 같지만 그래도 그 욕심이 있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보고 마음만 비우라고 해 보세요 그 다음에는 무슨 기쁨으로 인생을 살아갑니까 마치 열중셨 차렷 해놓고 주목을 안한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무엇에 주목하는지 제 나름대로 뽑아 보았습니다. 젊은 인터넷 사용자가 많아 그들의 관심도이지만 그래도 이것으로 세상 사람들이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 네이버 인기 검색어입니다(2010년 4월 2주차 주간종합). 광화문괴물녀, 나나, 큐리, 노홍철복근, 고나은, 성균관스캔들, 정형돈삭발, 이파니, 이정현, 신데렐라언니입니다.
그리고 다음(Daum) 실시간 이슈 검색어입니다(2010.4.14). 유인나 전소속사, 이효리 결혼계획, 2nise 뮤직비디, 칭하이성 지진, 안재모 배신, 이응경 딸, 이은우 하차, 똥폰남, 재범 한국, 유진 비키니입니다.
여기 보시면 사람들이 어디 주목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검색어들이 그저 재미로 보다 보니까 검색어가 올라갔다고 해도 우리는 지나치게 연예인, 오락위주의 검색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흥미로 삼아서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루터는 어느 날 키우던 개에게 먹이를 주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루터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개는 그 손을 따라가면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루터는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주목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이 개보다 못하다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만삭되지 못한 자신을 인도한 주님께, 영도 없고 이성도 없는 저 미물인 버러지보다 못하다고 했습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 좋아할 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Punë 9:3) Ka të lartë. 하나님 없는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됩니다. 이 세상에는 답이 없습니다. 마음을 채워봐도, 마음을 비워봐도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채우려고 노력하고, 어떤 사람은 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 양쪽이 다 안됩니다.
우리 집사람 초등학교 동창이 가끔 와서 밥을 사주고 갑니다. 자꾸만 불러내서 제가 한번 따라가 봤습니다. 그분이 남자입니다. 우리 집사람 아직 인기 좋습니다. 제가 만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취미는 자전거랍니다. 한번은 집에 세워둔 자전거를 누가 차로 받아서 자전거가 망가졌답니다. 차 운전하시던 분이 기껏해야 몇 만원 하겠지 그러고는 5만원 주고 가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이 자전거가 몇 천 만 원짜리인 겁니다. 어지간한 자동차 값보다 더 비쌉니다. 이 자전거는 비행기 만들 때 쓰는 카본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비쌉니다. 그러면 자동차가 받으면 찌그러지지 말아야지 왜 망가집니까
고급 자전거는 카본으로 만듭니다. 카본은 비행기를 만드는 재질로, 수직의 힘은 엄청나게 잘 견디어 냅니다. 그래서 산악에서 높은 충격을 받아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카본의 약점은 옆의 힘에 약합니다. 그래서 자동차로 살짝 받았는데도 망가진 것입니다. 모든 조건에서 최고의 재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모든 방법은 이와 같습니다. 어느 길로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비워도 채워도, 도를 닦아도 아니 닦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의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해서 의로운데, 그 의로움의 기준이 나라마다 다르고 지경마다 다른 것입니다. 아프리카 사람은 사자를 많이 죽인 사람이 제일 의로운 사람입니다. 나라마다 다 다릅니다. 추장마다 다 다릅니다. 지역마다 다 다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선동하고 남을 비판하고 신고 잘하는 그런 사람을 제일 훌륭한 사람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의인으로 뽑으십니까 하나님을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대화를 합니다. 사탄은 땅의 여기저기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고 합니다(Punë 1:8). 하나님이 욥을 주목하고 계셨다는 증거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않아 구걸하던 못 걷게 된 사람을 걷게 했습니다. 이 못 걷던 사람은 자기를 걷게 해 달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무엇을 좀 얻을까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그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Linjë 3:4) Grubb e. Dhe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고 명령했을 때 걸었습니다. 구걸했으나 걷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좀 주는 것은 잠시입니다. 그때만 필요합니다. 그러나 걷게 되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걸하는 식으로 기도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해결해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걷지 못한 이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처음에 자기들을 ‘주목’ Unë kam marrë.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나옵니다. 오늘 말씀에 집중하세요. 주목해야 합니다. 잘 되는 사람이요, 잘 되는 가정, 교회요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집에서는 부부끼리 싸우고, 직장에서는 선후배와 싸우고, 교회에서는 목회자하고 싸우는 사람은 잘 될 수 없습니다. 집안이 잘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사람끼리 싸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길이 우리의 살길입니다. 우리를 비우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함입니다. 비워놓고 채우지 않으면 공허해서, 허무해서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에는, 병을 고치기 전에는 사도들에게 주목했는데 사도들은 다시 말합니다. Trup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와 요한이 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에게 주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중요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5∼16에 보면 고린도교회 안에 서로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Ka. 그러니까 바울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아볼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린도교회의 상황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바울이 잠깐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지만, 문제의 해결은 고사하고 오히려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Klasik 7:10) Ka.
고린도전서 3장에 바울이 이 문제를 두고 한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바울파다 하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다 사람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입니까 저희는 각각 주께서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일뿐입니다. 내가 심는 일을 했다면 아볼로는 물을 주는 일을 했습니다. 심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물을 주는 사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움이 트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뿐이십니다.” U quajt.
하나님은 큰 자를 부르지 않습니다. 다윗도 작은 소년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누군 지도 모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기록은 하나님이 함께 하면서 이루진 것이지 갈데아우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세는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베겟 사이에서 낳으며 미리암과 아론의 동생입니다. 그러나 당시 애굽의 박해로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물에 띄웠는데 마침 애굽의 왕녀가 발견하고 데려다가 양자를 삼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유모로 들어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간 양육 받으며 애굽의 학술에 통달하였습니다(Linjë 7:22).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모세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혈기 넘치는 모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처갓집에서 양떼를 지키며 40년을 더 지내게 만들고 80세가 되어서야 부르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을 다 버리게 하셨습니다. 혈기를 부리려고 해도 힘이 없어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지팡이 하나가지고 바로에게 갔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영국의 격언에 ‘하나님을 믿은 이 믿음은 모든 것을 가진 것과 같다’ 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사 기드온의 때의 일입니다(사사기 6:23).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미디안의 손에 7년 동안 넘겨주었습니다. 농사를 지을 철이 되었을 때 쳐들어옵니다. 토지 소산을 멸하고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겨두지 않고 다 빼앗아 갔습니다(삿 6:4). 이스라엘 백성은 이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삿 6:11). 그런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사자(Engjëll)가 나타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 6:12) Është thënë. 기드온은 작은 자입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가문의 작은아버지입니다. 기드온은 아들 중에서 제일 작은 막내입니다. 그런 기드온에게 천사가 나타나 “큰 용사여” 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작다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작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분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를 아는 것이 또한 예수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을 주목하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세상이 있기 전에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첫 아담은 죄를 세상에 주었지만 둘째 아담은 구원을 주시 것을 주목해야 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광야 같은 길을 인도하시는 모세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민수기를 보면서 마지막날에 구원받은 백성의 수를 세실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레위기를 보면서 다시 드릴 필요 없는 영원한 속죄의 어린양이 되신 예수를 주목해야 합니다. 신명기를 보면서 우리 자녀에게 가르칠 영원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열왕기, 역대기를 보면서 하나님이 세상의 왕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나라가 바로 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을 보면서 오실 메시야를 주목해야 합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주목하는 것이고 신약은 이미 오신 예수를 주목하는 책입니다. 이 성경에서 예수가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엘 그레코(El Greco)라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린 ‘참회하는 성 베드로’라는 그림에서 베드로는 천국의 열쇠를 쥐고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이미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국의 열쇠를 쥐었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을 사하지 않으시면 안 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먼저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남을 탓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를 탓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 스스로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억울하다 하지말고 나를 들여다보아 나를 정결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자신을 먼저 들여다볼 수 있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주목하는 사람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봅니다. 예수님은 나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를, 무엇을 주목하는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주목하는 믿음만큼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입니다. 두 개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하나되는 것은 ‘주목’하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를 주목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예수께 주목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주목하는 믿음은 우리의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비천한 사람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저주아래 있는 어떤 사람일지라도 주님이 저주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사람은 저주대신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예수께 주목하시어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모든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조경의(1891. 11. 2-1950. 8. 4) 장로는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들이 떼어간 교회 종을 다시 찾아다가 걸고 예배시간을 알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잡혀가던 날도 아내와 함께 약방에서 환자를 돌보는데 심한 복통으로 그의 약방을 찾아온 군관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였습니다. 인민군 군관에게 “공산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모두가 내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지옥가지 않습니다.” 결국 군관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총살되었습니다.
최원초(1905.11.27-1950. 9.23) 목사는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고 천당가시오.” 라고 군복을 걸친 내무서원에게 정중하게 전도를 했습니다. “저한테 지금 전도하고 계시는 겁니까 ” “물론이지요 공산당원이라고 인간 대열에서 낙오될 수 있나요 사람은 예수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고 전도하다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전도하다 순교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제시대 때에도 한국전쟁 때에도 공산당에게도 전도했습니다. 전도하다 죽었습니다. 순교했습니다. 주일날 선거하는 것을 반대하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주일을 우습게 생각하는 것 아닌지요. 주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허은(1914. 2.28~1950. 7.25) 목사는 교회 헌당 후 한국전쟁이 터졌으나 교인들만 피난시키고 두 번 양떼를 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자신은 신축된 해방제단에 엎드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다가 정치보위부원의 손에 수갑이 채워져 가면서 아버지를 부르는 아들을 향하여 “예수 잘 믿어야 한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순교하였습니다. 이 유언이 우리를 향한 부모님들의 유언인줄로 믿습니다. 단순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야 한다” 는 말씀을 주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