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ling hinihikayat sa Galilee

Rev. yiyoungje MP3 sermon Pakikinig

Ang Buhay ni Jesus(53. Huling hinihikayat sa Galilee) / T 28:18-20

"18 ay dumating si Jesus at sinabi, Lahat ng kapangyarihan sa langit at sa lupa kuluan ay ibinigay sa akin. 19 Pumunta kayo samakatuwid at gumawa ng mga alagad ng lahat ng bansa, ang Ama, Anak at Banal na Ghost at mabautismuhan sa pangalan ng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모든 날)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을 시키는 엄마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아이가 처음으로 초등학교에 갈 때 무어라고 말해서 보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엄마들은 망설일 것도 없이 한 마디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전에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두고 ‘지상 대 명령’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 어떤 본문 보다 더 자세히 살피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마지막 당부의 말씀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눈에 띄게 나타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모든’입니다. Lahat ng mga salita ay nakatali mahigpit sa talata. Lahat ng mga salita sa katawan ng lahat ng apat na beonnaopnida. 1) Lahat ng kapangyarihan 2) Lahat ng bansa 3) Lahat 4) Palagi(모든 날)Ay.
Ininom ko ang mga pastor na maging isang problema kapag may isa. Lamang ng isang 'mangyaring panatilihin ang lahat ng itinuro' 'ay. ‘주님 제가 어떻게 모든 것을 가리 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모든’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시기를 바랍니다.

1.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자기가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Luke 4:6)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단에게 속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꿈적도 않으십니다.
Ang iyong!
사단은 지금도 속삭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하며 죽음만 기다릴 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것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모든 권세는 사단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권세를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T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들에게 전권을 위임해 주신 것입니다.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했습니다. 못 고치시는 병이 없었습니다. 모든 병이 다 나았습니다. 회복되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행 14:27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했습니다.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첫 번째 선교여행입니다. 선교라는 말은 처음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말로 사용된 것입니다. 같은 민족에게는 선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는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입니다.
바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ROM. 10:4) 믿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입니다. 여기에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족별 차별을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하며 예수님의 믿음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3. 모든 것을 가르쳐라

1) 가감 없이 가르쳐라
어떻게 우리가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을 수 있습니다. 설교도 갈수록 어려워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왜 설교가 어려워집니까? 방송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유명한 목사님들이 명 설교를 하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못하기 때문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이유는 자신에게 불리한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쓴 소리가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지 않으면 바른 사람이 안됩니다. Ang iyong! 자식들에게 만날 좋은 소리만 합니까? 진짜 필요한 말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별로 듣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모님의 교육을 받지 않은 자식들은 잘 되기가 어렵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T 5:18-19)

2) 성령으로 가르쳐라
사람이 모든 것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똑같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다고 말할 사람은 예수님 이외에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습니다(ROM. 3:23).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온전히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동양에서는 도를 닦으면 온전해지고 무에 이르면 도를 깨우쳐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우리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죄의 문제가 깨끗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중국에 요임금이라는 아주 어진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그 임금님 밑에 소부와 허유라는 두 선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도 역시 덕이 있고 욕심이 없는 깨끗한 선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주변에는 벼슬을 탐내고 욕심이 많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임금님에게 아부하고 남을 중상하고 하여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소부와 허유는 그 모습들이 아니꼽고 더럽게 보여 임금님 곁을 떠나 먼 곳으로 갔습니다. 영천수란 냇물이 흐르는 깊은 계곡에 움막을 짓고 소를 기르며 땅을 갈고 농사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Minsan, 요 임금님이 허유를 찾아 이 계곡에 왔습니다. 임금님은 허유에게, “한 마을의 통치자가 되어 주시오.”하고 나라 중 한 고을을 부탁하였다. 허유는 대답도 않고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는 못들을 소리를 들었다고 영천 수 흐르는 냇물에 귀를 씻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 때 소부가 밑에서 송아지에게 물을 먹이다가 허유의 행동을 보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여보게, 왜 귀는 씻고 있어?”하고 물었습니다. “요 임금님이 찾아와서 나에게 벼슬을 하라 하지 않나? 더러운 소리를 들었기에 귀를 씻는 거야.” “Oo? 그럼, 그 더러운 말을 들은귀를 씻은 물을 송아지에게 먹여서야 되겠나?” 하면서 송아지를 끌고 위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다고 이 사람들이 깨끗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John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가르칠 때 모든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전하지만 이 때 우리가운데 성령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설교가 왜 다른 연설하고 다릅니까? 오직 성령에 의지해서 전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해서만 우리가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3) 사랑으로 가르쳐라
사람에게 모든 것 또는 온전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람은 똑같이 부족하지만 사랑은 그 부족한 것을 뛰어 넘게 합니다. 강아지도 저 좋아하는 사람을 압니다. 하물며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모르겠습니까? 어떤 선교사가 언어를 아주 뛰어나게 잘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원주민 말을 해야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이 말로만은 안됩니다.
바울이 말한 사랑의 정의에 보면 고전 13:7Seksyon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모든’을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하기 싫은 어떤 것을 빼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개와 돼지 동물들도 제 새끼는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John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랑만이 제자를 삼을 수 있습니다.

한 어린 소년이 아버지께 질문을 했습니다. "Daddy., 전쟁은 무서운데 어른들은 왜 전쟁을 시작하나요?” 아버지는 현명한 대답을 하고 싶어 잠시 생각하다가 “얘야, 네가 알아듣기는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다. Pero, 한가지 예를 들면, 1914년에 일어났던 세계전쟁은 독일이 벨지움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단다”라고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는 “여보, 아이에게 가르치려면 진실 되게 바로 알려 야죠. 그 전쟁은 처음에 누군가가 살해되어 복수하고 또 복수하다가 시작된 거죠”하며 남편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화가 난 남편은 아이에게 적절하게 전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아내는 반대하여, 서로 언성을 높이다가 아내가 먼저 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이 광경을 본 아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전쟁이 왜 시작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는 이야기입니다.

4. Palagi(모든 날)과 함께 하신다.
본문 20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명령하다, 위임하다)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굳게 붙잡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모든 날)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Siya nawa)”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의 이 마지막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분부한” 것은 명령한 것입니다. 단순히 명령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단어 속에는 복음전하는 일을 제자들에게 위임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선생님으로 이 땅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을 제자들은 보고 배웠습니다. 이제 배운 대로 예수님처럼 가르치면 됩니다. 이런 자에게는 항상(모든 날) 함께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70년대 판자촌이었던 청개천에서 활빈교회(지금은 두레교회)를 개척하신 김진홍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판자촌 빈민 목회를 하실 때 동네에 사는 한 아주머니가 밤중에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며 데굴데굴 구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 아주머니를 등에 업고 동네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어서 큰 병원으로 가셔야겠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아주머니를 등에 업고 서울시내 굵직한 병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모두가 한결 같이 수술비가 없어서 받아줄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도무지 의욕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를 등에 업은 채로 터덜터덜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머니가 자꾸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이미 아주머니는 목사님 등에서 죽은 것입니다. 목사님은 너무나 깊은 회의와 갈등에 사로 잡혔습니다. 길바닥에 주저앉아 이미 죽어버린 아주머니를 붙잡고 통곡했습니다.
“예수님 이 광경을 보고 계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합니까? Panginoon! 이 괴로움을 아십니까?”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다 알고 있다. 네가 나보다 더 괴롭겠니? 너의 모든 고통을 내가 같이 받고 있단다. 힘을 내라 힘을!” 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모든 고통과 회의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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