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터이신 예수님
Rev. yiyoungje MP3 sermon Pakikinig
Sino ay si Jesus mga Kalahok?(42. 집의 터이신 예수님) / Classical 3:10-15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Classical 3:10-15)
어려서 흙을 가지고 놀 때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하면서 손으로 흙을 덮고 놀던 기억이 있습니다. 원래 이 노래는 제의적인 집단요로 가락국 건국 신화에 나오는 삽입가요로서, 가락국은 두껍이(거북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하였는데, 두껍이는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노래를 통해 가락국 김수로왕을 새 시대를 열어갈 주체로 소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노래를 다시 끝까지 하면 이렇습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두껍아 두껍아 물길어 오너라 너희집 지어줄게
두껍아 두껍아 너희 집에 불났다 솔이랑 가지고 뚤래 뚤래 오너라“입니다.
이 노래와 두껍이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꺼비가 알을 품으면 평소에는 피해 다니던 독사를 찾아가 독사에게 잡혀 먹히면서 독사 뱃속에 자신의 독의 뿜어 독사를 죽게 합니다. 알들은 죽은 엄마 두꺼비와 독사를 먹이로 건강하구 식식한 세끼두꺼비로 태어납니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에서 헌집은 엄마 두꺼비를 뜻하고 새집은 건강하게 태어나는 새끼 두꺼비를 뜻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두꺼비는 개구리와 같이 양서류 파충류에 속하는 것으로 알을 낳아 새끼를 만듭니다. 실제로 뱀에게 새끼를 만들려고 하면 아마 질식해서 죽을 겁니다. 그러나 두꺼비의 독은 사실입니다. 귀샘에서 분비되는 독액은 부포톡신이라 하며 부포탈린 등 여러 종류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중국과 한국에서는 한약제로도 사용됩니다. 가락국 김수로왕을 세우고자 노래와 함께 이 이야기를 퍼트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거짓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내용에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두꺼비의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두껍이가 죽어 새끼를 번식시킨다는 이야기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저는 어떤 때 이 노래가 우리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의 집은 헌집입니다. 세상에 속한 집은 버려질 집입니다. Corinto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집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집을 건축하고 계십니다. 이 땅의 집은 다 버리고 가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어야 할 집은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을 짓는 축복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한지 3개월만에 시내광야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나를 위하여 지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쩌다 한번 찾아오시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아예 그들 가운데 집을 짓고 함께 사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집이 필요하겠습니까? 온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 어떻게 20평밖에 안 되는 작은 천막에 거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을 짓는 우리는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알고 보면 나를 위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나폴레옹 황제가 부관과 같이 두 사람이 어느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이제 나폴레옹 황제는 변장을 하고 평민처럼 이렇게 또 부관은 친구처럼 둘이서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그날 저녁에 식사를 하는데 식사를 잘 시켜서 있는 대로 좋은 식사를 하고 식사 끝에 웨이터가 14프랑이라고 하는 많은 돈 계산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어 이 돈은 내가 내지” 그러면서 계산서를 받아들고 손을 주머니에 넣어 봤는데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돈주머니가 없어요. 그래 당황하니까 옆에 있는 부관이 “제가 내지요 뭐.” 그런데 그 사람도 주머니에 돈이 없어요. 두 사람 다 돈이 없어요. 그러니까 부관이 정중하게 말하기를 “대단히 죄송합니다 만은 지금 두 사람 다 지갑을 가져오지 못했는데 정확하게 한 시간 후에 돈을 갖다 드리겠습니다. 좀 이해해 주세요.” 그러니까 웨이터는 그런 대로 이해하는 거 같은데 그 호텔 주인이 나와 가지고 야단야단 하는 겁니다.
돈도 없는 사람들이 비싼 음식을 먹고 돌아다닌다고. 정신없는 놈들이라고 욕을 욕을 합니다. 오늘 당장 내라고. 그 부관이 하도 정중하게 사과를 하고 “한 시간 후에 꼭 갖다 주겠습니다.” 그 웨이터가 가만히 보니까 믿음이 가요. “보자 하니 그렇게, 이 이렇게 거짓말할 분들은 아닌 거 같은데 이해하십시오”하다가 정 주인이 말을 안 들으니까 이 사람이 웨이터가 자기 돈을 냈어요. 14프랑을 내고 “먼저 가십시오.” 그래서 손님들을 보냈습니다. 한 시간 후에 부관이 다시 왔습니다.
돈을 내주고 주인보고 하는 말이 “이 여관 얼마면 살 수 있겠소?”, “이거 제가 얼마 전에 3만 프랑을 주고 샀는데요”, “좋아요, 여기 3만 프랑 있소. 이 집문서를 내 놓으시오” 그래 그 호텔을 사 가지고 그 자리에서 당장 웨이터에게 주었어요. “이제부터 이 집은 네 거다. 너는 나를 믿어주었다.”하고 집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터는 기초를 말합니다.
터는 문자 적으로 성이나 망대의 기초(딤후 2:19, 히 11:10, Total 21:19)를 말하는데 비유적으로는 교회 기초(ROM. 15:20)나 가르침의 기초(히 6:1, 딤전 6:19)Ay makipag-usap.
집을 짓기 위해 제일 처음에 해야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집을 지을 터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 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지을 집은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회사가 창립할 때 자본금이 얼마가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회사의 터는 자본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어떤 회사는 자본금은 없고 어떤 기술을 가지고 시작된 회사도 있습니다. 이 회사의 터는 기술입니다. 그리고 어떤 회사는 경영마인드가 특이한 것으로 시작된 회사도 있습니다. 이것이 그 회사의 터가 될 것입니다.
교회의 터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한국속담에도 “속담 터를 잡아야 집을 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는 뜻입니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 터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도 터가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피흘린 값으로 사신 것입니다(Linya 20:28, 계5:9). 예수님은 자신이 교회의 머릿돌임을 주장하셨습니다(T 21:42). 바울은 에베소서 5:23과 골로새서 1:18에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터는 어떤 홍수가 와도 엄몰하지 못하며 어떠한 것에도 무너지지 않은 견고한 터입니다.
북한에는 “목수가 많으면 집을 무너뜨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옳은 지도자가 있어야 함을 교훈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 주앙교회의 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을 근본으로 하고 그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모든 교회의 터는 예수님 입니다. 예수가 터가 되지 못한 교회는 이미 교회당은 될지 모르나 교회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건축해야 합니다.
바울은 본문 10절에서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터를 닦아주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오는 세대를 위해서 주앙교회의 터를 닦아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우리 주앙교회가 창립한지 이제 1년이 되어가지 않습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시간이 더가고 우리가 열심히 해서 교회가 성장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때쯤이면 교회는 제가 지금 꿈꾸던 많은 일들을 추진할만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가 되면 저는 은퇴해야 될 나이가 될지 모릅니다. 조용히 물러나야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터를 닦아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그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수고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그가 1, 2, 3차 여행을 통해서 제일 성장시키고 복음이 들어간 지역이 고린도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이라면 그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성도들을 그토록 사랑하여 바울은 많은 편지를 교회에 고린도 교회에 보내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것이 고린도전후서의 성경입니다. 그곳에서는 잘 아시는 사랑 장(고전13장) 이라고 말하는 성경도 있습니다. 각종 은사에 대해서 소개한 12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우들끼리는 송사하지 말라는 6장의 당부도 있었습니다. 8장 10장은 우상숭배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1장에는 여성도님들에게 당부하는 편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8장에는 마게도냐 교회를 자랑합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9장에는 가난한 성도들의 헌금에 대한 문제도 이야기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은혜를 따라해야 합니다.
바울이 터를 닦은 방법은 한마디로 은혜를 따라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한 것입니다. 저의 좌우명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없으면 못합니다. 힘듭니다. 짜증이 납니다. 피곤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으면 힘이 납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자꾸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독수리와 같이 올라가는 힘이 있습니다. 이 힘을 모두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Ang iyong! 용서해 주시고 들으세요.
저는 설교할 때 원고를 보지 않고 하는 것이 더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성경만 보면서 설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오후 예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목사님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왜 주일 오전 예배에 원고를 써 가지고 설교하는지 아십니까? 몇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저는 이 설교 준비를 하면서 제가 먼저 은혜 받습니다. 그리고 왜 제가 원고를 보면서 설교하면 그냥 하는 것에 비해서 잘 못하는 것 같고 여러분이 은혜 못 받는 것 같이 느끼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제가 욕심이 많아서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부모님이 맛있는 것 있으면 자식에게 다 주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도 먹어보라고 하고, 저것도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은 부모님의 그 심정을 배불러 죽겠다고, 비만 된다고 화만 내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와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러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먼저 말씀에 은혜를 받다보니까 왜 설교시간은 꼭 1시간 안에 마쳐야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1시간이 지나면 그 때부터는 은혜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시험이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 목사가 주책이라고 할까봐 짧게 마쳐야 쿨한 목사가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선교지 중국 같은데 가서 있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 훈련 잘된 것 하나 중에는 몇 시간을 해도 자세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책상에 않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쁜 소식(Ebanghelyo) 듣고 오신 분답게 은혜가 충만한 기쁨의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 중에 하나가 기쁨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기쁘게 사십시오. Ito ang biyaya.
건축은 좋은 자제를 사용해야 합니다.
여러분 터가 좋다면 반드시 그 자제도 좋은 것으로 사용하여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만일 서울 한 복판, 제일 값이 많이 나가는 명동에 싸구려 자제를 사용하여 철판으로 공장을 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요즘 하는 말로 “명동 땅을 두 번 죽이는 겁니다” 그 비싼 땅에는 그곳에 알 맞는 좋은 자제를 사용하여 집을 지어야 합니다.
제가 싱가포르에 갔을 때들은 이야기입니다. 싱가포르는 땅이 아주 작은 섬입니다. 그것도 일본처럼 자꾸만 바다 물이 올라와 앝은 땅은 자꾸만 침몰되어 갑니다. 한마디로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귀하고 비싼 땅에 건물을 함부로 지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부가 정한 법은 30층 이상의 건물만 허용하고 또 건축양식이나 디자인이 독특하여 지금까지 어디서 본적이 없는 특이한 건물만 허락을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어야 할 터는 그럼 얼마나 소중한 터입니까? 예수님이 피로사신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한 터입니다. 이 귀한 터 위에 쓰레기 같은 집을 지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 귀한 터 위에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집을 짓는다 생각하십시오. 또 반드시 우리가 짓는 집은 제일 귀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주앙교회는 그러한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3절에 불로 그 “공력”을 각각 불로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표준새번역에는 “공력”을 “작품”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은 집은 불로 시험을 당합니다. “불”로 심판하기 때문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좋은 것으로, 풀이나 짚은 나쁜 것으로 비유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없어지지 아니할 귀한 것으로 지으라는 것입니다. 세상 학문이나 명예, 물질 등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런 것으로 지은 집은 불에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인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5:9절에 보면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 지어야 합니다.
Ang iyong!
이제 우리는 제일 귀중한 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이십니다.
그리고 그 터 위에 또 제일 소중한 집을 지어봅시다.
누가 따라할 수 없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 대로 멋있게 지어봅시다.
이 집을 지을 생각에 잠이 안 옵니다.
가슴이 설래 입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아름다운 집은 처음이다. 너무 아름다워 이 집은 영구히 보존하리라”는 칭찬을 받으시는 주앙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